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말 것
- 작성자 서하
- 작성일 202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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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498
엄마, 산문 과제로 ‘내가 삶과 싸우는 방법’을 받았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삶과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은 엄마예요. 가끔 정말로 궁금해요. 엄마는 엄마의 삶을 어떻게 견뎌 왔나요? 어떻게 모든 게 지나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나요?
저는 아직도 외할아버지가 미워요. 어떻게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한 짓과 내게 하는 태도를 분리해 보라 할 수가 있었나요? 오늘 아침에도 엄마께선 제게 다 지나간다고 말씀 주셨어요. 등에 와닿는 온기는 진짜였지만 지나갈 거라는 말은 믿기 어려웠어요.
꼭 붙잡고 싶은 것들은 저를 통과해 흘러가는데,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들은 제게 콱 박혀 빠지지 않아요. 엄마, 엄마는 어떻게 50년을 살아있을 수 있었나요. 태어난지 20년도 안 되었는데 숨 쉬기가 버거워요. 인생 맛보기가 이렇게 입맛에 안 맞아서 어떡하죠.
유산을 소재로 한 소설을 못 읽겠어요. 글자들을 꾸역꾸역 눈에 바르다가 몇 번이고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어요. 간명한 글자 속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들을 쳐다보기가 망설여져요. 제가 가진 고민이 흔하디 흔한 사연일 거라는 것도요. 제가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아요. 시험관 시술 과정에서 잘못된 세포가 흘러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아니라 다른, 좀 더 무던한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그런 경우의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부채감을 가지길 원치 않으신다 하셨지만 계속 떠올라요. 제겐 과분한 환경이 다른 아이에게 돌아갔더라면.
저는 엄마 딸이죠. 시스젠더 여성이고, 이성애자이기도 해요. 또 정말 운이 좋게도, 엄마 아빠께서 경제적 모자람 없이 키워주시죠. 그런데도 엄마, 저는 같은 반 친구들이 뱉은 “게이나 레즈는 다 죽어야 한다.”는 말에 상처받고 “입시 망하면 딸배나 해야지.”라는 친한 친구의 말에 바로 인상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써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일에 상처받는 건 잘못인가요. 배부른 고민일까요. 제 삶을 둘러산 세상은 생각보다 더 비정하고 잔혹할 정도로 이기적이에요. 수행평가 내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연예인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혐오 표현을 입에 올릴 때, 저는 회색 늪에 빠진 것만 같아요. 이미 목까지 잠겼어요. 저도 물들었을 거예요.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한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를 봤어요. 강박증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제 자소서 같더라고요. 초등학생 중학생 때부터 절 괴롭히던 생각들이 강박증 탓이래요. 제 잘못이 아니래요. 어쩌면 제가 제 삶을 진절머리난다 생각하게 하는 요소들 대부분이 제 탓이 아닐지 몰라요. 이 생각과 모든 건 제 탓이란 생각이 공존해서 문제지만요. 벨크로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를 괴로워하고 청각과 촉각에 지나치게 민감한 건 HSP로, 자살사고는 우울증으로. 제 문제들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문제는 많고 답은 없는 게 꼭 수학 익힘책 같네요. 엄마, 저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글을 쓰기로 한 걸 약간 후회해요. 첫 장은 빽빽하고 뒷 장은 텅 빈 노트들이 늘어가요. 흘려보낼 수 있었던 생각을 억지로 붙들어 놓는 건 아닐까요?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글에서 제가 하고픈 말이 없다는 피드백을 여러 번 받았어요. 어디까지 솔직해도 되나요?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은데 솔직해지기가 두려워요. 도망치고 싶은데 목적지가 없어요. 내 생각이 실례가 되면 어떡하죠? 타인을 상처입히면 어떡하죠? 결국 저는 방관자에 불과해요.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는 시대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 제가 홀로 업고 가야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삶이라고 하나요? 삶이 중첩될수록 너무 무거워요.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싸우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누구랑 싸워 봤어야 알죠. 지나갈 거라고 믿지도 않아요. 한 번 파도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파도가 들이치잖아요. 그것도 똑같은 바닷물이. 저는 답을 내리지 못해요.
답을 수할 수 있을 때까지, 입 닫고, 눈과 귀만 열어 두고 기다릴 뿐이에요. 마음 같아선 다 닫아걸고 싶어요. 엄마, 저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 글마저도 썩 짜임새 있는 것 같진 않네요. 그래도 제가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안다는 거 하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있잖아요, 많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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