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벽이 되지 않고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3-12-24
- 좋아요 1
- 댓글수 2
- 조회수 855
그대들은 원샷한솔이라는 크리에이터를 아는가? 혹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장애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원샷한솔은 시각장애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패성 장애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장애는 이제 비난 받고 공격 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역으로 사회에 장애인들이 잘 스며들 수 있는 좋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소수 사람들의 장애인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장애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과한 친절과 동정으로 장애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존재한다. 나 또한 지금 틱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인에 대한 시각에 대하여 서술해 보겠다.
{기침이 시작하기 전 내가 본 시각}
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장애를 가진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 나와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지적장애/자패성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친구들은 행동이 느리거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대다수의 반 친구들은 이 친구들과 놀기 꺼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까지는 장애를 가진 친구에 대한 틴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고 그냥 무시하거나 나처럼 동정으로 보며 그 친구들과 함께 했다. 하지만 문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어났다. 5학년 때 장애를 가진 친구는 약간 자패성 장애를 가진 친구였다. 친구들에게 "나랑 놀지 않을레?" "나랑 집에 같이 갈레?" "나 너 좋은데 너 나 좋아해?" 등과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잘 받아주며 함께 할리갈리도 하며 친해졌는데 다른 친구들은 아니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이 말에 짜증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희찬이와 00이는 도서관에 가서 15분 정도 지나서 오세요."라 말했다. 그래서 나와 00이는 도서관에 갔다. 나는 그 친구 책 고르는 것도 도와주고 함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속으로 00이 때문에 선생님이 친구들과 이야기 해야 해서 나와 00이를 도서관에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반 친구들은 00이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아마 나처럼 동정이라는 안경을 끼고 00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그 친구를 대하면 안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00이와 함께 도서관에 갈게 아니라 나도 교실에 남아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기침을 가지고 난 뒤 내가 본 시각}
초등학교 6학년 때 난 수원을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는 장애를 가진 친구를 보지 못했다. 물론 중학교에 와서도 특수 학급 친구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중2 2학기 때 난 기침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는 틱으로도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반 친구들은 내 기침에 대해서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버스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탈 때 벌어진다. 그 이유는 소수의 어르신들이 나에게 눈치를 주거나 "거기 학생 어디 아파? 사탕 줄 까?"등 부담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친절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 기침으로인해 나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럼으로 내가 지금까지 장애인 친구들을 대한 것 역시 옳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냐 내가 동정의 시각으로 그들을 보고 과한 친절을 해 그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과한 친절이 부담스러웠던 것 처럼 그들 역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역시 역지사지가 제일 좋은 약인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2023년 12월 22일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을 듣고}
2023년 12월 22일 나는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을 받았다. 이 때 지적 장애를 가지신 플룻 연주자 분께서 우리를 위해 4곡의 연주를 해 주셨다. 나는 다른 것 보다 이 2곡이 장애 인식 개선에 대하여 말 하는 것 같았다. 그 곡들은 바로 안예은의 문아의 꿈과 You raise me up 이다. 문어의 꿈의 가사중 "그래도 나는 매일 꿈을 꺼 이 곳은 참 우울해." 라는 가사를 통해 장애로 이 곡을 연주하기 쉽지 않았지만 계속 연주하고 멋진 플룻 앙상블이 될거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았다. 또한 You raise me up의 가사중 "나는 힘이 있어요. 일어날 힘이 "로 추정 되는 가사를 통해 장애가 비록 있지만 동정 없이 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았다. 난 이 곡을 동정의 안경을 쓰지 않고 감정에 기대어 들었는데 너무 좋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플룻 앙상블이 될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내가 동정이라는 안경을 벗어서 느낀게 아닐까?
{장애는 벽이 되지 않고}
많은 친구들이 이 강연을 들을 때 많이 떠들고 집중하지 않았다. 또한 후기로 "그냥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는 것 같아."라 평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장애가 불편한 것은 맞지만 그 것이 꼭 동정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장애인도 우리와 함께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이 강연은 충분한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이제 사회로 나가는 벽이 되지 않는다. 서로 배려하고 역지사지로 생각한다면 좀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작은 소망을 가진다.
추천 콘텐츠
글을 쓰는 모든 문우. 글티너 여러분들 모두 안녕한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요? 저는 2026년 3월 대학교에서 캠퍼스의 봄을 맞이하며 지금까지 글틴에 남겼던, 흔적들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특히 작년 수상집에 실었던 <시간 무빙워크>의 작가 노트를 <한여름을 베어물며>의 작가노트를 쓰기 위해 계속 바라봤답니다. 그런데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읽을 때마다 감정을 잡기가 힘들어지네요. 아마도, 위 소설의 일부가 제 삶의 이야기라 그런 거 같습니다. <한여름을 베어물며>는 제 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 고등학교 자퇴 이후 학교와 함께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아마도, 미련 때문이겠죠. 저는 기침 틱과 기관지염, 천식 등이 결합 된 기침이라는 문제로 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기침과 더불어 이명과 같은 고통이 찾아왔으니까요. 이런 ‘나’라는 한 사람과 같은 반 친구들을 위해 담임 선생님은 자퇴를 권유했고 저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인지라, 담임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 가는 마음과 함께 서운하고 미움의 감정도 함께 듭니다.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저 자체도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소복이 쌓여 왔고 결국 꿈으로 그 당시에 표출된 거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글에 녹아버린 감정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저 살아냈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지나온 날들을 이겨내 보겠다는 오기가 글을 씀으로 어느 정도는 감정이 품은 감정을 표출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작가 자신이 쓰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은 항상 '나'라는 사람을 담기에 저 역시 그런 감각을 매번 지니며 살아갑니다. 글을 통해서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한여름을 베어물며>를 쓰지 않고, 자퇴와 건강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짐작합니다. 한 발 짝 움직이는 오기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집에서 유튜브나 쇼츠 같은 것들로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자신이 담긴 글은 자신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계속 상처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마주할 때, 힘들고 벅차고 아프겠지요. 그런데도, 끝까지 글을 쓰는 ‘나’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발 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한 번 오기로 밀어붙여 보세요. 여러분에게 글틴은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힘든 일이 있거나, 살기 위해 쓴 단상들 혹은 문학들을 표출하고 알려주세요. 저 역시 글틴을 만나면서 저를 끝까지 붙들며 쓸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멘토님과 수많은 글틴 관계자, 글티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 번 손을 뻗어주세요. 형식적인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언제나 뒤에서 늘 응원하겠습니다. <작가 노트>로 진심을 적어 내릴 수 있게
- 송희찬
- 2026-04-29
19살이 되기 전까지 살아줘서 고마워. 살려줘서 고마워. 살아 내줄 나날이 고마워. 3월 27일이날 삼이 총 네 개가 존재한다. 3월의 3은 하나. 27일의 3은 셋 {3x3x3} 총 합해서 네 개. 나는 2008년 3월 27일 3과 4가 교차하는 날에 태어났다. 찡얼거리며 울부짖으며 내 존재를 세상으로 내밀며. 우량아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이날만 되면 나와 거리를 둔다. 찡얼거리는 내가 미워져서. 나에게 생일은 이런 날이다. 우리 가족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최근 명예 권사를 받은 친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그녀는 다른 미신은 믿지 않아도, 선풍기를 켜고 문 닫고 자면, 죽는다는 것과 사업하는 집안에서 생일날 미역국을 먹으면 사업 말아 먹는다는 미신만큼은 믿었다. 그래서다. 할아버지가 자영업으로 재작년까지 카센터를 운영하셨고, 아빠 역시 코로나19 이전까지는 사업이 나름 잘된 사업가 집안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날마다 쇠고기뭇국을 먹거나 아예 국을 먹지 않았다. 만약 할머니의 말에 반기를 들면 그녀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져 갔기에. 생일날 우리 가족은 축하하는 기분을 전체로 느끼기보다는 할머니의 굳은 주름살이 더 신경이 쓰여 결국 할머니가 하자는 대로 최대한 장단을 맞춰줬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어린 마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이루려고 했다. 특히 생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태어남이라는 포상감이 있었기에, 나를 태어나게 해주고 이루게 해준 모두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요구했다. 터닝메카드 장난감 이라던지, 신비아파트 장난감 같은 것을. 그리고 원하는 음식을 생일날에는 모두 요구했다. 그러고는 맛있게 행복한 표정으로 먹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합가했기 때문이다. 같이 살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내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기가 눌려 가정에 방관자였다. 한 가정에 삼 세대 이상이 살다 보니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다. 특히 하루에 대다수를 집에서 함께 지내는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갈등이 가장 많았다. 할머니의 생활 방식을 할머니가 나와 엄마 그리고 아빠에게 강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항상 그녀의 걱정을 들어야 했다. “나쁜 친구 가까이하면 안돼.” “어디 놀러 갔다가 사람들 죽었단다.”라는 식으로 놀이터 갈 때도 친구 집으로 과제를 하러 갈 때도 매번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할머니를 말리 거나 “어머니.”라는 단어로 상황을 정리시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자주 반복되어 나타났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보이지 않아도 할머니의 손에 있는 것, 같았고 숨이 조여왔다. 이가 계속 쌓이다가 가끔은 엄마의 화가 다스려지지 않고 폭발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우리 집안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내 방에 들어가 그를 안고 내 귀를 막으며 소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온몸을 떨며. 그 순간의 공기를 나에게서
- 송희찬
- 2026-03-31
2026 글틴 캠프가 끝나고, 1호선에 몸을 실었다. 원래라면, 서울역 동편에 있는 환승센터에서 판교 가는 버스를 타야 했지만, 나는 작년처럼 수원으로 향하는 1호선을 타 버렸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할머니가 있는 수원에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생은 혼자 나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개학 한 달 전 2월에는 할머니네에서 데려와야 했기에, 1월 30일 나는 그들에게 향해 갔다. 2026 글틴 캠프는 2025 글틴 캠프처럼 파주 지지향에서 했다. 책과 글틴. 때려고 해도 땔 수 없는 운명이라 너무 잘 어울리는 장소라고 작년에도 생각했었다. 그런 곳에 용기를 가지며 글을 쓰고, 본인의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하는 여러 명의 글티너. 그리고 위로를 전달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이 모든 것이, 2025년 1월 집결지인 서울역과 파주 지지향에서 느낀 관계들의 온기였다. 2025년 캠프에서는 활발하게 먼저 다가가 소통하는 글티너는 아니었다. 그저, 글틴 비공식 단톡방과 개인 메일로 몇몇 글티너와 이야기 나누고 소통했을 뿐. 그 이상과 그 이하의 것은, 채우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랬던 작년의 나는 캠프의 시작이었던, 서울역 집결에서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고 관계자 주변만 돌았다. 스크린으로만 봤던 사람들의 얼굴을 실제로 봤을 때의 어색함. 그 어색함이 나를 그해 1월 서울역 동편에서 돌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일부 사람들.“혹시 희찬님?”나지막하게 들려오고, 글틴에서 글로만 마주했던, 익숙한 이름들이 나를 알아봐 줬다. 그나자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까? 얼굴을 보이며 활동했던 게, 2024년도에 했던 글틴 리딩클럽. 패널도 아닌, 그냥 일반 참가자로 고선경 시인을 만나러 간 것, 뿐인데. 그러나, 23년도에 활동했던, 선배님들. 23년도부터 25년도 2월까지 멘토셨던, 그해 나와 같은 합평 조였던, 김태선 평론가님과의 대화가 이 순간을 이해시켰다.“작년에는 영상으로 보고, 올해는 이렇게 보내요.” 2024년도 1월에 했던, 글틴 캠프는 고등학교 예비 소집이 있어 가질 못했다. 그렇기에, 작년까지 있던 다작 상이자 특별상 개념인 장려상 수상소감을 영상으로 보내야 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힘든 시간을 마주하면서 꾸준히 써나가겠다는 의지만 보였던 것, 같은데. 이를 60초라는 시간에 꾹꾹 눌러 담아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감사하기도 했다. 25년도 합평 때, 김태선 멘토님 조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상. 비평이었다. 이때도 그렇고, 26년도에도 그렇고. 글틴 캠프에서 감상. 비평의 합평을 희망하는 글티너는 적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감상. 비평 멘토였던 김태선 평론가님은 수필과 함께 내 감상. 비평에 대하여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그러면서도 햄버거를 먹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즐겁고 피곤한 첫 글틴 캠프의 첫날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글틴 캠프는 작년도 올해도 밤이 진짜였다. 2025년도 글틴 캠프
- 송희찬
- 2026-02-0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희찬님, 장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계시네요. 맞아요, 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정이나 시혜의 시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중요하고요. 이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고 싶다면 김원영 작가님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작가님과 김초엽 작가님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좋겠어요.
@박서련 멘토님 안녕하세요~ 추천의 글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송희찬 님의 글을 여러 게시판에서 마주했었는데 이렇게 댓글을 직접 남기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쓰시는 글을 보면 항상 약자에 대해 고뇌하고 생각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고요! 작가의 소개? 말에 보면 살아갈 힘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쓰여 있는데, 정말 그 말 그대로를 실천하기 위해 글을 쓰고 계신 것 같아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자를 생각하는 작가는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다, 라고 언젠가 제가 알던 분이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송희찬 님 글을 보면 그 말이 떠오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는 글을 쓰시면 좋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카임님 안녕하세요. 따뜻한 댓글 고마워요.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작가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었는데 그 꿈에 가까워지다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리고 앞으로도 약자를 대변하고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쓰도록 노력해 볼게요. 카임님도 늘 건필하시길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