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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임솔아「멍」

  • 작성일 2025-05-08

   멍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시인 김언
임솔아의 「멍」을 배달하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멍이 듭니다. 공기에 의해서든 다른 무엇에 의해서든 자연스럽게 멍이 드는 바나나처럼, 사람도 살아가면서 부지기수로 멍이 듭니다. 몸에만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멍이 생겨나고 또 사라집니다. 어떤 멍은 평생을 따라붙기도 하지요. 멍 대신에 상처나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멍이 든 모습, 상처 입은 모습을 타인에게 함부로 보이지 않습니다. 부끄러우니까요. 나약해 보이니까요. 더구나 나이 좀 먹은 어른이라면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어른 대접을 받으니까요. 같은 이유로 치부와도 같은 멍 자국이 어른에서 아이로 옮겨 가면 조금은 대접이 달라집니다. 멍이 들어서 “물컹하게” 우는 아이는 안쓰럽고 가여워서라도 사람들이 안아줍니다. 안아주니까 달아나지도 않고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존재가 어쩌면 내 안의 어린아이일 겁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를 멍 자국을 지울 생각도 없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아이. 그런 아이가 싫어서 모진 말을 퍼붓기도 하지만, 그 아이는 달아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찰떡같이 달라붙어서 쫓아옵니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텐데요, 영악한 나는 멍든 그 아이를 내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도 합니다. 멍들어서 더 맛있어진 바나나처럼 내세웁니다. 사랑받고 싶을 때 슬그머니 꺼내놓는 그 아이보다 더 싫은 것이 어쩌면 지금의 나 자신일 겁니다.

   좋든 싫든 계속해서 불러 세울 수밖에 없는 그 아이는 마치 물병에 물때가 끼는 것처럼, 물때를 지운 물 때문에 다시 물때가 끼는 것처럼, 죽지 않고 나를 따라다닐 겁니다. 그 아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자기도 모르게 멍든 그 아이를 멍든 바나나를 꺼내 먹듯이 다시 봅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비가 창밖에 있습니다. 비가 씻기고 간 자리에는 다시 얼룩이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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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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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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