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 사랑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10-14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1,227
때때로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불우한 어린시절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정 욕구에 가깝다. 결국 사랑받는다는 건 인정받는다는 것이라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남에 대한 무심함. 관계를 쉽게 끊어 버리려 하고 원하던 것도 쉽게 포기하는 기질. 그 보잘것없는 능력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위하는 왜곡된 자존심.
그것들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왔다. 내가 너무 좋아서, 나를 완벽한 무언가로 보고 싶었기에, 나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삶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이런 성향이 처음 드러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사람들이 학폭이라고 부르는-대단한 사건은 아니다-몇몇 일로 정신이 피폐해져 있을 때, 나는 어린 시절을 잠식하고 있던 비대한 자아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더 어릴 때는 그것으로 인해 많은 친구들에게 고통을 줬다. 그러고도 전혀 반성한 적이 없는 나는 그 유명한 오은영 박사에게 간 적도 있다.
아무튼 6학년 때 세상에 믿을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며 남들과 대화를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한 생각들은 나를 일종의 타락으로 이끌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세상에 대한 혐오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자원봉사 같은 선행을 무조건 위선으로 여기게 된 것도 그때다. 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편지를 쓰라는 선생님의 수행평가에 폭언을 써서 제출했다. 선생님이 곧바로 분노하는 모습은 내게 더 큰 확신을 줬다. 모두 꽉 막힌 사람들이라 생각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그들과 다르고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작 꽉 막힌 것은 나였다. 그때부터 나는 타협하지 못하고 내 이득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은 본능이 되었고 시간은 이것을 희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진해지게 만들었다. 나이가 더 들었을 때 나는 정서적인 괴물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런 성질은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우울증을 불러왔다. 병원에서 받아본 심리 검사에서는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성질을 설명했다.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극한 유아론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기를 원했다. 자기애만으로 나의 능력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깊은 인정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과 고통을 인정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중학교 2학년, 내가 원하는 것이 진부하다고 생각한 사랑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망가져 있던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나처럼 망가진 사람이었다. 학업의 압박과 끓어오르는 해방욕 사이에서 그녀는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만남은 짧았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내게 단초를 줬다. 이 허무함을 채워 줄 묘약이 무언인지 슬슬 깨달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과 내 타락을 분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욕구가 중학교 3학년 때에 갑자기 폭발했다. 뒤늦은 깨달음이 지금껏 몰랐던 내 설움을 깨운 것일까.
그때, 눈보다 하얀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피부도, 마음도, 미소도, 눈빛도 투명할 정도로 하얀색이었다. 혼탁한 나와는 전혀 달랐다.
내게서 염세주의를 벗겨내는 것을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내면에 일어난 변화에 그녀는 큰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살면서 처음 본 나는 신을 만난 것처럼 너무나 서툴게 행동했고 결국은 빌어먹을 이기주의로 회귀하여 모든 것을 망쳤다. 무려 세 번이나 주어진 기회를 나는 걷어차 버렸다. 지나친 집착 탓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처럼 하얀 사람이 섰다. 그는 나보다도 복잡한 내면을 가졌으면서도 혼탁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저열한 욕망 덩어리에 불과한 것에 삶을 낭비했기 때문에.
“미안해, 미안해….”
내가 그토록 힘들게 하고 상처준 그녀가 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순백색의 마음은 내 우물 속 세상을 붕괴시킨 천사의 강림이었다.
그녀의 선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다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억지로 연을 끊었고 그 또한 상처를 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나라는 악마를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할 것이다.
평생을 비겁자로만 살아온 나는 ‘정상적’으로 사랑받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의 타락은 결핍을 충족하고자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 방식은 집착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애정 속에 담겨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어둠의 검은 촉수는 잔존했다.
첫 번째 사랑에서도, 두 번째 사랑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것은 끝끝내 살아남은 그것 탓이었다. 달리 끊어내지 못한 내 탓이었다.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타락. 그리고 반대편에서 일말의 인간성을 유지하게 손잡아주는 사랑. 타락은 나의 집처럼 안전했지만 나를 고립시키는 도구였고, 사랑은 알 수 없는 무언가였지만 나를 그 고립에서 꺼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는 무조건 일관된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나이기에, 나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다. 그래서 내 선택은 언제나 어두운 쪽이었다.
세상을 모두 부정하고 파국을 바라는 괴악한 심리상태. 나는 그것에 너무도 익숙했고 내 모든 것은 그쪽에 있다.
반면 사랑은 몇 번을 겪어도 언제나 낯선 것이어서 내가 일궈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왜곡된 집착 외에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나를 끌어당기던 어둠은, 실은 또 다른 연모의 감정이었다.
나에 대한 갈구. 나에 대한 집착. 나는 애초부터 사랑 외의 것에 삶을 맡긴 적이 없었다.
자기애에서 비롯된 모든 생각과 고민은 변명에 불과했다. 나는 나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나름대로 논리를 쌓아가며 세상에 대한 경멸을 키워가던 내가 이렇게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니.
하지만 이것을 안 이상 나는 이것을 더 돌아보아야만 했다. 사랑 앞에서 나는 언제나 주저했지만, 이대로 이어질 세상에 대한 경멸은 나를 갉아먹을 뿐이었다. 나는 마침내 이 놀라운 감정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타락의 뿌리를 제거한 채로, 순수하게.
순수한 사랑. 내가 어렵게 이룩한 어두운 세계를 설렘이 단숨에 몰아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했다. 교감은 내가 단절했던 세상에 대한 소통을 이어줬고 헌신은 내게 살 의지를 줬다. 그 모든 과정은 사랑을 깨닫는 그 순간 1초면 충분했다.
타락. 그것은 사랑의 일종이었지만 제멋대로 자라나서 나와 주변인들까지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나무가 되었다. 염세주의가 세상을 어둡게 물들였고 불신은 소통을 막았으며 좌절은 나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것은 충분히 크기를 키우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두 가지 사랑은 열망이라는 공통된 특징으로 내게 섞여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이상 나는 타락을 잘라내야만 했다.
물론 세상 모든 걸 다 사랑하겠다는 기독교적인 박애주의로 이 글을 마칠 생각은 없다. 그건 내가 보기에 미친 사람이나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냥 소박한 다짐을 하나 하고 싶다. 앞으로 사랑 앞에서 변명하지 않겠노라고. 변명은 아름다운 사랑을 집착으로 잘못 자라나게 만드는 원흉이다. 나는 한 번 사랑할 때 진심을 다해 사랑할 것이고, 그 대상이 다름아닌 나라고 해도 그 마음을 세상에 대한 염오감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오래된 친구인 집착과 결별할 수 있다면, 상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심장마저 깎아낼 수 있다. 불가능이라는 벽은 거짓말이라고 외치겠다.
그렇게 집착을 떨쳐낸 뒤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저 순수하게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아, 곁에 아무도 없음에도 내 마음을 통통 두두리는 작은 설렘.
내 볼에 키스하는, 작고 예쁜 사랑 사랑 사랑.
추천 콘텐츠
사람이란 무엇이고 인연이란 무엇인가? 너무 포괄적인 질문인데다가 답도 없는 게 분명해 보여서 어떤 의미로는 좋은 질문은 아니다. 이 두 질문의 공통점은 대답이 아주 많고 사람마다 갈린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은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나 주변 지인을 데려다놓으면 그 사람의 정의할 수 없는 인간성이 바로 그 대답이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에서 연결되는데, 그 지인과의 관계가 답이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고 질문은 모호해지기만 했지만, 나는 그것들이 올바른 대답이라고 확신한다. 사람은 사람이고 인연은 인연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틀릴 수가 없다. 나는 위 질문에 답을 하고자 많은 사람들을 관찰해왔고, 이것은 글틴 캠프에서의 관찰 기록이다. 가나다순으로 정렬해보자면 가엘과 강완, 기능사, 눈금실린더, 데카당, 모모코, 선노아, 송희찬, 조민준, 화자가 있다. 어느 정도 감정적 교류를 한 것은 그 정도 되는 것 같다. 혹시 누군가 누락되었다면 연락 바란다…. 사건의 순서대로 일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 뻔한 짓이기 때문에 사람별로 글을 남기고 싶다. 일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번, 가엘부터 시작해보겠다. 친해진 속도가 가장 빠른 사람이다. 원래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는데, 처음 만나서 옆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갑자기 빨리 가까워져서 나도 신기했었다. 가엘은 좋은 사람이다. 나보다 누나인데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배려하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언제나 웃고, 내 감정을 불안하게 걱정하는 모습이 나의 마음도 다시 일깨워준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삶이라는 이야기를 하나씩 쓰고 있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가엘을 정의내려버릴 생각은 없다. 내가 아직 모를 뿐 모두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그녀에게 숨어 있을 것이다. 다만 캠프에서 그중 몇 가지를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캠프에서 처음엔 버스 옆자리에 앉았고, 나중엔 톡으로 대화하기도 하며 우리는 좋은 감정만 가지고 가까워졌다. 삐걱거림도 별로 없이 길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욱 빨리 친해진 것 같다. 나는 현실에서 누나라고 부를 만한 사람과 마주보고 대화한 적이 거의 없다. 그마저도 중학교부터는 아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게 누나라는 존재는 조금 미지의 것이었다. 왠지 무섭고 훨씬 인생 경험도 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엘은 그런 인상을 깨 주었고, 내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기회를 준 것 같다. 가엘은 전혀 무섭지 않았고 인생 경험은 나보다 깊었지만 일부러 티 내지 않았다. 놀다 보면 연상이라는 걸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가엘은 편하게 다가왔다. 편한 관계라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상대방에게 말을 걸거나 부탁을 할 때 미안함보다 고마움을 먼저 느끼는, 긴 시간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 가엘은 언젠가 그런 편한 누나가 되어 연락하면 짠, 하고 나타날 것만 같다. 캠프에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어서 고마웠고, 이후로도 연락해줘서 고맙다. 우리의 인연이
- 김희수
- 2025-02-02
"너의...이름은?" 유명한 영화에서 나온 대사다. 대사 그대로 너의 이름은,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그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사랑하고 만나고 결국 헤어지지만 다시 재회한다. 현실도 그처럼 아름답다면 좋겠지만, 나는 재회를 믿지 않는다. 재회는 언제나 놀랍고 설레는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그만큼 재회라는 상황이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연락처를 뒤져 보았다. 어렴풋하게 변색된 기억들이 나를 반겼다. 십대의 시작을 함께했던, 혹은 더 전의 인연들. 한때 나의 전부였고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것들은 이미 추억 속에 파묻혀 있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나의 관심사 밖에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인연을 잃는 게 싫어졌다. 나의 말, 나의 생각, 같은 마음을 공유했던 그 순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게 무서워졌다. 내 가장 내밀하고 진실했던 것들이 옛날 사진 정도로 취급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전화번호가 그대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후회도 잠시 했지만 연락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냥, 끊어졌던 연을 다시 잇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연락을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만날 수 있던 옛 인연은, 사실 없었다. 자주 장난을 치고 학교에선 자곤 했던 친구는 연락을 보지 않았다. 조용히 공부하던 친구는 연락을 끊기를 바라는 듯했다. 함께 그림을 그렸던 친구는 용건만을 물어 왔다. 친했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내게 화를 냈다. 그런 반응이 어쩌면 정상적일지도 모른다. 몇 년 만에 연락해서 용건도 딱히 없으니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 내심 충격이었다. 연이 끊겼다는 게 확실해져버려서, 그때의 나는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재회라는 허황된 종교에 대하여, 나는 불신자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재회를 믿고 겪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단의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환상적인 재회를 겪어도 재회의 신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연 또는 억지의 손을 빌려야만 재회의 천사는 찾아오기에. 떠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남기 것은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과 지독한 상사병뿐이었다. 추억은 잡힐 듯 말 듯 과거의 감정들을 숨겼고 나는 그것을 결코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기억과의 술래잡기 속에서, 이제는 술래인 나만 남아버린 듯하다. 최근에 만난 친구가 한 명 있다. 솔직히 여기에 그 이야기를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글을 볼 그 사람에게 변명을 조금 해두고 싶다. 이 글은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 이야기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글을 써서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 혹은 그 사람에게 작은 사과편지를 남기고 싶어서, 긴 글 사이에 내 마음을 끼워 숨겨놓고 싶어서….라고 해 두겠다. 메일을 백오십 개나 한 뒤 첫 만남은 조금 어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서로에
- 김희수
- 2025-01-30
광인변주곡, 이 이름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다름아닌 글틴 최초의 문장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자이다.대상작인 '이빨 빠진 쑥떡'을 읽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시를 이렇게 쓸 수 있지, 싶으면서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글을 쓴다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감동을 받는 것은 언제나 감정에 호소하는 진심 어린 글, 내 주변 사람들의 진실한 마음이 기교 없이 담긴 글들이었다. 같은 글틴 이용자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랑스럽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언젠가 오래된 게시판들을 탐독한 적이 있다. 어이없게도 학원 선생님의 숙제 게시판이었는데, 십 년 넘게 한 번도 삭제되지 않은 그 게시판에는 옛 학생들의 순수함 어린 댓글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왜인지 뭉클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오래된 기록들을 보다 보면, 그리고 그들의 작은 대화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나는 묘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 그것들을 발견해주기를 바라며, 나도 몇 개의 댓글을 남겼더랬다.글틴에서 그 시를 읽은 뒤에도 나는 그 글을 쓴 사람을 검색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을 검색했을 때 나온 것들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200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글티너들, 그들이 댓글과 게시물을 통해 소통했던 흔적들. 함께 현실에서 만나 즐거움을 공유했다던 그 부러운 기록들. 그 드넓은 기록들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다. 글틴을 졸업하면 그들의 계정은 눌러도 들어가지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이것을 (이상의 말을 빌려) 박제라고 불러 왔다. 그들의 기록을 모두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슬프면서도, 그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청춘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다.대단하다는 문학 작품들보다도 마음에 와닿는 옛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 오래된 문우들의 글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다. 그들의 글을 보기 어렵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그들의 글의 놀라움을 언제나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될 것이란 상상을 한다.이 글을 읽을 모든 글티너들에게 검색 한 번을 권하고 싶다. 첫 번째 대상을 수상한, 광인변주곡의 이름을. 그 이름을 따라가면 그때의 글티너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최근의 글티너들도 한 명 한 명 졸업하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즐거운 일이지만 이제 그들의 새로운 글을 글틴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우리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도 잊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살면서 품어본 적 없는 몇 개 안 되는 확고한 소원을, 이렇게 말해 본다.광인변주곡, 그리고 2005년부터의 글티너들. 당신들 모두 나의 위인이다. 한 명이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 김희수
- 2024-10-2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난 원래 이런 놈이야 라는 식의 자포자기를 드러내는 것도 실은 깊은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되는 경향임을 간파한 통찰력이 인상적입니다. 굉장히 사변적인 글임에도 대단한 공감을 일으키네요(적어도 저에게는). 글 전반에서 드러나는 무척 성숙한 메타인지적 태도 때문이겠지요. 김희수님은 글에서 스스로를 유아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런 자신을 시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마음먹는 흐름도 큰 비약 없이 차근차근 짚어주어 좋았습니다. 단점을 꼽자면 변화의 계기를 만든 그녀에 대한 부분이 조금 모호하다는 것 정도가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