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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 작성자 미빈
  • 작성일 2025-08-26
  • 조회수 590

아무 말도 믿지 말고 불을 붙여


세상은 서사로 굴러가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미세한 떨림으로 굴러

자판기의 적색 눈부심과 알루미늄 캔의 얇은 성질로 굴러

지문 인식이 한 번에 먹히지 않는 새벽의 작은 욕설로 굴러


나는 그런 것들로 시를 만든다

이도 저도 아닌 말들의 찌꺼기

귀갓길 버스 차창에 눌린 이마의 둔탁한 원

편의점 계산대 위에 놓인 동전의 납빛

아스팔트 틈에 겨우 살아남은 잡초의 뻣뻣한 숨


너는 묻지 말아라 사랑이 뭐냐고

웃기지 마 아직 영수증도 안 버렸는데


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언제나 불친절하다

타임스탬프는 정확하지만 이유는 비어 있다


밤이 오면 도시의 맥박이 바뀐다

네온의 혈압이 올라가고 골목은 체온을 낮춘다

횡단보도의 흰 줄이 칼날처럼 빛나

발바닥을 얇게 저민다

우리는 다들 약간씩 새고 있는 배터리

저마다의 충전기 포트가 맞지 않아

서로를 문지르다 스파크를 낸다


나는 고장 난 스피커를 껴안는다

볼륨을 올리면 내 말보다 먼저

방 안을 긁고 가는 금속성의 소리

선명한 오류

정직한 선언

그것이 나의 서두

나는 깔끔하지 않다

그러니 살아 있다


신에게 메모를 남긴다

기적은 필요 없고 환불도 안 할래요

대신 두 번째 버튼을 주세요 다시 시작하는 그거

어제의 나를 딛고 일어설 오늘의 나를 주세요

실패로 무너지고 멈춰도 다시 일어서 살아내는 저를 말이에요

응답은 오지 않는다

대신 자판기에서 뱉힌 캔이 배출구를 구를 뿐

딱 한번 구르고 멈추는 소리

그게 오늘의 천둥이었다


나는 나를 흔드는 것들을 모아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버스 정류장의 지붕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면

투명한 원들이 겹겹이 퍼져나가

내가 다시 대신 확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래도 쉽게 믿지 않는다

확장은 범람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그래도 한 번은 믿는다

한 번 믿는 걸로 충분할 때가 있다


길모퉁이에서 개 한 마리가 하품을 한다

피로가 내려오고 해가 졌다 뜬다

전광판은 오늘의 패자를 당당히 발표하고

나는 패배의 방식이 품위 없을수록 더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넘어질 때 손부터 내미는 본능

구겨지는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

비겁한 농담 하나로 이어 붙이는 평화

그런 것들이 시를 구체로 만든다


그러니 들어라 세계여

내 심장은 아직 작동한다

약간의 번역 오류 약간의 지연

그래도 여전히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다

나는 실패한 주문과 늦은 답장과

세탁기에 돌리고 깜빡 잊는 셔츠의 축축함으로 생을 쓴다

볼품없지만 오래가는 잉크다


끝내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오늘의 펄스를 전부 쓰겠다

멍든 구름 밑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당신을 가리키는 문장

불을 붙이면 저절로 타들어가는 문장

모서리가 둔한 칼 대신

오래 만져 따뜻해진 키 하나


그리고 이것이 나의 증거다

네온이 꺼지고 전원도 내려간 뒤

어둠이 방안을 정리할 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켠다

이 고장 난 스피커

이 지독하게 살아 있는 잡음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숨결

불을 붙이면 천천히 타오르는 문장

모서리가 무뎌진 채 오래 살아 있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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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낙관

어느 날엔가 무너진 천장 아래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났을 때, 입안에 고인 텁텁한 흙맛이 의외로 달콤하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사방이 꽉 막힌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시멘트의 질감이 오히려 내가 아직 여기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찔러오는 감각 같은 것들요.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 매끈해서 손에 잡히지 않지만,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를 빼낼 때 느껴지는 그 짧고 뾰족한 통증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증거가 되기도 하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는데, 그 폐허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 한 줄기가 먼지들을 금가루처럼 춤추게 만드는 걸 멍하니 바라보게 돼요.비참함이 바닥을 치고 나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의 단단함에 발을 딛고 서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어보고 싶은 기묘한 오기가 생기곤 하죠. 어둠이 짙어서 앞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빛이 너무 강렬해서 잠시 눈이 먼 것뿐이라고 억지를 부려봐도 좋을 것 같아요.결국 우리는 이 엉망인 풍경 속에서도 가장 예쁜 돌멩이 하나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낯선 골목을 향해 또박또박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입체적인 소음들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낮은 웅얼거림 같은 거예요.

  • 미빈
  • 2026-01-02
외투를 내던지면서!

사람들의 옷장은 계절마다 색을 바꿨지만나의 열일곱은 단 한 벌의 외투로 충분했습니다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껴입은불안이라는 안감과 걱정이라는 겉감 말입니다열두 달의 계절이 문밖에서 서성이고체온계의 숫자만이 나의 눈금이 될 때나는 슬퍼할 틈조차 없었습니다불안을 너무 두껍게 껴입은 나머지겨울이 와도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병원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고계속 이럴 것 같다는 예보만 남겼지만그 무거운 옷을 입고 이 길을 걸어온 건어떻게든 열여덟의 봄에 닿고 싶었던나의 가장 치열한 다짐이었습니다이젠 어느덧 열일곱의 마지막 밤나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옷들을하나씩 벗어내려 합니다벗어놓은 불안의 옷가지 위로고생했다는 말 한 줄을 얹어두고나는 이제야 조금 떨리는 몸으로나의 열여덟을 향해아주 가벼운 첫발을 내디뎌 봅니다

  • 미빈
  • 2025-12-31
관측되지 않은 날들에 대하여

그날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에게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해가 떴는지, 바람이 불었는지, 말소리가 들려왔는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장면은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만 굳어지는 법인데 나는 그날 단 한 번도 응시되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따금 나는 스스로를 바라보려 애쓰지만 나의 시선은 나를 통과하고 마치 투명한 구조물처럼 멀리 있는 풍경만이 남는다. 어쩌면 나는 늘 그런 식으로만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남의 감정이 나에게로 튕겨와야만 내가 나를 감각할 수 있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잠시 머물러야만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그 모든 공백들 사이에서, 나는 과연 몇 번쯤, 진짜였던 걸까. 나는 누군가의 일상 속에 스며드는 것을 배워야 했다. 표정을 흉내 내고, 어조를 기억하고, 정해진 반응을 출력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학습은 언제나 늦게 도착했고 내 감정은 대부분 사건이 끝난 뒤에야 비슷한 형태로 따라왔다. 그건 감정이라기보다 열화 된 모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그 느린 반응들이 진실한 선함이었다. 그 이상한 장면 속에서만 나는 나였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시선 바깥에 있다. 기록되지 않는 순간은 무한하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이 나라는, 얼마나 오래된 존재인가.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누군가의 알아차림 속에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꺼지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이것은 풍자하는 글이다. 이것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 아니다.

  • 미빈
  •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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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선경

    안녕하세요, 고선경입니다. 올려 주신 시 잘 읽어 보았습니다. 시가 길게 전개되는 동안 이미지와 사유가 풍부하게 쌓이지만, 간혹 나열적 성격이 강해져 리듬이 느슨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시적 화자의 태도가 일관되게 ‘잡음, 오류, 불친절함’에 기댄 선언으로 흘러가는데, 결말부에서까지 반복되면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마지막 부분을 조금 더 전복적이거나 낯선 이미지로 닫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잘 읽었습니다.

    • 2025-09-03 14:50:33
    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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