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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에서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5-11-16
  • 조회수 504

우중충한 여름의 숲 장마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나무의 검은 줄기 축축한 뿌리 흙의 잿빛 냄새 이 모든 것을 강은 한 겹 덮고 있다 우리가 강가 주변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춤을 추고 또 어제 저녁에 먹은 아침을 모조리 토해낼 때 수풀은 무성하게 자라난다 갑자기 어디선가 물새 한 마리가 날아온다 물새가 날아와서 물 위를 사뿐하게 밟고 튀어오르고 건너간다 플라스틱 페트병과 검은 수초가 자란 부표 위에 가는 다리를 얹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숨을 고른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강가를 달려간다 햇볕을 받아 따스하게 달구어진 돌 위로 돌의 곡선을 흉내내며 팔다리를 뻗는다 여름의 숲은 습하고 어둡지만 물안개가 나를 쓰다듬을 때 무릎에선 상처받은 생장점이 새로 자라난다 딱딱하고 볼록하게 돋아난 생장점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태양을 찢고 다가오는 햇빛이 안착하는 순간들을 집중해서 눈에 담아낸다 엄마가 언니와 나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아무 시간도 공간도 방해하지 않는 듯한 문명의 바깥, 그곳에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 마침내 흙을 파내고 솟아난 태초의 인간들처럼 마음껏 춤을 추고 먹고 마시는 우리들 우리가 한낮의 어딘가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꿈을 꾼다 꿈의 저편에서 이미 싱그러운 웃음을 띤 언니들이 나를 반긴다 언니들은 내 눈 옆을 두 손으로 닦아주고 벌거벗은 나에게 기꺼이 옷을 입힌다 더위가 한층 강해진다


강에서는 거품이 난다 악취가 난다 하지만 숲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점점 거대해진다

계속해서 새로운 물이 흘러나온다 강바닥을 온통 적신다 그럴수록 언니들은 손을 강하게 맞잡는다

우리가 마음껏 기다리는 낮잠 속에서 언니들은 땀 흘리지 않는다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맑은


강의 표면을 한 겹 들고 펄럭이면 그 아래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숨을 내쉬자


뿌리가 자란다


여름은 점점 강해진다

절대로 어느 것도 약속하지 않았던 지난 세월들

언니들은 모든 시간의 고리에 손을 걸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어지도록


장마가

이 우림을 관통하려 한다 소중하고 희미한 풍경들을 데려가려는 듯이 숲은 점점 거대해진다 여름은 점점 강해진다 강은 점점 불어난다 모든 저녁이 잉태되고 새로운 밤이 자라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겪어본 가지가 바닥에 떨어져 폭발적인 힘으로 뻗어나가듯 아무 풍경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울하게 가라앉는 가슴들 숨을 쉴 때마다 한 장씩 겹쳐진다 우리가 꾼 모든 꿈이 찰나의 환상처럼 달아올라 팔목에 회색 흉터를 남긴다


언니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붉은 북을 길고 강하게 내려치는 것처럼 뜨겁게

고동치는 물새의 심장을 삼킨 것처럼 누군가

바람을 향해 온몸을 부여잡고 소리칠 때에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을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순간 말린다


불길이 번진다 숲이 불타오른다 숲이 숲에서 뜯겨나간다 언니들은 강과 돌에 불을 붙인다

어느 것도 안전하지 않다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오래된 낮을 꾼다



엄마와 언니와 내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천 년이나 된 거대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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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얇고 깊은 물줄기그 아래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 언니들언니들을 생각할 때면 곧잘비장해지곤 하는 내 입술단단하게 부풀어오르는 나의 마음괜찮아요 죽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하는 언니들의 품 안에서나는 행방불명된 신원미상자...어느 전봇대에 걸려 있을지 몰라그렇지만 눈에 거슬리는 곤충들의 몸통을지긋이 밟아버리고 싶어지는 이유나의 언니들, 생각하면힘을 주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어 문구점에서 도둑으로 몰린 아이처럼입안에선 방부제 친 색깔 사탕언니들은 고요한 유속의 물 아래서마치 백 년 동안 썩지 않을 것처럼 아름답지 폭풍 소리와 함께 축축한 전봇대문구점의 뽑기 기계, 그 길을 마구 뛰쳐나와 춤을 추는 내 몸짓머리 위로 쏟아졌다가 내려간다 나의 고개도 함께 그렇지만 한쪽 팔은 치켜세워야 해 그것을 반복하며 겁이 없는 스텝커다란 힘으로 쾅쾅 내려찍지 그 아래에서단단하게 부푼 몸통을 숨기려는 두 사람비는 그쳤는데 발 아래엔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지렁이나뭇가지로 건드리다 언니 생각에죽지 마, 죽지 마, 멀리 멀리 도망친다혀끝으로 색깔 사탕 와드드득 무너진다

  • 방백
  • 2026-01-13
겨울

부러워.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우리는 어색한 사이었지만 특별히 인사랄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함께 걸었다 주머니 속엔 둥근 형태의 무선 이어폰이 만져졌다 음악을 듣진 않았다 정류장엔 밝고 환한 빛이 켜져 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먼저 왔다 나는 그 애를 지나치면서 뒤돌아 손이라도 흔들까 고민했는데,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버스도 제때 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애가 부럽다고 말하면서엉엉 울었기 때문이었다*한밤에는 뭐라도 써야겠다는혹은 대단한 걸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그럴 때 책상 앞에 앉아 몇 달 동안 세 장을 넘기지 못한 일기장이라도 펼쳐 놓고 볼펜을 굴리고 있으면문득 내가 지금 쓰는 말이 어디선가 본 장면을 그대로 옮기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데그 익숙한 장면을 찾기 위해서지난주 들렀던 독립 영화관을 다시 방문했다도보로 삼십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주일을봤던 영화보고 또 봤지만일기장에 적었던 감상과 비슷한 분위긴 하나도 없었다재작년 가을에는 엄마가 돌아가셨다집이 꽤 힘들었다 마음뿐 아니라 재정적인 면에서도많이는 아니지만 근근히 살아가는 하루에 엄마가 일해서 버는 돈은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갑자기 알바를 구하고, 휴학을 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본가에 내려오라던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눈이 내릴 듯한골목을 지친 걸음으로 지나가다 그 앞에서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시선이 마주쳤을 때 깨달았다 내가 찾았던 장면, 머릿속 희미하게 울리다가 아무도 모르는 첫눈처럼사라지는 기억부러워.나도 모르게 중얼거려 보았다 그 애가 예전에버스 정류장에서 그랬던 것처럼부러워 부러워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 말이 계속 나왔다. 친구는 멈춰 서서 날 봤다. 이상했다.

  • 방백
  • 2026-01-01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우주 횡단 열차

1.이 우주는 내가 떠나온 바다처럼 넓다만약 과거에 바다를 모두 정복하려던 배가여태까지 살아있었다면이 열차는 그 배의 환상일 것이다우주 횡단 열차내가 우주 횡단 열차를 타고 우주를 건넌다ㅡ우주 횡단 열차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좌석에서 움직이지 말 것 오래된사막을 가로지르는 갓 태어난 유성우를어둠 속에서 오랫동안바라보는 골짜기처럼 깊어질 것나는 긴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리며긴 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언니들은내게 마법 같은저주를 거는데나는 우주 아버지가 내게 준마음들을 끌어안고 놓지 못하고 있다오랫동안 불타올랐다가식으면서 겉면에오묘한 광택이 나는 이것을 창밖으로 던질 수 있을까, 나는 점점 깊어진다언니, 언니꿈속에서 언니들은 머리칼을 자른다, 이제, 언니에겐 전부일텐데 아름다움을그것들을 모두 잘라 거친 파도 속에 휩쓸린다 머리칼은 갈갈이 찢겨 버린다 눈부신 거품과 함께 나타난 결전의 칼 그렇지만 언니가 쥐여준 칼을 나는 휘두를 수가 없다,아, 언니들은 간절하게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준다언니, 언니어떡해요 이곳에서 나는 항의할 수가 없어요차가운 궁전에서 나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어요나는 젊어요, 아름다워요, 사랑스러워요내겐 순결, 순수, 사랑만이 남았어요 언니 나를 용서하세요! 제가 어떻게살아갈 수 있겠어요?*그렇다 나는 그의 심장을 찌를 수 없는 팔을 가졌다 몇 번이고 허공에 헛손질만 한다 한 번도 칼을휘둘러 본 적 없었기에 이가느다란 팔이 미워 머리를 쥐어뜯고 우는데 기묘한 밤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간절히 비는 내게 새벽은 종말처럼 밝아오고 방 안으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뺨 위에서 최후의 칼날처럼 미끄러지는데늙고, 추하고, 번쩍이는 꼬리를 가진 자유로운 언니들 나를 본다거품처럼 불타오른 나를 보며 눈물로천 년 동안 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꿈!나는 꿈에서 깨어난다*1.내 머리칼이 길어져 열차의 바닥에 천천히 깔린다그 바닥에서 모든 여자들이 태어나 창밖으로 떨어지는데매일 같은 꿈을 꾸는 영상이 딱딱한 마음 속에서 반복 재생우주 아버지는영혼이 된 나를 횡단 열차 좌석에 앉히고천 년 동안 길어지는 머리칼에 순결순수사랑 사랑 사랑을 엮으신다

  • 방백
  • 202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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