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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먹기러기들」

  • 작성일 2013-11-25



유종인, 「먹기러기들」
아비는 오랜만에 붓글씨를 쓰고

어린 딸내미 둘은

오래된 신문지에 붓을 가지고 분탕질이다

재밌어

붓이, 논다

아비의 붓은 무거운데

딸내미들 붓은 그예 먹물을 튀겨, 사단이다

얼굴에서 목덜미, 티셔츠까지 먹물이 곳곳에 흩어졌다

꾸중에, 꾸중을 더한 끝에, 딸내미들은 붓을 놓고

운다

아비의 붓은 더 무거워진다

눈물이 먹물에 가 닿기 전에 얼굴과 목덜미를 씻겨주며 본다

벗어놓은 딸내미 윗도리에 튄 먹물들, 점점이 먹기러기들로 날아간다

울음도 먹먹해서 몸빛이 더 진해진 먹기러기들,

만발한 봄꽃들을

천 길 배 아래 두고, 뜬다
● 시·낭송_ 유종인 -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촉지도를 읽다」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당선했다. 시집으로 『아껴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이 있다.

● 출처_ 『사랑이라는 재촉들』(문학과지성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호흡으로 쓰는 글씨가 있지요. 색색의 호흡으로 쓰는 글씨가 있지요. 먹처럼 찬란한 색채가 있을까요! 눈이 없지 색이 없나요. 붓을 잡던 시절 어느 서양화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 내가 하면 그게 모더니즘이지 했다던 그분 스승의 말씀. 옳거니 했습니다. 수천년을 모던한 것. 매 호흡처럼 모던한 것.
아이 아버지가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호흡을 쓰고 있습니다. 붓글씨는 정보를 기록하는 행위만은 아니지요. 딸내미가 먹물 곁으로 같이 놀자고 덤비고 있습니다. 아비는 어쩔 줄 몰랐겠지요. 글씨는 마음을 달래는 일이기도 한데 아이는 아비 마음을 알 리 없습니다.
아이 옷에 기러기들 날아갑니다. 이 아이들이 먼 훗날엔 날아갈 것입니다. 아이는 지금 봄꽃처럼 찬란하지만 기러기 되어 날아갈 날 생각하니 천길 높이가 실감납니다. 먹글씨들이 번져가듯이 기러기들 날아갑니다. 마음도 어떤 알지 못할 것들로 번져갑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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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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