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들의 따뜻한 속삭임 | 조용우「세컨드핸드」
- 작성일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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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따지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새것이면서 또 헌것이지요. 모든 것이 새 물건이면서 헌 물건이라는 말인데요, 물건 자리에 사람이나 자연이 들어간다고 크게 다를까요? 내가 구입한 새 코트가 하늘에서 뚝딱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듯이, 가죽이든 털이든 원재료가 되는 물질이 이런저런 변형 과정을 거쳐서 내 손에 들어오듯이, 오늘 아침 새롭게 등장한 창밖의 구름도 온전히 새것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구름의 형상을 갖춘 채 나타난 것이니까요. 어디 구름뿐이겠습니까. 나 역시도 부모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간의 부산물로 잠시 이곳에 부려진 존재입니다. 새로운 인간이자 유일무이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떠들어대는 온갖 아름답고 권위 있는 말 역시 이전부터 있어왔던 말의 파생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오로지 새것에만 집착하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아도 좋겠습니다.
새것 안에 녹아 있는 헌것의 흔적을 곱씹다 보면, 역으로 헌것처럼 보이는 물건도, 사람도, 인연도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구입한 중고 코트를 통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먼 곳의 누군가를 새삼 떠올리듯이, 하루하루 중고품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나 역시 오늘 아침 새롭게 탄생하는 구름처럼 다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구름은 늘 헌것이면서 새것이고 새것이면서 또 헌것입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다 비슷하지만, 매 순간이 다 다릅니다. 문득 그걸 느끼는 내가 “조용하고 따뜻한” 중고(세컨드핸드) 코트를 입고서 집에 돌아옵니다. 코트 호주머니에 남겨 놓은 머나먼 누군가의 흔적을 직접(퍼스트핸드) 만지면서 돌아옵니다. 그 기분이 어찌 새롭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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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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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지기
- 2025-02-0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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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중고품을 샀을 때, 그것이 의복일 때, 전 주인의 사연이 메모되었을 때, 그런 일은 좀 스산한 느낌이 든다. 종국적으로는 이 옷을 계속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