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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들레: 언젠가 꽃씨는 날아들 것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6-04-25
  • 조회수 109

흰들레


1. 진주가 있다고 말해볼 것


“저기 진주가 있어.”

선희는 추상적인 말도 간단하게 했다. 희고 둥글다 해서 모두 진주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은혜의 논리도 소용없었다. 

“그럼, 눈송이라고 하자.”

그렇게 그들은 오지도 않은 겨울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소설에서 비유 없이 성립되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단상이 떠오르면 어디에 쓰일지 모르지만 일단 기록해 두는 습관. 수개월 동안 방치되어 죽어가던 문장에서 파생된 서사가 한둘이 아니므로 나에게 있어서 장면은 글의 생명력이자 한계였습니다.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동시에 글을 제자리에 머물게 했거든요. 장면을 서사로 확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비유가 문장을 아름답게만 했을까. ‘흰들레(2026)’는 이러한 고민이 녹아든 소설이기도 합니다. 


기억 속의 재하를 떠올리면서 선희는 손이 굳었다. 그때마다 재하는 비유를 사용했었다. 선희는 어둠을 밝힐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비유가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선희는 편지와 사진, 흰들레와 함박눈에 관해 썼다. 그녀의 시적인 문장들은 끝없이 이어져 소설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꾸만 길어지는 것. 선희의 퇴고 방식은 비로소 재하의 것과 같아질 수 있었다. 그녀가 인화했던 사진들이 모여 재하가 되었다. 그렇게 재하는 선희의 소설에서 다시 살았다.*


언젠가부터 문장이 살아있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요. 그렇게 말하다 보면 도리어 문장이 나를 살리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시절을 보냈을까. 대화에 소극적이고 생각만 쌓여가는 나에게 스스로 발언권을 주기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했습니다. 말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나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있어. 조용한 파급력을 지닌 서술자와 화자가 목소리를 대신 전해주었습니다. 나의 성향을 물려받은 그들이 조금은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으므로. 내가 만든 세계에서는 콘크리트 건축물을 보고도 진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함박눈을 따뜻한 존재로 조명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 


그런 세계는 어디서든 만들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첫 방학을 앞둔 오후의 한적한 교실, 책상 위 노트에서 ‘흰들레’의 세계가 탄생했습니다. (2024.7.9) 한 장 남짓의 초고 사이를 가르며 재하가 걸어 들어왔고 그 후로 아이들은 소설 속에서 살았는데요. 다만 그들은 굳어진 글자 속에서 너무 오래 갇혀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나와 함께해준 아이들을 세상에 그냥 내보내기는 미안해서 뒤늦게 편지를 동봉합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이 우편이 선희가 썼다가 지웠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에요. 




2. 과거의 편지를 꺼내볼 것


기차에서 꺼낸 편지에는 산문 한 편이 들어 있었다. 선희는 그것이 재하의 공책 일부임을 알았다. 선희는 자신의 존재가 재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되었다. 재하는 함박눈이 사실 따뜻한 존재라고, 녹는 것 또한 이치라고 여겼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니 차츰 눈이 녹았다. 선희는 재하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오래전에 쓴 글을 읽을 때면 알게 모르게 향수에 젖는데요. 조금씩 달라지는 관점 사이를 거닐며 산책하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문장에 다다르는 순간도 있습니다. 내가 이런 표현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나는 한 뼘 자라 있습니다. 내가 그려낸 아이들보다 간헐적으로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어져요. 


어린 시절에 쓴 글을 보면 쑥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스러워요. 문학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 즐겁게 글을 이어 나갔던 시기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버거운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나를 지탱해 주던 책에 기대어 걷다가 귀를 갖다 대면 문장들이 슬며시 위로를 건네요. 그런 것이 나의 소설에도 들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눈앞이 막막해질 때, 고개를 돌려 과거의 나를 읽으면서 뜻밖의 위로를 받습니다. 


동화 같은 첫 소설 ‘아기호랑이 탐험대(2019)’를 읽을 때마다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까요. 비문과 오탈자 투성이에 과장된 표현이 빈번히 등장하지만 아무렴 상관하지 않아요. 그런 지점이 모였을 때 생동감을 끌어내는 글이라고 믿어봅니다. 적당히 들뜬 마음과 난항마저 긍정하는 엉뚱함이 전반을 이루는 판타지 세계. 동심이 가득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시리즈가 여태껏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져요. 


아직도 가장 긴 서사의 주인공으로 남아 한때 일상의 절반을 함께했던 애착 인형, 아기호랑이와 10년이 넘도록 한 방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비록 책장 위에서 하릴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손에 쥐면 여전히 작고 소중한 얼굴입니다. 글을 쓰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대신해 주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그 모습 때문에 나의 글은 때로 어려 보이지만 필명을 바꾸려던 시도는 이제 하지 않습니다. 구슬 같은 눈으로 한결같이 나를 올려다보는 고개가 기특합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면 내가 비쳐 보이는걸요. 


나는 언젠가 ‘아기호랑이 탐험대’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낮은 시선에서 바라보는 넓은 세계, 어설프지만 따뜻한 이야기. 내가 인형들과 눈을 맞추며 상상력을 발동했던 시절, 순수한 우리의 모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가닿게 될지 그때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처음에는 만화로 그리다가 표현상의 한계를 느끼고 글자로 구축했던 세계. 시간이 흘러도 와해되지 않고 결국 신문이라는 집을 얻습니다. 방대한 분량 탓에 소년중앙 지면을 1년 넘도록 차지하며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독자를 만났습니다. 퇴고를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도 부족했지만 앞서 말했던 동화적 생동감을 잃고 싶지는 않았어요. 문득 외로움을 느끼던 당시의 나에겐 아기호랑이들의 작은 웃음 하나도 소중했을 테니까요. 


어느덧 나의 소설은 온전한 목소리를 갖추지 못한 외톨이들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아마 ‘외톨이의 작은 별(2023)’이 시작이었을 거예요. 그 무렵 나는 순수하게 좋은 친구들을 만남과 동시에 무척이나 나를 힘들게 했던 아이들과도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회복보다는 침식이 빠른 성격 탓에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도 마냥 힘들어했던 것 같네요. 친구들에게 미안합니다.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태도이지만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러는 사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그것이 어긋나는 상황마다 자책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울적한 마음이 아예 우주로 떠나버리길 바라며 쓴 소설은 시간이 흘러 나의 첫 수상작이 되었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포스터 문구로 시작하는 심사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다(We are not alone). 나는 이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습니다. 곁에 있어 주었던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들에게 당시의 소설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그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단지 틈틈이 새로운 소설을 구상할 뿐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담은 ‘죽음을 달리는 열차(2023)’를 쓰면서도 많이 위안을 얻었습니다. 내 마음을 곧바로 마주하기는 버거워서 온갖 비유로 점철했던 탓일까요. 내게 고통을 주었던 아이를 고발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시선은 자꾸 안으로 굽어들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별다른 서사 없이 내적 독백만 가득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사가 한 줄도 없는 인물이 꼭 나인 것만 같아요. 이제 나의 소설에서 비유를 걷어내면 진한 감정만이 요동치듯 고여 있습니다. 그걸 잉크 삼아서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적는 중입니다. ‘이번 장마철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아(2025)’서 행복합니다. 동화처럼 반짝이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믿어볼래요. 




3. 언젠가 꽃씨는 날아들 것


매끈한 표면의 카페 외벽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먼저 느껴지는 것은 온기보다는 빛의 촉감. 산란하는 것은 적어도 제 열기에 녹을 일은 없었다. 둥근 경계 안에 얼마의 민들레가 피어 있고, 밖에서는 그보다 많은 꽃씨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두 형상은 언뜻 상이한 것 같다가도 때로는 사뭇 닮아 보였다.*


길가에 홀로 솟아있는 민들레를 본 적도 있고 보호수 아래 군집을 이루듯 빼곡히 피어 있는 민들레에 놀란 기억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민들레 주변으로 더 많은 생명이 탄생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위해 줄기를 꺾고 싶지는 않아요. 언젠가부터 하얀 솜털이 난 흰들레를 발견하면 발끝으로 꽃대를 간지럽히게 되었습니다. 생각 외로 뿌리가 깊다던 민들레는 이제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무언가를 떠나보낸 자리에 다시 돋아나는 씨앗들. 커서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품어주는 일. 나는 행운이 아무한테나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나만의 글을 여럿 간직하고 있는 순간은 왠지 모르게 들뜬 마음입니다.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대감과 나에게만 헌정하고 싶은 애착이 교차하고 있어요. 그 지점에 서서 우리는 방황합니다. 퇴고하면 글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어째서인지 잘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자꾸만 새로운 글감이 떠오르는 탓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의 글도 아직 성숙하지 않아요. 기다려야 합니다.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다짐했던 기다림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소설은 언제나 성과를 가져와 주었거든요. 


‘노을빛 초록(2024)’과 같은 시기에 쓰였지만 ‘흰들레’의 발표가 한참 늦어진 이유는 공모전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기 중에는 긴 글을 쓸 여력이 없는 나의 문장이 느린 탓도 있습니다. 반복해서 도전할 수 있는 공모전의 기회를 잃으면서까지 온라인에 글을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글을 보여주지 않았던 당시에는 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는데요. 수상 실적을 통해 스스로에 믿음을 주어야 했지만 그럴수록 정작 글을 많이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응모와 무소식의 과정을 대여섯 번 반복한 후로는 ‘흰들레’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습니다. 연작소설을 기획했지만 완성한 건 단편 하나뿐이었고, 그것만을 때어내 공모전에 투척했던 시기였기에 더욱 초라한 심정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나는 1년 가까이 소설을 쓰지 못했습니다. 


선희는 꽃씨를 모두 잃고 이파리마저 내비친 민들레밭을 응시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 콧잔등에 맺혔다. 물에 젖어 뭉쳐버린 머리카락처럼 어딘가 비어 있는 공간에는 무상감이 깃들어 있었다. 은혜는 언젠가 저 자리에 다른 꽃씨들이 날아들 것이라고 선희를 위로했다.*


과거의 글에 빌붙어 사는 마음을 아시나요. 소설을 구상하고 초고를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퇴고에 지쳐 굳어버린 문장은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흰들레’를 묻어줄 곳을 찾지 못해 글틴 자유게시판에 일부를 공개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미루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아서 지난달 충동적으로 전문을 올려버렸습니다. 


미련 없이 떠나보낸 글은 뜻밖의 월장원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어째서 기대하지 않을 때마다 글틴은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주는 걸까요. 독자분들의 응원이 겹겹이 쌓여 나는 이제 더 많은 이들에게 글을 선보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문장을 입으로 말하게 되기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요. 


선희는 재하와 대화해야 했다. 분절된 단어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인사. 그런 작별이 필요했다. 선희는 더 이상 재하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병원에서 나왔다.*


나는 여전히 대화에 적극적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녁까지 학교에 남아 선생님과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마음에 듭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모여드는 웃음소리에 행복합니다. 누군가는 나와 함께 서점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요. 말문을 트면서 나는 조금씩 밝아지고 있습니다. 


말솜씨 좋은 작가의 강연을 엿들을 때면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아득한 다짐은 시간을 두고 하는 편이 좋습니다. 미발표작을 공개하기까지 2년, 첫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기까지 5년. 글을 쓴 이래로 이토록 진솔한 나를 담아내기까지 8년이 걸린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민들레 꽃씨도 예외는 아니겠죠. 홀씨는 부정확한 표현이고, 홑씨라고 부르면 꼭 외로웠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예쁘게 멀리멀리 나아가라고 꽃씨로 불러주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정원을 내다봐서 자꾸만 홀씨라고 발음하는 나는 아직 어리숙한 아이 같아. 둥근 머리 흰들레와 친구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노란 꽃들 사이로 머리를 내민 흰들레를 보며 위안받았다. 꽃씨들을 떠나보내고 작아지는 민들레를 보며 용기를 얻었다.*




*소설 ‘흰들레(2024 집필, 2026 발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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