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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골이고 싶지 않아서 | 조해주 「단골」

  • 작성일 2025-02-06
  • 조회수 344

단골


조해주



내가 다니는 회사는 종로에 있고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나는 단골이 되고 싶지 않아서


어떤 날은 안경을 쓰고

어떤 날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둘이


어떤 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오는데


어떻게


차갑게,

맞지요?


주인은 어느 날 내게 말을 건다


커피를 받아들고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저어서 드세요,


빨대의 끝이 좌우로 움직이고

덜컥 문이 잠기듯

컵 안에 든 얼음의 위치가 조금 어긋난다


주인은

내가 다니는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지인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김지현이라고 아나요?


나는 그런 이름이 너무 많다고 대답한다


그렇구나,

주인은 얼음을 깨물어 먹고


설탕처럼 쏟아지는 창밖의 불빛들


참, 내일은

어떻게 하면 처음 온 사람처럼 보일까 생각하면서



-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아침달, 2019) 

시인 김언
조해주의 「단골」을 배달하며

   시를 다 읽고 나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화자는 왜 이렇게 단골이 되기 싫은 걸까요? 자주 가는 카페이니 단골이 되고 싶지 않아도 단골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왜 이렇게 애를 쓰면서 단골처럼 보이는 걸 피하려는 걸까요? 애를 쓴다는 것이 티도 나지 않는 소심한 변장술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단골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은 간절할 정도로 티가 납니다. 다시 묻습니다. 화자는 왜 이렇게 단골이 되지 않으려는 데 진심일까요? 진심을 나누는 사이도 아닌데, 속사정이나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도 아닌데, 단골이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사적인 것까지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미리부터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단골이라고 해서 자신의 직업이나 가족, 출신 학교나 고향을 들먹이며 대화하는 것이 왠지 불편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꼭 그렇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타인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 자신을 내보이는 만큼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버거워하는 사람. 가까운 만큼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멀면 먼 대로 잔신경을 써야 하는 관계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사회에서 만나는 온갖 사람과의 온갖 관계에 대해 온갖 잔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니, 하루하루가 그토록 피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쓸 수 있는 신경을 다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쓸 수 있는 용량이 부족해서라도 더 신경 쓸 일을, 관계를,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싫은 것도, 관계가 싫은 것도, 책임질 일이 싫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용량이 부족해서 더는 신경 쓸 일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을 그래서 조금은 너그럽게 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남습니다. 이것저것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카페 주인이 꼭 무례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듯이, 단골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저 시의 화자도 이상하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용량 안에서 혹은 타고난 그릇 안에서 최선을 다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으로 보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에 붙입니다. 이상으로 감상을 대신한 자기 변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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