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은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혼자 가는 먼 집」
- 작성일 202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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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남지은
일곱 살처럼 살라고
엄마는 말하고
뭐든지 서서히 하라고
아빠는 말한다
삼 년 안에는 첫 시집을 내야지
선배가 조언하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해요
치료사가 당부한다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은 어떻게 다를까
언니가 혼잣말처럼 물어오고
시를 몇 편 쓰면 시인이 되나요
시인은 시만 쓰나요 시가 아니면 안 되나요
글쓰기 수업 학생들이 열띠게 질문한다
덜 핀 작약을 안아든 귀갓길
울 데가 필요해서 찾아왔다고
뵌 적 없는 시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니
여기까지 잘 왔네, 하신다*
사랑 많은 손을 붙들고
나는 여기
무어든 받아 적는다
포장을 끄르면 사라질 신비 같은
* 2020년 10월 3일 허수경 시인의 2주기 추모제를 지내고 북한산을 내려오는 길에 김민정 시인이 건네준 말. “수경 언니는 틀림없이 지은에게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여기까지 잘 왔다고.” 시의 제목은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에서 가져왔다.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사는 것이 녹록지 않을 때,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곁에서 보기에 답답했는지 조언이 먼저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선배는 선배대로, 치료사는 치료사대로, 저마다의 조언과 당부를 아끼지 않습니다.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고, 다 중요한 말이고, 다 소중한 말이기도 합니다. 중요와 소중의 차이, 이런 것도 충분히 음미해볼 일이지만, 찬찬히 음미하기도 전에 어린 친구들의 질문이 들어옵니다. 세상을 조금 더 살았다고 해서 훅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다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덜 여문 열매이거나 “덜 핀 작약꽃” 같습니다. 어찌해도 미숙해 보이는 내가 누구를 더 찾아가야 할까요? 누구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해야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서 찾아간 곳, 더 솔직히는 “울 데가 필요해서” 찾아간 곳에 계시는 그분은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세상 분이 아니라서 찾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분이 아니니 이 세상 말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듣습니다. 무엇이든 들으려고 무엇이든 받아 적으려고 간절히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들리는 말. “여기까지 잘 왔네” 그 말 한마디에 터지는 울음을 참고 돌아오는 길. 들었던 말을 다시 말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구구절절 다 풀어내지 않아도 선물인 것을 알게 해주는 포장이 있습니다. 그 포장을 굳이 끄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먼 길을 돌아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한참 전에 떠나온 듯한 그 먼 길을 혼자 가더라도 이제는, 조금은,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듯이, 앞으로 잘 가면 되는 거라고, 못 갈 것이 없는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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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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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1-14
창원 조성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마리아······ 파티마 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 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선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끔찍한 날 피해 자리를 비킨 동생도 죽고 모두 죽어서 죽고 나서 웃고 있었다 모두 지난 일이라는 듯 모두 지나야 했던 일이라는 듯······ 그러나 그건 나 혼자서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것이다 —시집 『천국어사전』(타이피스트, 2024)
- 최고관리자
- 2024-10-1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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