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계를 향해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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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77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이 사방팔방 펴져있는 세상
텍스트가 불러오는, 의식 저편에서 고착화된 관념적 객체의 이미지
이 이미지가 이름 속에서 솟아올라 당신과 나 사이에 양가적 세계를 창조한다
당신의 세상과 나의 세계
양자가 격렬히 충돌해서 몸을 맞대고 부대껴 또다른 창조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시는 그 공간을 일컫는 이름.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서로 몸을 맞대야만 할까
너무 지치지 않나요
모든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모든 이미지 하나하나에 둘러쌓여,
서로 나아간다기보단 꽉 막혀 있다고 느낄 때,
난 숨 막혀 죽을 거 같던데
당신은 당신
나는 나
내 앞에 당신은 없고
나 역시 당신 앞에 없어
"모든 독서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 였다는 폴 드 만의 말마따나
협소한 기호들만이 당신과 나 사이를 느슨하게 연결짓거나, 혹은 완전히 단절 시키고 있을 뿐.
그렇기에 텍스트가 만들어낸 감각, 감정, 이미지는 결코 정순한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사이에 불확실하게 존재하던 어떠한 단어를,
당신의 무의식에 주관적이고 관념적으로 내제되어있던 것으로 이미지화시키며 타자의 언어를 왜곡하는 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단어와 단어가 만들어낸 감각,
이름과 이름이 만들어낸 시각
묘사와 이미지들,
그 모든게 부조리하다
난 기호를 치워버리고 당신과 대면하고 싶어
진실을 보여주고 싶어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야
우리가 부딪히기 이전
당신이 텍스트를 읽기 바로 직전
글이 쓰이기 전으로
같은 출발점에서 동시에 같은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이미지를 파괴하고,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백지. 백지를 떠올려보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물질성이 없으며, 시간성 역시 망각되어 있다
오직 그(녀)와 나
우리는 이름없이 그곳을 떠돌고 있다.
그 세상에서
걸음걸음 나아간다
그 걸음에는 인칭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호성 속에서
나아가는 행위만이 알멩이가 되어 남고,
텍스트가 만들어내던 수사들은 전부 증발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걸음은 부딫침을 잃고
언어와 이미지의 특권으로부터 벗어나
서로의 걸음이 될 가능성을 품는다
나와 당신에서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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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 2025-01-15
죽어있는 책들소리없이 종이 먹고나 역시 소싯적우물우물종이 씹곤했지그때는 정말 우물우물했어근데 요즘 책들은왜 보이지가 않어?피곤에 찌든 일상서우물우물종이 위를 걷는다 그러다가 길가에 매가리없이 드러누운 책 보고아, 이제는 너도 쓰러져가는구나나 역시 후끈후끈 아스팔트 도로 위에 태평하게 드러누워 익사해가고우물우물 생각한다그래도 다시 살아야지뜨거운 열기에 몸을 일으키고죽어있는 책들찌익찌익종이 찢기는 소리에다시 살아난다세포와 세포가 서로 붙잡던 손을 끊어내던 강력한 결속의 의지찟겨진 종이를 힘껏 천장으로 뿌리고 하늘에서 살금살금 내려오는 눈어깨 위로 살포시 닿더니내 몸을 짓눌러서 땅에 박히고나는 소리없이 도로 위쌓인 눈 듬뿍 퍼서입안 가득 채운다이빨이 시리다눈을 토해내다이제는 우물우물도 힘들어눈은 다시도로에서 녹고도로는 눈을 먹는다자글자글 주름도 소리없이 얼굴을 먹는다책은 소리를 먹는다눈물은 결국 소리를 잃는다
- 화자
- 2024-06-19
해가 지는 긴 하루너를 만났다 얼마만이더라너는 뱃 속 탯줄 물고 있었고나는 그 옆서 꿈틀꿈틀있던 것 같은데부극부극 후덥지근한 땀내인지 핏내인지 그리운 심장박동이 우리를 감싸고.너랑 나 안고있었어그 곳에서는서로서로 달아올라심장심장 맞대고숨 내뱉으면 그 숨 내게 오고숨 머금으면 그 숨 네게 가고근데 지금은 어떻지이제 그 심장박동 소리 밖으로 뚝떨어져버려서더 이상 붙어있을 수가 없잖아나와서는 울기만 했대너랑 그렇게 붙어보질 못했어탁 트인 숨이 요즘은폐를 조여서 오히려 꺽꺽 헐떡거리면서 살아그러니안아보자 어디 한번오랜만에 만났으니
- 화자
- 2024-06-1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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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름이나 소속 등 모든 것들이 날 때부터 써온 색안경처럼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공감이 가는 시에요. 후반부가 되게 아름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