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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치에 대하여

  • 작성자 사계마로
  • 작성일 2026-05-28
  • 조회수 99

이 날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5월 중순, 어느날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란 추측만 가능할 뿐. 나는 대산 청소년 문학상을 준비하며 교내 내신까지 챙기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매순간 진행되는 원고에 대한 고민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원고를 고민했고, 급식실을 빠져나와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작은 노트에 문장을 쏟았다. 펜의 잉크를 한껏 낭비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꽤나 즐거웠다. '즐겁다'라는 단어로 차마 표현하지 못 할 정도의 기분이었다. 조금은 여담이다만, 슬럼프엔 더 열심히 글을 써야하는 것 같다. 단순히 쥐는 것의 문제나 좋은 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손에 쥔 펜의 잉크를 (연필의 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모두 다 소진할 각오로 그려내듯 아무거나 적는게 답인 것 같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는 사실 내가 글을 쓰고 있을때 남이 말을 거는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내 친구들도 다 알고 있기에 함부로 말을 잘 걸지 않는 편인데,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로 알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이 학교 교장의 목소리였다.
우리 교장은 참 독특한 인간이다. 어떤 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영포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의 여러 기행 중 하나로 학생들의 야자 참여율 저조에 대해 학생회를 모아놓고 간담회를 열어버렸던게 있었다. 그래도 말은 통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간담회 이후로 진중하게 해당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니까 1시간동안 시간을 내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 생각했"었"다.
교장과 어떤 유대감이 형성되어있지도 않았기에 교장은 내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때 보인 명찰을 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최대한 내게 티내지 않으려고 내 눈을 바라보려 했지만, 흘긋하며 가슴팍으로 시선을 잠시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이름을 불렀다.
교장은 곧바로 내게 요즘 가장 힘든 것을 물었다. 아무래도 장소가 학교다 보니 수행평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원하는 답변이 아니라는 듯, 그건 당연하다며 다른 일은 없냐고 물었다. 의외의 반문이었다. 나름대로. 분명 학교 생활에 대한 것을 궁금해하던 인간이었는데, 무슨 바람이었던 것일까?
나는 곧바로 대산 청소년 문학상 이야기를 꺼냈다.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중앙대와 추계예대의 특기자 전형을 언급했어야 했다는 건 조금 슬펐지만, 그 슬픔을 분노로 바꾼건 정말 한순간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와중에 교장은 대뜸 소설을 쓰는지 물었고, 나는 시를 쓴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시 그거 몇 글자 된다고 힘들어 하냐"라는 말을 했다. 일순 치미는 분노를 약간 누그러뜨리고 예고생과도 경쟁을 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것마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그에게 웃어넘기고 자리를 떴다. 이 대화를 정상적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글에서 교장 뒤에 단 한번도 "선생님"을 붙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 어떤 분야던 이리 쉽게 무시하는 사람에게 존중의 호칭을 붙여야 할까. 적어도 이 경우는 무례의 선을 아득히 넘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을 본인이 부정하는 모순이었다.
나는 이 이후로 많은 감정이 들었다. 분노와 격정, 역겨움과 증오. 하나같이 부정적이기 그지없어서 그날은 펜을 들지 않았다. 슬럼프가 길어질 수 있었지만, 이 감정들이 잉크에 섞여버린다면 희석시키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더러운 경험이다. 꿈을 물어본 사람이 그 꿈을 무시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잘못 배운 실용주의를 방패로 철학적인 인간인 척하며 본인의 인문학적 무지를 가리려는 인간. 참기 어려운 혐오감에 휘둘리고 말았다. 그날의 나는 이 응어리가 단발적인 감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은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기에, 나는 그때의 나를 검토해야만할 것 같다. 그건 다음에 이런 일을 겪었을때 내 태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비단 이것이 내가 문학을 하여서 그랬을까? 어느정도는 있을 수 있다. 교장의 전공은 생명과학이었기에 더욱이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 말했듯, 잘못 배운 실용주의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본인이 가보지 않은 세상을 재단하여 마네킹에게 거적대기를 걸치게 하는 모습. 그러고는 마네킹을 깎아내리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
아마 교장은 내가 다른 일을 했어도 엇비슷했을 것이다. 교장의 시야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언어학과 미학, 철학과 사학, 또 다른 여러 순수학문들. 오늘날 사회에서 비주류 학문으로 분류되는 것들 모두 말이다. 단순히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자. 그럼 과연 "주류 학문"은 무엇인가? 공학? 의학? 법학? 경제학?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의 테투리가 너무 넓은 것 같으니 공학으로 한번 더 줄여서 묻겠다. 오늘날, "공학 중 주류 학문"은 무엇인가? 컴퓨터 공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사실 이 답은 꽤 간단하게 나올 수 있다. 바로, AI공학이다. 그럼 앞선 예시들은 왜 언급한 것일까? 저 세 가지의 공학은 모두 명실상부 주류 공학 이"었"던 것들이다. 저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옛날의 유행하던 공학이었으며,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그 인기가 줄어든 것일 뿐, 저들 모두 현대의 중요한 공학들이다. 상대적으로 "비주류화" 되었을 뿐인 것이다. 모든 학문들이 이렇다. 예술처럼 뜨고지는 사조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유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선택지"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주류는 과연 비주류보다 가치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떠한 학문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본다. 그 일을 할 수 있다라는 것 자체만으로 그 행위와 역할은 모두 가치를 가진다. 또한, 그것은 존비를 가릴 수 없고 생각한다.
앞서 들었던 공학을 예시로 들어볼까? 오늘날은 단언코 AI공학이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다른 공학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가? 아니다. 결단코. 컴퓨터 공학의 빠른 발전으로 GPU의 성능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AI공학의 등장은 불가능했다. 컴퓨터 공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AI를 "바둑 잘 두는 프로그램"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컴퓨터 공학의 발전에는 전자공학이 깔려있다. 아, 반도체 공학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모든 공학들은 전부 기계공학에서 파생된 공학들이다. 이제 더욱 발전시켜볼까? 기계공학은 물리학을 근간으로 한다. 또한, 물리학은 수학과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연관을 가진다. 수학은 어떠한가? 본질적으로 사고를 다루며, 철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 그에 대한 예시가 피타고라스 학파에 대한 것인데, 피타고라스 학파는 기하학으로 모든 세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이다. 후대에서는 이들을 자연철학 중 일부라고 설명한다. 어떤가? 우리는 오늘날 주류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AI공학의 뿌리를 따라가다보니 철학을 만났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묻겠다.

주류는 비주류보다 가치있는가?

그리고, 다시 답변하겠다. 아니다. 애초에 어떤 학문에 대하여 가치를 묻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모든 학문은 존재만으로, 그것이 학문적인 성향을 띌 정도로 체계화 되어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가지며,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학문을 바라보았을때 패륜을 저지르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주류 학문을 하는 이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들도 언젠가 뜨고 지는 사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AI공학도 언젠간 저물 수 있다. 막말로 다시 인문학의 시대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아직 AI가 잘 하지 못하는 하드코딩이 각광받으면서 2차 컴퓨터 공학의 시대를 이룩하는 것도 합당한 추론이다. 자신들이 주류라는 이유로 다른 학문을 천시한다면, 이후의 시대에 도태되는 것은 당신들일 것이다. 어떤 곳에서든 박쥐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주류 학문을 하는 이들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주류학문 못지 않게 세상을 이롭게 하고 있음을. 혹시 아는가? 새로운 발견으로 새로운 학문적 유행의 지평을 열게 될지. 쓸모없는 학문은 없다. 어떤 학문이든 세상을 향해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세상에게 청구하길 간곡히 바란다. 당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외쳐라.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이 글을 쓰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내 친구들은 대다수 진로가 명확하다. 또, 제멋대로다. 말 그대로 제 "멋"을 따라간다. 물리학과, 수학과를 희망하거나 의대를 희망하면서도 전문의를 따면 생명과학과로 편입하겠다는 놈.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인해 특수동물학과의 진학을 꿈꾸고, 일렉기타를 좋아하거나, 혹은 심리상담을 하고싶어 한다. 세 걸음 뒤에서 친구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대가 된다. 물론, 꿈을 향하는 것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방향에 맞춰서 뜀박질을 하더라도 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보폭의 욕심이든, 성급한 마음에 신발끈을 차마 확인하지 못한 것이든 말이다. 넘어지는 것은 아픈 일이다. 슬픈 일이기도 하다. 무기력해지고, 자기자신을 비관한다. 세상에게 유독 예민해져 새소리에 귀를 닫아도 산들바람에 베인 흉터가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일어난다. 아프고 슬프더라도, 미련할 정도로 잘 일어난다. 꿈이란건 그런 것이다. 고통과 애상, 절망감과 타인의 모멸감 마저 사랑할 수 있는 길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오롯한 소로(小路)인 것이다. 빨리 달릴 필요도, 달릴 수도 없는 길. 투박하기 그지없는 그 작은 길 위를 다져가며 걸어가는 것. 내 친구들은 그것이 진정한 꿈이라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았다.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필요없다는 듯이. 자신들의 걸음걸이와 불규칙한 보폭마다 남는 명확하고 지긋한 발자국들을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도, 무가치에 반론하지도 않았다. 걷는 것이다. 그건 마라톤도, 단거리 달리기도 아니다. 살아가는, 살아있는 산책이었다. 주류와 비주류,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학문으로 살아있기 위한 길. 내가 걸어왔던 길과, 발자국들을 이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모든 학문들이 세상을 마음껏 탐구해도 혼나지 않는 세상을, 꿈꿔도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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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백

    남의 꿈을 쉽게 말하고, 그런 건 정말 화가 나지. 그런데 난 네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보고, 이렇게 글로 쓰는 게 멋있는 것 같다. 만약 나였다면 그 상황에서, 조금 짜증은 나지만 그러게요. ㅋㅋ 하면서 나이 드셔서 그런가보다 하며 넘겼을 것 같거든. / 마로야, 예민한 감각은 언제나 쓸모 있어. 화를 감각하는 사람은, 그 화를 통해 세상을 더 깊게 통찰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 나의 신념을 형성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거든. 앞으로도 화 나는 상황에서는 네 생각을 이렇게 깊이 정리할 수 있는 글을 써 봐. 항상 응원해! 그리고 글 쓰다가 막히면 물어봐. 나도 미숙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도와줄게... ㅎㅎ

    • 2026-05-31 05:24:24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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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계마로

      @방백 으헝ㅇ헝... 너무 든든한 아군이다... 진짜 가끔가다보면 내 주변에 이렇게 좋은 귀인들이 많아서 행복한거 같아!!! 내심 좀 더 차분했어야 했나... 싶기도 했는데, 아직은 모르겠네... 이렇게 반쯤 분노에 차서 뭔갈 써본게 처음이니까... ㅎㅎ 아무튼! 너무 든든하고 멋진 우리 아군의 조언을 들어서 좋군요~

      • 2026-06-02 20:22:51
      사계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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