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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5년 봄호(제79호)

바람재에 앉아 무등의 진경을 그리다

김규성 시, 산문, 문학평론

2000년 『현대시학』에 시 「달동네 2」 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2015년 송순문학상 우수상, 2021년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중심의 거처』와 비평집 『남도 시의 현재와 미래』,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뫔』, 『모경(母經)』, 『산경(山徑)』 등이 있다. 창작 활동과 함께, 이태관 시집 『어둠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을 비롯하여 약 85편의 시평 및 시집 해설을 집필하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쳐왔다. 송순문학상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다양한 인문학 주제로 강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백수인과 이지담, 박현우는 남도의 서남해안이 고향이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바다의 원초적 기억과 집단무의식이 심리와 정서의 근간을 이루며 시의 원형적 모태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에는 산해진미가 어우러진 혼신의 생체리듬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수인은 선비적 기품과 육화된 지성, 이지담은 참신한 은유와 고결한 성정, 박현우는 원초적 고독으로 연마한 현실 초극의 지혜가 돋보인다. 모두가 남도와 한국 시단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주의 숨결로 흐르는 안분安分의 교향악

- 백수인 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


1.

백수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려면 고향 장흥 기산마을에 있는 그의 서재를 탐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산 증인인 고서古書가 은은한 묵향을 머금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획기적 장르로 꼽히는 가사문학은 남도를 배경으로 꽃을 피웠다. 그 효시인 『관서별곡』은 또 한 권의 기행가사인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삼당시인 중 하나인 백광훈,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산 팔문장’으로 꼽히는 백광안, 백광성 등을 배출한 백씨 가문의 문학적 적통을 계승한 시인이자 국문학자가 백수인이다. 백수인은 조상의 문혼文魂으로 충만한 종가에서 나서 자라, 청·장년기를 오월의 메아리가 생생한 광주에서 복무한 다음,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집(백씨가문)으로 귀의했다. 이번 제3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은 그 귀거래사의 서사緖詞다.


하얀 날개를 널리 펴고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라 하네

선비의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날고 있는 외로운 섬이라 하네

- 「장재도」 부분


이 시에서 “학”은 “고결한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수절해 온 고결한 선비정신을 표상한다. 이는 면면이 이어온 백씨 가문의 전통적 가치관을 암유하며 시인 자신에게 해당되는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행합일의 지표는 시 「겨울의 입구에서」 암묵적 인고와 결연한 의지로 체화된다. 


겨울의 입구에 서서

우리들의 오랜 동안거, 그 아득한 적막을 들여다보네

한 시절 견디고 부대껴야 했던 두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보네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었지


텅 빈 들판에는 찬바람만 가득하지만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

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네 

- 「겨울의 입구에서」 부분 


시인은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만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고 술회한다. 춥고 엄혹한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저항하며 오늘에 이른 견자의 서슬 퍼런 안목이 가슴을 적신다. 이 시는 시인의 귀향이 단순한 노후의 휴식이 아니라, 본연의 궁극적 자아를 추스르기 위한 새로운 동안거의 출발이라는 불퇴전의 각오를 새삼스럽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2.

바다를 원형으로 하는 유치환의 시 「파도」는 부드러운 물의 이미지가 난폭한 파도로 격랑을 일으키고, 용광로 같은 사랑의 불길로 달아오른다. 잔잔한 바다는 물의 원형으로 관조적이고 성찰적이다. 반면 물을 원형으로 하면서도 난폭한 바다는 물의 역동적 발화이다. 


흔히 물과 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의 대립관계로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두 원소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수적 요소다. 두 원소의 보완과 조화에 의해서만 생명체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기운이 있어야 차가운 기온을 따뜻이 할 수 있고, 물이 있어야 뜨거운 열기를 식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신세계의 동적 요소인 열정이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정적 요소인 이성은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이다. 이성은 열정에 의해 실천에 이르고 열정은 이성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둘의 조화에 의해 사랑은 결실을 맺고 정신은 그 건강을 유지한다. 물과 불의 아름다운 조화에 중용의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백수인의 고향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남해안 산자락 밑이다. 내륙의 끝이자 해양의 시원이다. 그 접점은 통상의 경계와는 개념이 다르다. 대립이 아닌 조화, 반목이 아닌 상생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수인의 시세계는 바다와 내륙이 경계를 지우는 소실점에 터 잡고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바다의 일상인 조수를 주제로 시 3편을 선보이고 있다. 그 함의와 이미지를 통상의 조수 순서와는 역순(썰물, 밀물과 썰물, 밀물)으로 환치해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다가 물러서기로 마음먹을 때

물의 벼랑은 무너지네


세상의 높이와 깊이가 모두 날아가 버리면

남은 건 펄 위에 찍힌 쓸쓸한 발자국뿐이네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

스산한 새벽바람이 일렁이는 뒷골목

희미한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이네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

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네

- 「썰물 이후」 전문


위의 시는 썰물을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견주고 있다. 이는 시 「밀물」에서의 역동적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장치다. 따라서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라는 마지막 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열거한 세 편의 시를 단계별로 한 데 아우르는 설계(역순의 배치)는 시 「밀물」에 앞서 중간 역할을 하는 다음의 시 「밀물과 썰물」에서 구체화된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버리고 돌아서는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 「밀물과 썰물」 부분


뒤돌아서 가는 썰물의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지는 정경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그 발자국이 깊고 깊”은 것은 새로운 밀물을 기약하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이때 썰물은 사적 욕망의 물결을 잠재우고 멸사봉공의 공동체적 불길/밀물로 역동화한다. 최후의 결전에 임하던 장흥 동학혁명군의 기세, 오월 금남로의 함성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등 떠밀려 마지못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것이다


하늘에 닿고도 남을 저 함성을 들어보아라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을 보아라

- 「밀물」 부분


“하늘에 닿고도 남을” 함성을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으로 재해석한 시적 예지가 예사롭지 않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밀물은 고향 바다의 원체험과 오월 광주의 실체험이 시공을 초월해 결합하는 교향악의 마지막 악장이다.


3.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53편의 시 제목들은 대부분 구체적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가 주축을 이룬다. 시집 제목도 겨울+언덕+백양나무+숲이라는 네 개의 구상명사를 관형격 조사 "~의"가 홀로 다리 놓고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관념어나 난해한 ‘안개 언어’를 배제하고 담백하면서도 진솔한 실사구시적 테제가 제목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부분은 시인의 자서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날마다 걷는다. 강가를 걷고, 해변을 걷고, 산골짜기를 걷는다. 걸으면서 거기에 깃들어 사는 존재들과 마주친다. 새들을 만나고 나무들과 마주 서고 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을 만나고, 흙과 돌멩이와 바위와 물결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빛깔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늘 길을 걸으며 사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어 이를 장자의 소요유적 직관과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로 내면화한다. 아래의 시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도 특별한 수식 없이 사물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존재자(시인)와 존재(시)는 관념의 늪을 떠나 격의 없이 한 데 어우러져 미분화의 축제를 이룬다.


들판을 걸었네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네

포기 사이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흰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네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리

꽹과리 소리 깨갱 깽깽

징소리 지잉~지잉~

장구소리 덩더꿍 덩더꿍

북소리 둥둥둥

태평소 소리 띠띠 떼떼

잔치 벌이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네


뒤를 돌아보니 논 가에 우뚝 서 있는

자귀나무 한 그루

그 안에 수백 송이 꽃들이

상모를 돌리고 있었네

-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 전문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시각), 덩달아 꽹과리 북소리(청각)가 들판에 가득 차자, 저만치 서 있던 자귀나무도 어느새 다가와 배경에서 전경으로 동참한다. 들판이 온통 “수백 송이 꽃(후각)들이 상모를 돌리”(촉각)는 공감각의 대연회를 이룬다. 오감이 풍성한 자연친화적 감각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는 절창이다.


소동파는 가는 곳 마다 비록 유배지임에도 그곳에서의 정착을 꿈꾼다. 장소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달관의 경지에서 현실에 초연한 단면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첫 유배지 황주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황주에서 오래 적거한 탓에 이젠 평안하게 이 땅에 안주할 수 있게 되어, 본래의 황주사람과 똑같다”고 여긴다. 또 두 번째 유배지 혜주에서는 “이제는 북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혜주사람이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 이와 같은 현지에의 귀속 의식은 낯선 마지막 유배지로 위리안치의 형극에 내몰린 해남도조차도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는 종명지로 여기게 한다.


백수인의 시에서도 이와 같은 현존재로서의 공간 의식에 숙련된 여유와 행간의 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거추장스런 수식이나 화려한 기교를 배제, 조촐하고 소박한 언어로 자연에 의해 정화된 감성을 소담하게 그린다. 이를테면 자연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한 폭의 수채화로 담아낸다. 그에게 현실은 유토피아로의 공상적 일탈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 속에서 일상의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실존의 향연이다. 그 소요유 속에서 지혜롭고 성실한 자기관리에 의한 ‘중용의 자유’가 일상화된다. 따로 상상력의 수고를 빌리지 않아도 주위의 대자연에 눈길만 돌리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만 하면 현실 속에서 탈속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문장으로 새긴 경건한 사유의 향기

- 이지담 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2004. 문학들)


1.

본성, 즉 마음의 바탕은 원래 티 없이 맑고, 두루 밝고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두려움도 없는 지고지순하고 지극한 경지이다. 온전한 마음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자아를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기에 수행자는 혹 그 마음이 잠시나마 흐트러질까 봐 외부의 훼방을 경계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동시에 그 지극한 경지를 어린애처럼 누린다. 온전한 마음에 지극히 머물며, 그 마음 씀을 오롯이 하면 텅 빈 마음이 맑고 고요함으로 충만해진다. 그 상태여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주의 유기적 분업체로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어느덧 이순을 넘어선 이지담의 시에는 본성에 천착하는 구도자적 포즈가 내면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제4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에는 먼 집, 먼 일, 먼 기억, 먼산바라기 등 ‘먼’이라는 시어가 수식하는 시 제목이 눈에 띈다. ‘멀다’의 활용형인 ‘먼’은 거리와 시간, 즉 시공간을 아우르는 수식어로 현재의 자아(가까움)를 부각시키려는 일련의 언어 장치이다. 이는 시의 제목뿐 아니라 다수의 시에서도 그 핵심어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성정의 고삐를 수시로 다잡는 자기 도야의 일환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시작된 혼자만이 건너야 할 길/아직 멀다(「출렁다리」)


너무 멀다, 보고 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침묵의 꽃」)


어둠과 빛이 출발선상에서 자세를 낮추고/ 멀리 보는 눈으로 또 다른 문장을 쓰는 중이다(「감자북을 쌓다」)


멀리 오름이 지표처럼 보이고 공포가 자라 잡풀이 무성한 곳(「다랑쉬굴 입구에서」)


먼 거리는 태생 이전부터 하나로 엮어 있다는 다른 말일 뿐인데(「먼나무」)


멀리 더 멀리 날아갔다 돌아오는 새를 반긴다(「먼나무」)


아침마다 뻐꾸기 소리 들으며 먼 길 배웅한다(「먼 길」)


먼 나라 아이들에게 손을 뻗어 빛이 되어 준 사람(「여행자 2」)


먼 이방인들이 발길 멈추지 않은 것은/예를 다하고 있는 풍경에 취하고 싶을 뿐(「면앙정에 올라」)


책상 위의 문양이 휘어지는 쪽에 앉아 멀리 보면/더 작아지지 않아도 되는 밤이 아직 남아 있었다(「라플레시아, 안녕」)


장자는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통해 자아와 우주만물의 상대성을 해체해 버린다. 우주 만상을 맘대로 재단하고 누리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술대 위에 놓이면 지상의 어떤 상처도 먼지 한 점으로 작아지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으로 부풀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래의 두 연은 시 「구겨진 종이」의 일부인데 연마다 “멀리”라는 수식어가 사건의 전말을 지시하고 있다. 장자의 우주적 스펙트럼을 내밀하게 재구성한 제2의 창조를 연상케 한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를 날려 봅니다

멀리 가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집니다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겨 버립니다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지니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봅니다

- 「구겨진 종이」 부분


아무리 깨끗한 백지도 넓게 펼쳐진 평면 자체로는 날지 못한다. 일단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공중에 띄워야 멀리 날아간다. 그런데 시인은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진다. 그것도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긴 것이다. 그리고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종이비행기의 비상은 상처/그늘과의 결별을 뜻한다. 그것은 백지, 즉 순수 본연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구심력의 일환이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 자신과 공존한다는 사실을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 깨친 시인의 실존적 자기 확인인 것이다. 심원하면서도 비근한 통시적 원근법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지담은 화려하지 않게 빛날 줄 아는, 평범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는 비결을 조곤조곤 일러주고 있다. 인류의 행복이나 위대한 업적에 가려 돋보이지 않을지라도, 작은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자세는 시인에게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이지담은 작고 하찮은 것 속에서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고 닦아 지성의 좌대에 올려놓는 세공사이다. 


2.

개체적 자아의 완성을 통해 전체적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이지담 시의 핵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인 나와 사회 구성원인 나의 이중적 존재이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완벽에 이른다. 자아를 도야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격의 가장 이상적 경지이다. 인격은 나와 우주/사회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대부분의 남도 지성이 그렇듯 이지담의 인격적 토양은 참신한 자아에서 사회적 결사結社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예컨대 건강한 역사의식을 배경으로 발화한 비판적 리얼리즘, 무궁한 생명애, 사회정의를 기표로 한 휴머니즘이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시를 통해 새롭게 승화된 역사적 과제는 제주(활주로 무덤)→광주(마지막 승객)→서울(딱 하루만)로 이어지며 꺼지지 않는 촛불의 숭고한 역사성을 공통의 의미소로 재현한다.


유채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착륙하고

꽃에 취한 사람들이 육지를 향해 이륙하는

활주로 바닥 아래

잠겨진 열쇠는 기억을 두드려 빚어내야 한다


한라산 중간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에

살던 집을 버리고 살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

잡풀인 듯 베어져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든 활주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 「활주로 무덤」 부분


괜찮니, 물음에 대답이 없다

텅 빈 차 안

유리창이 깨지고

승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흥건히 고인 피

멸종을 바랐을 밤은 새벽을 끌고 오고 있었다

- 「마지막 승객」 부분


그저 딱 하루만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소소하게 웃어보자고 나선 길

이태원길에서

해일처럼 밀려든 인파에 웃음은 난파되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SOS 문자를 보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 「딱 하루만」 부분


이지담은 민족적 비극과 비상식적 참극을 떠올리며 그 유훈을 일상의 평화와 새로운 기운에 상응하는 유채꽃(제주4.3), 새벽(광주 5월), 소소한 웃음(서울 이태원)으로 상징화한다. 나아가 사건의 핵심을 절제와 함축, 내면화된 육성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재조명한다.


3.

사색과 명상, 고요한 기도는 자신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칸트가 평생을 시골에 묻혀 오솔길 산책을 즐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별장의 대부분도 그런 고요와 한가함이 주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수행 정진을 일삼는 스님들도 한사코 깊은 산중을 찾는다. 자신과 만나는 것은 자신과의 내밀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 소로는 두 해 동안 오지의 숲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활한다. 거기서 『월든』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이지담의 이번 시집에도 자연을 벗 삼아 번뇌를 씻고 사색의 지평을 심화해 문향을 꽃피운 누정 문학의 산실·환벽당·면앙정·연계정 등을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환벽당 마루 위에서 장삼자락 늘인 채

버선발을 옮기며 영혼에 숨길을 불어 넣는다

춤사위는 이미 누군가에 전이되어

판소리 가락을 열고 들어가 옛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

나무들도 푸르름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백수를 누린다 해도

연못에 핀 연꽃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려나

- 「순간이 영원으로」 부분


죽창처럼 푸르던 벼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데

면앙정에서 책을 읽고 가르치는 강학소리

- 「면앙정에 올라」 부분


무거운 돌에 눌린 시간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허허벌판 말고삐를 잡고 달려오는데

멀리서 통행금지 해제를 올리는 파루의 종소리

가슴을 때린 적이 몇 번이던가

묵은 숙제를 풀며

국화주 한 잔 따라마시며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 「미암일기」 부분


편지 사이사이 묻어둔 행간

연못 위의 발자국을 지우며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

연계정은 홀로 앉아

물 위에 뜬 모현관을 들어 올린다

오랜 친구인 침묵을 품에 안고

한 구절도 고쳐 쓰지 않았으므로

먹구름이 세상을 뒤흔들 때마저도

그 너머에서 빛을 내는 볕을 키워냈던 것처럼 

뒤뜰 대숲을 흔든 바람이거나

참새들이 밤낮 소란스레 지껄이는 지저귐도

쌀뜨물 가라앉히듯 하였으니

너무 멀다, 보고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

눈 위에 발자국만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시간

뚜렷하게 보이는 침묵을 받아 적어 남긴다

가장 선명하게 피워낸 그 순간들

- 「침묵의 꽃」 전문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을 묶어 두려고 일부러 애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음은 억지로 다스리려 들 때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방어기제의 일환인 무의식 속 억압의 심연으로 잠수하여 끊임없이 존재감의 노출과 탈출을 시도한다. 따라서 제멋대로 고삐를 풀고 달아나려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제어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는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고 그 향방을 살피는 내면의 환기와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끄는 바깥 환경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산만하고 왜곡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맑고 상쾌하게 다독여 주는 산이나 강, 너른 들판, 고요한 호수, 쾌적한 숲, 한적한 오솔길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이지담은 그렇게 정화된 청정한 마음으로 자아를 다스려 이웃과 만나고, 이를 시로 형상화 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꽃의 수사修辭와 사색의 밀도

- 박현우 시집 『멀어지는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24.문학들)


1.

절실하게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치열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축제를 의미한다. 『백경』에서 고래와 싸우는 선장이 그랬고 또 소설을 쓰는 멜빌이 그랬다. 과거나 미래를 떠나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다. 잡념이나 상대적 관념 따위가 낄 틈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사물을 향한 순수하고 온전한 상태의 몰입은 작가에게 밀도 깊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선물한다. 박현우의 시는 사물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부터 “꽃”을 빌려 그의 시가 사물에 대한 몰입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꽃밭에는 수 없는 풀꽃들이 피고지고

나를 잃어버린 언어들이 윙윙거렸다.

꽃의 수사修辭,

사색에 익숙해질 무렵

꽃의 이면을 탐하는 벌 나비가 부러웠다.

아니다

가까이 잡꽃이 윙윙거리는

소박한 언어이고 싶었다

- 시인의 말에서


이를 방증하듯 이번 시집 2부는 하나같이 다양한 ‘꽃’들이 제목을 이루고 있다. 3부의 「달맞이꽃」, 「11월 철쭉이 피었다」, 4부의 「물봉선 비에 젖는」 등의 시도 꽃을 주제로 하고 있다. 1부의 「분갈이」도 꽃을 가꾸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호접꽃」을 보자.


생기 잃은 손 잡아주다

향기마저 잃은 채 멍울져 오던 초라함이

꽃이 되는 지상의 역설 마주하며

난감한 현실이 꿈이 되고

꿈꾸는 너의 색에 취한 취객일 뿐이라서

꿈이라도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인데

- 「호접꽃」 부분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구분하지 않고, 꿈속의 환상을 전경화 한다. 새삼 꽃에 대한 몰입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기 최면은 아래의 시 「천리향」에서 고차원의 사유를 동반한 실존적 자각으로 의미화 된다.


식목일 시청에서 나눠준 천리향 한 그루

뭉툭하게 잘린 뿌리 마음에 묻은 여러 해

천 리를 간다는 향에 취해 시름을 떨치던 일처럼


살도록 그늘 한 번 된 적이 없는 냉가슴 열어보니

나잇살이나 잡수신 맹환이네 팽나무가 느닷없이 다가와

사랑앓이나 하는 듯 아노래* 골목을 덮기도 하여

보고 싶단 말보다 더한 가슴을 달래주는 것이어서


무심을 붙안고

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이

그늘 됨을 알았네

*진도 고군 자막리 골목 이름

- 「천리향」 전문


시인은 이름처럼 "천 리를 간다는 향"이 실은 "무심을 붙안고/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으로 환치되는 사실을 깨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된 “그늘”을 사회적 메시지로 부각시킨다.


2.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보편적 가치와 자신의 세계를 성실하게 가꾸고 실천해 가는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어느 위대한 업적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행복의 요건 중에 크고 작고 따위의 구분은 따로 없다.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하찮은 것 속에서 귀한 것을, 숨은 것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눈과 귀와 감각이 필요하다. 박현우는 일상의 다반사인 “설거지”(작은 것)를 주제로 적폐 청산(큰 것)의 막중한 과제와 방법론을 환기시킨다.            


날마다 우리 살아 있음을

이토록 진지하게 씻어내는 일


빈부가 문제랴

누린 만큼 눌어붙은 고상한 찌꺼기들

저희끼리 냄새피우는 일 지천인지라

새삼 놀랄 일 아니라 쳐도


잠깐 한눈팔아 보시게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것들

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니

되도록 빠르게 뽀득뽀득 씻어내야 하네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

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

어디 쉽게 떨어지던가

- 「설거지」 전문


제철이라는 죽순나물 한 잎

오물거리다 말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

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왈칵 소름이 돋았네

- 「안아주기」 부분


시인은 “잠깐 한눈팔다 보”면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것들이/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라고 경계한다.(「설거지」) 그리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왈칵 소름이 돋”는다(「안아주기」)고 자신의 무감각에 스스로 일침을 가한다. 이와 같은 무감각은 그 파장이 사회적 적폐로 확산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따라서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어디 쉽게 떨어지던가”라는 자조적 청유를 빌려 무감각한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독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동반하기 마련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기는 쉽다. 다만 눈을 감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못 찾을 뿐이다. 상처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은밀히 숨어있다. 그러나 그 흉터는 크다. 자기 이외의 몸집까지 욕심껏 껴안고 있기에 덩치는 더 크다. 그럴수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상처의 실물은 비로소 가까이 다가온다.


3.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는 그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다. 반조가 따르지 않은 개혁은 정교하지 못하다. 신앙에도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반조와 참회가 따른다. 따라서 시의 미학에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뿐 아니라 상처를 다스리는 불완전한 존재, 즉 상처의 주체로서의 자신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철거 아파트 담벼락에

오누이가 앉아

볼록렌즈에 찬 빛을 담는다


참새 두 마리도

간이 빨랫줄에 앉아

시린 볕에 날개를 그을린다.

- 「데칼코마니」 전문


시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하는 종교와, 다분히 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철학에 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물을 새롭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이미 신이 창조한 사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창조해야 하기에 종교나 철학에 비해 추상적이고 고독하다. 우주를 설계하고 만물을 골고루 특이하게 빚은 신의 손길에 걸맞은 상상력과 언어의 조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박현우는 시의 도처에서 “손님은 갔는데 옆 교회 첨탑에서 까치가 운다(「술의 화법」)” “밤이면 구슬픈 여귀곡이 들렸다는 둠벙/비수 품은 달이 꽃단장한다(「궁녀둠벙」)” 등의 절묘한 구절을 선보인다. 아래의 시구도 음미할수록 맛과 멋, 향기를 더해주는 절창들이다.      


갈꽃 날리는 극락강에 낙싯대를 폈다


흔들리지 않는 찌불을 긴장으로 보라보는 것은

상처 난 잎들 가장 가벼운 여행처럼

극락강역 마지막 기적이 환청이길 바라서다.

- 「조락凋落」부분


오는 길 정 맞은 돌 몇 주워

빈틈 많은 생의 구멍을 메워볼까

하는,

- 「모난 돌」 부분


고향집 매화송이 눈을 뜨면

지시락 물 받던 대야 가득

어머니 빨랫물이 주인 없이 넘치겠다.                 

- 「봄비」 부분


짜낸 것만큼 얼룩진 시선들이 있어

비워야 빛나는 것들 주무르며

마음에도 걸레 하나 챙겨둘 일이다

- 「문득」 부분


타들어 가는 사랑이

길게 늘어선 화장터

슬픔이 슬픔을 화장하는 동안

- 「물봉선 비에 젖는」 부분


사위를 날아오르던 늙은 새

갑판 구석에 둥지를 틀어놓고

칠게 구멍 더듬다 와 졸고 있다

- 「벌포리 바닷가」 부분    


시인들은 창작이 원활할 때는 황홀한 자기만족을 맛보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심각한 내적 진통을 앓는다. 그러면서도 그 고통스런 작업에 혼신을 쏟아 몰입한다. 회임의 기대감과 출산의 희열은 고통조차도 산고의 통과의례로 음미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박현우의 시는 일상의 고통과 고독을 연마해 충일한 생명성으로 형상화한 인고의 결집이다. 그 저변에는 오랜 시적 내공과 연마, 대자연과의 물아일체에서 체화된 심층적 사유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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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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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지옥보다 낯익은

1.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문구는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탐문하려 할 때마다 타자의 시선이 끼어들고 타자의 언어가 개입하기에 온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갇히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말 속에 규정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온전한 자신의 시선과 언어로 자기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의 방식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허연이라면 “나는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내 사랑은」 부분 (『불온한 검은 피』, 1995) 요동치는 시선마다 깨닫는 것은 나를 나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적대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반기”의 흔적들로서, 나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에 대한 적대의 잔여들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행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치욕의 내 입맛들”도 씻기지 않는다.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모두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왜 그런가? 피가 “검은” 까닭에, 그 피가 “불온한” 탓에. 타자의 지옥을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이 벌써 지옥이기에,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허연 시작(詩作)의 시작, 자기 인식의 기원일 터. 그러나 자기라는 생(生)이 여전히 지속하는 한 지옥은 아직 예감일 뿐이다. 사랑을 곧장 지옥이라 부르기보다 “천국이 아닐 것”이라 유보하는 시구는, 시인이 선 지금-여기가 지옥과 천국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연옥과도 같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현재로도 미래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의 정체 속에 영원히 유동하기만 하는 기이한 장소에 ‘나’가 있다.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여정이 그의 운명이다. 성장도 없고 퇴행도 없는 이런 상황은 소년을 소년으로 멈춰 세운다. 언젠가 존재했으리라 믿을 뿐인 “푸른색의 기억”은 저 검은 피의 불온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 2. 벌어질 일은 반드시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 「천국은 없다」 부분 (『내가 원하는 천사』, 2012) 순전한 사랑에 대한 꿈과 열망, 그것은 천국이 실재한다는 믿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곤경이 가파를수록 우리는 사랑에 대한 꿈에, 천국에 대한 믿음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쩌랴. 두 다리가 디딘 발판은 “지긋지긋한” 지상의 한복판. 이 땅의 어디로 가든 지상에서의 열망과 믿음은 결국 제자리뛰기의 지긋지긋한 반복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걸 왜 모를까? 뛰면 뛸수록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고, 뜀은 끝내 멈추고 말리라. 십자가가 많았다. 왜 개별적 인간들은 임연수어가 있고 잘 끓여진 카레가 있고 심지어 맥박이 뛰고 끝도 없는 겹겹의 파도가 있는데 신을 보려고 할까? 망하기 전에 서둘러 망하려고 할까? - 「해변 정류장」 부분 사랑을 위한, 천국을 향한, 신에 대한 자유. 우리를 홀리는 저 말들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여기 지상에 머물다 끝내 여기서 소진하리라는 역설의 진실을 표현한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상이자 허상이요, 환상일 따름이니. 딴 생각을 하다 버스를 놓치고 낮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들었다 “잘 알아 두라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야” - 「해변 정류장」 부분 이러한 자유는 제자리를 맴도는 뜀뛰기, 수백 번 수천 번을 굴린다 해도 한 걸음 못 나아가는 쳇바퀴 달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각자 영위하며 생을 소모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리멸렬하고 사소한, 지상의 흙 한 줌 부스러기에 연연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길고양이가 있었다. 캠핑오는 사람마다 이름을 지어줘서 고양이 이름이 한 백 개끔은 된다고 캠핑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는 우리 텐트에 올 때만 레오였다. 레오는 우리 구역에선 한 번도 빠짐없이 레오였다. 이박 삼일동안 그랬다. 하지만 레오는 옆 텐트에 가면 줄리앙이었다. […] 캠핑은 지리멸렬했다. 사소했다. 끝까지 사소했다. 데크 바닥을 핥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였다. - 「지리멸렬하다는 것」 부분 “레오”는 사자의 이름이다. 동시에 “줄리앙”이기도 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타인에 의해 보여지고 명명되는 존재로 삶을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라 불리고 자신하든, 끝내 “데크 바닥을 핥는” “사소”한 존재가 그것. 치욕적이거나 불운한 운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생의 주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 「작약과 공터」 부분 작약이 피었다. 사람들이 먹고 놀며 흥청거리는 장소, 거기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작은 새의 사체 옆. 이를 신비롭다 할까, 아름답다 부를까? 살아 있는 “나”에 감사해야 할까? 내 시선에 들어온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 같기도 하고,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기도 하다. 우울한 감정을 불러내는 그 시선은 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다만 “잔인 속의 고요”를 품을 따름이다. 저 고요를 삶도 죽음도 통과하고 있다. 자살한 여성이든 슬픈 태도든 작약은 그 사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것은 마음대로 보고 제멋대로 명명한 “나의 재능”일 터. 분명히 해두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보며 내가 부르는 모든 것은 ‘이 나’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 자아의 잔상이라는 것을.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과 공터」). 3.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 부분 (『오십 미터』, 2016) 소년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성장을 거부한 채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타자의 영향을 받고, 타자의 시선 속에 자기를 두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꾸미는 일이다. 이는 자기의 길이 아닐 터이기에 소년은 사랑의 바깥에 머물고자 한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기를 원한다.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다 주고 약해지면 남는 건 없어 대신 ‘사랑’말고 필요한 것만 하는 거야 신념 같은 거 비웃으면서 그거 알아?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 이게 파도랑 가장 오래 노는 거야 절대 다 적시지 않는 거야 반 정도만 적시고 꼭 반을 남겨 두어야 해 - 「이끼 키우기」 부분 “‘사랑’ 말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란 무엇일까? 행하면서 행하지 않기, 혹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기. 사랑을 연기(演技)하되 사랑을 연기(延期)함으로써 사랑 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연기(緣起)가 아닐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끊지도 끊기지도 않도록 다만 곁을 맴도는 것. 그러니 사랑 대신 사랑하지-않기를 사랑하자. 알았지?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이끼에 물 주자 - 「이끼 키우기」 부분 소년이 성장하지 않듯 사랑도 성장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끼는 성장하겠지. 사랑 아닌 사랑을 누리며,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소년처럼. 그런데 소년은 정말 자라지 않는 걸까?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 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수없이 없이 많은 희안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뼈 속으로” 난 “길”은 내적 성장을 암시한다. 외형은 자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애인이 아닌” 듯 “사랑이 아닌” 듯 시간은 흐르고, 준 것과 남은 것이 이루는 반비례 속에 뼈 속의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명명이며, 성장 대신 내어주거나 얻은 것, “늘 그리워하는 병”(「오십 미터」)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희안한 초안들”이란 아마도 제대로 성장했다면 갖추었을 소년의 꿈이자 열망, 믿음이 아닐 것인가? 환상과 허상, 상상을 통해서나마 성장이, 어떤 성숙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애인은 혼자가 되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그런 성숙은 나눌 수 없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 터. ‘나라는 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간신히 표명되는 모종의 자기 감각일 테니.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불가능을 통해서만 바라고 믿을 만한 감각일 것이다. 차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Y는 하루가 차갑고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바다에서는 소녀들이 까르르대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해변이었다. […] 십일월의 바다는 Y에게 의미심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감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관리되지 않는 것 해변에서 Y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파묻었다 - 「Y의 해변」 부분 4.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 「생은 가엾다」 부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지옥이든 천국이든 삶을 버티고 이어간다는 사실은 가엾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들은 그 같은 생을 부대끼며 우리가 내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일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느 헐한 저녁/혼자 단무지를 씹”는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고, 그 하던 일들이 되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에 빠져들게 만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바로 그 같은 삶의 무상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야근조 몇이 둑방 위를 걸어간다 그들에게는 한 세계가 있고 마을에도 한 세계가 있고 남자들이 밤에 해당하는 몇 가지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은 마을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춘 채 하루를 세상 어디쯤 배치한다 […] 남자들은 늘 했던 일들을 하고 마을도 늘 했던 일들을 한다 약속 같은 게 없으니 망칠일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 잠자리에 든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하루가 간다. ‘제행무상’ 말없이 이루어지는 밤 - 「어둠과 마을」 부분 기약이 없는 일상,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다. 영원회귀처럼 찾아드는 “어둠과 마을”의 풍경은 지금-여기의 이 순간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낮게 속삭인다. 허무감의 극치일까? 동시에, 실재하는 순간 속에 꿈과 열망, 믿음을 투여하는 성실한 허무주의자, 초개인주의자의 나날이 그로부터 펼쳐질지 모른다.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 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 「판교」 부분 타자의 눈길과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나만의 나’ 속에 자신의 거소를 짓는 것. 성스러움일까, 아닐까? 저 지독스러운 고집과 고독, 무한한 자부와 겸손, 기이할 정도로 사소한 것과 존귀한 것이 얽혀들어 만드는 삶.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 「판교」 부분 생이 가엾다면 죽음을 멀리할 것이다. 오만하게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허무주의자는 죽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이 태어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장마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상(氣象)을 견디고 버티는 시를 길어낼 수밖에.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덕분이었다. - 「장마의 시」 부분 이 생애에서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천국이었으면,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어떤 종착지라면 우리는 초탈할 수도 있고, 완전한 체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작고 붉은 열매”가 떨어져 “포자로 피어났”을 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을 느꼈을 때, 그것이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소년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삶만큼이나 죽음도, 죽음만큼이나 삶도 알아버린 저 “장마” 속에서. 이곳에서는 다만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그 모든 것을 시로 길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답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성장하지 않는 소년을 멈춰 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문턱이 아닐는지.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 번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 「장마의 시」 부분 * 성장을 거부한 소년에게 시간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마도 내적 성장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을 흐르는 피가 ‘검고 불온하다’며 천국과 지옥을 뇌까리던 시절을 “오만”하다고 회상조차 하게 되었다. 신화처럼 ‘푸른색의 기억’을 찾기보다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시절의 “동네 이름”에 더 마음이 갔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그 동네 이름을 기억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때 번성했었다는 남녘 어느 도시로 문학 강연 가는 날 문화센터를 찾아 헤맨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달이 빨리 흘러갔다던 그 동네를 찾고 있었다 원로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시는 비명’이라고 오만한 말을 지껄이고 밤거리로 나왔다 - 「항구」 부분 상투적인 통찰의 몸짓 없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는 성장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 중인 소년일 터. 그가 여전히 ‘나쁜 소년’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리에 마냥 서 있지만은 않은 여정 속에 있음은 틀림없다.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도 세워두지 않은 채 여전한 걸음을 옮겨가는 누군가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권력으로 알지 않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무연고 시신처럼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가슴을 두드렸다 몇 알의 불안장애 약은 시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세월을 항구에 놓아두었다 - 「항구」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펴낸 지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가 나왔다. 그리고 4년을 주기처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나온 산문집이나 동시집, 시선집을 제외한다면, 다음 시집이 나올 시간을 놓친 셈이다. 아쉬워해야 할까? 시인 허연은 아직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방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무상했던 거부와 부정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지 않고 지금-여기의 순간으로 매번 끌어당기는 것은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이 지금의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내가 듣는 것. 허연에게 시란 그것을 멈춤 없이 계속하는 글쓰기이며, 생의 허무주의를 성실히 실행하는 행위일 테니까. 천국보다 낯설지만, 지옥보다는 낯익은.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개정판 자서」 전문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월간 현대시 최진석 허무주의소년성장무상성일상타자지옥인내자기인식 2025
이철주 임계점의 시학 ― 이다희

1. 지금 우리의 영혼이 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시속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맹목을 온 힘을 다해 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익숙해지고 말아, 어째서 이리 늘 쉽게 지치고 마는지 곧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하여 온 생을 걸어야 하는 몸과 영혼 사이에 주어진 가혹한 계약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의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히 드러내고야 만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쉼 없이 반복되는 중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까. 맹목의 속도와 방향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할 수 있다면 삶은, 시간은, 감각과 영혼은 얼마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몸의 시간에 안착하거나 가상의 자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며, 몸과 영혼 사이의 간극과 시차로 매번의 삶을, 한 번도 발설된 적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충실히 증명해낼 순 없을까. 이다희의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중력을 찾”으려는 “충혈된” 낮의 시간과 “중력이 희미해지”는 밤의 깊이(「햇빛이 오는 쪽」, 『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사이에서, 그 아득한 현기증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하려 한다. 이는 물론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자주 발견되었던 모티프일 테지만, 유독 이번 시편들에서 더 선연하고 돌올해 보인다. 중력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희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성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격렬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작지만 분명한 존재의 울음을, 눈길을, 선득한 혼란을 아득한 허공 위에 담담히 풀어놓는다. 무감해진 생의 감각과 굳어버린 언어의 몸에 작은 숨구멍을 내고(“그녀의 귓불에 점처럼 박힌 구멍을 본다”, 「귀걸이가 있다면」),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왔다 물러나는 존재의 충동과 생동하는 호흡을 문장의 심연 한가운데에 단단히 심어놓는다. 그렇게 중력과 허공이 뒤엉켜 범벅이 된 혼곤한 꿈들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 이다희 시의 울림은 중력과 허공의 경계를 섬세히 살피고 어루만지려는 시선의 견고함과 그 깊이로부터 온다. ‘너머’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시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에는 언어의 관성이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로서의 절박함이나 성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산문시의 차분한 호흡으로, 때로는 힘들이지 않고 찍어낸 스냅샷과 같은 이미지의 경쾌함과 리듬의 산뜻함으로, 우리의 삶과 감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유의 허방을 적확히 찌르고 그 폐부를 찬찬히 응시한다. 중력의 맹점이 음화로 인화되어 나타나는 위태로운 매혹의 순간을 담담히 매개하고,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며 뒤섞일 것 같은 팽팽한 임계점의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낸다. 다음의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카는 숫자 8이상을 세지 못한다. 조카는 숫자 8까지 세고 다시 1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8다음으로 17을 외쳤는데 누구도 조카에게 17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tv에서 보거나 책에서 봤겠지. 다들 나름의 추측을 보태었다. 나는 지니가 갇힌 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조카의 작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8다음에 왜 1이 아니고 17인지 알려줄래? 조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에 빠져든다. 조카는 훨씬 무거워진다. 잠의 중력이 나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바지에 침이 묻는다. 무릎을 내어주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잠에 빠진 인간은 잠으로 돌진하지만 무릎을 내어준 인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전히 혼자였다.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덩그러니. 문득 살아야 할 시간들을 헤아려보았다. 나는 나의 수명을 알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조롱은 많아지고. 내 마음은 진실을 불태웠어. 먼지가 된 진실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아, 바람에 흩날리네. 자동차는 가만히 있고 긴 고속도로가 타이어 아래를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다.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 눈물이 흐른다. 이 눈물은 마치 남의 눈에 매달려 있다가 내 볼에 툭 떨어진 것 같다. 만족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제 집에 가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 「크로마키」 부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중력과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작은 거짓과 착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안전하게 보증된 대리만족에 기대어 하루치의 허기와 갈증을 근근이 견디며 버텨내 보지만, 아주 가끔 아무리 정교히 꾸미려 해도 위장된 속임수들이 온통 속절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아찔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상상의 연기를 펼치는 “크로마키” 촬영 현장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조카”의 깊은 잠과 그 잠의 중력은,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각과 상념을 적나라한 허공뿐인 어둠 속으로 단번에 밀어내 버린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허공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그간 지상의 몸에 달라붙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어온 스스로 “불태워” “먼지가 된 진실”의 자리를 아프게 직시한다. 그러나 온전히 허공뿐인 것은 아니다. 화자는 스스로가 지워버린 진실의 텅 빈 자리만이 아니라, “조카”의 작은 비밀, 8 다음이 9도 아니고 1도 아닌 정확히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남는다. 중력에 거세당한 텅 빈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추궁과 협박에도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허공의 비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러니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는 고백은 이처럼 기나긴 우회 끝에 도달한 해방의 순간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도 뜨거운 헌사가 된다. 물론 이는 ‘중력’을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린 관념과 추상으로서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깊은 잠”을 촉구하기 위한 매개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도피나 회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훼손된 수수께끼와 진실, 허공의 자리가 다시 중력과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요한 안식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력과 허공이 뒤엉키며 어지러이 뿌리를 내리는 매혹의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명료히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참새가 지붕의 가장 끝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에 참새의 발이 저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겠지 곧 참새는 분주하게 날아가 버린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이 다시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대리석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물감이 터지지 않을까 - 「코가 붙듯이」 부분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이 품고 있는 지상의 중력은 그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는 “참새의 발”과 아스라이 균형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다. 참새는 언제라도 스스로가 품은 허공 속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자의 시선은 허공에의 투신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해방의 상상력보다는 중력과 허공이 만나 이루어내는 위태로운 균형과 혼란에, 잠재태들이 극에 달하는 임계점의 순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 허공이 중력 위에 다시 내려앉는 형상적 필연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는 “대리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무한한 잠재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감이 터지”듯 서로의 경계를 범람해 뒤섞이기 직전, 모든 혼란과 소란이 폭발하듯 촉발되기 직전, 영원한 시작의 순간들에 바쳐진 위와 같은 시들은 이다희의 문장이 오래도록 정박해 있고 싶어하는 풍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3.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위태로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에 깊이 천착해 있는 이다희의 시는, 화자에 의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도입된 ‘허공’이 촉발하는 리듬과 호흡의 운동성에도 긴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때로,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감각과 사유의 극한을 돌파하려는 그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다희 시 속 허공은 주체와 세계를 모두 지워버린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공마저도 감싸안으려는 타자의 구체적 체온으로부터, 서로가 품은 울음의 깊이를 공평히 나누어 가지려는 응시의 뒤엉킴으로부터 촉발된 가장 따뜻한 부재이자 간극으로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와 부재를 부산스러운 의미의 소란과 몸부림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 부재를, 침묵을, 설명될 수 없음을, 그 적나라한 맹점을 끌어안은 채, 그 허공이 품은 열기와 온기로 서로의 맹목과 허기를, 갈증과 결핍을 함께 앓고 견디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들이 가능해진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에 공기에도 노출된다. 종이와 공기가 파란 잉크를 나누어 가지는 순간에도 다음 문장이 필요해.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중략) 두 개의 스페이스 바, 두 개의 공백. 왼손 엄지에 하나 오른손 엄지에 하나. 두 개의 우주는 바깥을 원한다. 겨울을 원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외로웠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겨울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밤이 울적하다면 계절이 지구의 오래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우주로 다시 쓴다. 모든 꽃이 자해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꽃의 종류를 골라서 꽃집을 나온다. 머리보다 큰 수국을 높이 들고 달리는 저 여자는 대낮을 파란 불꽃으로 불 지른다. 기쁘다고 하기엔 바쁘고, 슬프다고 하기엔 꽃이 아름다워 눈물이 마른다. 지금 여자가 당신에게 윙크를 한다. 당신에게. 눈물이 아니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윙크. 윙크. - 「볼펜, 남편, 키보드」 부분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잉크와 종이가 만나는 단순한 사건에조차 함부로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 없는 허공이,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와 그 신비를 품은 우주가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대용 키보드 속 두 개의 스페이스바처럼 서로 꼭 닮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개의 공백과 허공으로, 간극과 평행선으로 남편과 자신을, “여자”와 “당신”을 나란히 놓아둔 채 차례로 호명한다. 두 개의 허공은 막힌 문장에 뚫린 이중의 숨구멍이 되어 시적 주체가 견디고 감내해야 할 중력의 시간을 “파란 불꽃”의 선연한 열기로 한껏 뜨겁고 풍요롭게 타오르게 만든다. 온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이 거꾸로 서로를 더 깊고 뜨겁게, “바쁘”게, “아름답”게 만드는 까닭은, “눈물”로 애타게 호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서로의 허공을 “윙크” 하나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품어줄 수 있다는 오래되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에게 깊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려 깊은 눈치와 배려는 꼭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명쾌히 밝혀주고 있듯, 이것은 결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가 오면 악기들이 퉁퉁 불어서 한참을 달래야한다. 이 차이를 알아낼 수 없다면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 연주자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한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찻잔 테두리에 둘러진 황금을 보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울음이 그녀의 말을 방해했지만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황금처럼 보이겠지만 황금이 아니라고.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나는 찻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마치 자기 자신을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사람처럼. 한결 맑아진 얼굴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렸다. 찻잔은 이제 텅 비어 있고, 자신의 영원한 불만족에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 「바로크 일기」 부분 손님을 맞는 데에 꼭 연주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을 맞는 행위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겉으론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리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주인인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든 응답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라는 ‘허공’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화자는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확인하고 선언한다. 그는 그녀의 “손에 찻잔을 쥐여” 준 채 떨리는 손이 잦아들어 “찻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 타자의 심연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위 시가 특별해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 간단히 환원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녀가 떠난 뒤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린다. 마치 원래부터 진짜 손님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허공이 끌고 들어온 어둠이었다는 것처럼. 이 어둠에 각인된 결코 지울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이 “영원한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이다희 시의 시적 주체들은 이미 이 어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하다. 부정하고 밀어내야 할, 길들이고 제거해야 할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자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어둠을, 허공을 정확히 응시하고 끌어안는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의, 허공의 순례자들이다. 허공과 중력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일순간 부풀어 오르고 불현듯 멈추어 서는 호흡의 중심에, 임계점의 날카로운 간극에 아득히 사로잡힌다. 4. 이다희의 문장은 언제나 하나의 쌍으로, 두 개의 호흡으로, 엇갈리며 뒤엉키는 두 벡터로서 존재한다. 중력으로부터 허공이 솟아오르고 허공으로부터 다시 중력이 자라나는 이 종결될 수 없는 존재의 충동과 반복은, 그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을 이 상보적 운동성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시는 관성과 중력에 굴복하지도 어둠과 허공을 향해 손쉽게 탈주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며, 너머에 진실이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도, 이를 향한 과장된 몸짓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길어 올리는 빛나는 순간들은 중력과 허공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견고한 침묵과 텅 빈 부재의 물성으로부터 세상 모든 빅뱅의 혼돈과 폭발의 열기를 읽어낼 줄 아는 극도로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이중의 시선으로부터 획득된다. 이다희 시의 독특한 인장은 이처럼 존재와 무가, 중력과 허공이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를 뒤바꾸며 영원히 그 임계점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존재론적 사유의 역동성과 그 충만함 속에 자리한다. 이를 임계점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버려진 밤들이 품은 내밀한 임계점의 순간들을 그의 문장이 초대한 또 하나의 깊은 맹목 속에서 캄캄히 발음해 본다. <끝>

월간 현대시 이철주 임계점중력허공부재타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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