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임솔아「멍」
- 작성일 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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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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