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짐
- 작성자 현재이
- 작성일 2026-09-03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34
우린 훤히 들여다 보이는 정글짐 속에 앉아
고백한다
내 손목시계는 사실 약이 다 되었어
엄지로 가죽 밴드를 쓸면
벗겨진 하얀 가죽 아래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네가 끼고 있는 야광 팔찌는 이제
손깍지를 모으고 들여다보아도
빛나지 않고
비즈 속으로 투명한 낚싯줄이 비쳐 보인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개미들은 우레탄 타일 사이를 기어가고
눌린 종아리 아래로 찢어 돌돌 뭉친
휴지 조각들이 쌓여간다
그 너머 아빠다리를 한 네 양쪽 주머니가 볼록한것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보여줄 것이 있어
주머니를 뒤적이던 너는
깊이 넣어두었던 것을 떨어뜨린다
플라스틱 볼 속 하얀 기름 위로 떠 있는
북극곰
함께 담겨있는 투명한 물을 흔들어보아도
결코 둘은 섞이지 않는
수학여행을 다녀온 언니가 내게 주었던 키링
초록색과 자주색
우레탄 타일 사이로 떨어진 그것을 너는
서둘러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다시 볼록해진 너의 허벅지 위
붙어있는 도깨비 풀이 그제야 보인다
네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있어도
상관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들면
사방으로 뻗어 얽혀가는 정글짐
어지러웠다
추천 콘텐츠
뽀얀 수증기를 걷어내며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작은 타일 조각들로 그려진 인어공주를 만날 수 있었다슬어있는 곰팡이를 피해오돌토돌한 타일을 손톱으로 긁으면타닥타닥하는 소리이건 모자이크 기법이야알고 있었지만 아 그렇구나 무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안경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흐리게 메아리치는 네 목소리를 잘 따랐었지누가 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을까팔로 다리를 꼭 끌어안고한쪽 손으론 코를 움켜쥐고 잠수물에 잠겨 들면 물안경을 쓰고도 왠지 눈을 꼭 감게 돼참고 있다가 뱉은 물방울은 커다랗고엉덩이는 바닥에 닿았다가도 다시둥글게 떠오른다팔과 다리는 여전히 물속에 잠겨가라앉은 네 쪽으로 버둥거려도물 밖으로 오른 등은 내려올 생각을 않네바위처럼 눈을 꼭 감고 잇는 네 주위로는자그만 기포들이 꿈틀거리고 있어이제 내가 쥐고 있는 숨은 얼마 남지 않았고잡아당기지 마세요부탁해 봐도 말들은 공기 방울이 되어 터져버리곤물 밖으로 올라간 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등판에 맺힌 물방울이 서서히 말라가며서늘해질 때폭발하듯 네 얼굴에서터져 나오는 공기 방울들그때도 네가 눈을 감고 있었는진잘 보이지 않았어네가 아빠 다리를 막 풀려고 하는순간 고개를 획 들쳐 올려 맡았던 바깥공기텁텁한 락스 향이 수증기에 섞여 코안으로 막 헤엄쳐들어올 때작게 공기 방울 터지는 소리축축한 코로 들이마셨던 그 공기에 담겨있던 건무슨 말이었는지누가 얼굴을 안 보고도 더 오래 견딜수 있을까그날은 네가 이겼지만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경기에서 중요한 건목욕탕 아래 희뿌연 수영장후덥지근한 공기에 지워지던 것이땀인지 우리의 웃음이었는지야
- 현재이
- 2026-03-09
두 팔 달린 고철 덩어리를 타고너는 떠났다새로운 사명을 받았다며히어로는 끝난 세계에서 캐리어를 꾸려야한다고두 시간 뒤의 미래로 먼저 가 있겠다고 했다거꾸로 선 남반구의 땅에선아래로 매달린 별자리를 나보다 먼저 외울수 있다며소매 끝으로 내 뺨을 훔쳤지별자리 따위가 중요하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너에게숨겨진 빌런이 되어주고 싶진 않았으니닫히는 스크린도어 너머로 손 흔들어주었다너는 모래로 쌓은 눈사람에 선글라스를 씌워주며내가 없는 영화의 크레딧을 읽어주었지두 시간 뒤 우리는 어떤 장면에 머물고 있었기에너는 과거형으로 쓰인 자막을 아직 현재형으로 고쳐읽는 나를 두고 떠난거야?사건보다 더 길게 이어지는후일담은 늘빈 팝콘통과 관객이 남은 영화관에서 시작된다
- 현재이
- 2025-12-15
강은 쓰이지 못한 색들이 칠해지는 팔레트여서 밤이 되면 더 많은 빛들이 눌어붙곤했다 어둠이 걷고 있는 산책로는 리넨 캔버스처럼 가로등 불빛으로 듬성듬성 박음질 되어 있었고 물결은 여러 번 덧칠한 임파스토 결처럼 표면 위로 투터운 표정을 숨겼다 주름지는 물결은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굳어버린 어느 화가의 지문을 닮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 어떤 시간대의 풍경인지 알 수 있었다 복층으로 포개어진 하늘 아래서 나는 낮보다 밤의 물결에 더 많은 색이 칠해지는 이유를 혼자 알고 옅어진 색들이 서로를 통과하는 시간대면 물감을 쌓아 올린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강을 따라 걸었다 그 위에 어떤 색을 덧칠할지 고민하며 어둠과 손을 맞잡고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면 강을 깊이를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는 게 어쩐지 마음에 들었고 물살이 일 때마다 캔버스에서 지워낸 흔적들이 강의 바닥에서 살아나는 것 같아 중얼거렸다 물결에 덧씌워지는 글레이즈는 바닥을 다 덮지 못하고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이 곳이 어디쯤의 붓 자국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이 길의 테두리도 강의 깊이도 전부 윤곽 없이 그어진 연필선 같아서 그 지문 같은 물결이 어떤 색을 가리키는지 들어보기 위해 나는 수영 금지 푯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금지의 언어 너머에 있는 미완의 색을 알고 싶어서
- 현재이
- 2025-12-12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