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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

  • 작성자 푸른그
  • 작성일 2026-10-04
  • 조회수 51

인간의 인생이란 건 영화의 프레임이다. 프레임 하나가 인생의 1초이고, 장면은 추억의 면이 된다. 이상이라는 건 현실에 붙잡힌다. 인간의 멍청한 뇌는 이상이 중력에 뭉개지는 걸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렇게 인간은 흘러내리는 이상을 안고 무너져내린다.

우리는 현실이란 뱃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60억명이 훌쩍 넘어버린 인구수 속에서 살아가며 항상 눈물에 젖은 채 뒤로 당겨지는 몸을 억지로 앞으로 움직인다.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든 나아간다. 마음이 있다면 가능성은 무한대로 치솟을 수 있다. 현실이란 녀석은 마음이 주는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고, 마음이란 녀석은 현실을 깨닫게 만든다.

돈이란 것도 같다. 인간은 모두가 원치 않게 태어난다. 원치 않게 태어난 우리들은 무조건적으로 돈에 의존해야 한다. 모든 것은 돈에서 비롯된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인생이 망가질 정도의 실패도 돈 때문이다.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은 이어지지 못한다.

현실은 이상을 뭉갠다. 마음은 언젠가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부족한 자본은 인간이란 생물을 처량하게 만든다. 현실의 역할은 우리의 죽음이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만 15세의 이야기다.

언제부턴가 돌아가던 필름에 불규칙한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 구멍이 어째서 생기기 시작한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의미불명의 불가사의였다. 하지만 카메라의 아주 미세한 크기의 부속품들은 필름에 구멍이 나는 이유를 알았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부속품이 불량이었다. 이번에 카메라 외관에 기스가 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카메라를 다루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스가 나는 걸 모르는 둔감하디 둔감한 사용자의 성격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영상의 완성도가 높을 리 없었다. 영상의 중간중간 구멍 뚫린 필름에 번개가 치는 듯한 하얀 빛이 번쩍였고, 영상이 끊기는 지점 또한 존재했다. 카메라는 재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초등학교 1학년, 드라마에 관심이 갔다. 인물 한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가 궁금했다.

초등학교 3학년, 친구들과 유튜브를 시작했다. 직접 희곡을 쓰고, 연기하는 방법을 가르쳐 단편 영화 만들기에 최선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단편영화부에 들어갔다. 맡은 것은 연출이었지만 나에게 맡겨진 일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23년도 뮤지컬부 유일한 1학년으로 이름을 올렸다.

중학교 2학년, 뮤지컬부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차장으로 지명되었다.

중학교 3학년, 뮤지컬부의 부장이 되고, 강사 선생님을 대신해 뮤지컬부의 전반적인 일을 혼자서 처리했다. 나 연습할 시간도 없이 부원들을 연습 시키는데 급급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난 연기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나는 아르바이트 쓰리잡을 뛰게 되었다. 나는 공부에 손을 놓아버렸다. 정신 차리니 어느새 희망만을 바라는 패배자가 되어있었다.

26년 7월 말 대전의 연기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열차를 타고 논산역에서 39분을 이동하고 걸어서 12분, 지하철로 7분, 다시 9분을 걷고 대0 빌라 3층으로 올라가면 나의 첫 연기학원이 있었다. 연기학원의 첫 수업 날. 즉흥 독백 대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연기하는 것 같은 긴장감과 설렘이 감돌았다. 그 좁은 연습실에서 다들 거울을 보고 연습할 때 매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대사를 읊었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뮤지컬부 오디션 때가 생각났다. 2분가량을 연습하고 면접실로 들어갔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의 연습 시간을 가지고 순차대로 발표했다. 내 순번은 두 번째. 중요한 일정을 두고 팀원이 오지 않아 화를 내는 연기였다. 그날따라 몰입도가 평소와 달랐다. 관객은 보이지 않고 오직 나의 목소리와 공간만이 존재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표정과 억양, 감정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내가 가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저주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음 학원비 납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난 학원을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실직하셨다. 아버지는 나의 미래가 가망 없다며 대학 학비조차 모으지 않았다고 했다. 설상가상 가족외식에서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져 최소한의 지원도 끊겨버렸다. 난 가족에게 마저 버림받았다. 3학년 연기 입시반에 들어가려면 최소 500만원을 모아야 했다. 대학을 붙든, 떨어지든 성인이 된 후 나가는 비용도 생각해야 했다.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가능성이 아무리 커도, 인간이 피워내는 이상의 불꽃은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다니면서 2주 동안 2년 7개월간의 소비계획을 정리했다.

잠시나마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문제는 없겠다고, 그렇게 안일하게 평온했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 내 머리의 필름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우울증 수치라는 소견과 함께 정신과 약이 두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어제 나는 두 직장 중 한 곳에서 해고통보를 받았다.

나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였던 건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신호를 건너는데 이대로 대형 트럭에 짓이겨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었다.

가장 의지하고 좋아하는 친구를 불렀다. 퇴근 후여서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앉아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현실적인 조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았다. 만화에서도 천재들이 좌절하는 마당에 현실에 사는 언니는 어떻냐. 그건 나중에 해도 된다.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으면 받아들여라. 그래,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 언니는 난간에 매달린 사람 같아.”

쪽팔렸다. 혈액이 증발해가는 느낌. 머리 용량이 전부 비워지는 텅 빈 공허함. 나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추락했다. ‘너는 해낼 줄 아는 게 없는 패배자야’라고 속삭이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사장님에게 나는 가치 없는 생물이다. 친구에게 나는 실패자다.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 공허함을 그대들은 알까.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존중받지 못하고 가치 없다 핍박받는 삶.

나를 만든 창조자들에게 배척당하는 기분.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들에게 묻는다. 나는 패배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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