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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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방이 있다
자그마한 아파트 1층에 딸린 한 방이다
2평 남짓한 곳에 침대 하나 들어갈 수가 없어
이불을 깔고 자야한다
물론 자기에는 충분히 넓다
알아보기 힘들게 패턴이 새겨진 회색 벽지와
옛 서양풍의 담백하게 짜인 흰 문과
희한하게 배란다로 가는 문이 있다
선풍기는 2대가 있다
에어컨이 없는 집이니 당연하다
한 선풍기는 밑동에 리모컨이 박스테이프로 대충 붙어있다
어지간히 찾는게 귀찮았던 모양이다
한 곳에는 내가 가져온 가방들과
어지러이 엉킨 충전기들과 케이블이 있다
그 뒤에는 그 구석 양쪽 벽면에 책장이 약간 거리를 띄운채 서있다
붙어있으면 한쪽의 책을 못꺼낼테니 말이다
둘 다 똑같이 프린트된 나무문양에 책들로 꽉 차있다
책들이 잔뜩 꽂힌 책장에 이미 여러 잡동사니가 곳곳에 올라가 있지만
여전히 어느 죽은 인간의 역사를 찾아보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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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참을 수 없이 웃기다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종합되는지를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은 인간이다
다른 쪽 벽면에는 또다른 인간의 옛 사진이 있다
멋지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피아노를 친다
보니 영창피아노다
피아노를 치는 그 인간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살아있기를 바랄뿐이다
죽은 인간이 앓는 소리를 낸다
산 사람들을 이십년간 괴롭혀온 소리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그 앓는 소리에 저 모든 책들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또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 죽은 인간은 방을 드나들며 내가 알지 못하는 눈빛으로 잠시 나를 바라본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진 속 인간을 다시 바라본다
빛이 바래서 오래됬다는 느낌말고는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다만 그녀가 그 사진속에서는 페달을 안 썻다는 것 뿐이다
나는 인간에게 취하는 법을 까먹은 것 같다
그들이 이제 내게 슬픔이 되거나 두려움이 되거나 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키스하려 잠에 든다
책장은 먼지가 슬게 놔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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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사
- 2025-07-09
어쩌겠어 찰랑이는 흑발만 보면 네 생각이 나 네 얼굴은 진작에 잊어버렸는데 말이야 멀찍이서 여자를 볼 때면 그저 네가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 질 않아 여전히 널 알아볼 순 있나 봐 전쟁 영화를 볼 때면 죽을 사람들만 연인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는데 나는 죽진 않을 건가 봐 네가 날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널 위해서 내가 이렇게 사랑 시까지 쓰다니 넌 그저 내가 사랑한 수많은 여자 중 하나일 뿐인데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야 넌 내 이상형이 아니야 그래도 어쩌겠어 네가 남친이 다섯이든 여섯이든 거리에서 널 맞닥뜨리길 기대하는 걸 네가 없다고 우울하거나 그러진 않아 괜찮다니까 다만 네가 가진 마약은 내가 아직 맛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그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이 그랬지 네가 어딘가에서 이미 몰래 죽어있길 바라 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면 이딴 시를 계속 쓸 것 같으니까 진정으로 네가 이미 몰래 죽어있길 바라 내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 기능사
- 2025-07-08
해발 5000미터에서도 사람은 산다 마터호른보다 높은 그 산중에서도 사람은 산다 대단하다는 나무들도 끊겨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은 눈과 나무 사이에서 산다 그 귀하다는 나뭇가지들에 진흙을 덧대어 만든 학교와 여러 채의 집이 있다 능선과 능선과 능선들 온통 황갈빛의 흙뿐이다 이곳에는 날카롭게 멋들어진 검은빛 돌들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도 히말라야는 히말라야다 시체들이 사는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돌파란 말이다 뒤뚱뒤뚱 걸어서 아이들은 야크 때를 몰러간다 티베트 쪽 사람들이라 말은 통할 리가 없었다 아무렴 좋다 한낮에도 공기가 미적지근히 차갑지만 해는 꾸벅꾸벅 저버린다 저 반짝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분명 위성일 것이다 홰에 불을 때워서 흔들어준다 사람 사는 곳 중에 우리가 위성에 제일 가깝다고 에베레스트와 마터호른 사이에도 사람은 산다고 말이다
- 기능사
- 202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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