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수수께끼 같아요.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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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이 종수에게 물었다.
종수씨는 무슨 소설을 쓰세요?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종수가 대답한다.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왜요?
저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영화 <버닝>(2018) 중
최근 이창동 감독은 영화 <가능한 사랑>을 선보였다. 2022년 단편 <심장소리> 이후 오랜만에 등장하는 장편작이다. 이창동 감독은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작품 하나, 하나 마다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나는 이창동이 마치 한국의 타르코프스키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이창동의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타르코프스키는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는데 강하지만, 이창동은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다. 하지만 이들 둘다 자신들의 철학관이 확고하며, 사회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안타깝게도 <가능한 사랑>은 한국에서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해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내게는 감사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가능한 사랑>이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에 걸려 나는 현재 볼 수 없다. 9월 23일 일부 극장에서 현재 개봉한 상태임에도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11월 이후에 넷플릭스에 공개가 된다면 나는 곧 성인이 되고 그 영화를 바로 관람할 수 있다. ott에 따로 걸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능한 사랑>에서는 또 이창동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가 궁금해진다.
다시 영화 <버닝>으로 돌아와서 사실 <버닝>에 대한 비평은 이미 오래전 작성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포크너, 하루키, 그리고 이창동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흐름을 글틴에 올린 적이 있다. <버닝>은 원작이 따로 있다. 바로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이다. 그리고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와 동명의 소설 포크너의 <헛간을 태우다>가 또 존재한다. 찾아보기론 하루키가 포크너의 소설을 보고 헛간을 태우다를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쓰다보니 겹쳤다는 인터뷰를 보았다. 다만 나는 이 세 작품 모두 흥미로웠다. 불태운다는 행위를 공유하고 있고, 인물들의 상황과 처지가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내가 이전에 올렸던 비평을 참고하면 좋겠다.
영화 <가능한 사랑>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은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창동 감독이 떠올라 <버닝>을 최근 다시 시청했다. 영화 <버닝>은 볼 때마다 난해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집중하는 지점이 달라진다. 저번 비평을 쓸 때에는 한국 청년의 분노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종수의 대사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는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고3의 막바지가 다가오는 내게 저 대사는 나의 심정을 가장 잘 반영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세상,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왜 살아가야 하는가. 오래전부터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철학자들에게 화두가 되어왔다.
중세시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시기 인간은 모든 삶의 의미를 신에게 맡겼다. 신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의무가 있다. 신이 내려준 십계명에 있는 10가지 계율을 지키며 신을 사랑해야 한다. 신을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신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턴, 케플러 등의 과학혁명과 동시에 일어난 인간 이성에 대한 연구는 신에게 맞서며 다시금 인간에게 혼란을 안겨주었다.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불확실해진 근대를 넘어, 2차 세계대전이 지났고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신은 없는 이 어두운 세상에 인간은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신이 없다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미스터리한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진정으로 세상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졌고, 수수께끼가 되어갔다.
인공지능이 도래하며 우리는 점점 신의 존재를 회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진리와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과학은 신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마법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연장해준다.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 감정이 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시리즈물 <데칼로그>에도 등장한다. 시리즈 <데칼로그>는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을 주제로 총 10편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그 중 제 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를 주제로 만든 1편을 살펴보자.
1편에서는 열살 남짓한 소년 파웰이 나오고, 그의 아버지인 크르지스토프가 등장한다. 아버지인 크르지스토프는 교수로 컴퓨터를 잘 조작하고, 만지는 사람이다. 이는 은유적으로 신을 맹신하지 않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파웰은 반면 아직 성장 중인 아이이다. 아버지에게 신의 존재를 물으면서도 컴퓨터에도 관심을 가진다. 자아가 형성 중인 단계인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되고 선물로 스케이트를 받게된 파웰은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호수의 얼음 두께를 분석한다. 컴퓨터 분석 결과 얼음 두께는 스케이트를 타도 깨지지 않을 만큼 두껍다는 판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파웰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컴퓨터를 바라본다. 파웰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깨진 탓에 결국 죽고 만다. 크르지스토프는 이에 절규하며 성당으로 가보지만, 그는 그곳에서조차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인간은 과학을 맹신하며 세상의 확실함을 부여하려고 하지만, 결코 세상은 확실하지 않다. 인간의 지식은 날로 갈수록 더해지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불완전 하기에 완전한 존재를 찾게 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진리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이 수수께끼로 가득찼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장례식에 갔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곳에서는 향을 피웠다. 향에서 나오는 연기를 당시에 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향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처음에는 직선을 향한다. 그것이 점점 하늘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 똑바로 올라가던 연기가 갑자기 요동치며 몇 갈래로 갈라지는 것, 그리고 또 다시 돌연 뿌옇게 확산되는 것을 보고 나는 영감을 받아 시를 썼다. 마치 저 연기가 세상의 불완전함, 연기와도 같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삶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내용의 시였다. <데칼로그>에 대한 해석을 쓴 책인 김용규 작가의 <데칼로그>(바다출판사)에서도 그 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의 과학자 톰에 의해 발표된 카타스트로프 이론, 점의 이름은 카타스트로프 점이다. 실제로 연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카타스트로프의 점이 있다. 아무리 컴퓨터와 과학이 증명하고자 하지만 증명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데칼로그> 속 얼음이 결국 깨졌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얼음이라는 것이 어찌 모든 두께가 다 일정하겠는가. 얼음의 어느 한 부분은 분명 약한 지점이 존재할 것이다.
고3의 입시도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모든 것을 건다. 누군가 입시는 도박과도 같다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입시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즘 6학종을 쓰는 아이나 6실기, 6논술을 지른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재수를 각오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논술 같은 경우에도 붙어도 본인이 왜 붙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특히 학종이나 실기도 입학사정관이 보는 심사기준이나 여러 우연에 의한 요소들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적으로만 가는 교과조차도 경쟁률에 따라서 합격컷이 달라지기에 정말 도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발생한 수시접수 연장 사건도 결국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심리에서 비롯된 사건이기도 하다.(경쟁률을 끝까지 확인해야 더 유리한 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도 실기를 준비하면서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와 삶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지난 9개월은 돌아보기만 해도 불확실한 순간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인간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일체개고) 최근 명절을 보내며 여러 생각이 오갔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확실한 미래가 많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고, 고등학교에 가면 중학교와 유사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를 것이다. 매일 학교를 나간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고, 심지어 중학교 옆에 바로 고등학교가 있으므로 정말 일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며,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에 그 이후의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끊임없이 내게 고뇌로 남았다. 이전에 작성한 수필에서도 드러났지만 세계는 이해하면 이해하려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집이 갑작스럽게 재개발 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재개발은 오래전부터 예고하고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10년간 논의만 되었던 재개발이 단 몇 개월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전세로 있던 우리 가족은 빠르게 집을 구해야만 했다. 겨우 학교 주변에 있는 집을 구하긴 했지만 우리 가족에게 남은 과제는 더 쌓여갔다. 새로운 집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기존에 10년간 살아온 빌라에게 정이 많이 있었다. 내 모든 순간, 순간들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트럭을 할머니 집에 주차하고 지하철을 타고 퇴근해야 하는 등 여러 문제가 많았다.
고3이 되고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참 알 수가 없고, 나라는 존재조차 이제는 의심이 들었다. 수시 6장을 쓰자마자 힘이 쭉 빠졌고, 기존의 꽉 잡힌 루틴도 무너졌다. 다시 잡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는 학교에서 내게 주는 장학금 시상식조차 잠을 자다 가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며 나에대한 의문이 더 더해졌다. 그날만큼을 잊지 않겠다며 아침에도 메모장에 기록해놓고, 담임 선생님도 다시 한번 이야기했지만 점심을 먹는 순간 나는 그 사실을 까먹어버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3학년을 보내며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던 만큼 나는 더욱 깊은 감정의 골에서 헤엄쳤다. 이 끝도 없는 수레바퀴에 종속된 느낌이었다. 나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나조차 이렇게 불확실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에 이끌려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현상을 수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버닝> 속 종수의 행동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영화 <버닝> 속 종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창동 감독이 보여준 그 해결방법은 참으로 탁월하고 흥미롭다.
우선 말하자면, <버닝>은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각이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특히 이 영화는 감독조차도 답을 정하고 만든 이야기들이 아니다. 작중 우물은 꽤 중요한 메타포인데, 이 우물이 존재한다는 사람도 있고, 존재하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만 봐도 관객이 아무리 머리를 써봤자 진실은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해석을 덧붙인 이야기이니 참고했으면 한다.
종수는 자신의 친한 친구 혜미의 실종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 실종의 가장 큰 용의자는 바로 '벤'이다. 벤과 혜미가 처음 만났던 곳은 아프리카 나이로비였다. 나이로비에서 한국인이 둘 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둘은 친해졌다. '벤'은 미스터리한 사람이다.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사는 부자이지만, 그 재산의 출처를 알 수 없다. 그에게 직업을 물어봐도 그는 자신의 직업이 '노는 것'이라고 비유하면서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종수는 벤을 마치 개츠비와 같다고 묘사한다. 돈은 많지만, 그 출처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람을 의미한다. 단순히 벤이 부자라는 이유로 혜미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벤은 혜미와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아주 친하게 지냈다. 종수가 혜미를 보러 가는 자리마다 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미가 차고 있던 시계가 벤의 화장실에 있다는 증거까지 나와버리면서 종수는 벤이 혜미를 죽였다고 거의 확신에 가까워지게 된다. 결국 종수는 벤을 불러 그를 죽이게 되고, 그가 타고 온 포르쉐에 그를 넣고 불을 붙여 태워버리며 영화가 끝이 난다.
중요한 지점은 여기서 종수의 장소가 변화한다는 점이다. 중간에 종수는 혜미의 집에 들어가서 자신의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를 써내려간다. 그 이후 장면에서 종수가 벤을 죽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는 종수의 살인이 종수의 소설 속 상상의 장면이라 생각한다. 종수가 노트북을 사용하는 장면 이후로 벤의 살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종수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수수께끼를 해소했는가? 어차피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을 미행하고, 혜미의 집을 찾아가고, 혜미가 연을 끊어버린 가족들을 찾아가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는 종수가 소설을 쓰는 행위를 의미한다. 불확실한 세상, 수수께끼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소설 속 세계에서 종수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 것이었다. 종수가 벤을 살해한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 종수가 보인 불을 태우는 행위는 포크너가 <헛간을 태우다>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행위와 유사하다. 불을 태우는 것은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포크너의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분노할 때마다 헛간을 태운다. 마치 이와같이 종수도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다. 계급주의와 세대갈등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종수는 불을 통해 승화한다. 앞길이 불확실한 자신의 처지를 직접 소설에 묘사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소설을 쓰는 행위, 예술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 '거울'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거울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미현 문학평론가는 자기 성찰을 김승옥론에서 '자기 자신에게 쏘는 화살'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소설을 쓰면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쏜다. 이는 단순히 자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학을 넘어서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하는 행위이다. 성찰은 화살을 맞는 것처럼 아픈 행위이다. 모든 삶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 나 또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존재한다. 그 아픔을 마주하는 것이 성찰, 거울의 행위이다. 아픔을 마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다. 종수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통찰했다. 분노에 가득차서 모든지 때려부시는 자신의 아버지(영화 내에서는 결국 징역을 선고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존재 혜미와의 작별, 벤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느껴지는 계급의 열등감, 그리고 아직 등단하지 못하고 무슨 소설을 써야할지조차 모르는 자신의 처지까지. 종수를 둘러싼 세계는 너무나 버겁다. 그럼에도 종수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그대로 보고 그것에 달려든다. 수수께끼라면 어떤가. 가슴의 베이스가 울리듯이 수수께끼는 오히려 진부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다. 종수의 이러한 행위는 '코나투스'를 잘 발휘하는 것과 유사하다. 스피노자는 기존의 중세시대에서 말하는 신의 관점을 비판했다. 그가 본 신은 그저 자연현상 그 자체였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이 필연성에 종속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신이라고 해서 다른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도 결국 자연현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운명도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정해진 숙명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이 바로 코나투스를 발휘하는 것이다. 코나투스는 자기 보존을 하는 행위 자체를 말한다. 코나투스를 잘 발휘하는 것은 이 세상의 자연현상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세계의 필연성을 인식한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왜냐하면 원인을 바꾸면 결과가 바뀐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코나투스를 깨닫는 것도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지만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이제 세상의 작동원리를 알았기에 원인을 바꾸고, 결과도 바꿀 수 있다. 코나투스를 잘 발휘하는 인간은 자신의 잘못도 남 탓으로 되돌릴 이유가 없다. 그저 나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고 앞으로 더 잘 행동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 이 수필을 쓰는 순간조차 결국 거울이 되었다. 거울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있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글의 가치는 충분하다. 수수께끼 같다는 문장은 참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진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수수께끼라는 그 진리를 발견한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더 명확하다.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했고, 종수가 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모든지 할 수 있다. 수수께끼 같기에 우리는 어떤 답이든 제시할 수 있다. 세상은 빈 그릇 같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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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리는 벽난로를 제대로 끄지 않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집에 화재가 나게 되고, 두 아이를 잃게 된다. 이 일로 아내와 이혼을 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영화에서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파왔다. '리'는 이후 아내와 우연히 마주치지만, 서로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는 다시 살아보려고,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이전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다시 그에게 찾아오곤 한다. 기억은 때론 고통을 낳는다.이란 웹툰에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속 주인공은 어린 남자아이이다. 세상은 전쟁으로 정부, 공동체는 모두 파괴되고 자연상태가 되었다. 파괴된 도심에서 여자아이 한 명을 만나 서로가 의지하여 살고자 하지만 한 순간에 여자아이는 총을 맞고 사망한다. 남자아이에게 더 이상 살아갈 이유는 사라지게 된다. 웹툰 내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마치 기계의 배터리가 꺼지듯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에 부딪힌다. 결과가 정해진 이 긴 역사에서 우리가 지금도 숨을 쉬어가면서 내일을 살고, 또 다음날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어느날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전화 목록에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를 보면 대부분 070으로 시작하는 광고 전화가 가득하다. 가끔 친구나 부모님의 부재중 기록도 남아있으나, 그렇게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 목록은 한 번에 해치우는 편이다. 부재중 전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다. 부재중, 그리고 전화 그 사람이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 현재 부재한 상태이니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그 당연한 단어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마음에 무언가 쌓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 안에는 현재 폭설이 내리고 있다. 포근한 눈살이 아니라, 매섭게 내리는 폭설 말이다. 폭설은 순식간에 쌓여 덩어리를 만들고, 언덕을 만들어 무게를 증식시킨다. 마음이 무거워졌다.부재중 전화를 생각하면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담임 선생님은 키가 매우 작았다. 안경을 썼고, 머리는 짧고, 반곱슬이었다. 이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된 것 같은 그 선생님은 학교에 오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연륜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과목은 기술을 가르쳤는데, 시험을 보는 과목은 아니었기에 기억에 깊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재밌었던 사람이었고, 내게는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 중 한명이었다.중학교 첫 담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특별하다. 내가 중학교에서 첫 반장을 하면서 만났던 선생님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재밌었던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그 선생님을 몇 번 마주쳐서 인사를 했던 적이 있다. 마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은 재단이고, 두 곳이 연결되어 있어서 중학교 선생님들과 마주치는 일들이 잦았다. 사실상 나는 졸업을 했음에도 졸업을 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중학교 건물
-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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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편 44: 23-26-나는 본래 모태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다. 어머니 뱃 속에서부터 이미 교회를 다녔었고,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교회를 빠진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또한 모태 신앙이다. 다만 우리 아버지는 나처럼 뱃 속에서부터 모태 신앙이었던 것은 아니고, 친할아버지가 큰 병을 치유하신 이후로 개신교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열정적으로 믿었던 초등학생이었다. 진실로 천국을 믿기도 했고, 성경이라는 이야기도 재밌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소설을 쓰거나 역사를 좋아했던 이유도 나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라는 것에서부터 모든 흥미가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성경 속 이야기 만큼 재밌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배웠던 부분이 겨우 출애굽기 정도였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그 서사는 나에게 정말 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모든 것이 순진했고, 신의 존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신을 믿었다. 기도를 하면 내 소원을 이루어주도록 돕는 것이 신이었고, 만약 내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 믿었다. 사실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는 신을 수단화했던 것이다. 학교 아이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신을 믿기만 한다면, 진실로 믿기만 한다면 죽어서도 천국에 간다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이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모태 신앙이란게 참 무섭다. 왜냐하면 모태 신앙은 워낙 태어날 때부터 개신교적 사고관을 주입하면서 자라다 보니 천국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천국이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신의 존재 또한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신의 음성을 들은 적도,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내가 신앙심이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던 것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부목사를 그만두셨을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부목사를 그만두셨다. 당시 집안 분위기는 정말 암울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사역했던 사람이었다. 대학도 신학대학, 대학원도 신학대학원 그 외의 일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또 다른 직업은 구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나이도, 경력도 아버지를 이제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며 일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땡볕이 기다리는 그 넓고 넓은 사막으로 가야만 했다. 계단을 여러 칸 올라가서 택배 상자를 내려놓으면 겨우 몇 백원을 번다. 그것을 몇 백개를 하루에 반복하면서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일에 적응을 잘했다. 평생 부목사로 사
- 노스텔지아
- 2026-06-07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사르트르나무위키에 적힌 한 문장. 나는 사르트르가 실제로 했는지 알 수도 없는 그 말을 보고작은 노란 메모지에 그 문구를 그대로 적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썼던 나의 최후의 의지였다.순간, 순간의 나열들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1월, 2월, 3월 점점 상처들이 무뎌져가고, 의지는 흐려졌다.내 방에 메모지는 단 9개이다. 가장 가운데에는 앞서 말했던 사르트르가 말했는지도 알 수 없는 문구,그 아래에는 국어 기출분석 방법, 1년째 까먹고 있는 등차수열, 등비수열 합공식, 현대시 분석법, 수학 공부법, 영어 공부법 등등이 있다.1월에 나름대로 마음을 다 잡고 했던 일들이 이제는 별로 무의미 해보인다. 의지는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린다.평소에 가던 카페에서 나는 주로 공부를 했는데, 예전에는 5시간 연속으로 앉아도 괜찮았던 곳이 이제는 1시간만 앉아도 지옥 같다.슬슬 의지도 바닥나는 시점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탓일까. 얼어붙은 마음은 녹아내리지만 차가웠던 머리는 점점 아파만 온다.4월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시험 공부를 하느라 너무나 바쁘기도 했지만 평소 그것을 완화해주던 글쓰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고3에게 글쓰기 사치가 맞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결국 끊을 수 없는 유튜브 쇼츠와 같은 글을쓰려고 자리에 앉았다.나는 주로 글을 새벽 2시에서 3시에 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이전에는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정언명령이다.그것들을 내버려둔채 글을 쓰러 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3이면 그정도 고통은 필요하다. 사실 2시 이후에도 공부를 하는 것이 맞지만오늘만큼은 조금 다르게 보내보력 한다.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인식하고자 오늘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새벽 감성에 때론 이상한 글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의 새벽을 책임졌던 그동안의 소설과 수필들은 여전히 내 노트북에 차곡차곡 쌓여 따뜻한 도서관의 책장을 가득 메운 것만 같다. 피곤함에 젖은 그 글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감히 누가 평가를 한다고 할 지라도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던 간에 그 글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나의 실패의 바탕이 되었던, 성공에 바탕이 되었던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소설을 쓰면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공부를 뽑아보자면 윤리 과목들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생활과 윤리 내신을 준비하다보면 사상가들의 모순이 꽤 많이 발견된다. 특히 칸트. 칸트의 모순을 나열해 보자면 정말A4 몇 장 분량은 나올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칸트의 다른 이야기까지 파고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이성과 선의지가 있기 때문에존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기준은 서양에 사는 백인 기준이다.(칸트는 동양인과 흑인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에 칸트는 인간의 목적으로 대우하면서도 수단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가끔 장난으로 칸트가 싸이코패스가 아니냐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글을 쭉 쓰면서 나는
- 노스텔지아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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