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 작성자 서벽
- 작성일 2026-09-03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52
네가 준 책 속의 여름에는 눈이 왔다 그것도 아주 깊은 폭설이 구름 없는 햇살을 꿰뚫고도 녹아내렸다 쌉싸름한 눈덩이가 이리저리 구르고 또 점점이 쏟아져내리는 그 골목길에서 주인공은 숨을 거두었다 기대어 선 채
어디서?
어깨를 맴돌던 너는 불쑥 묻는다
새초롬한 목소리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글쎄 마지막 장이었으니까 넘겨도 백지뿐이었고
네가 준 책 속의 그는 무기력한 삶을 보냈다 온종일 초침이 부서진 시계를 바라보면서 내딛지 않으면 아무도 달라지지 못하는 줄로 알고 그렇게 바보같이
왜?
아까보다 들뜬 목소리로
어느덧 무형의 손을 감싼 채 너는
여름 향기 사이로 싸늘한 염원이 밀려오고
그러게 네가 말해줄래? 바꿀 수는 없지만
고개를 내저을 것만 같던 너는
어느새 사라져 있고
손안에 쥔 책더미
이미 한참 전에 읽고야 말았던
그런 백지뿐인 이야기
텅 빈 창 밖으로 보이지 않는 눈더미가 기울어진다
분명 누군가에게 기대어있던 것도 같은데
실은 알고 있었어
주인공이 웃고야 말았다는 것도
여름이라고 말하면 여름인 줄로만 알았다는 것도
추천 콘텐츠
필연적이야 죄다뻐끔거리는 입술 어항 아래를 선회하는 말과 말들이 왜곡된 얼굴을 스쳤어 닿은 적 없는 기억이 눈동자를 파고들어서 문득 눈을 감았어 아주 거세게 아무것도 들어찰 수 없도록 일그러진 속눈썹 그러나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고 흑빛 잔광 아지랑이가 세상을 메우는 날처럼 비어버린 행성 물고기와 외계인은 무엇이 다를까 어금니가 자라나기를 바랐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처음부터 수면 아래를 통과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고 채울 수 있을까 감히 텅 빈 세상을 실은 비울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이미 죽은 세상에외계인을 집어넣고 싶었어바라보는 게 아니라 불신으로 가득하게 왜곡되고도 비관적으로 서로와 서로를 밀어내는 부력 속에 갇혀 최초의 연을 끌어내리며가라앉고 싶었어 필연적으로
- 서벽
- 2026-09-07
몰아치는 진눈깨비를 맞는 건 네가 아닌 나고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기관차 선로 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내리는 사람은 없고 오직 타오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대합실부터 이어진 줄 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객차 안을 메운 석탄의 냄새 아무리 맡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데 다만 그런 소문뿐이라서 입을 열면 낯선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어 다물어도 사라지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타고 넘는 그림자 보폭 하나 없이 창 밖을 가득 메운 성에 그 안에 새겨진 비밀 메시지 그러나 한숨을 내뱉으면 단번에 잃어버리고야 마는 눈물을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고 했어 종착역이 아니라 꿈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유한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나 잊어버리는 건 네가 아니라 나고 달그락거리며 맞물리는 증기기관 희뿌연 연기는 이윽고 멈춰 서고 다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죽지 않는 이들이 모이면 영원이 만들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객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선로 위를 막아서는 무언가몰아치고 있어 기어코 누군가를 끌어내리고야 말먹구름이?아니 네가 네 전부가종말은 늘 화창한 날에 함께 하고는 했는데
- 서벽
- 2026-09-06
구심점을 잃은 사람거리를 나서면 물기 어린 목소리가 질질 들러붙어어깨 밑을 스치는 웅얼거림빛의 이름을 알고 있어그러나 결코 닿지 못할 곳도지구 끝을 향하는 새 떼와이따금 전깃줄에 걸려버린 비참함끄덕거리는 고개를 들면고동 같은 이명이 나를 파헤친다점점이기울어져 내리는과거를 울리는 웃음소리어쩌면 정말로 새가 되었을지도 모르지그러나 쏘아진 것을 주워 담는 건용서받지 못할 일이고내딛는다는 건 결국 일종의 끌어내림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로별똥별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단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이름을 담아잊히는 영혼길가에 보폭 없는 그림자를 지우는 사람이 있어투명한 이름을 따라 거니는 단 한 사람감히 빛이 가지 못할 곳을 쫓는 섬망과 환각들이 있어
- 서벽
- 2026-09-0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