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의 서커스
- 작성자 이형규
- 작성일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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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 조회수 512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밤 산책을 좋아한다
무감각 환각 파티
우리는 기분이 좋다
사람을 담은 유리 구슬을 구경하고
사람이 없는 인도를 걷고
사람이 떠다니는 바다를 구경한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서 웃고
팝콘은 너무 무거워
콜라를 나눠 마셔야지
우리는 밤 거리를 걷는다
그곳에는 늘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있다
길을 걷던 사람이있고
길을 걷고
길을 걷다가
나한테 다가온다
푹신한 옷을 삐집고 나온 피가 흥건하고
여름의 서커스는 이렇게 끝이 나고
푹신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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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규
- 2025-11-02
열대야의 밤을 지나카드를 찍고 무인 편의점에 입장한다 온도가 습도가 적당하다 모두가 나를 반기는 것 같고나는 기꺼이 돈을 지불하기로 한다 가판대에는 손에 잡히는 물건들이 있고그것들은 대부분 나를 지나간 것들 누구도 나의 선택을 지지해주지 않는 곳 혼자 모든 고민을 해결해야할 때 주인을 모르는 카드가 바닥에 놓여있다 어제는 신라면에 핫바 하나를 먹었는데오늘은 사리곰탕을 먹어볼까약간의 사치를 부려 음료수도 하나 살까 키오스크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한다고민 끝에 영수증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편의점을 나오면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고밖은 습하고 덥고 에어컨이 없고 전자레인지가 없다 가볍게 왼쪽으로 기운 편의점 테이블 위에 오늘의 저녁이,한쪽으로 쏠린 마음이 있다 혼자 내 선택을 지지해 본다왠지 좋은 저녁이 될 것 같다 기울어진 테이블에 맞춰 몸을 기울인다 약간 비뚤어진 풍경에무인편의점이 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가판대가 있다 기울이면 전부 쏟아져야 하는데아무것도 쏟아지지 않는다 기울어진 상태의 테이블과 나 우리는 이인삼각을 한다무엇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스스로를 지지한다
- 이형규
- 2025-10-26
그날은 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비행이 끝나고 밀려오던 문자들 사이로 그날 내가 듣던 음악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사람이 죽었는데 피아노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왜 아직도 피아노를 치고 있죠? 드뷔시의 달빛과 몽상 끝없이 연주되는 선율 사이 가만히 앉아 승무원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으면 하루키의 감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네가 교실에 혼자 남아 피아노를 치는 걸 엿듣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방과 후에는 늘 조금 낮은 햇빛 조도가 낮은 교실의 기억들 기울어진 사물함에 메모장을 넣어두면서 사물함 속에 파묻혀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했던 순간들 처음 선생님이 방과 후에 나를 불렀을 때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피아노 소리가 눈을 감고 벽에 기대 균형을 맞춰본다 창문에 닿기를 좋아하는 비의 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타고 내려가는 빗방울들을 떠올린다 금방 어두워진 교실은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만을 내고 나는 다시 몸의 중심을 잡고 교무실을 향해 걸으며 그 순간을 사물함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승무원이 다가온다 나는 급하게 짐을 챙기고 밖의 온도를 가늠해본다 조금 추운 계절이 너에게 먼저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나는 창 밖의 풍경을 향하고남은 계절을 마저 정리하기로한다
- 이형규
- 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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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리윤입니다. <여름 밤의 서커스> 잘 읽었습니다. 가볍게 말을 거는 듯한 어투로 독자를 시 안으로 확 끌어들이는 도입부가 인상적이에요. 고백을 던지는 듯한 비밀스런 어조와는 달리 '밤 산책을 좋아한다'는 평이한 서술이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람을 담은 유리구슬'에서 '사림이 떠다니는 바다'로 이어지는 3연도 탁월해요. 덤덤한 어조로, 직접적인 설명 대신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제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푹신한 웃음'이라는, 촉감과 웃음을 결합한 이질적인 동시에 선명한 이미지로 긴 여운을 남기는 시의 결미도 참 좋았어요. 김행숙 시인의 <에코의 초상>,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응원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