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2024년 여름호(제12호)
청소년이라는 서발턴과 새로운 영어덜트 시 : 청소년 문학의 현재와 미래
청소년은 말할 수 있는가?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는 중요하지만, 없어야 할 존재다. 니콜라예바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 혹은 교사를 포함한 ‘부모 대리인’은 인물을 부정하거나 방해하는 무능한 존재로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아동청소년 인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고통”이자 “불가피한 불행(inevitable evil)”의 무대라고 표현되었던 ‘학교’는 대체로 부조리하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학교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대개 주변적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1)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의 존재감은 매우 크며 근대 가족, 제도, 학교 시스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는 유교 사회부터 내려온 사회적 이데올로기, 오랫동안 한국에서 강력하게 작동해 온 국가주의, ‘입시’라는 목표 하에 청소년의 삶이 교육제도에 포섭되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로 인해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은 오랜 시간 보수성을 견지해 왔고, 교양 담론적 성격도 강했다.
한국에서 1930년대 이후 중산층 핵가족이 이상적 가족 모델로 제시되며 아동은 ‘보호’의 존재로 위치2) 지어졌다. 아동이 가족 내 위계에 맞게 ‘피보호자’의 위치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소위 “어린이다움”이 고착되는 과정을 거쳤고,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고 규제하며 사회와 국가의 규범을 전수시켰다. 공교육은 국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와 공조해왔는데, 청소년 문학 역시 이 과정에서 “청소년다움”을 형성했다.3) 이로 인해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가족, 학교가 문학의 전면에 드러나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른’들이 개인의 성장을 돕거나 가치관이 형성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거나 작품 속 주체, 화자가 되곤 하였다. 어린이 청소년이 화자인 경우에도 사실상 “어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2024년인 지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청소년 독자의 정체성, 출판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세란은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청소년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청소년다움”을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청소년다움’의 보수성과 대립하여 “언뜻 진보 담론을 펼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조차 일종의 ‘청소년소설다움’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4)
이융희는 청소년 소설이 2000년대 초, 그림책과 판타지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갑작스러운 입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비판적 인식 하에 등장했으므로 사실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소위 ‘어른’이라고 불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 집단”이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결국 문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강화한다고 비판5) 했다.
오세란은 근대 사회가 형성될 때 요구되었던 단일한 정체성이나 성장, 사회화 같은 가치가 이제는 자신의 다양한 내면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은 미성년이자 주변인으로서 어른들이 원하는 서사를 수용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패턴화된 성장, “온건한 경청자로의 유도”가 공식처럼 되어 버리는 문학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렇다면 청소년이라는 ‘서발턴’은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스피박 식으로,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인지적 구도를 통해 청소년을 재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 말하는 것을 듣자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청소년은 기존과 매우 다른 존재들이며, 2010년대 이후의 시대의 급속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랐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지금 여기’의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인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는 어떤 시대였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를 겪으며 세계 질서가 전진의 행보를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거대한 후퇴’7) 라고 요약할 수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이를 악화시켰다. 고립과 정체(停滯), 우울과 불안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 곳곳에 위기가 심화되었다.
2010년대부터 2023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사람들을 무력감과 공포로 밀어 넣었고, 사회는 양극화되고 사회통합은 약화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퇴보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부조리함은 깊어지지만 개인의 무력함은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감시자본주의8) 가 일상을 장악해 간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인구감소, 환경파괴와 이상기후, 연금위기,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위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중위기 앞에 놓인 현실 속에 있다. 칼부림 사건과 같은 이상동기 범죄가 불안을 격화시키는 등 사회의 병적 현상들을 지켜보고,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의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통계결과로도 드러난다. 2020년 학생 희망 직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중등 대상 조사임에도 1위부터 10위까지의 희망 직업 중에는 교사나 군인,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업, 의사와 같은 고소득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9) 자신의 내적 동기나 희망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성 높은 직업을 선택하라는 사회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 휴대폰 소지로 상시 연락이 되고 보호자가 자녀의 위치 추적, 동선 파악까지 할 수 있게 된 기술 발전이 그들을 옭아맨다. 또한 저성장과 계층 사다리 붕괴, 대졸자 증가 등으로 인한 기회의 감소,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경쟁이 심화된 현실 속에 놓여 과도한 선행학습 요구와 그에 따른 스케줄링에 소진되며 성취 압박에 시달린다. 스틱스러드와 존슨은 지금의 부모들이 자
녀들에게 사소한 일들의 취사선택부터 하루 일과의 계획, 심지어 장래희망까지 간섭하는 ‘과잉육아’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지나친 통제와 과열되는 경쟁, 게임과 SNS 중독,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아동청소년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다양한 임상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 주며 최근 문제시되는 청소년 번아웃과 우울증 등의 문제를 ‘삶의 통제력 부재’에서 찾는다.10) 가혹한 입시현실 속에 놓인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그러나 현실과 불화하며 대응해온 문학의 방식으로, 지금의 아동청소년아동청소년 문학은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그것을 넘어서 보려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아동청소년들은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다. 디지털원주민이자 포노사피엔스로 불리는 세대이며 소위 ‘디지털이민자’이거나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이 경험과 경륜을 통해 줄 수 있는 지식과 정보, 지혜보다 더 많고 더 구체적인 것들을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부터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연장자의 지혜에 의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뒤처진 기성세대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잘 살아갈 방법을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약 기성세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낡은 구태의 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강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소위 ‘세월호 세대’이며, 미투와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어른’들이 신뢰할만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였고,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며 사회의 구태와 민낯들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했다. 가족과 사회가 충분한 보호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학교가 그리 견고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팬데믹 시기의 유연한 학사제도,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교실의 풍경을 많이 바꾸었고 곧 실시될 고교학점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어른’을 지워 버린 빈자리에 홀로 서서, 청소년들은 이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청소년 문학의 변화
니콜라예바는 ‘성장기’란 아동문학의 근본적인 내용11) 이라고 말하며 아동문학을 거울-문학으로 이해할 때 사회를 비추고,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은 어떤 거울이 되고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니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는 다면체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제도권 국어/문학 교육 하에서의 읽기가 ‘주제 찾기’의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 까닭에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주제’는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다면적 해석이 가능하여 단일한 주제를 갖는 대신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 아래 의도된 교훈의 프레임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관점과 틀을 벗어나는 사고를 권한다.
또한 ‘사회를 비추는’ 기능에 있어, 거울의 선명도가 확연히 높아졌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최근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온 청소년의 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도 하고, 다문화, 디아스포라, 페미니즘, 성 소수자, 빈부격차 등을 심도 깊게 다루는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최배은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아동청소년 문학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하며 2016년 10월 미투운동이 시작된 이후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아동청소년 문학장에 있었던 페미니즘에 입각한 작품비평과 토론에 주목12) 한다. 평론가들은 “동화를 쓰는 여성작가, 페미니스트 작가”13) 라고 선언한 이현의 작품이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고찰하고 『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우리학교, 2018)에서 다섯 명의 여성작가가 ‘몸’이라는 키워드 하에 십 대 여성 청소년을 탐구하는 것에 주목했다. 청소년소설은 ‘스쿨미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교사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소녀의 용기』처럼 근래 일어난 실제 사건들을 환기시키게 되는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스쿨미투의 현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글연구소가 개발한 창작 희곡집 『여학생』(배소현 외, 도서출판 제철소, 2017)에서처럼 “여성청소년의 욕망과 불편을 폭로하고 들려” 주기도 한다.
청소년에게 허용되는 이야기와 그들이 실제 즐기는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허용된 청소년 문학’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공적으로 발화되지 못한 욕망이 이중적이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장에서 표출되는 현상이 가져오는 문제14) 도 존재한다. 최배은은 웹 플랫폼 등에서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이야기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허용하는 이야기 간의 차이가 커질수록 유해한 콘텐츠로부터 청소년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향유하는 이야기의 작품성을 온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면서 2019년 8월 포항의 한 중학생이 라이트노벨을 읽다가 교사가 ‘야한 책’을 읽는다며 급우들 앞에서 체벌하자 투신자살한 사건을 언급하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고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제대로 비평하는 일이 긴요15) 하다고 강조했다. 김지은도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소비자인 아동청소년이 독자로서 느끼는 책에 대한 고민이나 소감 등이 생산자인 어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생산자 역시 자기 작품이 아동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할 수 없기에 아동청소년 문학평론이 필요하다면서, 아동청소년이 느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어른들로부터 해방됐던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동청소년 문학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6)
일반적으로 청소년 문학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여겨져 왔으나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무거운 주제의식, 핍진성 강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진화해 나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문학과 청소년 문학 간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이는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실제의 청소년들이 변화한 까닭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의 청소년들이 기존과 매우 다른 세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멀티미디어와 폭발하는 데이터, 과잉 소통, AI가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2010년대 이후의 현실을 경험하며 자랐다. 기존의 청소년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성경험 평균연령도 해마다 낮아지고 있고 디지털성범죄가 확산되며 n번방 사건처럼 청소년이 피해자에 포함되는 사건들도 증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일어나는 사이버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자연히 그들이 느끼는 욕망, 문제의식, 불안의 양상도 변화하게 된다.
청소년 인권행동모임 ‘아수라노’,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위티’, “누구나 스스로 위기를 말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후 운동단체를 표방하는 ‘청소년 기후행동’과 같이 사회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고, 청소년 활동가들이 증가하는 것도 직접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가 증대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도 폭넓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겁게 그려낸 『오, 사랑』(조우리, 사계절, 2020), 퀴어-되기의 서사를 담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이필원, 사계절, 2021), 청소년 임신과 십대 미혼모를 다룬 『두 번째 달, 블루문』(김고연주, 창비, 2017)과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청소년 문학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진지하게 정면 돌파하며 다루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세란의 지적17) 처럼, 미성년인 아동청소년들에게 비극적 세상의 전망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없어 청소년 문학이 인간과 세상을 성찰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순간 문학 정신이 부재한 자리를 당위적 교훈으로 메꾸게 될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이를 과감히 벗어나 사회의 부정성을 그대로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이미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고 있고, 실제로 많은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발생되며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문학에서 당사자성이 높아지고 있음도 다수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청소년 문학은 “독서생태계, 사회문화 지형도, 청소년독자의 위상과 밀접히 소통하며 변화를 거듭”18) 한다. 따라서 이 모든 변화들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변모양상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군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문학의 작가군은 전보다 넓고 다채로워졌으며 신인 작가들도 대거 등장했고, 일반문학과의 구분도 희미해져 더 다양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도 여러 경로를 통해 쉽게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동청소년들이 자신이 소비하는 콘텐츠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공유하기도 쉬워졌다.
실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곳도 많아졌다. 국내 최초로 ‘어린이 심사위원제’를 도입한 스토리킹,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 문학상 프로젝트’(청문상 프로젝트)와 같이 아동청소년들이 직접 후보도서를 읽고 선정해 심사하는 문학상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읽고 싶은 콘텐츠를 결정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아동청소년은 능동적인 소비주체로 등극하게 되었고 청소년독자의 위상은 확연히 변모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의 언어로, 청소년들의 니즈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플랫폼인 북틴넷 (bookteen.net)과 같은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읽고 싶은 주제나 내용을 담은 책을 찾아보고, 원하는 책을 요청하기도 하며 관심 있는 도서를 SNS에 담거나 공유할 수 있다. 북틴넷에 공개된 소개글에 따르면, 청소년은 도서 큐레이션의 모든 이미지(포스트와 썸네일)를 만들고, 게스트 큐레이터로 책을 소개할 수 있다.
그간 한국 청소년 문학에서 “‘온건한 경청자’가 목적화되었”19) 던 이유는 오세란의 지적처럼 청소년 문학이 교과서에 거의 실리지 않는 제도권 국어교육과 청소년 문학의 괴리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김은하의 의견처럼 외국과 비교해서 우리 교육과정에서 자기 서사 쓰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20) 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서사화하고, 자기 생각을 직접 발화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예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문학장에서 청소년은 어떻게 새로운 읽기와 쓰기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을까?
영어덜트 시와 새로운 주체들
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시는 사실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작가’는 친숙해도 ‘청소년시작가’는 낯설게 느껴진다. 청소년 문학=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창비청소년 문학상’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미발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함께하는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역시 소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소년 문학은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청소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관점과 이해 가능한 미학적 형식으로 풀어놓은21)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 시도 이러한 개념 설명 속에 충분히 포함되나, 청소년 소설은 200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데 비해 청소년 시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청소년 시집은 드물게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씩 청소년 시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감정과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 자기만의 표현과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시 장르에 대한 선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주로 10대까지를 의미한다면 영어덜트는 성인기 전반의 사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제 청소년 문학과 성인문학의 경계가 전보다 흐려진 현실 속에서 ‘영어덜트 시’라는 표현이 ‘청소년 시’보다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청소년 시집들이 기성시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쓴 것들인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 청소년 시인들이 낸 시집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한 예인 김소희의 『열여섯 팔레트』(지식과감성#, 2023)는 실제 열여섯 살인 시인이 쓴 청소년 시집이다. 열여섯 소녀의 불안, 우울, 기쁨이 진솔하게 표현된 시집에는 청소년기를 실제로 관통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본 세상이 색깔 이미지와 함께 펼쳐져 있다.
한국의 공교육과 입시 제도는 교실을 매우 억압적으로 만들고, 학생들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정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초기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곤 한다. 이는 계속 누적된 문제가 되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통받는 20대가 5년 새 각각 127%, 86% 폭증했다는 심평원의 통계22) 에서도 드러나듯 우리 청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열여섯 팔레트』는 청소년 자신이 시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심리와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는 시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인 자신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시간에 끌려다니면서 허겁지겁 살다 보니”(4쪽) 일어나게 된 일들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시에서 자신의 감정에 색깔을 붙인다. 행복은 초록색, 불안은 보라색, 우울은 파란색, 희망은 노란색이라는 식이다. “바닷속 물고기들이 행복해 보여도/결국 모두 상어에게 잡아먹히고 말걸//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가 편해/ 가만히 있어도 밥을 주고/ 가만히 있어도 깨끗한 물로 바뀌거든//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어
항 안 물고기」)라고 좁은 시야 안에 머무르며 자발적으로 미래의 가능성들을 수거해 버리는 삶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가 그렇기를”(「열여섯 팔레트」)하고 기도하며 경쟁을 넘어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를 생각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되 연대를 모색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영어덜트 독자들의 시에 대한 관심도 전보다 높아졌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성질을 지닌 정서의 잠재태이자 정서적 이미지”23) 인 ‘정동’을 담아내거나 찾아보기에 적합한 장르가 바로 ‘시’이며, 독자들은 시를 통해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고, 내면의 감정을 발산할 수 있다. 시인이 남김없이 말하지 않고 남겨둔 빈자리에 자기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채워 넣고자 하는 영어덜트 독자들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20대 독자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각종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최근 시집 구매 통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20대 독자의 약진이며, 예스24 집계 결과를 보면 최근 6년간 시 종합 분야 및 한국 시 분야에서 전체 구매자 중 20대 구매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시 종합과 한국 시 분야의 20대 구매자 비율이 2018년 7%대와 비교했을 때 2023년 14%대로 2배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 이는 청소년들이 20대에 진입하며 시집 구매 독자층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위 집계 결과상 2023년 한국 시 20대 베스트셀러에서는 201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상위권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시 분야의 중요한 독자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20대가 세대적 공통분모를 가진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경험과 감정, 신선함에 공감하고 몰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의 변화와 사건들은 그 이전 세대와 잘 겹쳐지지 않는 지금의 영어덜트들의 특성을 형성했고, 그들은 기존과 다른 경험과 감각,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시대에 대한 동세대적인 공감대를 원한다.
이에 따라 영어덜트들의 고민과 처해 있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지영 시집 『최고는 짝사랑』(쉬는시간, 2023)은 쉬는시간 청소년시선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미 청소년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 『해피 버스데이 우리동네』 등을 펴낸 바 있는 신지영 시인은 이 시집의 42편의 시를 통해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재기발랄함, 명랑함, 귀여움 대신 이 시집 속에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이 가득하고 쉽게 위안이나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시집의 청소년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거나 붙들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연약해서 “손으로/ 꾸욱/ 누르고// 발로 살짝/ 짓이겨도/ 뭉개진다// 참 쉬워/ 너 같은 아이”(「잎」)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냉혹해서, “여름은 남의 탓/ 차가운 비명이 도로 위에 익어” 가고. “미처 건너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 무늬처럼/ 눌려 있다// 썩기 전에 말라붙어 버린 눈알 위로/ 길 잃은 파리들이 내려앉는다”(「한심한 여름」)고 묘사되는 끔찍한 장면이 그저 ‘한심’하게 치부된다. 그러나 죽은 고양이를 보며 청소년 시적 화자는 “자라지 못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준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멈춰 있는 중”(「모범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망치지 않고/ 누구도 아프지 않지//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사랑/ 최고는 짝사랑!”(「최고는 짝사랑」)이라는 말은 사실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한국 사회의 아동청소년들은 많은 것들에 속박되고 입시 제도 안에 갇힌 채 시스템 안에 규율된 존재들이다. 이 시집 속 아동청소년 인물들은 부조리, 방임,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아래 놓여 있고 무의미하거나 억압적인, 때로 폭력적인 일상 속에 멍들고 상처 입은 모습이다. 이 시집의 2부 “파벨라의 고양이”에서는 아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파벨라(브라질의 빈민촌)”와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나는 깨진 아이//누구도 붙여 주지 않았다.”(「깨진 아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삶은 “뭉개진다는 거 참 쉽더라 (…) 이리저리 치이다/ 속이 다 터져버려/ 뭉개진 내가//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하루가 썩어가는지/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벌레들이 몰려든다”(「내 자리는 어디에」)는 식으로 그려진다. “세상이// 뺑글/뺑글// 돌아/ 돌아// 작은 방에 한데 엉켜서// 마구/ 마구를 맞은 것처럼”(「빨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어느 날은 나보다 부쩍 커져서/ 언제나처럼 표정은 숨기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나보다 더 나같은 어둠”(「그림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문제 없다고// 거친 말처럼/ 나 세상에게 달려갈 뿐인걸”(「말 있는 말」)이라고 말하며 삐뚤어져도, 어긋나서도, 망가져서도 자라난다. 신지영 시인은 시집 끝의 산문에서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벌어진 채로 흉터가 되지 못해도 아이들은 자신을 키워낸다.”라고 쓴다. 미화되지 않은 사실적 고통, 날것의 불안과 어두운 현실, 두려운 미래가 그들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실이며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지금의 영어덜트 독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소극적 독자가 아니라 시가 창작되는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최근 독자들이 시를 향유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는데, 이 역시 20대 독자들의 증가와 관련된다.
시를 자기 방식으로 읽고 편집 및 공유, 큐레이션까지 하려하는 적극적인 젊은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소셜미디어의 활성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이 독자들은 시를 SNS에 올리며 자신의 독서 취향을 공유하고 소통하려 한다.
강윤정 문학동네 편집부장은 2024년 상반기 문학동네 시인선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고선경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의 성공을 두고 “SNS에서 10대, 20대로 추정되는 독자들 사이의 입소문만으로 꾸준히 판매된 인상적인 사례”25) 라고 말했다. 김민정 시인은 “흩뿌려진 시구와 단어에서 일부만 취할 수 있는 시는 특히 인스타그램 시대에 독자를 주체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장르”26) 라고 보고 있다.
‘청소년 문학’은 새롭게 점검되고 고찰되며 그 외연이 확장될 필요가 있고, 그에 대한 비평 역시 더 진화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영어덜트들은 새로운 읽기 주체와 창작 주체로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어덜트들의 일상과 문화, 감각은 이미 한국 현대시에 스며들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검토와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새로운 미래 주체가 될 영어덜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며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 창작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들의 감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앞으로의 문학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010년대 중후반 시집들이 “세월호 이후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27) 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문단의 새로운 창작 주체가 되어가고 있고,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학장 안에 들어와 있다.
- 1) 마리아 니콜라예바, 조희숙 외 역,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14, 104~105쪽.
- 2)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 한국근대가족과 페미니즘』, 또하나의문화, 2003, 111쪽 참조.
- 3) 오세란,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고 싶다」, 『어린이와 문학』 2016년 7월호 참조.
- 4) 오세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 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59쪽.
- 5) 이융희, 「순문학이란 없다 2」, 웹진 《텍스트릿 TEXTREET》, 2019. 9. 7.
- 6) 오세란, 앞의 책, 2021, 133쪽.
- 7) 사회학자 김호기의 표현이다.(김호기, 「굿바이, 2010년대!」, <경향신문>, 2019.12.1.)
- 8) 하버드 대학 교수 쇼샤나 주보프의 용어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는 인간 행동이 만드는 데이터를 기업이 직접 수집해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 9)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 조사』, 교육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20.
- 10) 윌리엄 스틱스러드, 네드 존슨,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자기주도성’은 ‘성공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 11) 위의 책, 124쪽.
- 12) 최배은, 『오래된 백지』, 소명출판, 2024, 137쪽.
- 13) 이현,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창비어린이』 여름호, 창비, 2017, 70쪽.
- 14) 최배은, 앞의 책, 225쪽.
- 15) 위의 책, 같은 쪽.
- 16) 송석주 기자, “[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독서신문>, 2020. 3. 3.
- 17) 오세란, 앞의 책, 2021, 169~170쪽.
- 18) 위의 책, 81쪽.
- 19) 김영희·김은하·오세란·김건형 대담, 「독서들로부터- 페미니즘과 청소년 독서 교육 현장」, 『문학동네』 봄호, 2021 중 김건형의 말.
- 20) 위의 글.
- 21) 오세란, 「청소년소설의 장르 용어 고찰」, 『아동청소년 문학연구』 통권 6호, 2010, 149쪽.
- 22) 박양명 기자, “우울한 20대, 우울증·불안장애 5년새 127%·86% 폭증”, <메디컬타임즈>, 2022. 6. 24.
- 23) 김금내, 「시 텍스트 감상에서 독자 정동의 교육적 접근 방향 탐색」, 『한국문학교육학회』 75, 2022, 47쪽.
- 24) 김태완 기자, “오늘은 “세계 시의 날”… 최근 6년간 20대 시집 구매 비율 늘어”, 『월간조선』, 2024. 3.21.
- 25) 오경진 기자, “인스타그램 시대, 詩가 변했다… 한없이 가볍고 감각적으로”, <서울신문> 2024. 7. 16.
- 26) 위의 기사.
- 27)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대담,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호, 442쪽 중 김소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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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더 잘 실패하기 김근의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에게서 에게로』는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본연의 기능에는 관심이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거부하고 의미의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문시가 많고 시의 행도 긴 편이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자유연상을 따라 말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의미는 저 멀리 달아난다. 출처를 규명할 수 없는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를 끌고 간다. 김근의 시는 무언가 선명하게 비추거나 재현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을 끌어당긴다. 김근의 시는 빛에서 어둠으로 이행 중이다. 시집의 맨 처음 놓인 「이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준 적 없는데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이사」) 이 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집주인이지만 “흘려놓은 흔적들”로 존재하는 당신을 점점 기다리고 당신의 어둠을 단속하다가 급기야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들어” 간다. ‘나’는 당신과 어둠 속에서 오는 말들에 매혹당한 자이다. 「이사」의 화자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 않는 당신의 어둠 속에 살기로 한다. 대상을 알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살던 집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저 밝은 곳에 남겨”(「이사」)진다. 이 시집은 독자 역시 의미의 집을 나와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실체가 드러나도록 대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러나 대상을 명료하게 하는 일은 그것을 가두고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는 다른 지각과 인식을 만난다. 그것은 언어가 수행하는 명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가려진 문장」)이 그렇게 태어난다. 서러우니, 에는 어떤 거리들이 몰아쳐와 들러붙는 것이어서 생으로 떨어져 젖은 이파리 같은 것들 잘은 또 떨어지지는 않기는 않았기로서니 아프니, 쪽에 살아만 있는 꽃향기 자욱만 하고 지독만 하고 몽롱한 봄날 하늘 갑작스럽게 날 흐리고 스산하고 주어도 없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형들 거기로 서러우니, 하는 목소리도 아프니, 하는 목소리도 죄 빨려들어가더란 이야기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 「서러우니, 아프니,」 중에서 언어는 편리하지만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호이다. ‘서러우니’, ‘아프니’는 ‘이파리’와 ‘꽃향기’처럼 가깝고 서로 감각적으로 구분되는 말이지만 이 말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헝들”로 “죄 빨려들어가” 버린다. 의미 기능에 충실한 언어는 쉽게 관성의 늪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거느리는 느낌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는 소거된다. 통상적인 문법은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는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를 외면한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바깥”에 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자는 기존의 문법이나 재현에 의존한 완성이 의미가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완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김근의 시는 부사어를 좋아한다. 부사는 문장의 완성과 관련 없지만 상태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확신할 수 없고, 희끗, 그저 희끗, 희끗거리는”(「희끗」),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어슴푸레」) 모르는 상황에 어울린다. 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된 말은 유희적이다. 언어는 의미 대신 리듬으로 흘러넘친다. 김근의 시는 “‘너’가 있었다”는 문장을 다시 쓴다. “너는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있었다고/추측된다 너를 둘러싼 적막이 얼마나/시끄러웠는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다만/있었고 있었다고 추측될 뿐 지금 없다 없었다고는//차마//추측되지 않는다”(「혼자 있는 사람은」)라고. 무엇을 확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너’는 ‘사이’에 있고 추측에 불과하다. ‘사이’는 사실과 추측, 현재와 과거, 적막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김근의 시적 화자는 말할수록 이방인이 되어간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고 벗겨내도 벗거내도 다는 벗겨지지 않는 그저 얼룩인” “난 당신이 방금 봤던 내가 확실한 거야?”(「사이사이」). 언어가 실재와 상관 없는 추상적 기호라면 이 세계도, ‘나’, ‘너’, ‘당신’도 이름만 있을 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사이사이」는 매트릭스처럼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 ‘사이’의 존재론을 펼친다. “누가 우리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만 기록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은 주체의 확고함을 의심한다. 화자는 우리를 “시 안에서 꼼짝없이 가둬놓고 거기 바깥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넌, 넌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이’는 안과 밖, 말하는 자와 글쓰는 자가 지워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는 그저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게 아니오?”(「정류장」).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개념이다. “영원히 지연”되는 기다림 속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윤슬」)다. 문법적 주어만이 아니라 단일하고 견고한 자아 정체성으로서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김근의 시에는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켜켜이 깃든 누군가”이고 그래서 ‘나’라는 관념 역시 “그만 산산이/깨어져버리”(「거기, 없는」)고 만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오류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지닌 관념과 인식, 생각들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임시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곡우’라는 낱말이 “본뜻과 헤어져버려 본뜻이 무엇인지 떠올려지지도 않게끔. 떠올려봤댔자 이미 모르게만 되어버”(「곡우」)리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뚜렷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특정할 수 없는, ‘에게서 에게로’ 가는 과정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언어와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근의 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모른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세 사람이」). 그의 시는 주체의 의도와 의지를 놓아버린 채 낱말들의 중얼거림에 시를 내맡긴다. 이를 두고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을 불신하는 해체주의 실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수동성이 “반짝임과 반짝임 사이 어둠 속으로”(「윤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 틈새가 시의 자리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라고 말했다.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익숙한 관념을 벗어나 의미의 불안정한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는 시도이다. 시는 애초의 의미를 허물고 “잘 잘못 써진다. 비로소 시는 잘 실패한다”. 김근의 시가 증명하듯 의미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지만 “다시 더 잘 실패”하고 “더 더 더 실패”(「세 사람이」)하는 형식으로서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에게서 에게로’, 낯설고 모르는 곳으로. 잘 실패하는 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최전선이다. 다행히 김근의 시는 잘 실패하고 있다. 시, 자기 구원의 여정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이루어진다”(「진흙연못」). 이 구절은 김태형의 시의 중심 문장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의 음악에 자기 심장 뛰는 소리를 포개어 놓는다. 살아 있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화자들은 기꺼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서정시의 문법은 세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다. 김태형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성찰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흑백고원」에서 늙은 나무들이 화석이 되어 비와 햇빛을 견디는 모습을 “자기 자신을 견디는 동안”으로 이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계기이다.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심장을 내가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과 후회가 “부는 바람”에 지나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는 바람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온통 황막한 벌판”에 서 있는 늙은 나무들에게서 시작된 삶의 지혜이다. 자연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을 일깨워우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넘쳐흐르고도 남은 말이 있었으니/물고기 한 마리가 느닷없이/네 푸른 입속으로 뛰어들었다”(「잉어」)도 그런 경험에 해당된다. “자꾸만 차오르고 넘쳐흘러 튀어”오르는 마음 속의 말은 잉어와 같다. “어느 때인가/나를 치고 올라”오는 말과 잉어의 속성은 은유를 통해 연결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같다는 인식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작용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변 동물의 생태는 그에게 삶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바닥처럼 자기를 움쳐쥐고 있다”(「도마뱀」)거나 “쫓기다 살아남은 고양이 한 마리/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사체를 냄새 맡는 고양이”(「허리가 긴 흰색 고양이」), “제 울음소리를 부러진 발톱으로 할퀴어 놓기만 하다 가는 고양이”(「야윈 고양이의 달」)는 관찰자의 예상을 비켜가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속으로 울음을 품은 것이 고양이만은 아닐 것이다. 김태형의 시에서 ‘나’와 동물의 거리는 가깝다. 예측불가능한 삶의 속성과 훼손되는 생명의 실상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동물을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행자이다. 그는 “잔물결이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내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다 들려주고 가는”(「여행자」) 풍경 속에 있다. 김태형의 시적 화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흑백고원」)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을 고백하는 대신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 만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여정, 이번 시집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에서 만난 ‘죽은 개’는 인간의 희로애락도 한 시절이며 모든 것들이 소멸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가만히 알려주고 있다. “나 역시 나를 지나가고 있”(「죽은 개가 내 이마에 침을 흘리며 지나간다」)다. “나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달의 뒤쪽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다」)는 인식 역시 그러한 자기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김태형 시의 화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거나 듣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성찰의 힘을 잃지 않는다. 느릿느릿 커다란 트럭이 앞서 가며 모래와 부서진 자갈을 뿌린다 경사진 길을 오르지 못할까 싶어 바짝 따라가다 바람이 얼어붙은 곳까지 다다랐다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은 절벽을 다 내던진다 누가 이곳까지 올라와 긴 숨결을 한없이 내려만 놓고 있었는지 내 입술에 묻은 하늘마저 파르르 떨린다 한차례 묵은 눈가루가 흩날리자 한 줌의 그림자가 햇볕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벽은 절벽 앞에 서 있다 그러자 묵은 눈이 또 내린다 눈은 내리고 나는 허공에다 입을 벌리고 저녁으로 서서 하얀 입김이 되어 있다 ― 「어느 절벽」 전문 절벽은 절정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이 시의 절벽은 말하는 이의 마음 풍경처럼 읽힌다. 바람이 얼어붙고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리는 곳. 절벽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결빙과 해빙이 동시에 일어난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나무는 결박된 것을 스스로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을 만든다. 절벽 위에서는 절벽도 절벽을 다 내던진다고 한다. 절벽은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는 고백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절벽이 어디쯤 있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절벽 앞이다. 다 놓아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다 놓아줄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은 정직하고 소중하다. 고통 없이는 그런 깨달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쌓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묵은 눈이 또 내린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이 되는 ‘나’는 가볍다. 절벽 앞은 두려움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고, 숨 쉬는 것처럼 그렇게 삶은 계속될 테니까. 시집의 표제작인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에서 마지막 양 한 마리는 자기 자신이다. 고작 열 마리 뿐인데도 사라진 양과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어렵사리 양을 세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는 약간의 우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라는 대목은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니, 하지만 양을 세는 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반대로 이해하자면 마지막 양 한 마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절벽까지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양을 찾는 데만 급급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열 마리의 양을 세는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내면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은 자기 구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나의 일과”(「저물녘에 돌 하나 던지다」)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라는 통찰을 얻는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 선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경험이라 울림이 있다. 김태형의 시가 좋은 서정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무엇이라도 곁에서 곁에서” 듣기 위해 “내 작은 귀는 햇빛처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있었”(「귀」)고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벽의 거대한 허공에 맞먹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있다. “마냥 길을 따라 흘러가다 길이 되어 버릴” “바람만을 따를 뿐인”(「진흙 연못」) 이 커다란 자유의 여정이 계속되길 바란다.
정수리 왼쪽 아래에 털이 하나도 나지 않은 동그라미가 있다. 막에 싸인 듯 매끄럽고 건드리면 그 아래서 팔딱팔딱 박동이 느껴지는 지름 사 센티미터의 원형 탈모. 이 년 전 아빠의 가정폭력과 함께 원이는 머리를 뽑기 시작했다. "따끔하면서도 개운한" 촉감이 주는 안정감, "묘하게 시원한" 기분에 중독된 것이다. 개학 날 원이는 실핀과 스프레이로 탈모 부위를 공들여 가린다. 같은 반에는 "항상 연예인처럼 예쁘고 깔끔한" '언진스'가 있다. 아이돌 그룹 이름에 '언중여고'를 조합한 것이자, '언니들 진짜 스바라시'의 줄임말이다. 언진스는 멤버 수를 다섯으로 맞추기 위해 "적어도 쪽팔리지는 않을 아이"인 원이를 "간택"하여 무리에 끼워준다. 그러나 서열이 가장 낮아서 늘 겉돌고 무시당하는 것은 물론, 급식실에서는 네 명이 마주보고 앉는 탓에 원이의 앞은 구멍처럼 텅 비어 있다. 자리를 바꾸는 날 원이는 자신의 "지위를 바꿔줄" 언진스의 리더 세빈과 가까워지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행색이 독특하고 친구가 없는 모로 근처에 앉게 된다. 필사적으로 무시해도 모로는 쉴새없이 말을 걸고, 머리에 있는 원이의 실핀도 들추고 만다. 한편 원이는 세빈의 닦달에 못 이겨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언진스의 "수준에 맞는 피드를 꾸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지만, 아무도 원이의 게시물에는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는다. 심지어 세진이 시키는 대로 교복 셀카를 올렸다가 남자들로부터 성희롱 메시지를 받게 된다. 종례가 끝난 뒤 울던 원이를 모로가 챙겨준 것을 계기로, 원이는 모로에게 엄마가 집을 나가게 된 사정을 포함해 그간의 개인사를 모두 털어놓는다. 이후 아빠의 통제가 더욱 심해져 "탈모고 뭐고" 그냥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는 원이에게 모로는 바리캉을 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둘은 돌연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원이는 청량리역 화장실 칸 하나에 모로와 함께 몸을 구겨 넣고서 번갈아가며 졸다가 사람들이 없는 새벽에 머리를 삭발한다. 가출비 십일만 원을 탕진하며 함께 하루를 보낸 밤,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모로를 몰래 뒤따라간 원이는 모로의 반지하 집에 다다라 삭발한 모로 엄마를 목격한다. 장애가 있는 모로 엄마의 사정을 알고 스스로 졸렬함을 느끼면서도, 원이는 모로가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 했던 건 아닌지 의심하며 불안에 사로잡힌다. 다음날 원이가 삭발한 머리로 전교생 앞에 등장하자 언진스는 원이를 찍어서 인스타에 올린다. 모로가 언진스에게 욕을 하자 원이는 "정작 화내야 할 상대"는 따로 있음을 알면서도 "가장 만만한 상대인" 모로에게 성질을 부리고 주먹을 휘두른다. 이후 모로가 폭력에 오래 노출되어 있던 가정사와 자신이 원이에게 다가갔던 이유를 고백하고, 원이는 오열하며 후회하지만 인스타에는 이미 "레즈 개싸움 직관ㅋㅋㅋㅋㅋㅋㅋ"이라는 글과 함께 세빈의 영상이 올라 있다. 원이는 게시물을 지우기 싫다며 뻗대는 세빈에게 달려들어 폰을 박살내고, 학부모 상담을 위해 학교로 온 아빠의 거짓말에 "역겨움을 느껴" 아빠가 불법 토토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뒤쫓아오는 아빠의 고함을 뒤로한 채 원이는 모로의 손을 잡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빗속을 마구 달리던 두 아이는 둘의 아지트인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몸을 구겨 넣는다.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모로는 연고를 바르듯 탈모 부위를 문지른다. 원이도 모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는다. 호흡을 할 때마다 빠각빠각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휘청이는 소리가 두개골 닫히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특정 인물의 선의에 전개를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나, 결말부 편지 형식을 통해 모로의 서사와 속내를 모두 설명해주어 소설적 형상화와 긴장도를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기는 소설이다. 그러나 또래 집단 내의 미묘한 계급의식과 알력에서 빚어지는 심리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가정에서든 학급에서든 '지위에 걸맞은' 인간이 되기 위한 생존 싸움 속에서 스스로 숨쉴 틈을 확보하려는 인물의 절박함을 성실히 따라간다. 신선하고 매혹적인 묘사 또한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한다.
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도스토옙스키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작가들은 대개 ‘고통의 향유’를 통한 미학적 실천을 통절하게 수행했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문학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유하는 지독한 역설을 수행할 때,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예비하며 비극의 숭고미의 어떤 극점을 알게 된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추문화하며, 독자와 더불어 정녕 인간적인 심연의 질문을 열어나간다. 한강 문학의 바탕 의식은 그러하다. 2. 영매(靈媒) 작가와 고통의 법열(法悅) 고통의 순간은 널려 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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