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희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일각고래의 뿔』
- 작성일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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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지?
백이 무언가를 골똘히 본다. 상아로 만든 보검 같다. 아 그거? 진열장 안의 장검 같은 상아를 보고 민혜가 반긴다. 그게 바로 일각고래의 뿔이야. 유니콘의 뿔이라고. 내일 데지마 상관에 가서 보려 했는데 여기도 있네. 그녀가 좋아라 한다. 술이 깨는 모양이다. 유니콘의 뿔? 나도 다가간다. 이거 엄청 비싼 거예요. 민혜가 속닥거린다. 일각고래의 뿔은 소문으로만 들었다. 정확히는 뿔이 아닌 이빨이지만, 북극에 사는 고래의 어금니가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북극 고래는 유빙을 뚫어 숨을 쉬고 먹이를 잡고 적을 물리치니 어금니를 작살처럼 변형시킨 것이란다.
뿔이 아니라 작살인데? 백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작살 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정말 작살과 흡사하다. 포수들의 작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포수는 작살로 먹이를 잡고 경쟁자를 물리쳐 숨을 쉬니 작살이 맞다. 와, 손이 근질근질하네. 백이 작살의 손잡이 부분을 진열장 위에서 가늠하며, 꼭 맞네. 지난번에 내가 잃어버린 바로 그 작살이잖아, 하고 능청을 떨자 민혜가 받아준다. 그래? 그럼 이거 우리 거네? 우리가 가지고 가야겠네. 카운터의 주인이 여차하면 달려올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거 수컷이죠?
민혜가 불쑥 내게 묻는다. 작살을 맞고 도망 온 동족을 보고 고래들이 궁리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런 게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수컷의 이빨을 이렇게 단련시킨 거죠. 아주 오랫동안, 그야말로 이를 갈면서 말이에요. 암컷은 새끼를 잉태하고 종족을 보존해야 하니까 제외시킨 거고요. 과연 솔피 강의 동생다운 추리다. 내 이도 어딘가 근질거리는 것 같다. 더글더글. 나도 이를 갈아본다. 아래윗니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갈아본다. 고래도 손이 있으면 인간처럼 도구를 만들었을 거다. 손이 없으니 자신의 신체 중 가장 강한 이빨, 어금니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어머, 저거 좀 보세요. 민혜가 내 팔을 톡 친다. 진열장 속에 누워 있던 작살 뿔이 들썩거린다. 마치 내게 응답하는 듯이. 어? 백도 신기해한다. 카운터의 주인 여자가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앉은 게 그다음이다. 벽에 걸린 액자가 들썩이고 천장의 고래 모형도 부르르 몸을 떤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지진이에요!
백의 외침에 민혜의 눈이 팽팽해진다. 아니다. 고래가 작살을 본뜬 게 아니고 인간이 일각 고래의 뿔을 보고 모방했을 거다. 아니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가 우연히 일치했거나. 백이 잽싸게 출입문 쪽으로 달아나고 민혜가 얼결에 따라가다 나를 돌아본다. 아아. 이빨 하나로 남은 고래야. 어찌하여 너는 지구 반대편의 이 먼 나라, 작은 항구까지 흘러와 뿔 하나로 이리 누웠느냐. 전생을 이빨 하나에 처연히 담고 말이다. 장생포의 작살잡이가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자, 발밑이 고래 등처럼 움찔거린다.
유연희, 『일각고래의 뿔』 (강출판사, 2022), pp.31~34
이들은 지금 도피 중입니다. 장생포의 작살잡이와 포경선 선주. 불법으로 잡은 고래를 먼바다에서 해체까지 해서 판매상에 넘기던 완벽한 한패.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도피처로 고른 곳이 하필 지진이 일어난 나가사키입니다. 일본의 장생포. 포경업의 근거지. 고래고기를 즐겨 먹는다죠. 고래고기 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고래 기념품 가게입니다. 고래 뼈로 만든 장식품과 장신구들. 혹등고래, 밍크고래, 향유고래, 돌고래, 범고래. 고래 모형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만난 일각고래의 뿔. 그것은 뿔인가요 이빨인가요. 작살잡이가 잃어버린 작살인가요. 진화를 거듭해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다시 바다로, 엄니를 작살처럼 매달고 여전히 쫓기고 있는 일각고래. 이빨인지 뿔인지 작살인지가 꽂힐 곳은 어디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심장. 쿵. 여진이 쿠구궁. 지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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