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어를 배우는 기분
- 작성자 앉은
- 작성일 2026-02-11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154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편지예요
덧발라진 유화 물감처럼 눈물 자국이 남은 편지지엔
수취인 불명 발행인 불명
단순히 내용만 적혀 있었죠
꼬부랑 글씨로 된 것은 의도한 걸까요?
노어 필기체는 러시아인들도 알아보기 힘들다던데
정갈한 필기체로 쓰인 문장 여러 송이
편지는 석양과도 같아서
저 너머로 보낼 때 가장 예쁜 법이라고들 하죠
한 자 한 자 꼭꼭 지르밟아 써낸 이 편지가
누구인지 모를 당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
그렇게 감히 믿어 봐요
이 편지가 왜 저에게 온 걸까요?
노어를 배우지 못한 제게 언어라도 하나 배우라는 뜻
그런 뜻일까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일 거야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이 편지가 왜 제게 왔는지
Е는 에, Ж는 제.
키릴 문자 한 묶음이 정수리에 들어올 때마다
뇌를 턱 치는 새로운 기분이 들어요
즈드라스뜨부이쪠, 하라쇼.
기본 회화는 할 수 있어야겠죠?
언젠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날이 온다면
이 편지에 직접 답을 적어
누군지 모를 당신의 손에
쥐여 드릴게요
노어를 배우는 기분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좋을 텐데요
추천 콘텐츠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리다가 편다. 누워 있는 사람의 갈비뼈에서는 그 사람만의 시그니처가 흘러나온다. 잊을 수 없는 과거, 잊힐 수 없는 과거.뭉치고 두드러지는 덩어리계명성의 빛을 밭게 내뱉는 금 간 갈비뼈엔행성들이 하나씩 수놓아져 있다선득한 과거가 울린다이렇게나 사무치게 추운 겨울밤에도 금성은 저 위에서 밝게 빛나고, 빛나고.하릴없이 다가오는 과거가 밝는다들춰진 겨울의 역광은 뜨겁고 눅진한 햇빛을—여름의 순간을— 가지고 수평선 위 검푸른색의 무한대 공간으로 올라간다우리는 얼마나 살지 못하였는가가장 마지막의 사람이 누워 있다. 늑골과 장골 사이로 솟아오르는 별빛이 머리 위로 흩뿌려진다.우리는 또 어떻게 사는가살아있으려면 누워 있어야 한다. 누운 채로 발을 구르고, 구르고. 팔을 머리 위로 펼쳐 휘젓는다.아직 살아 있어요말을 내뱉는 입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과거의 모양이 너무나도 형편없어서, 사람은 그만 입을 다문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사람의 입을 벌려서 그 속을 들여다 본다. 겨울에 피지 않는 꽃이 입속에 가득 핀다. 한겨울의 빛이 뼈마디 사이로 불거져 거죽 아래를 채운다. 사람은 이제 죽지 않는다.
- 앉은
- 2026-02-28
이어폰에서는 곧장 몬티의 차르다시가 흘러나오고, 기약 없는 액체는 컵의 아가리를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별 볼일 없는 바이올린의 가장 얇은 현이 새소리가 되어 창밖으로 날아간다. 볶은 커피콩을 삶아 우린 물은 여전히 컵의 벽을 타고 내려간다.새맑은 소리는 격정적인 춤곡으로 변해가고, 일본어 책을 펼쳐 아침 인사를 배우던 사람이 별 자국을 떨어뜨린다. 흰 대리석 식탁 위로 외로이 놓인 커피 머신 밑에는, 다갈색 별빛이 수놓아져 하얀 밤하늘을 적신다.아침의 차르다시는격정적으로 귓속을 울린다미래는어딘가에 걸려대롱대롱 하늘을 내뱉고오늘과 미래, 미래의 과거를 본다사람의 미래가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끊어진 바이올린의 현이 웃이 훌훌 털리듯연주회장 안을 나뒹굴고당황한 연주자는꽉 막힌 반물빛 천장을 올려다본다새된 바이올린의 소리가아직도 회장 안을 감도는데
- 앉은
- 2026-02-27
푸른 향이 나는 나무를마당에 심는다어쩌면 나무가 쓰러질지도 몰라그렇게 너는 말한다화초집에서 나무를 들고 온다횡단보도가 없는 골목의 사거리 아래로설익은 열매 하나가 떨어진다지나가는 자동차 바퀴 옆으로아슬아슬하게 굴러발밑을 파랗게 물들인다나무를 보라창공에 뻗어 그 머리를 볼 수 없는 나무를 보라냉차 한 모금에 버리는어린 세쿼이아 한 그루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이 높은 나무 하나를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기분이 가산되는 하루를살아있는 나무가 제 팔을 움직인다나뭇잎 쓸리는 소리가푸르게 울린다쓰러지게 두지 않아나는 나무를 꼭 껴안는다세쿼이아 꽃이 되어
- 앉은
- 2026-02-2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