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거나 가거나 가고 갔다
- 작성자 김백석
- 작성일 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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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45
아주 오랫동안 녹슨 향초를 꺼냈습니다
어떤 냄새 났었는지 다 까먹은, 가지만 남은 꽃
겨울에 피는 꽃을 상상합니다
동백꽃이 아니라
이미 피었던 것을요
내가 만질 수 있던 꽃잎은 누렇게 썩어버리고
애초에 보이지 않던 냄새는 인지 밖으로 흩어지고
그런 꽃 말입니다
초록을 잃어버린 머리 없는 사람 같은 꽃을요
나는 꽃이 보고 싶어 향초를 핍니다
냄새는 역시나 하늘 위 철새처럼 보이지 않고
떠나가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나를 지나간 사람의 얼굴과 내가 지나친 사람의 얼굴
때때로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철새들
가위 모양을 그리면서 하늘을 휭주하는 모습에서 꽃향기를 맡습니다
향초와는 조금 다른,
다 시든 겨울의 꽃냄새를
눈이 다 녹았다
그렇다고 꽃이 피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철새들
모두 지나치는 사람의 얼굴이었지
향초조차도 언젠가는 꺼지고 만다는…
오늘따라 애타는 것들은 떠나가는 것의 얼굴을 한다
다 바스러진 가지를 손이 쥡니다
바램 같은 마음을 창문이 그리고
빛이 여전히 스미는 마루에 앉아서
나는 겨울꽃의 냄새를 맡습니다
내가 지니가는 것
우리의 겨울은 지나치기만 합니다
핏줄처럼 돋은 무신경과 가위 모양의 새들
다 타가는 향초의 냄새까지
그러나 무신경한 곳에서도 피는 흐르고 맙니다
우리는 그래서 기도하듯 냄새를 맡습니다
모두 지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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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선택도시에 살아서 산이 흐릿하다가까운 걸 너무 많이 봤어요 하얀색에 점점이 박힌 벽지 그리고 핸드폰을요 소리를 기다린다는 생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아마 나일 거야 벽지를 타고 흐르는 여릿한 신음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나는 괴로워했습니다 이유를 찾으면 조금 가실까 한참 동안 괴로움을 바라보았습니다 역시나 산처럼 괴로움은 흐릿했다 문뜩 너무 많은 사람들이 라식을 했답니다한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한동안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긴데 우리는 너무 쉽게 실명을 선택합니다항상 가까운 곳을 보고 싶어서 제 눈을 뽑았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고 나조차 그런 사람이었다나는 괴로움을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라식 때문이다 수술대에 눕는다 얼음을 조금 깨고 나온 유속, 느린 번쩍임레이저가 쏘아진다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 그러니 괴로움에 대강 이름을 붙이는 거지 아무도 세심한 것 따위 모르니까자신의 실명에 즐거워하고 피라미드에 깃발을 꽂고 등정을 선포한 이들웃긴 사람들이지 틀리지 않았지만 대충 사는 사람괴로움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준다 습관적으로 눈이 내린다 도시에서도……눈 산은 눈에 덮이고……그러면 저건 눈인 거야, 산인 거야 답을 아는 사람들은 실명하거나 항상 가까운 것을 본다 우리는 모두 상자 속에서 슈뢰딩거 고양이처럼 울지만 어디에도 정답은 없었다
- 김백석
- 2025-02-12
아무리 말해도 닳지 않는 말들이 있다고예를 들어 이름 같은 것들 유난히 별이 밝은 날 너의 이름을 불렀다 성대의 울림을 타고 입안의 끈적함에 젖고마침내 허공에서 산란했다 대기와 1대9 혹은, 1대10비율로 섞이는 말의 힘은수없이 많은 원자의 숫자에 질식해 버렸다그러니까 뜻을 잃는거지 웃긴 건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거야 이름이 뜻을 잃어버린 순간 우리는 조금 멀찍이 있는 파출소로 걸어가지 불친절한 경찰은 밝은 미소로 신원을 확인해 주고 영구적 플라스틱처럼 닳지 않은 이름을 발견했다 문득 든 생각은 그런게 이름이냐는 거였어 신호등의 초록불은 5, 4, 3 점점 빨간불로 향해가고 힁담보도의 하얀 막대를 간신히 붙들고 튼 입술로 말했지 플라스틱은 이름이 아니라고 언제든지 기억해 낼 수 있는 건 이름이 아니라고 닳지 않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고 뜨문뜨문 내뱉은 말은 후들거리는 잰가처럼 논리적 작용을 멈췄지 플라스틱적 영원을 믿을까라는 유혹에 휩싸였고그래서 눈을 봤다 우리의 뒷걸음질을 아무도 볼 수 없는 시대이기에 시신경의 번쩍임에서 시작되어 눈물샘에 약간 젖은,그 새로운 말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우리 속의 어법어디에서도 재생시킬 수 없는 가장 짧은 찰나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빨리 증발시키는 법을 택한다 단번에 사라지는 그 눈 맞춤은 닳아버린 이름은 뇌 속 잠깐의 번쩍임으로 남는다 아주 영원토록 지겹도록 길게
- 김백석
- 2025-01-27
지하주차장을 걷습니다 우리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지상에 있습니다 남보다 단단한 땅인가 봅니다 차들은 동그란 원향교차로를 지나가고 골인 나는 모르는 이름을 지닌 차들은 차곡차곡, 빼곡빼곡 누구는 태평양을 지나고 누구는 인도양을 지나고 누구는 꼴랑 서해를 지나고 비싼 이름들 사이를 지나 바다를 모르는 차에 탑니다 홍삼냄새가 났다 버튼 하나로 창문을 내리는 일은 비싼일이었습니다 동그란 눈물때를 타고난 창문은 빛을 끊임없이 나누고 지그재그 수천조각 수만조각, 전인류의 숫자만큼우리 차도 회전교차로를 지나갑니다관성때문에 창문을 봤다고 할아버지께 말했다관성의 어깨를 잡고 나지막히 말한다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세상의 조각난 빛수많은 자동차 수만큼, 수많은 이름만큼빛은 모두 한눈에. 한눈에 담긴 한사람 한라산 냄새가 난다냄새를 잡을 수 있다면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손 그러나 전 인류의 수만큼 쌓인 마음
- 김백석
- 2025-01-2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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