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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에서의 발걸음

  • 작성자 미빈
  • 작성일 2023-12-16
  • 조회수 1,041

지나가는 나날들이

마치 끝없는 미로 같다

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점점 더 길을 잃는다


어느 곳이 맞을까

고민하며 발을 뗐지만

이번에도 막힌 듯해서

그만 울어 버렸다


어쩌면 모두가 끝없는 미로에서

방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로에 갇히기 싫어서

울며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날 믿어보기로 했다

이 길이 맞을까 걱정하면서도

여태 잘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할 거니까

추천 콘텐츠

지금(퇴고)

너는 그렇게 말했지아무 말도 믿지 말고 불을 붙여세상은 서사로 굴러가지 않아엘리베이터의 미세한 떨림으로 굴러자판기의 적색 눈부심과 알루미늄 캔의 얇은 성질로 굴러지문 인식이 한 번에 먹히지 않는 새벽의 작은 욕설로 굴러내게 묻지 마 사랑이 뭐냐고웃기지 마 아직 영수증도 안 버렸는데하하하!나는 그런 것들로 시를 만든다이도 저도 아닌 말들의 찌꺼기귀갓길 버스 차창에 눌린 이마의 둔탁한 원편의점 계산대 위에 놓인 동전의 납빛아스팔트 틈에 겨우 살아남은 잡초의 뻣뻣한 숨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언제나 불친절하다타임스탬프는 정확하지만 이유는 비어 있다밤이 오면 도시의 맥박이 바뀐다네온의 혈압이 올라가고 골목은 체온을 낮춘다횡단보도의 흰 줄이 칼날처럼 빛나발바닥을 얇게 저민다우리는 다들 약간씩 새고 있는 배터리저마다의 충전기 포트가 맞지 않아서로를 문지르다 스파크를 낸다나는 고장 난 스피커를 껴안는다볼륨을 올리면 내 말보다 먼저방 안을 긁고 가는 금속성의 소리선명한 오류정직한 선언신에게 메모를 남긴다기적은 필요 없고 환불도 안 할래요대신 두 번째 버튼을 주세요 다시 시작하는 그거어제의 나를 딛고 일어설 오늘의 나를 주세요실패로 무너지고 멈춰도 다시 일어서 살아내는 저를 말이에요응답은 오지 않는다대신 자판기 배출구를 구르는 캔 소리딱 한번 구르고 멈추는, 오늘의 천둥길모퉁이에서 개 한 마리가 하품을 한다피로가 내려오고 해가 졌다 뜬다전광판은 오늘의 패자를 당당히 발표하고나는 패배의 방식이 품위 없을수록 더 인간답다고 생각한다넘어질 때 손부터 내미는 본능구겨지는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비겁한 농담 하나로 이어 붙이는 평화그런 것들이 시를 구체로 만든다끝내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나는 실패한 주문과 늦은 답장과세탁기에 돌리고 깜빡 잊는 셔츠의 축축함으로 생을 쓰겠다볼품없지만 오래가는 잉크다그러니 내 심장은 아직 작동한다약간의 번역 오류 약간의 지연그래도 여전히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다이제 전원도 내려간 뒤어둠이 방안을 정리할 때나는 고장 난 스피커의 플러그를 뽑아 입에 문다혀끝에 닿는 차가운 납의 맛입안의 체온과 침 섞인 숨결이마른 콘센트 속으로 역류할 때방 안 가득 가만히 고이는, 타지 않는 냄새

  • 미빈
  • 2026-07-19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를 수가 있어? 라고 했고 몰랐던 게 아니라 아니 몰랐나? 잠깐, 몰랐나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나쁜 건데그런데 아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되나그런데 나에 대해 뭘 알고 저렇게 생각하는 거지그 사람이 팔짱을 끼는 방식이 있는데 팔짱을 끼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데 팔짱을 끼고 세상을 보면 잘 보이나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물어봤으면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됐을 것 같고 됐을 것 같다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나는 뭘 안다고 사실틀렸어요 가 입에서 그렇게 쉽게 나오는 사람은 맞았던 적이 많았겠지 많았으니까 저렇게 됐겠지 맞았던 적이 많은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이렇게 라는 게 뭔지 설명을 못 하겠어서 이 시가 여기서부터 흐릿해지는데 흐릿한 게 내 문제인 건지 이렇게 가 원래 흐릿한 건지를내가 말했잖아, 다음에 오는 말은 항상 내가 말한 것들이고다 해봤어, 다음에 오는 말은 항상 내가 해본 것들이고그건 아니야, 다음에 오는 말은 항상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인데그러면 뭐가 맞아요? 라고 물으면그건 스스로 찾아야지 라고 하거든아아, 라는 말을 오늘 몇 번 했는지 모르는데 아, 의 종류가 다 달랐는데 그 사람은 다 같은 아, 로 들었을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맞는지 모르겠다는 걸 저 사람처럼 빠르게 틀렸어요, 로 바꿀 수 있으면 나도 팔짱을 낄 수 있을 것 같은데결국 나도 팔짱을 낄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무서운 거야

  • 미빈
  • 2026-07-03
파문의 뒤편에는

잔잔한 호수에누군가 예쁜 돌멩이를 하나 던지면조그마한 물결이 일렁이고나는 돌멩이를 주우러 손을 뻗지어라, 물결이 출렁이네물결에 가려 보이지 않고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결국 얼굴을 파묻었어그제야 보게 되었지예쁜 돌멩이 주변의더 예쁜 수중 정원을!그 돌멩이는무엇을 향해 던져졌던 걸까?

  • 미빈
  • 2026-06-26
소나무

변치 않고 푸르다고늘 하늘을 향해 선다고그래서 세상은지조라 했고절개라 했지껍질이 갈라진 건 언제였을까첫 번째 겨울이었는지아니면 어떤 여름의 무게였는지가지 하나가 뻗어나가다 꺾인 채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다시 올라오지 않았고그 위로 또 가지가 뻗었겠지수지가 흐르다 굳은 자리아직도 투명하게 남아 있는데봄마다 새순은 돋았겠지너무 여려서바람을 따라 눕다가도끝마다 조금씩 하늘을 보았겠지바위를 비집고 내려간 뿌리는막힌 곳마다 조금씩 방향을 틀며끝내 가장 단단한 곳을 붙들었겠지수십 번의 겨울을 건너왔고건넌 자리마다 굽고 갈라졌고그래서………

  • 미빈
  • 2026-06-22
시멘트의 양생(養生) 기간

굳어 가기 전의 마음은 질축축하고 무거워서 어디로든 쉽게 흘러내렸고 손가락을 찔러 넣으면 넣는 대로 너의 지문이 깊게 파였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적응 혹은 정착이라 불렀으나 실상은 젖은 시멘트 바닥에 서로의 발자국을 깊게 함몰시키는 점거에 가까웠다. 마르지 않는 시간 동안은 모든 성형(成形)이 자유로웠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내부를 휘저을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러나 바람이 불고 계절의 표면이 비틀리면서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딱딱한 칼슘의 골격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자 구조가 단단하게 결속될수록 너와 나의 경계는 더 이상 섞이지 않는 하나의 완강한 벽이 되어 서로를 밀어냈다. 만지면 뭉개지던 것들이 이제는 부딪치면 뼈가 부러질 듯한 타박상을 남긴다. 고체(固體)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끔찍하게 외로운 일이다. 이제 네가 남긴 발자국을 지우려면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며, 정과 망치를 들고 와 내 살점을 요란하게 깨부수어야만 한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메마른 석회 먼지가 목구멍을 텁텁하게 막아 서러운 기침이 터질 때쯤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겉면은 이미 차갑고 단단하게 화석화되었으나, 가장 깊숙한 중심부의 콘크리트는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수분을 머금은 채 질척하게 울고 있다는 것을. 이 지독한 양생이 끝나려면 얼마나 더 많은 밤을 메말라가야 하는지.

  • 미빈
  • 2026-05-20
소란과 잠

소란은 항상 먼저 잠드는 사람이었고, 잠은 항상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사람이었어. 둘이 같은 방을 쓴 건 3년이었는데, 그 3년 동안 소란이 잠드는 걸 잠이 지켜봤고, 잠이 자고 있는 걸 소란은 한 번도 못 봤어.소란은 잠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밤에 혼자 뭐 해? 잠은 별거 없어, 라고 했어. 그게 전부였어. 소란은 그 대답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잠도 그 질문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 이 정도가 깨지지 않았으면 했던 거야.어느 날 소란이 이사를 갔어. 잠은 혼자 밤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빨리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어. 소란은 새 방에서 처음으로 늦게까지 깨어 있었어. 둘 다 상대방이 하던 걸 그제야 해본 거야.그게 그리움인지 아니면 그냥 습관이 바뀐 건지, 너는 구분할 수 있어?

  • 미빈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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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항상 주변부터 기억나 그날 틀어놓은 노래, 창문으로 들어오던 바람의 온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그날의 저녁 식사정작 행복 자체는 흐릿한데 주변이 선명한 것, 이상하지 않은가아마 행복은 직접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인 것 같아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사라지는그러니까 행복했던 순간에 나는 행복을 보지 않고 창문을 보고 있었던 거고, 덕분에 행복이 거기 있을 수 있었던 거고고양이가 햇빛 드는 자리를 찾아가는 걸 본 적 있어고양이는 행복을 찾아간 게 아니라 따뜻한 자리를 찾아간 건데, 결과적으로 행복해 보였어어쩌면 그게 맞는 순서인지도행복하려고 했던 날치고 행복했던 날이 없었어행복했던 날은 전부 다른 걸 하고 있었어.

  • 미빈
  • 2026-05-16
유기(遺棄)적 유기(有機)

가윗날을 피해 도망간 적 없는 것들이 제멋대로 영역을 넓힌다. 죽은 것들은 소리가 없다. 기척도 없이 길어져 매일 아침 목덜미를 찌르며 기어 나온다. 빗질할 때마다 우두둑,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자신의 끈질김을 확인한다. 바닥에 떨어진 한 올을 주워 들면 손끝에 닿는 온도가 서늘하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몸 밖으로 밀려 나와 끝내 검고 긴 꼬리를 만들어 낸다.두피 아래에는 아마 거대한 창고가 있을 것이다. 환불받지 못한 기억들이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공포 같은 것들이 썩지도 않고 차곡차곡 쌓여 압력을 견디다 못해 가느다란 구멍으로 밀려 나온다. 어떤 기억은 빛 없이도 자생한다. 비료를 준 적 없는 통증이 모근을 타고 올라와 가느다란 줄기마다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샴푸를 아무리 짜내 거품을 내도 모근 깊숙이 박힌 비린내는 가시지 않는다.미용사는 끝이 상했다며 가볍게 잘라낸다. 잘라내면 그뿐인 줄 알고 바닥을 보지만 잘려 나간 검은 줄기들은 꼭 누구의 이름처럼 흩어져 있다. 버려진 것들은 말이 없고 남아 있는 것들은 기어코 다시 길어져서 내 시야를 가린다. 잘린 단면은 금세 무뎌지지만 두피 아래 잠복한 근원들은 여전히 축축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리카락이 유독 무겁게 처지는 건 단지 수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내일이면 다시 1밀리미터도 채 안 될 만큼의 어제가 자라날 것이다. 빗질할 때마다 손가락에 걸리는 매듭은 내가 풀지 못한 기억들일 테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물기가 덜 빠진 머리칼을 움켜쥔다.···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은 끝내 길이를 갖는다. 가느다란 것들이 서로를 물고 늘어지고, 사라지지 못한 채 실핏줄처럼 서로 엉겨 붙어 어느 순간 내 키와 같은 높이까지 자라 나를 만들어낸다.모두 잘라낸다면 더없이 가벼워질까. 모두 잘라냈을 때 나는 정말 가벼워질까. 잘린 조각으로만 남은 내 이름의 가벼움은 도대체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가벼움이 두렵다.모두 잘려나간 뒤의 나는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견딜 수 있을까.모두 잘려나간 뒤의 내가 과연지금의 나와같은 이름을같은 목소리를같은 그림자를가질 수 있을까.오롯이 버리지 못한 무게가 날 붙잡는다.끝내 버리지 못한 무거움이결국엔나를길러낸다.

  • 미빈
  • 2026-04-13
기하학적 낙관

어느 날엔가 무너진 천장 아래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났을 때, 입안에 고인 텁텁한 흙맛이 의외로 달콤하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사방이 꽉 막힌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시멘트의 질감이 오히려 내가 아직 여기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찔러오는 감각 같은 것들요.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 매끈해서 손에 잡히지 않지만,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를 빼낼 때 느껴지는 그 짧고 뾰족한 통증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증거가 되기도 하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는데, 그 폐허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 한 줄기가 먼지들을 금가루처럼 춤추게 만드는 걸 멍하니 바라보게 돼요.비참함이 바닥을 치고 나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의 단단함에 발을 딛고 서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어보고 싶은 기묘한 오기가 생기곤 하죠. 어둠이 짙어서 앞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빛이 너무 강렬해서 잠시 눈이 먼 것뿐이라고 억지를 부려봐도 좋을 것 같아요.결국 우리는 이 엉망인 풍경 속에서도 가장 예쁜 돌멩이 하나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낯선 골목을 향해 또박또박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입체적인 소음들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낮은 웅얼거림 같은 거예요.

  • 미빈
  • 2026-01-02
외투를 내던지면서!

사람들의 옷장은 계절마다 색을 바꿨지만나의 열일곱은 단 한 벌의 외투로 충분했습니다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껴입은불안이라는 안감과 걱정이라는 겉감 말입니다열두 달의 계절이 문밖에서 서성이고체온계의 숫자만이 나의 눈금이 될 때나는 슬퍼할 틈조차 없었습니다불안을 너무 두껍게 껴입은 나머지겨울이 와도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병원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고계속 이럴 것 같다는 예보만 남겼지만그 무거운 옷을 입고 이 길을 걸어온 건어떻게든 열여덟의 봄에 닿고 싶었던나의 가장 치열한 다짐이었습니다이젠 어느덧 열일곱의 마지막 밤나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옷들을하나씩 벗어내려 합니다벗어놓은 불안의 옷가지 위로고생했다는 말 한 줄을 얹어두고나는 이제야 조금 떨리는 몸으로나의 열여덟을 향해아주 가벼운 첫발을 내디뎌 봅니다

  • 미빈
  • 202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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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오

    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미빈 님의 <미로에서의 발걸음> 잘 읽었습니다. 미로에서 방황하는 화자의 심정이 잘 느껴지네요. 다만 지금 시는 다소 짧고 도식적인 구성으로 느껴져서, 언어의 다채로운 사용을 염두에 두고 시를 써보아도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

    • 2024-03-06 00:32:13
    김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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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빈

      @김선오 조언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하는 수많은 선택과 갈등을 미로의 갈림길로 비유해 봤어요. 다음부턴 언어의 다채로운 사용을 생각하며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4-03-10 04:22:08
      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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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