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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금언 공화국」 중에서

  • 작성일 2010-04-08




임범, 「금언 공화국」 중에서
 
 
 
 
안국역 근처에 사는 ㅇ씨의 산책 코스는 이렇다. 안국역-감사원-삼청공원-말바위 쉼터-와룡공원-감사원-안국역. 삼청공원에서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말바위 쉼터에 오르면 발아래로 서울 도심이 들어온다. 도심 가까이에서 낮게 내려다보는 서울 풍경은 북한산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르다. 아늑하고 푸근하다. 거기서 서울성곽을 넘어 와룡공원으로 가는 숲길은, 바로 옆에 대도시 번화가가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울창하기까지 하다.
 한 가지, 와룡공원에서 감사원으로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2차선 포장도로에 보도나 갓길이 없다는 게 불편했다. 오가는 차량을 신경써야 하고, 차가 내뿜는 매캐한 배기가스를 피할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도로 한쪽 끝 절벽에 쇠말뚝을 박고 그 위로 나무를 깔아 보행자 도로를 만든 것이다. ㅇ씨는 ‘세금을 이렇게 쓰니 참 좋구나’ 생각하며 느긋하게 보도로 올라섰다가 난간에 붙은 팻말의 글귀를 보고 흠칫 놀랐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것을 근심 말고 자기의 능력 모자람을 걱정하라. -공자”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이런저런 글들을 써오던 ㅇ씨였다. ‘산에까지 와서 이게 뭐야… 하긴, 맞는 말이지. 공자 말씀이네.’
 10m쯤 내려가니 팻말이 또 나왔다. “옥도 갈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사람도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 -율곡 이이” ‘이건 또 뭐야’ 하며 앞을 내다보니 팻말이 계속 이어졌다. 도스토옙스키, 안창호, 몽테뉴, 불경, 효경, 대학…. 2㎞ 조금 넘는 구간에 금언 팻말이 23개 있었다.
 금언의 화자나 출처는 동서고금을 아우르고 있었지만 역설이나 유머, 신랄함이 담긴 건 드물었다. 대다수가 성실, 근면을 강조하는 무난한 글귀, ‘공자 말씀’이었다. 자주 나오는 단어를 꼽아보니 노력, 만족, 성공, 행복 순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 식히려고, 기분 전환하려고 공원에, 산에 온 사람에게 노력하라는 말을 굳이…. 어떤 건 너무 ‘공자 말씀’이어서, 그 말을 했다고 적혀 있는 이름의 주인이 이 팻말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안중근 의사”  
 ㅇ씨는 지하철 승강장에, 공공화장실에 빠짐없이 붙어 있는 금언들을 떠올렸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금언을 좋아할까. 관공서든 민간단체든 사람들을 자꾸만 계도의 대상으로 여겨서 여기저기 금언을 붙여놓는 건 아닌가.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워낙 책을 안 읽으니까 한 줄짜리 금언이라도 읽으라는 건가. 그도 아니면 그냥 관성? ‘좋은 말씀이니까 붙여 놓으면 좋아하겠지’라고 여기는? 어쨌든 말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전후 맥락이 있는 건데, 뭘 갖다 걸려면 그 공간의 맥락을 고려하는 성의를 보이면 안 될까. 삼청공원, 말바위 쉼터 같은 곳이라면 거기 얽힌 역사, 인물, 일화가 적지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이런 팻말도 있었다. “어떤 일에도 항상 최선의 길,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한다. -대학”
 
 
작가 / 임범 - 대중문화평론가
 
낭독 / 송바울 - 배우. ‘세일즈맨의 죽음’, ‘독짓는 늙은이’ 등 출연. 극단 ‘은행나무’ 대표.
출전 / 한겨레신문 2010년 3월 5일
음악 / 김권환
애니메이션 / 이지오
프로듀서 / 김태형
 

유쾌한 글! 이 글을 읽고 제가 왜 공공장소의 금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정말 곳곳에 ‘좋은 말씀’이 많은 나라. 공원이나 지하철역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 안과 화장실과 심지어 지하철 티켓에까지 잔소리를 적어놓는 나라. ‘착하게 살자’처럼 마음속으로 혼자 결심하면 될 말까지 왜 커다란 돌에 새겨서 길 한가운데 내놓는 건지…….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들어요. 공자님 말씀이 자꾸 거슬리는 데에는 개발독재 시절을 겪은 사람이 더한 게 아닌가. 워낙 통제와 구속이 많았던 시절이잖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글과 그림이 동시에 붙어 있다면 어느 쪽으로 먼저 눈이 가나요. 저처럼 글을 다루는 사람은 물론 글 쪽이겠죠. 그러니 글이 주는 기쁨과 고통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쓴 기자 역시.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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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공감의 눈물이 주룩주룩.

    • 2010-04-09 17:50: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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