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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그래 보고 싶었어, 다르게 살아 보고 싶었어 | 임유영「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 작성일 2025-04-05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시인 김언
임유영의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를 배달하며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이 대목에 이르러서 왜 앞서 나온 장면들이 가지런하게 이어지지 않는지, 뒤죽박죽 뒤섞인 것 같은지 이해가 됩니다. 화자는 과거를 기억나는 그대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실과 반대되게, 또 어떤 때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한데 섞어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너를 처음 만났던 때의 일인지, 헤어졌다가 우연히 재회했던 때의 일인지, 아니면 아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깊이 만났던 것처럼 꾸며내고 있는 일인지 여전히 헷갈리지만, 그럼에도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는 화자의 말은 분명하게 들려옵니다. 간절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헛된 꿈일지라도 계속해서 꾸다 보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하면 정말로 다시 만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정말로 다시 만난 것처럼 우리의 삶이 다르게 펼쳐질지도 모르니까요. 어차피 왜곡되는 게 기억이라지만, 기억을 뒤집어서라도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을 다시 쓰고 싶은 바람이, 정말로 기억을 뒤집고 삶을 뒤집고 또 무엇을 뒤집어서 우리 앞에 펼쳐질까요? 그게 궁금해서 가만히 앉아서도 달아나는 꿈을 꿉니다. 멈추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는 상상을 합니다. 내가 선택했던 삶과 선택하지 못했던 삶, 이 둘을 동시에 살아가는 사람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렇게 미련 많은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련 많은 글을 쓰면서 미련 없이 한 시절을 놓아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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