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어버린 것
- 작성자 연꽃담비
- 작성일 202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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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반납일을 하루 잊어버리게 되었다. 학원을 마치니 밤 10시가 되어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미루기로 했다. 연체가 하루 쌓여버리자 정직함을 희생당한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나 시험 기간은 책을 읽지 않는데 좋은 핑곗거리였다. 2주 동안 읽은 300 몇 페이지 가량의 책은 오늘자에야 겨우 절반을 넘길 수 있었다. 내 성실함의 지표를 눈으로 나타낸 듯 했다.
학원이 끝난 후, 집에 가면서 노래를 들었다. 직접 부르지는 못하지만 뜻이 좋은 영어 가사였다. 들으면서 내일 해야 할 일들을 곱씹어보니 수행평가 준비가 남아있었다. 꽤나 까다로운 수행은 새벽까지 암기가 필요했다. 월요일을 겨우 마친 참이던 나는 오른 종아리 쪽 여름 모기 자국이 쑤셔서 두어 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집으로 가는 동안의 시간만큼은 물처럼 아까운 내 하루에 반영되지 않았으면 했다.
저녁이 지난 후, 스탠드가 비추고 있는 방 책상에 앉아 학교 가방을 열었다. 노트와 학습지 묶음, 필통과 아이패드 등으로 이미 무게가 나가고 있는 것. 그중 가장 무거운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학원 숙제였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오늘처럼. 종종 게으름을 간과하고 시간 계산을 맞추지 못하면 못하게 될 수준의 양이었다. 수업 시작마다 행해지는 검사 때까지, 결국 마치지 못한 숙제는 추후에 다시 인증을 받아야 했다. 다음 수업 시간이라는 유예 기간이 생겼지만, 타이머 시간을 늘려놓은 것일 뿐 단단한 매듭이 조여오는건 동일했다. 그마저도 오늘은 그놈의 수행평가 때문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기에. 심부름 나간 돈으로 군것질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 새 모기 자국 위에 손톱을 세우며 암기 글씨를 날려썼다. 잉크가 막혀 써지지 않는 검은 펜촉을 연습 종이 위에 꽉 눌러 휘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기심을 마주하면 피곤해진다. 아니, 어쩌면 새벽 2시까지 깨어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나는 정오가 지나 하루가 시작될 때까지 깨어있었으나 오늘은 몸이 침대가 아닌 책상 위에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어제 쓰고자 하던 글감이 생각났지만 지금의 우선순위는 잠이었다. 다섯 발자국을 걸어 이불 안으로 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먼저 베개에 닿았다. 마지막 의식을 소등하는 순간에서도 오늘 있었던 중요한 하루치 선택의 많은 ‘미루기’들이 떠올려졌다. 이기심을 마주하면 피곤해진다. 의식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저편으로 도망쳤다. 선풍기 소리가 일정하게 귓가에 진동하자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더욱 선명했고 역설적이게도 머리는 점점 무뎌졌가.
진짜 화요일을 맞이할 시각이 되어 눈을 떴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자 잠이 달아났고 새벽 내내 달달 외운 수행평가는 무난했다. 숙제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반납할 책은 도서관에 잘 전달되었고 공교롭게도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어제와 같은 루틴대로 책상에 앉았다. 먼저 잠들 필요 없는 룸메이트(동생)는 방 불을 끄지 않았으므로 내 작은 스탠드 또한 어제와 달리 켤 필요가 없었다. 때마침 모기 자국이 흐릿해져 통증이 까마득해진 시점이었다. 글쓰기 메모에 적혀있는 단어를 토대로 핸드폰 자판 위에 한 자씩 적어보았다.
훨씬 여유로운 타이핑이었다. 수필을 다 쓴 날은 수요일. 정확히는 약 2시간 전인 오늘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월요일이었던 스스로의 마감 기간을 이틀 동안 연기해 버린 셈이다. 그에 대한 대가였을까. 오늘 읽어본 글은 기존에 구성한 내용과 차이가 있었다. 원하던 모습이 아니게 된 원고를 손에 들고 나서야 미안한 마음에 싹이 자라듯 피어올랐다. 선택적 망각으로인한 안일함이 내가 얘기하고자 한 주제, 정확히는 감정을 잊게 하였으므로. 내 게으름을 위해서 더 멋들어질 수도 있었던 글감을 희생했으며, 그것은 오늘을 포함해 꽤나 상습범이었다. 그새 습관이 들었는지 오른 종아리에 손을 올리고 이제는 가렵지 않은 그 위치에 감촉을 상기했다. 시간이 부족했다고 머리를 스쳐난 생각은 분명 거짓이었을 것이다.
내용이 바뀌었다한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깨달은 점을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흐릿한 초안을 쫓느라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편집한다면 그것이 더 무책임한 선택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난 무엇을 위해 내 일을 회피했고, 그 선택의 근거가 되기 위해 합리화한 핑계는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책임은 쾌락과 반비례한다는 것.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는 것. 점점 몸이 커짐과 동시에 내가 ‘결정’을 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하기야 1년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싫어하는 계절 또한 꼭 여러 번 거쳐야 하는 듯하다. 마음같지 않던 이번 글은 내 눈에 보이는 한 궁상맞았지만, 그럼에도 완성하고자 했던 이유는 아마 머지않아 또 다시 벌레가 날 물었을 때, 무작정 긁어내지 않기 위한 약바름이자 책임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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