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윤지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동지」
- 작성일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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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마윤지
12월에는 흐린 날이 하루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놀이터엔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으면 좋겠다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면 좋겠다
조금 헷갈려도 책은 읽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고 안 아프면 좋겠다
30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눈의 타임캡슐 매일의 타임캡슐
다 흘러가고 그게
우리인가 보다
짐작하는 날들이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
이를테면 깍지
햇빛의 다른 말이다
-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 2024)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에 어울리는 소원이 무얼까 생각해봅니다. ‘작은설’이라고도 부르는 동지의 긴긴 밤에 어울리는 소원, 아니면 짧디짧은 낮이 저물기 전에 빌면 좋은 소원, 그런 게 무얼까 고민하다가 관둡니다. 소원이 꼭 동짓날에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한가위나 대보름같이 대단한 날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평범한 날 평범하게 비는 소원. 소박하게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이 어쩌면 우리의 일상사를 이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의 화자도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놀이터에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았으면 하는 마음.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었으면 하는 마음. 그러다 조금 욕심을 낸 것이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서 안 아프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입니다. 그런 마음이 쌓여서 오늘을 이루고 내일을 이루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이루면서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우리도 끝내 흘러가고 말 겁니다. 그게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30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또 내리는 광경에 풀어놓습니다.
30만 년 전부터 내렸던 눈이 또 내리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사도 매일같이 찾아와서 매일같이 만져지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어쩌면 그런 일상사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어쩌다 다른 소중한 것을 마음에 품더라도 대하는 자세는 일상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야 함을 화자의 소원을 통해 다시 배우고 다시 느낍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겨울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에서도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털장갑의 털실 한 올에도 소소하게 햇빛은 묻어납니다. 묻어나면서 빛이 납니다. 겨울을 지나는 어느 하루의 소원이 또 그렇게 빛이 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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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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