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서의 발걸음
- 작성자 미빈
- 작성일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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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 조회수 930
지나가는 나날들이
마치 끝없는 미로 같다
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점점 더 길을 잃는다
어느 곳이 맞을까
고민하며 발을 뗐지만
이번에도 막힌 듯해서
그만 울어 버렸다
어쩌면 모두가 끝없는 미로에서
방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로에 갇히기 싫어서
울며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날 믿어보기로 했다
이 길이 맞을까 걱정하면서도
여태 잘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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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엔가 무너진 천장 아래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났을 때, 입안에 고인 텁텁한 흙맛이 의외로 달콤하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사방이 꽉 막힌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시멘트의 질감이 오히려 내가 아직 여기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찔러오는 감각 같은 것들요.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 매끈해서 손에 잡히지 않지만,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를 빼낼 때 느껴지는 그 짧고 뾰족한 통증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증거가 되기도 하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는데, 그 폐허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 한 줄기가 먼지들을 금가루처럼 춤추게 만드는 걸 멍하니 바라보게 돼요.비참함이 바닥을 치고 나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의 단단함에 발을 딛고 서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어보고 싶은 기묘한 오기가 생기곤 하죠. 어둠이 짙어서 앞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빛이 너무 강렬해서 잠시 눈이 먼 것뿐이라고 억지를 부려봐도 좋을 것 같아요.결국 우리는 이 엉망인 풍경 속에서도 가장 예쁜 돌멩이 하나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낯선 골목을 향해 또박또박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입체적인 소음들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낮은 웅얼거림 같은 거예요.
- 미빈
- 2026-01-02
사람들의 옷장은 계절마다 색을 바꿨지만나의 열일곱은 단 한 벌의 외투로 충분했습니다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껴입은불안이라는 안감과 걱정이라는 겉감 말입니다열두 달의 계절이 문밖에서 서성이고체온계의 숫자만이 나의 눈금이 될 때나는 슬퍼할 틈조차 없었습니다불안을 너무 두껍게 껴입은 나머지겨울이 와도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병원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고계속 이럴 것 같다는 예보만 남겼지만그 무거운 옷을 입고 이 길을 걸어온 건어떻게든 열여덟의 봄에 닿고 싶었던나의 가장 치열한 다짐이었습니다이젠 어느덧 열일곱의 마지막 밤나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옷들을하나씩 벗어내려 합니다벗어놓은 불안의 옷가지 위로고생했다는 말 한 줄을 얹어두고나는 이제야 조금 떨리는 몸으로나의 열여덟을 향해아주 가벼운 첫발을 내디뎌 봅니다
- 미빈
- 2025-12-31
아무 말도 믿지 말고 불을 붙여세상은 서사로 굴러가지 않아엘리베이터의 미세한 떨림으로 굴러자판기의 적색 눈부심과 알루미늄 캔의 얇은 성질로 굴러지문 인식이 한 번에 먹히지 않는 새벽의 작은 욕설로 굴러나는 그런 것들로 시를 만든다이도 저도 아닌 말들의 찌꺼기귀갓길 버스 차창에 눌린 이마의 둔탁한 원편의점 계산대 위에 놓인 동전의 납빛아스팔트 틈에 겨우 살아남은 잡초의 뻣뻣한 숨너는 묻지 말아라 사랑이 뭐냐고웃기지 마 아직 영수증도 안 버렸는데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언제나 불친절하다타임스탬프는 정확하지만 이유는 비어 있다밤이 오면 도시의 맥박이 바뀐다네온의 혈압이 올라가고 골목은 체온을 낮춘다횡단보도의 흰 줄이 칼날처럼 빛나발바닥을 얇게 저민다우리는 다들 약간씩 새고 있는 배터리저마다의 충전기 포트가 맞지 않아서로를 문지르다 스파크를 낸다나는 고장 난 스피커를 껴안는다볼륨을 올리면 내 말보다 먼저방 안을 긁고 가는 금속성의 소리선명한 오류정직한 선언그것이 나의 서두나는 깔끔하지 않다그러니 살아 있다신에게 메모를 남긴다기적은 필요 없고 환불도 안 할래요대신 두 번째 버튼을 주세요 다시 시작하는 그거어제의 나를 딛고 일어설 오늘의 나를 주세요실패로 무너지고 멈춰도 다시 일어서 살아내는 저를 말이에요응답은 오지 않는다대신 자판기에서 뱉힌 캔이 배출구를 구를 뿐딱 한번 구르고 멈추는 소리그게 오늘의 천둥이었다나는 나를 흔드는 것들을 모아주머니에 넣고 걷는다버스 정류장의 지붕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면투명한 원들이 겹겹이 퍼져나가내가 다시 대신 확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가 있다그래도 쉽게 믿지 않는다확장은 범람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그래도 한 번은 믿는다한 번 믿는 걸로 충분할 때가 있다길모퉁이에서 개 한 마리가 하품을 한다피로가 내려오고 해가 졌다 뜬다전광판은 오늘의 패자를 당당히 발표하고나는 패배의 방식이 품위 없을수록 더 인간답다고 생각한다넘어질 때 손부터 내미는 본능구겨지는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비겁한 농담 하나로 이어 붙이는 평화그런 것들이 시를 구체로 만든다그러니 들어라 세계여내 심장은 아직 작동한다약간의 번역 오류 약간의 지연그래도 여전히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다나는 실패한 주문과 늦은 답장과세탁기에 돌리고 깜빡 잊는 셔츠의 축축함으로 생을 쓴다볼품없지만 오래가는 잉크다끝내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나는 오늘의 펄스를 전부 쓰겠다멍든 구름 밑에서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당신을 가리키는 문장불을 붙이면 저절로 타들어가는 문장모서리가 둔한 칼 대신오래 만져 따뜻해진 키 하나그리고 이것이 나의 증거다네온이 꺼지고 전원도 내려간 뒤어둠이 방안을 정리할 때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켠다이 고장 난 스피커이 지독하게 살아 있는 잡음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숨결불을 붙이면 천천히 타오르는 문장모서리가 무뎌진 채 오래 살아 있는 지금
- 미빈
- 202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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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미빈 님의 <미로에서의 발걸음> 잘 읽었습니다. 미로에서 방황하는 화자의 심정이 잘 느껴지네요. 다만 지금 시는 다소 짧고 도식적인 구성으로 느껴져서, 언어의 다채로운 사용을 염두에 두고 시를 써보아도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
@김선오 조언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하는 수많은 선택과 갈등을 미로의 갈림길로 비유해 봤어요. 다음부턴 언어의 다채로운 사용을 생각하며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