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에세이

  • 작성자 파란색스머프
  • 작성일 2014-12-22
  • 조회수 1,020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도, 라는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죄책감 따위 느낄 필요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빠나 엄마에게 주워들은 이야기 몇이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전부다. 어렸을 적에 집이 부자였다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집이 망해 외할아버지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으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아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녔다. 이불에 구멍을 낼 정도로 담배를 자주 피웠다. 불같고 심하게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불교였다가 중간에 천주교로 개종해 친가 전체를 천주교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년에는 카트에 비둘기 모이를 담고 길가에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매일 카트를 끌고 공원으로 나갔다. 오 년 전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인 후 계속 투병생활을 하다 작년 9월 꽃동네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셨다. 생전에 나를 정말 예뻐하셨다고, 엄마는 말했다.

기억나는 것도 몇 없다. 내가 유치원 때 할아버지가 아현동 문방구에서 레고를 사줬던 것,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바람에 친척들이 다 모인 곳에서 아빠의 인사를 듣지 못해 왜 집에 왔는데 인사를 하지 않느냐며 불같이 화를 낸 것, 내가 할아버지 방에 누워 작은 TV로 애니메이션 채널을 보고 있는데 문을 살짝 열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간 것. 그 외의 기억은 모두 병원에 있는 모습이다.

돈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할아버지는 여러 번 병원을 바꾸더니 꽃동네에 들어가셨다. 친가는 육 남매였고 그중 세 분이 성직자였다. 나는 부랑자나 보호자 없는 사람이 오는 곳이 꽃동네였다, 라고 습작에 썼다.

병원비에 간병인 월급까지 합하면 매달 나가는 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점점 시설이 좋지 않은 곳으로 할아버지를 옮겼다. 몇 년이 지나자 휠체어를 타고 옥상정원을 돌아다니실 수 있었던 할아버지는 팔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굽어 펴지지 않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주무르며 사람의 몸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달에 한 번 꽃동네에 찾아가면 나와 엄마가 할아버지의 몸을 주무르고 있을 동안 아빠는 1층 로비에 내려가 있거나 동생과 장난을 쳤다.

그때는 아빠가 많이 미웠다. 친가 친척들도 미웠다. 할머니 집에서 육 남매가 모두 모였던 날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큰아버지인 신부님은 자신이 신부가 된 이유에는 할아버지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것도 있다고 했고, 고모는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내 나이 때부터 가게 일을 돕고 건물 청소도 하는 등 고생을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아빠가 말했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저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언젠가 아빠에게 물었다. 왜 저런 말을 했냐고. 기억하고 있냐고. 나는 아빠가 저 말을 했을 때, 너무 무서웠다고.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고. 아빠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다. 그런데 딱 잡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한 뒤 약간 핀트를 달리 나가는 식으로 찜찜하게 해명을 해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빠가 정말로 그렇게 말 한 적이 없는지.

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찍 죽고 싶다는 것 하난 확실하다. 60이 되기 전에 죽을 거다. 목에 구멍이 뚫려 말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침대에만 누워 보내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다. 할아버지는 지금 흑석동 성당 평화의 쉼터에 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날들을 병원에서 보냈고 성당에서도 보낼 것이었다. 가끔 평화는 무슨 엿 같은 소리, 하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이 년 정도 꽃동네에 계셨다. 말만 꽃동네지 실상은 그 많은 후원금을 어디다가 썼나 싶을 정도로 관리가 정말 거지 같았다. 커다란 방 안에 환자 열 명이 넘게 들어가 있는데 막상 그곳에 배당되는 간호사는 채 세 명도 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환자 가족이 와야 슬그머니 모습을 비쳤고 침대나 화장실 같은 시설도 열악했다. 이런 거 따질 처지가 아니란 거 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꽃동네에 가지만 않았으면, 돈을 더 투자해서 재활 치료만 받았으면 몸이 그렇게 굳는 일도 폐렴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시는 일도 없었을 거다.

할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남 잘못을 따지다가 결국 내 탓을 하게 된다. 그때 학원이니 영어 과외니 해서 내 교육비로만 한 달에 백 만원이 나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 밑도 끝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다. 엄마에게 이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죽인 것만 같다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충분히 사실 수 있지 않았냐는 내 말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열아홉 살 먹은 지금, 조금은 알겠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말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리다.

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고 휠체어를 타고 계신 할아버지 사진을 정리하며 아빠는 말했다. 삼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진지한 대화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 아빠한테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나는 그게 싫어 집을 나간 적도 있었고 아예 아빠를 없는 사람 취급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그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목요일이었다. 사망통지서에 적힌 시간을 보니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동생이 문자 못 봤냐고 물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켰다. 고모는 내 옷을 보더니 따로 갈아입을 필요 없겠다고 했다. 나는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아빠의 눈이 빨겠다. 그런데 목소리만큼은 참 담담해서, 살짝 떨리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 한참을 펑펑 울고 나니 고모가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밥을 먹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먹지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현동 성당 별관이 장례식장이었다. 주일에는 발인을 할 수 없고 별관에서 결혼식이 잡혀있는 바람에 이 일장을 치러야했다. 난생처음으로 상복을 입었다. 상복이면 뭔가 특별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그냥 한복보다 입는 법이 더 복잡하다던가. 오히려 몇 초 만에 입을 정도로 간단했다. 머리에 꽂는 하얀 핀도 그렇고 음식들도 그렇고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뿐이어서, 이게 뭐야, 싶은 맘도 있었다. 학교에서 야자를 하던 도중 주머니에서 장례식장에서 꽂았던 리본 핀이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별관은 2층까지 있었다. 장례식장은 1층이었고 나는 상복을 입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온통 하얀색 투성이었다. 다음날 있을 결혼식을 위해 직원들이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닫고 장례식장으로 뛰어갔다. 서러웠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새벽 세 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음식을 나르고 손에 생선 찌꺼기를 묻혀가며 그릇을 정리하다 보면 잡생각이 싹 날아갔다. 그날 효녀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겉으론 멋쩍은 듯 웃었지만 모두가 나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조문객이 오면 신부님(큰아버지)이 간단한 미사를 드렸다. 남의 장례식에서 미사를 드린 적은 있어도 아버지의 장례미사를 드릴 줄은 몰랐다고 신부님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새벽 두 시였나. 상에 남아있는 음식을 치우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 앉아있는 삼촌(신학생)을 봤다. 구부정한 어깨로 삼촌은 오래도록 할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불 꺼진 방에 촛불 혼자 타들어 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세상에는 내가 어림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때는 사이비라고 느낄 정도로 혐오했던 천주교를 존중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소리 내서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과 신부님, 수녀님(큰 고모)는 울지도 않았다. 우는 대신 다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올해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곡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긴 했지만, 그래도 그땐 차라리 소리 내서 울었으면 했다.

태어나서 아빠가 우는 걸 딱 두 번 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 꽃동네 입원 일로 신부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우울증에 걸려서 한창 고생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아빠였다. 나는 울고 있는 아빠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장례 미사 때 참 많은 사람이 왔다. 염수정 추기경님(장례식에 왔던 작년에는 서울 대주교님이셨다)부터 해서 신학교 학생들, 수녀님들. 그렇게 많은 성직자는 처음 봤다. 연단 앞에서 신부님은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신부님은 할아버지를 육 남매 중 세 명을 성직자로 키워낸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뭐라 더 말하기는 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발 자기가 뭘 알길래 저딴 말을 해. 나도 잘 아는 것은 없었으면서,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화장을 기다리는 작은 방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령 기도를 드렸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떨림도 없이 이 말이 반복됐다. 중간에 방을 나왔다. 나는 아직도 파수꾼이- 이 말만 들어도 힘이 풀리고 토할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데 오 년은 충분한 시간이었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어서 그랬나. 친가는 생각보다 빨리 담담해졌고 할아버지 얘기도 곧잘 했다. 담배 냄새가 가득하던 할아버지 방이 창고가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 방에는 곰팡이가 자주 슬었다. 공기 청정기를 가져다 놔도 곰팡이는 계속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상이지만 알고 보면 반지하인 집안 구조 때문에 무슨 짓을 하든 계속 곰팡이가 생긴다고 아빠는 말했다.

아파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가족에게 피해 주지 마라.

이런 말을 하는 남자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도 할아버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는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현동에 갈 때마다 아빠에게 산책을 하자고 졸랐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빠는 옛날 얘기를 들려줬다. 여기서 할아버지가 장사를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건물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어렸을 적에는 맨날 쌈박질만 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가만가만 얘기를 들으며 응 응,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지 얘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기보다는 말을 할 때 묘하게 들뜬 아빠의 얼굴을 계속 지켜줘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지만 쓰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파란색스머프
파란색스머프

추천 콘텐츠

어떠한 사람

나는 남에게 착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나는 그 알 수 없는 강박에 의해, 일상을 불편으로 소화한다. 차라리 누군가 내게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면, 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나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 따위는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나는 떠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깨달을 것이다. 사막에서 비가 내린다 한들 다시 뙤약볕이 드리우듯,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 생긴다 해도 다른 이들은 또 나를 떠나간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 난 그 해결책으로 '갈증 없애기'를 택했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갈증'이 '의미가 없다'라고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인물들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거의 아무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 갈증을 놓지 않은 이유이자, 내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다. 아무래도 나는 그것을 위선 혹은 연민으로 생각하나 보다. 다시 돌아가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는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첫째, 천성 나쁜 사람이라서, 모두가 지향하고 있는 좋은 사람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세상에는 완벽히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좋은 동시에 나쁜 사람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좋음과 나쁨의 정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인기(人氣)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대부분이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다수가 착하다고 예찬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이것은 각 개인의 좋은과 나쁨의 비율이 다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둘째, 처음부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꽤나 극단적으로 보이는 주장이다. 하지만, 위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인기(人氣)라는 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에게는 각각 불공평 삶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좋은 사람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몇몇은 후자의 말에 반발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인기(人氣) 얻은 이들, 예컨대 아이돌이나 연예인 말이다. 나는 그런 피나는 노력을 해서, 잘 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 노력이 그대를 무대로 이끌어주었다면, 그대는 속되게 말해 '될놈될'이었던 것이다.

  • 박해랑
  • 2026-07-09
인터미션이 없는 세계

  • 유율
  • 2026-07-04
나는 술꾼

기말고사거든요 두 과목을 치고 도서관에 조금 있다가 왔죠 집에 두 과목은 화법과 작문이랑 사회문화였어요 도서관에서는 뭘 했더라 월간지를 읽었는데 여러 개를 읽었어요 집에 왔어요 빵이 식탁 위에 있어서요 먹었어요 하나를 먹었는데 제가 조금 예전과 달라졌어요 젤리가 먹고 싶어서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가서 무인 아이스크림점으로 갔어요 거기 젤리가 있거든요 근데 저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애들 3명이 들어오길래 제가 뭘 사는지 볼까봐 그냥 나왔어요 앞에 있는 이마트24로 갔어요 거기서요 뭘 먹고는 싶은데 그리고 그게 몸에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아닌데 영양정보를 확인했어요 짱셔요가 당류 함량이 30g이었어요 당알코올 2g이었는데 먹으면 취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사고 고개 숙이고 꾸벅 나왔어요 오르막길을 오르며 먹었어요 하나 둘 그런 기분만 좋게 만드는 것을 왜 먹나 싶었어요 할 게 없어서 이런 것도 먹어요 저는 집에 왔더니 허기가 진 건지 중독이 된 건지 모르겠어요 빵을 하나 더 먹고 예감이라는 과자를 뜯어 먹고 사과 주스를 마셨어요 저는 왜 이러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듯했어요 그거 아세요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먹고 울면서 먹어요 먹기 싫어서 근데 뱉기는 싫어요 완전 어린왕자의 술꾼 같았어요 그 책을 중학생 때 읽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깨달으면 어떡하죠? 그래도 알고 있어 다행이에요 술꾼은 중독성이 있는 물질에 내성이 생겨 끊지 못하는 고착 상태를 표현한 인물이었어요 절 닮았어요 하하 빵을 먹기 싫은데도 입에 넣는 모습을 보면 어린왕자가 물을 거예요, 왜 빵을 드세요? 전 답하겠죠. 먹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거든. 왜 나빠지는데요? 빵을 먹지 않으니까! 이것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맞게 쓴 건가요? 그걸 굳이 따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저는 지금 정확하지도 않고 말하자면 흐물거리는 상태예요 보기 싫죠 그리고 허영쟁이도 절 닮았어요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허영쟁이는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슬프지만 옆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타인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요 별만 반짝이죠 위에서 그것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외로움을 떨쳐낼 수 없어요 왕도 저 같아요 저는 꼭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하니까요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명령을 하죠.. 상대방은 절 신경쓰지 않는데 저는 저를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별을 소유하는 사업가는 대부분 사람들 같아요 놓아 주면 좋겠어요 나도요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사람이에요 하나 그게 그에게는 더 행복할지도 몰라요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무목적의 우주 속에 떨어진 것보다는 보람 있는 (혹은 그렇게 믿는) 일을 하는 게 자신을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줄 테니까요 (그게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주위를 둘러싼 것 중 완벽하게 설명된 것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칸트를 꽤 좋아하나 봐요 사람은 너무 자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니까요 칸트는 애초에 믿기로 한 거죠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마치 제사장처럼 지리학자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

  • 드시코
  • 2026-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저도 스머프님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너무 죄송해서 글조차 못 쓰겠더라구요. 많이 뉘우쳤습니다. ㅠ.ㅠ

    • 2015-01-20 21:26:50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파란색스머프님의 아버님을 통해서 들었던 할아버지 이야기가 쓰였으면 좋겠네요. 저도 할머니를 잃는 기분을 경험해봐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할머니도 치매에 걸리셔서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는 걸 많이 힘들어 하셨죠. 다른 가족들도 그랬어요. 어쩌면 일상이 되어버린 엄마, 아빠 등의 가족들을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밀어내는 것 같아요. 여러 핑계나 변명을 대면서 말이죠. 누군가를 잃고 나서 그 소중함을 느낀다는 아이러니함. 이 글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은데, 좀 더 경험의 깊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요소를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2015-01-03 21:51:35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