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영혼들의 품에서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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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428
2026 글틴 캠프가 끝나고, 1호선에 몸을 실었다. 원래라면, 서울역 동편에 있는 환승센터에서 판교 가는 버스를 타야 했지만, 나는 작년처럼 수원으로 향하는 1호선을 타 버렸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할머니가 있는 수원에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생은 혼자 나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개학 한 달 전 2월에는 할머니네에서 데려와야 했기에, 1월 30일 나는 그들에게 향해 갔다.
2026 글틴 캠프는 2025 글틴 캠프처럼 파주 지지향에서 했다. 책과 글틴. 때려고 해도 땔 수 없는 운명이라 너무 잘 어울리는 장소라고 작년에도 생각했었다. 그런 곳에 용기를 가지며 글을 쓰고, 본인의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하는 여러 명의 글티너. 그리고 위로를 전달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이 모든 것이, 2025년 1월 집결지인 서울역과 파주 지지향에서 느낀 관계들의 온기였다.
2025년 캠프에서는 활발하게 먼저 다가가 소통하는 글티너는 아니었다. 그저, 글틴 비공식 단톡방과 개인 메일로 몇몇 글티너와 이야기 나누고 소통했을 뿐. 그 이상과 그 이하의 것은, 채우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랬던 작년의 나는 캠프의 시작이었던, 서울역 집결에서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고 관계자 주변만 돌았다. 스크린으로만 봤던 사람들의 얼굴을 실제로 봤을 때의 어색함. 그 어색함이 나를 그해 1월 서울역 동편에서 돌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일부 사람들.
“혹시 희찬님?”
나지막하게 들려오고, 글틴에서 글로만 마주했던, 익숙한 이름들이 나를 알아봐 줬다. 그나자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까? 얼굴을 보이며 활동했던 게, 2024년도에 했던 글틴 리딩클럽. 패널도 아닌, 그냥 일반 참가자로 고선경 시인을 만나러 간 것, 뿐인데. 그러나, 23년도에 활동했던, 선배님들. 23년도부터 25년도 2월까지 멘토셨던, 그해 나와 같은 합평 조였던, 김태선 평론가님과의 대화가 이 순간을 이해시켰다.
“작년에는 영상으로 보고, 올해는 이렇게 보내요.”
2024년도 1월에 했던, 글틴 캠프는 고등학교 예비 소집이 있어 가질 못했다. 그렇기에, 작년까지 있던 다작 상이자 특별상 개념인 장려상 수상소감을 영상으로 보내야 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힘든 시간을 마주하면서 꾸준히 써나가겠다는 의지만 보였던 것, 같은데. 이를 60초라는 시간에 꾹꾹 눌러 담아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감사하기도 했다.
25년도 합평 때, 김태선 멘토님 조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상. 비평이었다. 이때도 그렇고, 26년도에도 그렇고. 글틴 캠프에서 감상. 비평의 합평을 희망하는 글티너는 적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감상. 비평 멘토였던 김태선 평론가님은 수필과 함께 내 감상. 비평에 대하여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그러면서도 햄버거를 먹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즐겁고 피곤한 첫 글틴 캠프의 첫날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글틴 캠프는 작년도 올해도 밤이 진짜였다. 2025년도 글틴 캠프에서는 조별 촌극이 있었다. 우리 조를 포함한 많은 조. 어쩌면 모든 조가 첫 밤, 점호가 끝난 뒤 모여 촌극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때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첫날 밤의 체력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못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회의를 끝냈다. 또한 오후에 있을 제20회 문장 청소년 문학상 시 부분 우수상 수상자로서 리허설이 있었기에. 시상식이 끝나기 전까지 긴장 때문인지 손과 발 그리고 머리. 온몸이 떨리고 아팠다. 그래서 그런지 둘째 날도 조원들을 많이 돕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는 족발, 치킨, 피자, 분식 중 치킨을 부상이자 야식으로 받을 수 있었다.
25년도 우리 조의 모든 글티너 덕분에, 시상식 때 큰 실수는 없었다. 수상작인 <시간 무빙워크>가 나에게는 무슨 의미의 글이었고, 계속 쓸 수 있게 해 준 힘이 어디였는지 약 일 이 분 동안 이야기했지만, 수상소감을 더 말하고 난 뒤, 그 당시 기억은 나지 않고, 과분하지만, 더 완벽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몸은 흐느끼는 것처럼 피곤힘이 몰려와도 쉽게 잠들지 않았다. 2025년도 마지막 캠프라는 아쉬움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락했던, 그리고 글틴 채팅방에서 이야기 나누었던, 글티너의 방으로 들어가, 많은 글티너와 새벽 12시 30분까지 가벼워 보이지만, 나름 진지했던 두 번째 밤을 보냈었다.
나에게 2025년 글틴 캠프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기억됐다. 그저 문학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누군가의 후배이자 선배로만 대해준 수많은 글티너. 어떤 것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극성 내향인. 고교 자퇴 이후 북적거리는 곳을, 피하고, 그저 땅만 바라보고 걸어 나가는 사람. 그런 나에게 그들이 전하는 따뜻함은 그해 캠프가 끝나고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들이 이끌어준 만큼 그들을 돕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그해 3월, 동국대에서 열리는 전국 만해 백일장에 나갔다. 글틴에 있는 글티너 중에는 문예창작학과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많은 글티너가 참가할 것 같았다. 캠프 때의 미안함과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글틴 자유 게시판에 이와 관련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더 많은 글티너가 만해 백일장에 왔겠지만, 내가 만난 글티너는 2025년 1월 지지향에서 만났던, 일부 글티너뿐. 그것도, 응시하러 들어가기 전까지만.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기압 때문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할 수 없이 시 한 편을 후딱 적은 뒤, 집으로 가는 1호선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이런 내 모습이 집에 돌아와서 후회만 했다. 이런 감정은 며칠 동안 생각이 났고, 다음번에 만나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며 여러 다짐을. 한 시간에 대여섯 번 글틴에 들어가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빨리 도망쳐 나온 것을 기압 탓이라고 돌려 말했지만, 결코 내가 도망 나온 이유가 기압만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학교에서 온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과 달리 고등부로 글을 써서 냈지만, 결코 고등학생이 아닌 내 모습이 너무 대비되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2024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학생들 하교 시간에 그 하굣길을 등굣길처럼 걸었는데.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속으로는 무뎌지지 않아서. 나는 도망치기만 바빴다. 수원으로 향하는 모든 길 위에서.
2025년도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 1년도 다니지 못했던, 고등학교의 침수 장면. 꿈속에서 같은 반 친구였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보였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꿈에서 일어날 때면,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기억 못 한다. 그들의 변화를 보기 전, 나는 온몸이 물에 빠져, 더 이상 꿈에서 꿈을 꿀 수 없는 상태가 됐기에. 이 꿈은 수원을 떠나야만 했던, 봄과 여름에 자주 꿨고, 몸과 옷뿐 아니라 침대 매트릭스까지 모두 땀에 젖었다. 몸이 젖고, 더워도 자면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의 심리였기에.
수원을 떠나고 이천으로 이사 가기 일 이주 전부터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던 적이 있다. 감사함과 죄송함을 털어야만, 수원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등학교에서 좋았던, 인연들을 제외하고. 동생이 다녔던, 별사탕 어린이집 선생님과 운전 기사님. 중학교 교감 선생님과 교통 지도 선생님. 북수원 시장의 선물 백화점 이모님과 동네 병원 원장님과 간호사들에게 마지막 같은 인사를 나누었었다.
평일 아침, 동생을 등교시키고 엄마와 함께 오전 산책을 했던 적이 있다. 우리의 코스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 앞 CU 편의점까지. 우리는 늘 1+1 행사하는 출퇴근 커피를 사고, 가끔은 출퇴근 커피에다가 기계가 내려주는 커피를 사서 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서 커피를 사고 나오는 시간만 되면,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 어린이집 운전 기사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어차피 지나가야 하는 중학교 앞에서 등굣길마다 차량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께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인사를 드린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나온 중학교에 남아있는 선생님들만큼은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었기에. 그러나 이사는 가야 하니 마지막 인사는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여 출퇴근 커피를 사서 그에게 하나 드렸다.
“학생, 혹시 재작년까지 여기 다니지 않았어?”
“맞아요. 23년도에 3학년이었어요.”
약간의 담소와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한 사람이 보였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교감 선생님. 그녀는 우리를 바라보다가 “송희찬.”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등교 시간에 사복으로 거리에 있는 나를 보고 있지만, 그녀는 당황함보다 친숙함이 더 묻어 있었다.
나에 대한 소식은 이미 중학교 선생님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당연하다. 매 오전 아이들의 등굣길을 함께 걷고. 하교 시간이 되기 전, 커피를 사서 편의점에서 나왔으니.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선생님들과 차를 타고 출근하는 선생님들 모두 오가며 봤을 확률이 크기에.
교감 선생님과는 거리에 서서 이야기하다가 점심시간에 내가 교무실에 찾아가 더 이야기 나누었다. 교감 선생님께 드릴 책도 한 권 있기에.
점심시간에 만나서 우린 내 건강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수능과 검정고시를 준비할 것인지 이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시간 무빙워크>가 수록된 제20회 문장 청소년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들였다.
“선생님, 여기에 제 시 들어 있어요. 저처럼 글 쓰는 친구 있으면, 여기 추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또한 글틴도 홍보를 해드렸다. 전국 국어 교사 모임이 후원하고는 있지만, 정작 현직 교사들은 잘 모르는 공간이라, 도움이 될까 싶어서 글틴에서의 성장 이야기를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내 시에 관한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교장이 되기 위한 활동과 외근이 있었기에. 우리의 대화와 만남은 결국 이날이 마지막이 되었고, 책은 교장이 되는 그녀에게 드리는 축하 선물이 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동생이 품었던, 유년의 잔재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동화책과 장난감을 어린이집과 몇 달 전 할머니가 되신 선물 백화점 이모님께 나눔을 했고, 이사 가는 날에는 동네 의원 원장님과 간호사께 아메리카노 한 잔씩 돌렸다. 이렇게까지 나누면, 이사 가서는 복만 들어오고, 좋은 기억만 생길 거라는 바람을 가지며.
이천으로 이사 간 이후에도 비슷한 꿈은 자주 꿨다. 놓지 못한 것들이 꿈속에서 원망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수원이나 이천이나 비슷했다. 똑같이 나와 침대는 물에 침식되고, 너덜너덜해지는 상태의 아침이 잦았다. 그럼에도 꿈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현실을 못 살게 만들지는 않았으니. 그저, 새로운 학교에 동생을 보낼 때, 출퇴근 커피나 메가 커피의 할메가 커피를 마시면, 꿈은 활동하는 동안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는 나도 모르게 현실에 등장하기도 한다. 글을 쓰면서, 자퇴의 기억과 학교 다니지 않는 청소년을 보는 사회의 시선이 나타나게 된다. 삶을 쓰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글에 내가 스며들어 쓰면서 나를 잃고 나를 헤치는 글쓰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써진 소설이, 2023년 7월부터 지금까지 첫 소설 장원이었던, <한여름을 베어물며>다. 서윤빈 멘토님의 12월 장원 공지를 보면, 알 수 있듯 위 소설은 약간의 오토픽션 계열의 소설이다. 정확히는 내 현실과 심리를 투영했다고 볼 수 있는 앞에 내가 언급한 그 꿈의 내용에서부터 시작된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쓰는 동안 여러 번 멈추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던 소설이다. 그래서 이상하게 마음이 많이 갔던 소설이자 가장 보기 싫은 소설 중 하나인데, 이런 소설이 12월 장원을 넘어 제21회 문장 청소년 문학상 소설 부분 장려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서윤빈 작가님의 지적처럼 위 소설은 결코 이야기가 강한 소설은 아니다. 그저 에티튜드. 나를 가꾸는 소설로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남기고 싶었다. 다행히 이런 내 의도이자 내 마음을 서윤빈 작가님이 멘토링에서 모두 언급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수상보다 내 이야기와 무의식이 전달하는 목소리와 이야기가 타인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미소와 한숨으로만 표현됐다.
이러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매년 <글틴 활동 일지>로 글틴에 올리거나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나, 캠프에서 느끼고 글틴에서 활동하면서 받은 온기는 텍스트로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이번 캠프에선 그 따뜻함을 내가 한번 나누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번 캠프에서는 절대 혼자 머뭇거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캠프에 제출한 작품 외에 내가 하루에 여러 번 글틴을 오가며 봤던 그동안 글틴에 올렸던, 작품들까지 전부 다.
판교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서울역 2층에서 집합 장소 주변을 바라봤다. 글로만 봐오던 새로운 글티너는 어떤 사람일지 생각하며 둘러봤다. 2층에서 돌아본 서울역 서부는 패딩을 입은 사람들과 통통한 비둘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누가 글티너이고 누가 일반 사람인지 또 비둘기는 작년에도 그렇고 왜 이렇게 많은지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마구 들었다. 하지만 그 틈 속에서도 익숙한 몇몇 얼굴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다른 분들도 궁금하다는 생각에 고집을 부리며 1시 50분이 되기 전까지 1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 내 집결지에 도착해서는 작년과 달리 나름,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나누어 보았다. 한 번 이상 만났던 사람도 있었던지라 불안한 감정은 많이 사그라들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가움. 새로 온 글티너에게는 “너는 누구니? 필명만 말해줘. 어차피 글틴에 올린 글은 내가 다 읽었을 테니.”라는 이름 모를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다. 인사는 나누었지만,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 나눈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본격적으로 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극성 내향인의 성질이 나도 모르게 또 튀어나왔다. 그래서인지 차에서도 이야기 나누면, 캠프 때 제대로 놀지 못할까 봐 지지향으로 향하는 1호차 1인석에 앉아서 창밖만 봤다.
서울의 높은 건물과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그리고 그곳을 뚫고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만 계속 생각할 뿐. 그런 생각과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하니 지지향은 금방 도착했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지지향은 책이 참 많다. 시집도 소설도. 많은 책이 라운지의 책장에 들어가 있기에 도서이고 파주 출판단지의 특색을 잘 살렸다고 숙소 자체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짐 속에 틀어박혀 있는. 마지막 날 사용될 나의 블라인드 책은 똑같은 책이지만, 포장되어 있어 이곳에 있는 책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나도 이 책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이 많았는데.
첫날 했던, 활동 중 당연,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은 합평이다. 내가 속한 합평 조는 지난 글틴 캠프에 없던 조금은 새롭고 특별한 조였다. 바로, 현직 작가 없이 글틴 졸업생이 주도로 글티너와 글티너로 합평하는 조였다. 나름 신선했다. 나에게는 우상 같았던, 선배와 예술위에서 활동하고 계신 글틴 선배. 동시대 때 활동했던, 졸업생 글티너. 그리고 현재 같이 쓰고 있는 동료들로 구성된 우리 합평 조. 김태선 평론가님과 함께했던, 작년 합평이랑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로 위로받고, 위로를 주는 합평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제출한 시는 바로 <열여덟 비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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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에는 열여덟을 입에 붙들고 살았다
동생의 하굣길에서 동생을 안아줬는데
아버님 소리를 매일 들었다
소년 가장도
고딩 아빠도 아닌데
그저 열여덟
{중략}
열여덟
이런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것뿐입니다
동생 친구들의 얼굴엔 쉽게 울음이 고였고
동네 사람들은 제 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다친 사람은 없는데 다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사고 친 적은 없는데
내가 나에게 사고 친 꼴이 됐다
{중략}
열아홉의 얼굴 위로
열여덟이 흘리고 간 비행운이 퍼져갔다
동생은 잘 자라고 있지만
열아홉이 돼도
난 아직 열여덟을 이길 수 없다
비행이 종료되지 않았기에
-<열여덟 비행인> 中
합평에 들어가기 전, 합평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글틴 단톡방 초창기 들어오신 분들은 기억하실 수도 있어요. 자퇴 이후 제가 노안이라, 동생을 데리고 동네 놀이터 가면 저를 본 아이들이 무서워했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조금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거나 재밌는 부분도 아닌데 괜히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전적인 글에 거리감을 넣는 법을 어려워하던 나를 위해. 위 시의 탄생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판단되었으며, 글틴에도 나랑 비슷한 경험을 가진 글티너가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쩌면 내 이야기를 한 것이 부끄러운 선택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소속이 있지만, 소속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합평 당시에는 시의 모든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시가 출발 된 시작점만 이야기했을 뿐. 하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동생을 데리러 초등학교 앞에 서성였을 때 나를 바라보는 몇몇 엄마들의 눈빛은 매번 날카롭고 경계하는 눈빛. 성인 같은 남자가 아이들 하교 시간에 서 있고, 최근에 그 당시 대전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까. 초등학생 1학년 동생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불안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열여덟 살인데. 학교에 갔으면 고2일 뿐인데. 이런 생각과 감정과 생각을 시 속에 모두 담아 보려고 했다.
다행히도 내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았다. 합평을 함께했던 글티너들이 문학적인 부분 외에도 응원의 말을 많이 해줬다. 나랑 동시대에 활동했던 글티너, 나보다 먼저 글틴을 시작하여 졸업한 글티너. 그리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글티너까지. 그저 나를 돌아보기 위해 썼던 글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활자에 따뜻한 향기가 스며든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예술위에서 일하는 선배 글티너가 책 한 권을 추천해줬다.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 ‘타이피스트’에서 나온 최민우 시인의 시집 <학교를 그만두고 유머를 연마했다>. 제목이 내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캠프 오기 전부터 구매하려고 했던, 시집이었는데 한 번 더 추천받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진짜 사야겠다는 다짐을 품고 합평한 모든 순간을 이번에도 마음에 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좋은 말과 유익한 말을 많이 해주고 싶었던, 캠프의 첫날 밤. 나는 위로만 받고 많은 말을 해주지 못했다. 글틴 캠프 정규 시간표에 있는 합평 시간 외에도 밤과 새벽에 315호 방에서는 합평이 진행되었다고 하던데. 내 체력은 한계가 분명했고, 분명한 한계에 많은 글티너에게 지금까지 글티너 개인마다 써온 글들에 대하여 첫날 밤에 합평하지 못했다. 최대한 많은 인원과 소통하고자 했던 꿈은, 내가 꿈으로 떠나는 바람에 첫날은 실패하였다.
눈을 떠보니 6시였다. 집에서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는 습관은 여행을 와도 똑같았다. 이튿날은 21회 문장 청소년 문학상 시상식과 리딩클럽 수료식이 있어서, 새벽에 수상소감을 생각했다. 제19회와 제20회도 모두 서 봤으니까, 이번에는 너무 길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성의 없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상식 때는 짧게 ‘지금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게 해 준 여러 글티너에 대한 감사’만 짧게 전달하고 단상을 빠르게 내려왔다.
하지만, 시상식은 처음이고 두 번째고 세 번째고 다리는 후덜거리는 것은 똑같고. 단체 사진 촬영 때, 뚱뚱하게 나와 보일까 봐 매번 걱정하고 상장으로 매번 가리지만, 이번에도 뚱뚱하게 나오는 것도.
시상식과 수료식이 있기 전, 오전. 독서 대화가 끝나갈 때, 블라인드 도서를 준비한 이유를 포스트잇에 적어야 했다. 내가 가져온 시집은 안미옥 시인의 <힌트 없음>이라는 시집이다. 그녀의 시집을 굳이 블라인드 도서 교환식에 가져온 이유는 첫 장원이었던 2023년 11월 감상. 비평 게시판에서 장원을 받고 산 책이기 때문이다. 그저 긍정적인 기운을 나누고 싶었기에 “첫 장원을 받고 구매한 시집입니다. 장원 기운 받아 가세요.”라고 포스트잇에 적은 뒤 내보냈다. 이 책을 받은 사람에게 좋은 운이 따라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블라인드 책을 제출했다.
이 활동들 외에 더 많은 정규 활동을 했다. ‘글틴 출판 도시’와 작가 강연 모두 훌륭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315호에서 했던, 무한 합평 천국이라 말할 수 있는 합평이었다.
나는 소설과 시. 정확히는 모든 장르를 쓰고 있는 사람이라 어느 분야로 합평할까 고민을 적지 않게 했다. 나를 하나의 장르로 구분하기는 나 역시 어려운 일. 그러나 하나의 축으로 가야 한다면 글틴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시를 선택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합평 천국 합평 때 많은 글티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작품이 바로 시 중에서도 가장 좋은 평갈 받은 <시간 무빙워크>였다.
굳이 <시간 무빙워크>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시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나를 마주했던 시였기에. 그러나, 나는 합평 천국에서 나의 시를 합평 도마 위에 올리지 않았다. 나를 믿고 월 장원으로 선정해준 김선오, 김리윤 시인과 작년 우수상으로 뽑아준 김이듬 시인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 더불어, 새벽 2시가 다가오니 눈이 서서히 풀려오고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서. 그러나 한 명이라도 더 글티너의 시를 읽고 이야기 나누어 주고는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글티너에게 내 합평 순서를 주고, 본래 내 순서에 합평하는 시까지만 합평하고, 룸메이트와 남은 글티너를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 생의 처음으로 새벽 2시에 잤다. 캠프에 참여할수록 늦게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2025년도에 12시 30분에서 올해 새벽 2시까지. 새벽 공기도, 밤공기처럼 똑같이 차고, 지지향은 여전히 ‘따뜻하구나’이런 생각에 뿌듯함이 살짝 들었지만, 여전히 발목을 잡은 것은 많은 인연에게 그들의 글을 내가 이렇게 느꼈다고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이번 캠프에서도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번에는 캠프에 참여한 글티너 대다수가 자유 게시판에 후기를 남겼고, 참여자 채팅방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또한 잘 사용하지 못하는 인스타를 제외한 네이버 블로그에 알고 만나고 찾은, 글티너는 모두 서로 이웃을 했다는 것. 이런 뒤풀이 형식 같은 것, 덕분에 해주지 못했던 말 그리고 받았던, 따뜻함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로 만나서 하는 이야기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후기를 읽고 그 밑에 댓글을 달며 나 나름대로 2026 캠프의 온기를 보존해 보려고 했다. 후기를 조금씩 적은 2026년의 인연들을 떠나보내는 서울역 1호선에서부터.
캠프가 끝나고, 1호선이 향한 곳은 할머니 집이 아닌 학교 밖 청소년 센터 꿈 드림이었다.그곳에 먼저 간이유는 내 담당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2025년도 4월에 만든 작은 세상. 미니어처 작품을 가져가야 했기에. 나는 세 가지의 에코백과 짐을 들고 갔다. 하나는 시상식 때 받은 보드와 꽃다발을 담은 쇼핑백, 리딩클럽 상품이 담긴 쇼핑백과 그 안에 있는 에코백까지. 모두 잘 정리하여 거대한 미니어처를 담아야 했다.
내가 센터를 떠난지 마지막으로 반년 이상 지나서 그런지, 변화한 것이 많았다. 꿈 드림 사무실 위치와 그 주변 자체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곳을 왔던, 2024년도 10월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낯선 느낌보다는 그리움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 처음처럼 침을 여러 번 삼킨 뒤 꿈 드림 센터 안으로 들어가, 내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반년 만에 뵌 선생님. 반년 전 모습 그대로 나를 맞아주셨다. 따뜻했다. 학교 밖 청소년 센터 특유의 온화한 공기가 주변을 감싼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가고 그녀의 도움으로 내 세계를 천천히 감쌌고.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온 짐을 함께 정리해 주시다가 수상 보드를 보셨다.
“희찬아, 어디서 상 받았구나.”
“저번에 이야기했었던, 글틴에서 매년 하는 연 장원 소설 부분 장려상 받았어요.”
선생님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운을 때셨다.
“선생님도 최근 수업 준비하다가 찾아봤는데. 활동하고 있었구나.”
“네, 23년도부터 쭉 활동해 왔어요.”
그러고는 지금껏 글틴에서 해왔던 작업과 결과 그리고 그사이에 만난 온화한 인연들. 조곤조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하다 보니 선생님이 아쉽다고 이야기하셨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더 많이 축하할 수 있었는데.”라며 함께 축하를 많이 못 했다는 것에 관한 아쉬움을 표하셨다. 그러고는 꿈 드림 졸업생이 된 나에게 사비로 사신 문진과 손수 필사하신 박노해 시인의 시 <너의 하늘을 보아>를 선물로 주셨다.
선물로 받은 문진 속 윤슬이 반짝인다. 그리고 박노해 시인의 시 역시 투명 필름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온도를 가질 수 없는 유리와 종이인데. 이상하게 받고 난 이후 손이 화끈거렸다. 사물 자체에 전해준 사람의 온기가 스며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신 꿈 드림 선생님과 수원시 꿈 드림에 미안했다. 고등학교 자퇴한 뒤,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속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자퇴해서 꿈 드림 센터에 찾아간 이후부터 나는 꿈 드림의 소속 청소년이었고,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꿈 드림을 나온 뒤, 할머니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가 만든 세상을 생각했다. 푸른색 트럭. 푸른색 빵집 벽지. 파란색이 도들아 보이는 미니어처를 만들 때. 어쩌면,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쓸 때부터 허우적거리던 꿈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닐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순간들이 이 푸른색을 더 덧칠하거나 덮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버스의 맨 끝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역시 아무런 답이 나지 않은 채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몇 주 만에 보는 동생의 키가 컸다. 나도 몇 주 동안 저 정도는 컸을지 궁금했지만, 열심히 혼자 잘 놀고 있는 동생을 보고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저렇게 자라는 키 안에 한 사람 한 사람 온기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나 역시 내 온기를 그와 함께 나누며 여독의 피로를 푸는 대신 동생과 놀고, 다음 날 아침까지 늦잠을 자버렸다.
햇빛이 나를 향해 들어올 때, 내 몸에선 땀이 흘렀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지만, 옷은 축축했다. 아직 다 이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았어. 안도를 내쉬며 선생님과 헤어질 때 했던 말을 떠올랐다.
“나중에 좋은 작가가 돼서 꿈 드림과 연락이 꾸준히 닿았으면 좋겠다.”
“그럴 날이 저도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나를 덮은 채 살아서 잊어버렸던 소중한 사람들의 온기를 오늘도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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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모든 문우. 글티너 여러분들 모두 안녕한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요? 저는 2026년 3월 대학교에서 캠퍼스의 봄을 맞이하며 지금까지 글틴에 남겼던, 흔적들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특히 작년 수상집에 실었던 <시간 무빙워크>의 작가 노트를 <한여름을 베어물며>의 작가노트를 쓰기 위해 계속 바라봤답니다. 그런데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읽을 때마다 감정을 잡기가 힘들어지네요. 아마도, 위 소설의 일부가 제 삶의 이야기라 그런 거 같습니다. <한여름을 베어물며>는 제 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 고등학교 자퇴 이후 학교와 함께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아마도, 미련 때문이겠죠. 저는 기침 틱과 기관지염, 천식 등이 결합 된 기침이라는 문제로 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기침과 더불어 이명과 같은 고통이 찾아왔으니까요. 이런 ‘나’라는 한 사람과 같은 반 친구들을 위해 담임 선생님은 자퇴를 권유했고 저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인지라, 담임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 가는 마음과 함께 서운하고 미움의 감정도 함께 듭니다.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저 자체도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소복이 쌓여 왔고 결국 꿈으로 그 당시에 표출된 거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글에 녹아버린 감정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저 살아냈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지나온 날들을 이겨내 보겠다는 오기가 글을 씀으로 어느 정도는 감정이 품은 감정을 표출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작가 자신이 쓰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은 항상 '나'라는 사람을 담기에 저 역시 그런 감각을 매번 지니며 살아갑니다. 글을 통해서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쓰지 않고, 자퇴와 건강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짐작합니다. 한 발 짝 움직이는 오기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집에서 유튜브나 쇼츠 같은 것들로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자신이 담긴 글은 자신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계속 상처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마주할 때, 힘들고 벅차고 아프겠지요. 그런데도, 끝까지 글을 쓰는 ‘나’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발 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한 번 오기로 밀어붙여 보세요. 여러분에게 글틴은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힘든 일이 있거나, 살기 위해 쓴 단상들 혹은 문학들을 표출하고 알려주세요. 저 역시 글틴을 만나면서 저를 끝까지 붙들며 쓸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멘토님과 수많은 글틴 관계자, 글티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 번 손을 뻗어주세요. 형식적인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언제나 뒤에서 늘 응원하겠습니다. <작가 노트>로 진심을 적어 내릴 수 있게
- 송희찬
- 2026-04-29
19살이 되기 전까지 살아줘서 고마워. 살려줘서 고마워. 살아 내줄 나날이 고마워. 3월 27일이날 삼이 총 네 개가 존재한다. 3월의 3은 하나. 27일의 3은 셋 {3x3x3} 총 합해서 네 개. 나는 2008년 3월 27일 3과 4가 교차하는 날에 태어났다. 찡얼거리며 울부짖으며 내 존재를 세상으로 내밀며. 우량아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이날만 되면 나와 거리를 둔다. 찡얼거리는 내가 미워져서. 나에게 생일은 이런 날이다. 우리 가족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최근 명예 권사를 받은 친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그녀는 다른 미신은 믿지 않아도, 선풍기를 켜고 문 닫고 자면, 죽는다는 것과 사업하는 집안에서 생일날 미역국을 먹으면 사업 말아 먹는다는 미신만큼은 믿었다. 그래서다. 할아버지가 자영업으로 재작년까지 카센터를 운영하셨고, 아빠 역시 코로나19 이전까지는 사업이 나름 잘된 사업가 집안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날마다 쇠고기뭇국을 먹거나 아예 국을 먹지 않았다. 만약 할머니의 말에 반기를 들면 그녀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져 갔기에. 생일날 우리 가족은 축하하는 기분을 전체로 느끼기보다는 할머니의 굳은 주름살이 더 신경이 쓰여 결국 할머니가 하자는 대로 최대한 장단을 맞춰줬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어린 마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이루려고 했다. 특히 생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태어남이라는 포상감이 있었기에, 나를 태어나게 해주고 이루게 해준 모두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요구했다. 터닝메카드 장난감 이라던지, 신비아파트 장난감 같은 것을. 그리고 원하는 음식을 생일날에는 모두 요구했다. 그러고는 맛있게 행복한 표정으로 먹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합가했기 때문이다. 같이 살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내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기가 눌려 가정에 방관자였다. 한 가정에 삼 세대 이상이 살다 보니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다. 특히 하루에 대다수를 집에서 함께 지내는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갈등이 가장 많았다. 할머니의 생활 방식을 할머니가 나와 엄마 그리고 아빠에게 강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항상 그녀의 걱정을 들어야 했다. “나쁜 친구 가까이하면 안돼.” “어디 놀러 갔다가 사람들 죽었단다.”라는 식으로 놀이터 갈 때도 친구 집으로 과제를 하러 갈 때도 매번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할머니를 말리 거나 “어머니.”라는 단어로 상황을 정리시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자주 반복되어 나타났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보이지 않아도 할머니의 손에 있는 것, 같았고 숨이 조여왔다. 이가 계속 쌓이다가 가끔은 엄마의 화가 다스려지지 않고 폭발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우리 집안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내 방에 들어가 그를 안고 내 귀를 막으며 소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온몸을 떨며. 그 순간의 공기를 나에게서
- 송희찬
- 2026-03-31
두고 가야 한다. 아니면, 버려야 한다. 축축해진 유년과 감정의 기억들은.나에게는 같이 살고 함께 자는 친구가 있다. 입과 발은 있지만, 움직이거나 말하지 못하는 친구. 하지만, 그는 매일 밤 내 옆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지켰다. 어둠이 무서워서 매일 밤 작은 불이라도 켜고 잠을 자야 했던, 내 옆에서. 근 10년 동안 쭉. 내 절친이고, 함께 사는 누구보다 내 냄새가 가장 오래 배 있는 사람이 아닌 친구. 나는 그를 ‘끼끼’라고 불렀다. 원숭이처럼 생긴 원숭이 모양의 인형이었기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갔던, 끼끼는 총 3마리가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지금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잃어버리거나, 버려져 버린 끼끼 두 마리중 한 마리는 내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는 내가 3살 때, 내 품에 안겨 잠을 잤던 존재였다. 그러나, 내가 껴안고 자며 스며든 내 모습이 인형에게는 땀과 침 등의 물질로 받아들였겠지. 그에게는 내 유년이 만든 세상에 대한 이물감 같은 감정들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른들에게는 그 인형이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로 여겨졌을 거다. 엄마는 내 냄새를 잔뜩 품은 끼끼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셨다. 그러고는 햇볕이 좋은 날, 밖에 그를 걸어 놓으셨다. 햇빛이 구정물과 냄새를 모두 빨아 드리라고. 그러나, 난 그날 이후로 그 끼끼를 보지 못했다. 밖에 걸어 놓은 인형을 누군가 훔쳐 갔다. 그날 이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첫째 끼끼에 대한 기억이 커서도 가끔 난다는 것이다. 특히 유치원에 다닐 때, 방과 후 수업 반 아이들과 함께 원숭이와 관련된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 끼끼에 관한 생각으로 집에 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래된 잔상처럼, 첫째 끼끼는 유년기에 원숭이를 보면, 그를 다시 떠 오르게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인형들이 둘째와 셋째 끼끼다. 하지만, 둘째는 크게 감정을 요동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할머니의 염색약이 그의 다리에 묻고 지워지지 않은 뒤, 그를 꽉 껴안고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안고 자면, 나에게도 그 염색약이 묻지 않을까. 그런 걱정들이, 그와 나의 거리를 가깝게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 냄새와 온도가 묻어 있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감정이 덜 갔다. 그런 그였기에, 나는 내 욕심과 걱정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를 내 밖으로 내칠 수밖에 없었다. 올 3월이면, 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집과 많이 떨어진 대학이라, 나는 기숙사나 자취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나에게 엄마와 아빠는 이런 조언을 해줬다.“희찬아, 기숙사 들어가면 끼끼는 가지고 가지 않는 게 좋겠다.”“왜”“끼끼 상태를 봐.”그렇다. 끼끼의 몸은 완벽한 몸이 아니었다. 그의 몸통은 내가 흘린 분비물로 누렇게 변했으며,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이런 것을 기숙사에 들고 가면, 룸메이트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말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에 격하게 동의는 한다. 하지만, 내 삶에서 끼끼 없이 홀로 버티는 게 가능할까
- 송희찬
- 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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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표지 사진은 본문에 언급된 문진입니다. ^^ 글이 잘 정제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ㅠㅠ+<열여덟 비행인> 합평 받은 시 퇴고하고 싶은데 할 때마다 울컥하여 퇴고가 쉽지 않네요...
@송희찬 잘 정제되어 있습니다. 멋진 문진이네요. 합평을 받고 퇴고하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작품도 있어요. 조금 놔두었다가 다시 읽어보세요 :)
멘토님 진짜진짜진짜 감사합니다^^ 잘 정제되었다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