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들 어떠하리
- 작성자 노을
- 작성일 20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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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쓴다.
하지만 나는 사실 글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좌우지간 그래도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머리를 쭉 늘어뜨리는 듯한 느낌이 좋기도 해서.
글에는 형식이 있다.
수필, 시, 서평, 소설, 기행문 같은.
내가 쓰는 무수한 글들도 다 형식이 있겠거니 싶다.
하지만 내 글에는 그렇다 할 형식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읽을 수 있는 글 그 자체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면, 혹은 글을 다 쓰고 난 후에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위한 글을 쓰는가?’
‘어디에서 봤을 법한 수려한 표현과 단어로 그저 멋있어 보이려는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문학의 의미나 글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는 그런 진부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또한 진부한 말일테지만, 글을 넘어서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무치게 궁금했다.
문득 든 내 생각이지만,
나는 정말 유별히 원하는 것이 크게 없다.
사소한 취향부터, 위대하고 대단하신 어른들께서 말씀하시는 그 진로인지 뭔지하는 것들 까지도.
유별나다는 것도 내 생각일 뿐일까 싶기는 하다.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보통은 크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거나,
일찍이 진로를 결정하여 꿈을향해 달려가기 위해 노력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 같은 친구는 거의 없다.
어쩌면 제 의지를 갖고 살아가기 시작한 지 몇 년 남짓 된 새순들에게 진로를 고르라는 것은,
갓난아기의 눈앞에 팔만대장경을 펼쳐 두고 경전의 구절을 읊는 것과 같은 꼴일 것이다.
‘평생 해서 먹고살 일’ 을 고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무게감이 상당하다.
세상 그 어느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가벼이 여길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젊은지 어린지 모를 우리들에게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진로란, 결코 가볍지 않다.
만약 우리에게 진로라는 것이
한번 해보고 안되면 말 수 있는 것, 안되면 다른 것 하면 되는 것처럼 가벼이 생각될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진로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처럼 글을 쓰는 것을 즐기고 좋아한다면 주저 않고 소설가나 시인이라는 직업에 뛰어들어 볼 것이다.
그러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직업의 한계나 단점을 몸소 느끼고 나면 다른 길들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이 만약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고민 없이 너도나도 프로게이머에 도전해 볼 것이다.
그중 일부는 정말로 성공한 프로게이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여느 분야가 마찬가지이듯 성공하는 이는 소수일 뿐.
마찬가지로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는 현실적인 고통을 몸소 느낀 후에는 다른 방안을 찾아보겠지.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어떤 사람들은 ‘실패‘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지만,
나는 실패보다는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경험은 건강한 경험이다.
어른들이 백날 잔소리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느 정도 원하는 안정된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궁극적으로 본인들이 경험하지 못해 본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여기서 ‘보는 것’은 비단 시각적 정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 싶다.
오래된 관용구에는 근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경험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진로또한 가벼이 다가올 수 없다.
작은 사회라고 불리우는 학교와 그 모티브인 진짜 우리 사회는 선택과 뜀박질을 강요하고 닦달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자유로이 선택권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또 저래서 안되고,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또 안되고.
그렇게 방치한 채로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뛰지 못한 이들에게는 가혹한 벌칙을 내린다.
선택을 맘대로 바꾸지도 못한다.
뛰다가 넘어져도 안된다.
그저 뜀박질이 조금 느려져도 안된다.
꿈을 꿔서도 안된다.
남녀노소 누구든 그러다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아, 아쉬울 뿐이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사회는 돌아간다.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
.
.
나는 공부를 관뒀다.
변명거리는 수두룩 빽빽이지만, 굳이 하지는 않겠다.
나는 인간 사회에 태어나 우리 사회에 속했기에,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더라도 속한 집단의 룰을 따라야 한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아쉽지만 내 집단의 룰에 따르면, 학력이 좋지 않은 이들은
일단 인간관계의 품질검사에서 한 등급 내려간 채로 시작한다.
이러한 품질검사는 재력, 외모, 성격 등 한 단계씩 점수가 매겨진다.
‘그렇다면 네가 노력을 하면 되지 않는가?‘
‘외모 따위는 손쓸 수 없어도, 학력만큼 기회가 공평하고, 노력이 반영되는 분야가 어디 있는가?‘
이제는 말의 서두만 듣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수 없이 들은 말들.
물론 기회는 공평하다.
내 나라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보면,
정말 안타까운 극소수를 제외하곤 하고자 하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
위기는 공평하지 않다.
고난과 역경은 균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백번 양보하여 비록 그 위기의 정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들이닥친다 할지언정
개개인의 천부적인 회복탄력성은 모두 차이가 있다.
같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는 이가 있고, 넘어진 블록 세우듯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는 이도 있다.
그러한 회복탄력성도 노력의 범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나는 노력도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생각하기에.
물론 위기가 찾아올 때에 내가 과거에 했었던 것들이 노력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두가 각자의 인생이 소중하듯, 과거의 나도 내 인생을 스스로 나쁜 쪽으로 몰고 가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나도 마찬가지이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과거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음이라 여긴다.
이 또한 현재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 집단의 룰에 따르면 조금 불리한 길을 걷고 있는 나이지만,
그 불리한 길 또한 나의 길이리라 여길 뿐이다.
미래에는 미래의 위기가 나에게 당도하겠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있게 해 주었고,
현재의 내가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듯,
미래의 나도 나의 길을 걸으며 그저 나는 ‘나‘ 로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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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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