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봄호(제18호)
고통이 사랑일 수 있을까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0.
영상이 아닌 소설이 지닌 서사 윤리가 따로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시대 소설의 윤리적 고민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덜컥 수락했으나, 글을 써야할 시점에서야 제대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 혹은 말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적 참사,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기부를 모금하는 영상 속 누군가의 고통. 그러한 영상 앞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에 바빴다. 저 타자의 고통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두려워서? 타자의 고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이 싫다는, 도덕적인 척 하는 자신이 실은 그저 무책임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그저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으려는, 얕은 연민일 뿐인.
그러나 타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그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타자의 고통을 ‘본다’는 것과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인정은 기자로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해야 할 때 겪어야하는 윤리적 고민-‘어떤 고통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저널리즘’이 타자의 고통을 “볼거리로 전락”시켜 “폭력적으로 소비”하는지, 아니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 “사회적 공감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 방향이 갈라지는 “개별의 저울질”은 하나의 고통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정말이지 매번, 미지의 영역”1)일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치열한 고민을 거쳐 재현된 타자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할까. 앞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하는 영상을 내가 피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피하기 전에 이미 보아버린 이미지가 있다. 정지된 이미지는 잘 지워지지 않고 때때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수전 손택은 “최초의 자극만 제공”하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타자의 고통이 나, 우리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2)기 위해서는, 사진의 ‘충격을 주는 능력’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지만을 기억하면 그 이미지로는 표현되지 않은 무엇, 이를테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서사’가 요청된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3) 즉, 하나의 이미지에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 고정된 이미지 속 타자의 고통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고통이 왜 일어났고, 어떠한 성질의 고통인지, 그 고통을 당한 자의 내면은 어떠한지 등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
물론 모든 서사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공감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공감해보려 할 때, 그것이 진심이라면 곧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나는 타자의 고통을 모른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일 테니까. 그렇지만 수전 손택이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4)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이미지의 충격에서 나아가 이해와 행위를 위한 ‘서사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리고 김인정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의 “기억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며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나갈 때 “슬픔을 나눈 공동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5), 나는 두 사람의 말에서 이미지 속 ‘너’의 고통을 그저 ‘너’의 고통으로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나’와 ‘우리’가 무언가를 행해야만 한다는 다급한 호소를 듣는다. 타자의 고통을 단순히 ‘고통의 스펙터클’로 ‘구경’하거나 ‘좋아요’를 누르고 넘어가 버리지 않는, 그렇다고 타자의 고통을 마치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고통의 심연을 봉합해버리지도 않는, 어떤 방향이 있을까.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향해, 타자의 고통과 함께 어떤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정말로 서사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영상이 아닌 소설의 서사만이 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는 어떤 것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저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소설들이 몇 권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6)도 그 중 하나로, 소설 속 ‘인선’으로 하여금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208쪽)라는 느낌을 처음 경험케 한 것은 제주 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견된 뼈들을 담은 사진을 본 후였다. 아마 소설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지점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1.
총 3부로 구성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한 분기점이랄 수 있는 『소년이 온다』7)로부터 7년이 지나 발표되었다.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광주’를 서사화했던 작가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제주 4·3’과 ‘보도연맹 사건’에 가닿는다. 역사적 사건이 지닌 고통스러운 진실에 더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무거운, 마치 물기를 머금은 눈 한 송이 한 송이들을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감각적인 문장들로 인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는 마치 깊은 눈밭에 한 발 한 발 발을 빠뜨리며 힘겹게 나아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고통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이 소설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시작점에 놓이기도 한다. 평론가 황정아는 역사적 사건이나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때 “오로지 고통의 강렬함에 의지하는 방식”은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대전제를 고민하는 ‘나’를 중심에 세우고 그 고민의 진정성으로 재현의 책임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즉, “재현의 윤리” 자체에 빠지다보니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8)하는 질문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 평론가 이소는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으로 향하는 대신 철저히 감각의 차원에 천착”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역사와 사회를 고통의 감각으로 보는 것에는 늘 위험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평자 모두 감각적인 차원에서 제시되는 ‘나’의 재현에 대한 고통이, 역사적 사건 자체 혹은 그것을 재현하는 형식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의 ‘모호성’, ‘애매성’에 대한 형식에 대한 언급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이는 특히 2부에서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어떻게 갑자기 제주에 있는 ‘나’-경하 앞에 나타났는지, 인선이 영혼으로 찾아온 것인지, 2부 자체가 ‘나’가 꾸는 꿈의 일종인지, 혹은 ‘나’가 죽은 후 영혼으로 인선을 찾아온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는 “감각의 생생함에 비해 경하와 인선이 4·3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9)거나, 특정 대목의 “묘사들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설정의 모호함”으로 인해 “전체적으로는 흐릿한 인상”10)에 그치고 만다고 평가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두 평론의 핵심적인 비판을 다소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이 소설은 구체적인 시공간을 지닌 정치적·역사적인 사건을, 모호하고 애매한 설정과 더불어 ‘나’라는 개인의 감각적인 고통의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위험이 있지 않은가?’일 터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고통의 영역 바깥으로 확장될 가능성”11)을 찾는 일이 이 소설에서 어려울 수도 있지만, “고통의 진정성이라는 센티멘털리즘의 회로”12)에 갇혀버릴 위험이 이 소설에 있을 수도 있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어려움이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캄캄한 허공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냐고, 그러므로 바로 저 ‘한 걸음’에 주목해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2.
앞서 『소년이 온다』가 한강 작품 세계의 분기점이라고 했거니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부터 다루어보아야 할 것 같다. 『소년이 온다』를 관통하는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13)를 놓고 볼 때, 기존의 한강 소설이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에 방점이 찍혀있었다면, 그래서 인간의 근본적인 폭력성에 주목하면서도 그 폭력성을 부정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고, 그래서 인간의 저 도저한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솟아나는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향해 어떻게든 한 발자국 더 가보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쩌면 저 폭력과 사랑, 둘 사이에 놓인 것이자 둘 사이를 연결하는 끈이 바로 ‘타자의 고통’일 수도 있을까.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민하는 ‘나’는 『소년이 온다』 이후 한강 소설에서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다음해에 발표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희곡을 쓰던 ‘나’는 자신이 타자의 “고통의 바깥에 있다”14)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을 그 타자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소설의 끝에는 그 재현의 불가능성에 갇혀 있지 만은 않은 순간도 존재한다.
이제 손을 꺼내 눈을 향해 내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손은 얼마나 차가울까. 거기 닿은 눈은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15)
인간은 “시간에 갇혀”(39쪽) 살아가는 존재이고 죽음은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는 결코 그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소설 속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렀다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라고(12쪽)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이 소설 속에는 있다. 우리에겐 시간의 흐름에 갇힌 채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시간뿐 아니라, 때론 그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서로의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 서로의 “평화를” 기원하는 순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은 ‘그’와 살아 있는 ‘나’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시간에 갇”힌 ‘나’가 “시간 밖”(42쪽)에서 잠시 ‘그’와 만나는 순간이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과 ‘눈 한 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의 만남. 소설의 끝에 이르러 타자의 고통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한계선에서 한 발을 더 내딛고자 한다. 이 소설의 다음 발표 작품인 『흰』의 ‘나’가 한 고백처럼.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16)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없어 글쓰기를 중단했던 ‘나’는, 그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다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런 ‘나’는 더 이상 ‘재현의 윤리’에만 갇힌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음을 각오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애도하고자 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타자를 애도하고자 하는 주체는 “자신의 전환”17)을 받아들이는 주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계속해서 한강의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나’는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기보다는, 타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3.
그렇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의 ‘나’는 어떨까. 이 소설의 ‘나’ 역시 『소년이 온다』 이후 타자의 고통 바깥에 있다는 사실로 고민하던 ‘나’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나’는 ‘인선’으로부터, 인선은 자신의 어머니인 ‘강정심’으로부터 역사적 사건과 그 속에서 살아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전해 듣는다. 전하는 이도 전해 듣는 이도,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도 고통스럽게 하는 이 ‘고통의 재서술’ 속에는, 그러나 고통의 순간뿐 아니라 그 고통에 필적하는, 그 고통을 비집고서라도 솟아나고야 마는 ‘사랑의 재서술’이 또한 흐르고 있다. 죽음에 가까워져 가던, 차라리 죽고 싶어 하던 ‘나’가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134쪽)가 있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가까스로 비껴난 것처럼. 인선의 아버지가 한 눈으로는 인선을 보면서 동시에 다른 한 눈으로는 인선의 “몸 너머 다른 빛”(165쪽)을 보았던 것처럼. 뒤돌아보면 돌이 되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건지고 싶은 사람”(242쪽)이 있다는 이유로 기어코 뒤돌아보고야 마는 심정처럼.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날 때 믿을 수 없게도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316쪽) 사실처럼. 이 소설에는 죽음과 삶, 어둠과 빛, 고통과 사랑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양립하는 혹은 서로를 향해 스며드는 짧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타자를 향한 ‘나’의 그 뒤돌아봄-사랑 이전에, ‘나’를 향해 뒤돌아보는 타자의 사랑이 먼저 있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타자가 ‘나’를 뒤돌아보고 삶-초를 건네주었다는 것, ‘나’는 몰랐으나 바로 그 행위로 ‘나’를 이미 한 번 살렸다는 것. 이 소설은 ‘나’와 타자가 서로를 뒤돌아보며 서로에게 초를 건네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이미-먼저 구했음을 증명하는 서사다. 경하, 인선, 새들-아미와 아마, 강정심, 강정훈, 아이 등 그 모든 관계들이 마치 비와 바다와 눈이 순환하듯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이야기다.
4.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는 당사자의 직접 발화가 아닌 누군가를 거친 간접 발화와 누군가로부터 전해진 자료들을 통해 서사가 진행되는데, 이로 인해 서사에는 명백하거나 확실한 인과관계보다는 무언가 빠진 것 같고 불충분한 것 같은 어떤 ‘빈틈’이 발생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의 직접성으로서는 부적합할 수도 있을 이 빈틈은, 그러나 그 말이나 자료를 전해받는 이로 하여금 “두 걸음의 간격”을 의식할 것을 요청한다.
인선의 발자국만 디뎌갔지만 운동화와 바지 밑단이 젖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두 팔을 뻗어 균형을 잡으며, 두 걸음의 간격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며 나는 계속 나아갔다. 속눈썹에 눈송이들이 맺힐 때마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 선득함이 인선에게도 느껴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뺨에도 이 눈이 녹아 스며드는지. 그녀가 혼이라면 어디까지 나를 데려가려 하는지. (305쪽)
위 대목에서는 ‘나’가 초를 든 ‘인선’을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고 있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의 느슨함-모호성으로 인해 독자는 이 소설 전체를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게 된다. 타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겠다는 오만도, 타자의 고통과 나는 무관하다는 방기도 아닌, 타자의 고통에 대한 하나의 자세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앞선 황정아와 이소의 논의에서 비판적으로 제기되었던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사적 애매함이나 모호성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뼈에 구멍이 있기에 새가 날 수 있듯, 눈 한송이와 한송이 사이에 빈 공간이 있기에 자기 자신인채로 서로 결합할 수 있듯, 서사의 모호성-빈틈은 독자가 이 서사에 개입하고 따라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특성을 『소년이 온다』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소년이 온다』 소설 속 에필로그의 ‘나’는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 속 인물의 고통이라는 타자를 마주하여 책임을 지고자 한다. 에필로그의 ‘나’가 ‘작가의 말’이 아닌, 소설 속 또 하나의 장인 ‘에필로그’에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 자체를 타자로 마주하여, 이 소설에 책임을 지고자 소설을 쓴 자로서의 ‘나’를 내세워야만 했을 수도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로 말해보자면, 주체의 기존 존재 방식을 문제 삼고 주체로 하여금 거부하기 힘든 요구-명령을 내리는 타자와 주체의 관계는, 기존 한강의 소설에서는 주로 소설 속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를 변곡점으로 하여 이 관계는 소설 속 인물과 작가로 추정되는 ‘나’ 사이로까지 이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면 그 이어짐은 독자에게까지 확장된다. 소설 속에서 ‘나’가 ‘인선’이라는 타자를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듯, 독자 역시 그런 ‘나’의 걸음을 역시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게 된다. 즉, 이제 책임의 주체로 서야 하는 것은 바로 독자가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독자에게 책임의 주체로 설 것을 요청한다. 직접성과 즉각성이라는 영상 및 이미지의 특성에 맞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간접성과 애매성이라는 ‘틈’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틈을 상상하고 생각하게 한다. 타자의 고통과 온전히 겹치지도, 그렇다고 그 발자국을 끝까지 따라가보는 일을 포기하게 두지도 않는, 온전히 적극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특유의 방식으로 독자를 고통과 사랑의 서사에 참여시킨다.
5.
앞서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과 그 폭력에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사랑, 그 둘 사이에 ‘타자의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었다. 소설 속 인선은 강정심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뻐근한 사랑”을 느끼며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쪽)를 깨닫는다. 잔혹한 폭력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고통의 그 크기만큼 사랑도 그만큼 크다는 뜻일까. 나는 사랑하는 이를 따라서 과감히 죽어버리고 싶지만, 그 사랑하는 이가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 바로 내 기억 속이기에 차마 쉽게 죽어버릴 수도 없는. 혹은 나의 책임을 요구하며 나로 하여금 끝까지 살아가게 하는. 바로 그것이 ‘사랑’인 것일까. 그렇게 “두 세계를 사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한 곳을 정처(定處)로 둘 수 없기에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엇나가고 비틀리는 날들이겠지만, 또 그 나날들 속 어떤 한 순간에는 잠시 어딘가에 머물기도 할까. 그 사랑의 몇 몇 순간들로 고통의 나날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랑하는 자가 고통 받는다는 것, 사랑하는 자만이 기꺼이 고통을 받고자 하리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본다. 사랑은 고통을 요청하는가? 아니, 고통이 사랑을 요청하는가? 아니, 어쩌면 저 뿌리 깊은 인간의 ‘폭력성’에 맞서야할 때 ‘고통’과 ‘사랑’은 동시에 요청되는 것일까?
- 1)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웨일북, 2023, 17쪽.
- 2)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쪽.
- 3) 위의 책, 135-137쪽.
- 4) 위의 책, 154쪽.
- 5) 김인정, 같은 책, 262쪽.
- 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 표기.
- 7)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소년이 온다』가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한 분기점인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한 편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염두에 두기에, 그리고 이미 많은 논의들이 주목한 바 있는 바, 『소년이 온다』에 이르러 기존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전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소설의 ‘에필로그’에 역시 그간의 한강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로 추정되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일단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재현’과 ‘작가로서의 나’라는 특성은 이후 발표된 소설들에서도 나타나는 바, 이 두 특성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직은 구체화하지 못한 필자의 생각이다.
- 8) 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26쪽.
- 9) 이소, 「제주에서 보낸 한철」, 《쓺》 2022년 상권, 108-109쪽.
- 10) 황정아, 위의 글, 25쪽.
- 11) 이소, 위의 글, 109쪽.
- 12) 황정아, 위의 글, 27쪽.
- 13) 한강, 『소년이 온다』, 95쪽.
- 14)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문예중앙, 2015, 45쪽.
- 15) 위의 책, 51-2쪽.
- 16) 한강, 『흰』, 난다, 2016, 11쪽.
- 17)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역, 경성대출판부, 2008,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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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규범적 양식 아래서 읽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다. 유기적인 서사와 플롯과 같은 사건의 인과론적 배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작품은 소설어로서는 이례적으로 함축의 밀도가 높다. 자유연상과 직관에 가까운 느낌과 정동이 빈번하게 돌출되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고도로 응축적인 시어를 해독하는 일처럼 독자들은 어떤 모호한 감각적 혼란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2011)은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의 발표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이 두 작품에 대한 뜨거운 평가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집중적 관심으로부터는 일견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의 외형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설을 비평적으로 연결하는 열쇠어는 연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가까운 세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가 사회적 동물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가부장적 폭력을 조명하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구체적 범주로 확대한다. 한강의 작가적 사유구조 속에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선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의 구족 혹은 체제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나는 『희랍어 시간』 역시 ‘폭력’에 대한 한강의 작가적 사유가 ‘언어’라는 소재를 매개로 전개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에게 세계의 폭력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사건성’을 계기로 이해되거나 설명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부조리한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된다. a)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43쪽). b)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너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101쪽). 위의 인용문 a)의 경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이 독일에 있는 헤어진 사랑의 대상에게 쓰고 있는 편지의 한 부분이고, b)의 경우는 실어증에 빠진 수강생인 여성이 과거에 있었던 부조리한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a)의 남성은 조부 때로부터 비롯된 유전질환으로 마흔이 되기 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독일인 여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반면, 남성은 어디에선가 읽은 바가 있다는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이라며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다.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일 신이 무능한 존재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성의 논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들이 처해 있는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반발감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의지나 선악과 같은 도덕률의 준수나 위반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인 남성에게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선험적 폭력성으로 체감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설 속의 남성에게 신이란 바로 그 가혹한 폭력과 악의 부조리한 실행 상황에서도 침묵을 본질로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파스칼적 명상을 보충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불가지론을 피력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성의 내적 절망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한편 b)에서 회고되는 상황의 폭력성은 두 겹의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리는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에서 백구가 승합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이것은 백구나 그의 곁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의 의지의 ‘저편’ 혹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 폭력이다. 그 끔찍한 폭력은 백구나 여자아이의 외부에서, 다시 말하면 의지의 저편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공황에 가까운 충격을 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조리는 충격과 연민의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껴안았던 백구가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로 여자아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경험에서 온다. 당시의 여자아이와 그것을 회고하고 있는 실어증에 빠져 있는 여성에게, 선의에 대항하는, 아니 선의와는 무관한 폭력적 체험이라는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외상적 공포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세계를 근원적인 부조리와 폭력으로 인식하거나 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 속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과 문학적 성격을 밝히는 일은 별도의 작가론에서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소설적 질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 이 소설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비평적·논리적 추론과정의 구조와는 달리, 이 소설은 쓰여짐의 당시에 어떤 완결된 플롯을 전제하거나 사건의 골격을 완성한 단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작가는 아마도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하게 혹은 남성 인물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력을 상상하면서 현실을 비원근법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단일한 시점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간다는 식으로, 서사의 불투명성을 의식하거나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장이 전개됨에 따라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잦은 교체를 보인다. 이에 따른 서술자 역시 남성과 여성으로 자주 교차된다. 편지의 형태가 등장할 때는 2인칭으로 전환되며, 3인칭의 경우에도 제한적 전지시점과 작가 전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사건의 서술이기 보다는 기억과 인상의 다층적 묘사로 느껴질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두 인물 그러니까 서서히 시각을 읽어가는 남성 인물과 언어, 더 정확히는 한국어의 발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여성인물은 일단 그들을 주체화해 표상할 고유명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없이 ‘나’ ‘그’ ‘그녀’로 지칭되면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감각적 현실과 얼마간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과 빈틈이 많은데, 그 사이로 ‘유령적인 것’이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와 화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이제는 타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상실된 자기가 현재의 자기와 공존하면서, 간섭하기 때문이다. 상실된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부유하는 듯한 일상 속의 자기를 찾아와 기억을 뒤섞는다. 남성에게 그것은 환(幻)으로 충만했던 지등의 선명한 불빛이고, 여성에게는 음소와 음운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활력으로 충일하게 느꼈던 최초의 기억이다. a)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낯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이고 있었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25쪽). b)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 속에서 만들어 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13-14쪽). a)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의 회고이며, b)는 그 강의를 수강하고 있으며 실어증에 직면해 있는 여성의 기억이다. 각각 시각-풍경(a)과 청각-인식(b)에서 오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a)가 시각적 감각자극으로부터 오는 희열이라면, b)는 기호로서의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절하면서, 그것을 발화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로부터 오는 감각적 희열로 설명할 수 있다. a)에서는 그 시각적 희열의 경험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b)에서는 그 청각적 희열을 “생생한 흥분과 충격”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적·청작적 희열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현전성(現前性)에 대한 감각적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체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성의 충일한 ‘빛’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의 마술적인 한국어 청각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전율 혹은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렁이는 지등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론적 자기확인과 한국어 음운을 발화/발음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청각적 언어의 현전의 충격 때문이다. 대상과 나의 틈 혹은 간격이 일소되고, 거기에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실성이 마술적으로 감각/지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충일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의 경험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남성에게는 빛이 희미해져 가면서 어둠이 짙어지고, 여성에게는 언어의 청각적 발화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전하는 사건이 거듭 벌어진다. 우선 남성의 경우. 10여 년을 살던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청년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도계 독일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청력을 상실한 것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대신 소통을 위해 말하는 상대의 입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해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읽히게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말하기-듣기 기능의 장애를 ‘시각’을 통해서 보충하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자신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결혼하고 싶다라고 여성에게 말한다.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남성이 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세계의 의미체계나 상징체계로부터의 추방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니, 이제 당신은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에 격분한 여성이 남성을 폭행하고 그들은 돌연한 결별을 맞게 된다. 시력=빛의 잠재적 상실이 부조리와 폭력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존재상실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였던 요아힘 그룬델과의 추억 역시 남성에게 또다른 명백한 상처로 남게 된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운명에 처한 친구는 소설을 읽어보면 철학적 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파트너로서의 욕망도 품고 있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남성에게 너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이라고 말하면서, 남성의 잠재적 미래의 불모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날카롭게 충격한다. 동성과 이성을 막론하고, 그가 사랑한다고 느꼈던 두 대상으로부터의 추방과 이별은 이렇게 ‘빛의 상실’이라는 진행형의 감각적 쇠퇴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에게 ‘말’로 상징되는 언어의 청각적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거기에는 두 개의 언어적 트라우마 체험이 개입된다. 최초의 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을 임신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티프스에 결렸고, 그래서 낙태를 결심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출산했다. 이 체험을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넌 못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이때 고모들, 외사촌들, 이웃집 여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이 말들은 언어가 ‘세계’로 들어가는 친밀한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죽음의 위협 혹은 상징적 거세의 위협으로 화자에게는 인식된다. 두 번째 계기는 이혼과 함께 여성에게 난사되었던 전 남편의 거친 폭력의 언어들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또 한 번의 존재론적 상실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62쪽).”라는 절규 이후의 여성의 실어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빛의 상실’과 ‘말=소리의 상실’이라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두 남녀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의 희랍어 강의를 진행하는 남성은 상실된 시력 탓에 희랍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어렵게 문자를 쓴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실어증의 여자는 그 낯선 문자를 노트에 적으면서, 기꺼이 한국어라는 언어공동체의 외부로, 어쩌면 존재론적 외부로 자기를 부유하는 상태로 위치시키는 데서 비로소 안심한다. 이 두 남녀 주인공들에게 희랍어는 다만 묵독(默讀)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매개로 한 밀도높은 대화=소통=교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와도 같아서 미끄러지고 빗나가는 상황만 연출할 뿐, 존재론적 의미로 정착되거나 그들의 관계를 결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두 존재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게 되고, 여자가 말 대신 안경이 깨어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상실되었던 흔적 없이 지워질 한국어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일상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나 문화적 유물과도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희랍어의 언어 체계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존재론적 자기회복과 기적 같은 마주침을 묘사하고 있다. 침묵과 결여와 상실이 거꾸로 회복과 구원과 만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어적 질문을 이 소설은 사금파리처럼 일순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그 빛을 숨기는 시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서 읽기보다는 혀와 성대를 간신히 열어 느리게 낭독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된다. 어둠이나 침묵 속에는 과연 이데아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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