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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5년 봄호(제79호)

모멸과 차별을 넘어, 치유의 글쓰기

김영삼 문학평론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비평부문에 당선되어 글쓰기를 시작해서, 소설과 시에 대한 비평을 쓰고 있다. 대표 평론으로 「실어증을 앓는 언어들」(2024년 젊은평론가상), 「절대 신화 너머의 자리, 포스트-광주」 등이 있으며, 저서로 문학과 기억,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우리문학사-현대문학(공저) 등이 있다. 현재 계간<문학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전남대 국문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Ⅰ. 모멸과 폭력  

- 김현주, 메리골드, 다인숲, 2024.  

 

1.

김현주의 소설집 메리골드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만든 감정의 살풍경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자행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적 언어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예술로 포장된 인물들의 자기 방어기제는 소설 독해의 일차적 난관이다. 하지만 이는 김현주 소설의 성취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인물들이 사실 과거 연약한 주체(버려지거나 유폐되거나 모멸의 대상이기도 했던)였다는 점은 당혹스럽지만, 이들의 방어기제가 연약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형태로 노출될 때 의도치 않게 감추어진 상처가 드러나면서 해체된다는 점은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주의 소설들은 자기 방어에 능숙한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적 증상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사를 독해할 때 독자의 시선은 주체에게서 멀어지면서 타자에게로만 고착된다. 그러나 이 길을 역행하고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내면서 행간에 감추어둔 감정의 풍경을 응시할 때, 우리는 김현주 소설의 입구에 서게 된다.

 

2.

오독을 유도하는 방어기제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배치된 언어들의 함정을 피하고 마주한 풍경에는 모욕과 모멸과 수치와 같은 감정들이 흥건하다. 때로는 피가 때로는 비겁함이 때로는 자기혐오가 때로는 눈물이 그 자리에서 축축하다. 가령, 「빛의 감옥에서 직장 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원장의 무고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비겁함은 모멸감이라는 깊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당신이 해고되지 않으려면 쉿, 이라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때, 모멸감을 느꼈다.”). 애도보다 망각이 정규직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죽음을 오래 애도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정상적으로 살려면 빨리 망각해야 했다”). 물론 정규직인 된 이후 그녀가 겪는 불면증우울가슴 통증은 모멸감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일요일마다 작은 교회에서 행한 참회의 기도는 그것을 투명하게 세탁해주었다. 주식 리딩방을 운영하는 의 주인공 그녀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회원들(“꿀단지 옆으로 기어드는 개미들”)을 경멸하고(“가난한데다가 멍청하기까지. 의심 많은 인간들구제불능이야.”),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가사도우미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함으로써 동정을 소비한다(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삼백만원은 없어. 그 대신, 삼십만 원 그냥 줄게. 안 갚아도 돼. 가사도우미는 모멸감을 느꼈다.”). 정작 가족을 포함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외된 듯 보이는 그녀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편두통, 불안 등 신경증적 증상을 주식시장의 개미들과 하이에나들의 욕망을 잽싸게 포획하면서 치료한다(“그녀의 웃는 표정은 먹이를 낚아챈 한 마리 잔인한 맹수 같았다.”). ‘그녀는 이빨 사이의 흥건한 피로 자신의 상처를 은폐할 줄 아는 주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

 

3.

붉은, 행간은 김현주의 소설집에서 모멸과 폭력의 역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멸감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게 되는 괴로운 감정(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1. 이 글에 언급된 모멸감에 대한 사유들은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이다. 이 정의에는 모욕-경멸-수치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모욕이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모욕감은 타인에게 그러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의 응어리다. 그리고 모멸에는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적나라한 공격을 드러내는 언행이 모욕이라면, 무심코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경멸에 가깝다. 즉 경멸에는 적대적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낮잡아 보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를 직접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행위양식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포식성을 희석화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일 것이다. 모멸은 이러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김찬호;64)라고 할 수 있다. 「붉은, 행간의 화자 는 두 명의 남자(남편이자 작가인 케이’, ‘의 정부이자 연극연출가인 에스’)로부터 받은 모멸감을 그들의 작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아쇠의 희생자이자 피의자이다.

 

그녀는 페이지가 찢겨나간 <중독>을 바닥에서 집어 들더니 책 무덤 위에 펼친다. 책 속에 접시 위의 과일을 집어넣는다.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책 속으로, 책 바깥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책들 위에 올라선 후, <중독>을 밟는다. 토마토와 청포도가 튀어 나가고 일부는 그녀의 발길질에 짓뭉개진다. 다시 책 위를 두 발로 힘껏 내리밟는다. 책 속은 젖어 얼룩 범벅이 된다. 과육은 책 속에서 으깨어지고 과즙은 행간으로 스며들 것이다. 짓밟고, 태워버리고 싶은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과즙 범벅이 된다. 책을 모독하고 싶다. (「붉은, 행간」, 23)

 

그녀는 <중독>을 짓밟으며 무대 위에서 빛난다.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하면서 보다 파격적인 연기를 시도한다. 매회 무대 위에서 그녀는 에스를 다양한 부위별로 힘껏 물어뜯는다. 그때마다 에스는 신음을 내지른다.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에스의 야릇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관객을 열광시킨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반전이다. 그녀는 침착한 동작으로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젖은 혀로 부드럽게 천천히 핥는다.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붉은, 행간」, 39)

 

인용문의 <중독>은 남편 케이의 유작이다. 무명 소설가였던 남편의 작품은 와 불륜 관계인 에스에 의해 불멸의 작품으로 포장된 채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그리고 는 무대에 등장해 남편의 작품을 모독하는 퍼포먼스를 반복한다. 행위예술 특유의 난해함으로 승화되어버린 의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남편의 소설에서 묘사된 아내 의 모습은 수동적이며 무기력했다. 실재의 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소설 속의 새장 속의 새이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묘사되었다. 잠시 나가더라도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올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남편 케이에게 는 그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영혼일 뿐이었다. 남편 케이와 아내 사이의 이 간극을 소설은 이라는 언어로 비유한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그녀의 불안과 케이의 애증으로 1502호는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격한 진동으로 실내의 벽, 은 무섭게 벌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부풀린 이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 더 크게 벌어졌다.”/ “집요한 틈새는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이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 

은 남편 케이에게서 받은 의 모멸감의 다른 표현이다. ‘에는 1502호의 위장된 평화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위태로운 행복이 노숙자 같은 불안을 데리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20)이라는 문장은 남편의 언어적 경멸과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가 느낀 모멸감이 가장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가 남편의 유작인 <중독>에게 가한 행위들(찢고, 밟고, 책 속에 과일을 넣고 짓뭉개는 등의 행위)은 모멸에 대한 되갚음으로써의 모독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세 가지 층위의 모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승인 과정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때, 모욕은 이러난 자존감이 손상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무명 작가였던 케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내 작품이 모호하다고 하는데 그건 인물의 내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지. … 상징을 잘 이해해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면 좋겠어.”) 세상은 그의 언어 속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욕이다. 케이의 죽음 후 그의 소설 <중독>은 에스의 연출에 의해 본래의 의미 맥락에서 이탈된 채 연극 <중독>으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에스는 작가의 죽음을 작품에 중첩시킴으로써 소설 <중독>의 행간을 영원히 감추어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모욕이다. 그리고 연극 <중독>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는 소설 <중독>을 짓이기고 찢고 밟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설에 묘사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지점으로 이탈시킨다. 더불어 연극이 반복 상연되면서 의 모독 행위는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것이 세 번째 모욕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연극 <중독> 속에서 의 예술적 행위의 승인 과정의 소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앞선 두 번째 인용문은 의 행위가 연출가 에스의 의도를 완전히 역행하는 장면이다. ‘는 한때 에스와의 관계를 통해 모욕당한 자신의 존재감을 재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에서도 이 발생한다. 남편 케이와 마찬가지로 에스또한 를 자기 예술의 승인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로 수단화한 것이다. 연극 <중독>에서 에스를 흡혈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따라서 앞선 두 번째 인용문에서 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에스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에스가 행한 모욕을 되갚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붉은, 행간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천천히 핥는 의 붉은 입술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한 셈이다. 이로써 연극 <중독>의 작품이 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김현주의 소설 붉은, 행간을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 인물의 신체와 정신이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예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모멸의 헤게모니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모멸의 폭력을 그대로 되갚는 방식으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모욕과 경멸에 노출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꼬리를 물면서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주체와 폭력의 거리는 자못 가까워진다. ‘훼손된 자아(spoiled self)’(어빙 고프먼)의 폭력적 자기 증명. 문제는 이런 방식이 주체의 훼손된 자아를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식의 예술행위 또는 글쓰기가 자기모멸의 늪에 빠진 주체에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자못 위험해 보인다. 다행히 작가는 메리골드에서 이러한 폭력성의 늪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스릴러의 양식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자기 응시를 수행하고 있다.  

모멸감은 폭력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멸감의 해소 방식이 항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거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이 결핍되어 있을 때, 모멸감을 느낀 훼손된 자아는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타자에 투영하면서 폭력과 폭언을 통한 자기 증명에 매몰될 수 있다.

김현주의 메리 골드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갤러리 관장이자 도예가인 화자 가 자신의 건물에서 무상으로 꽃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훼손된 자아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자기모멸감에서 벗어나려는 뒤틀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싸구려 꽃으로 격조 있는 갤러리를 망쳐놓다니, 발코니랑 계단에 유치한 저것들, 당장 다 걷어내요!”/ “이렇게 예술적 센스가 없다니!”/ “당신의 예술적 감각은 형편없어요. 그래서야 카페 운영을 제대로 잘하겠어?”/ “그녀의 원피스는 시장에서 값싼 무명천을 떠다가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저급한 취향 때문에 화가 났다.” )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 그녀무조건의 동정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가여운 존재”(79)였다. 자신의 건물 2층을 내어준 무상임대차계약은 호의적인 주체가 동정의 대상에게 베푸는 적선으로써 상대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우울해보였던 그녀의 삶이 메리골드처럼 화사해지면서부터다. 적막했던 갤러리는 그녀가 온 뒤로부터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메리골드 덕분에 행인들이 들어와 일층 전시실을 구경하고 카페로 올라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볼품없어 보이이 시작하면서부터 는 불안감에 휩싸인다(“쫓겨난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내 작품들은 이상하리만큼 볼품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박제동물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도자기의 미적 가치를 모르는 그녀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과 자신의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는 모멸의 가해자가 되었다.

의 모욕적인 말들과 무상임대를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조수처럼 부리며 멸시하는 장면들에는 자신과 그녀 사이의 위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여기에 그녀가 남편의 전처를 닮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모멸과 폭력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가령, 남편의 전처 사진을 칼로 긋는 장면(“환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나이프로 천천히 그었다. 후련했다.”)이나, 무기력한 대상이 자신에게 굴복했을 때의 쾌감을 묘사하는 장면(“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이 내 몸에 전율처럼 흘렀다.”)에서 가 느끼는 쾌감은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생산하는 감정이다.    

소설은 이러한 감정의 근원에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허영을 위한 싸구려 소비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불안감(“내 작품들, 원가에 내놓는다고 홀대하지 마세요. 이거 최상급이야. 전부 팔렸으면 좋겠네.”) 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에게서 버려졌다는 모욕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수치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착종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건물에서어떻게 나보다 더 행복할 수 있어?”(100)라는 말에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분노, 버림받은 자신이 행복질 수는 없다는 슬픔, 나보다 못한 위치의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억울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증상인 셈이다.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이러한 모독의 감정들은 떠도는 영혼의 노래아무도 모른다에서 각각 국가폭력과 면역 정치에 의해 잊혀진 죽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은 작품의 행간에 감추어진 죽음을 통해 스릴러로 서사화된다. ‘가 코엑스 전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라진 사건을 주목해보자. 화자는 그녀는 노란 메리골드를 뽑지도 않았고, 붉은 샐비어를 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없는 동안, 갤러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99)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언급된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나는 뒤틀린 손가락 관절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겁먹은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100) 그러니까 일주일 전 그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기억상실은 2층 카페를 가득 채운 사라지지 않는 소독 냄새라는 무의식적 진술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소설 맨 앞에 배치된 평범한 문장(“이층 카페의 탁자보를 걷어내면서, 나는 그녀를 느꼈다. 표백제를 푼 물통에 누런 탁자보를 담그고 카페 내부에 소독약을 뿌렸다.”)의 무의식이 남긴 사후적 증거에 해당한다.  

 

5.

소설의 스릴러적 플롯이 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메리골드는 분명 자신이 자행한 폭력의 기억마저 멸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초라함, 모욕당한 자존감이 자기를 위협하는 외부 인자에 대해 보이는 면역학적 과잉 반응,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모멸감의 극단에서 어떻게 역진화하면서 파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단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모멸감의 근원에 오랜 시간 글쓰기로부터 멀어진 작가의 자기진단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현주 작가의 소설을 모멸감과 폭력의 역학관계로 독해하는 이 글의 시작점에는 빅 블루가 있었다. 이는 앞서 진술한 바 있는 말,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연관된다. 「빅 블루는 작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문화 소비에만 매몰된 채 문학이라는 질병에 침전된 화자의 모습을 자기혐오와 시대와의 불화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자꾸 아주 오랫동안 소설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겹쳐 읽힌다. 또 김현주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느끼는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섣부른 짐작 때문에 나는 다음의 문장들이 아프게 읽혔다.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천 일 동안 매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밤, 고통의 밤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이야기가 완성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불멸의 글쓰기,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아무 책도 읽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멍 때리며 노는 인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작가가 되었다.(「빅 블루」, 64)

 

나는 어쩌면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깊이 잠수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빅 블루, 푸른 바닷속으로 책이 떠다니면서 작가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이, 작가가 썼던 문장들이 돌고래처럼 헤엄치거나 솟구쳐 오르는 것을 연상하면서 죽는다.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 막막한 소설의 바다. … 바다 맨 밑으로 들어간다. 바다 속, 눈이 어두운 심해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수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익사한다. (「빅 블루」, 68)

 

여기서 는 가혹한 자기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모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깊고 푸른 어둠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문학이라는 질병에 갇힌 화자의 무기력은 예술가로서의 승인과정에서 경험한 어떤 모욕에 대한 자기 심문으로 읽혔다. 글을 쓰기 위해 국가 행정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모독은 그 감정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생산 없이 소비로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공허함은 한 인간의 자기 실격 보고서임과 동시에 자기모멸의 감정을 통과하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대한 기록으로 읽혔다. 무엇보다 이 강도 높은 고해성사는 대단한 용기로 읽혔다는 점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서툰 짐작 끝에 생기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자기증명 과정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왜 어떤 사람들의 구조신호는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찢어야만 겨우 낮은 주파수나마 얻게 되는 것인지? 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하면서 그것이 어쩌면 자기 고백일 수도 있는 가혹한 지점에 서야만 하는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구 또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글을 읽는 세계에서  유폐되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공감 또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은 한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힘이라면 무한한 우주 어디라도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작가 김현주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한다.

 

 

Ⅱ. 차별과 환대

- 김성훈, 길목의 무늬, 문학들, 2024.

 

 

1.

김성훈의 소설집 길목의 무늬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좌절과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성숙한 자아의 패배적 자전서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조신호에 기꺼이 응답하는 인물들의 환대와 연대 때문이다. 김성훈의 소설은 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제와 사회의 셈법에서 뺄셈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뒷골목에서 하위주체로 명명되거나, 정당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그늘진 외진 장소로 배치된 채 비체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의 대상들이다.

 

2.

소설집의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의 배경인 목포의 다순구미마을은 이러한 인물들의 장소이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는 의미와 달리 이곳은 가난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사는 동네”(34)로서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폐허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화자 는 이른바 파시의 아이였다.

 

바다에서 서는 장을 파시라고 한다. 나는 파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산동 유곽에서 버림받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를 일컬어 누구는 임자도 여자라고 했고, 또 누구는 흑산도 각시라 했고, 더러는 산다이 색시라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절구질하는 입방아가 싫었다. (「길목의 무늬」, 37)

 

그러니까 는 바닷사람들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부모의 존재나 출생지조차 불분명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였던 셈이다. ‘파시에서 몸을 팔던 어머니는 어선이 입항하는 날, 나를 낳고, 기침하고, 다시 유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49) 손님으로 만난 아버지에게 를 맡김으로써 그녀는 장차 어린 아이가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벗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린 화자의 삶은 태생의 천박함에 응시한 타인들의 시선”(37)에 노출되었고, ‘다순구미를 떠나 바깥 세계로 입문하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몸을 파는 어머니의 직업과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글씨는 의 태생에서부터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사회의 정상적 성원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달순은 주인공이 겪은 사회적 차별을 젠더의 측면에서 강화하고 보충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외부화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순의 희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소규모 직장에서 경험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차별은 결국 달순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달순의 기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타국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존재들의 바깥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성훈의 등단작품인 길목의 무늬는 버려진 아이들의 실패서사로 읽히면서 사회적 차별을 서사화한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를 기꺼이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달순 엄마의 희생과 환대의 서사를 통해 소설을 패배주의와 우울에서 건져내고 있다. 양부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머리 검은 짐승 거둬 키워도 잘만 산다는 것”(49)을 동네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를 차별의 늪에서 건져냈다. 그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우짜든지 너랑 나는 잘 살아야 해.”(49)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달순 엄마는 친모의 빈자리를 그 이상으로 대리보충한 엄마였다.

 

운동회고 소풍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줬던 달순 엄마였다. 그 품에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달순네 집에 들어가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발을 들이밀고, 유달산 자락에서 얻어온 도깨비바늘을 그 집 이불에 달라붙게 했다. (「길목의 무늬」, 39)  

 

달순 엄마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등의 말들이 암시하는 거친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 그 단어들이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달순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젖 냄새가 배어있는 장소이면서 외로움과 자기비하에서 화자를 건져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은 의 출생에 얽힌 공백 위에 아버지달순 엄마의 무조건적 환대를 중첩시킴으로써 어린 인물을 차별과 혐오의 늪에서 구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환대의 힘은 가 이후 견습 선교사가 되어 케냐로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국가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산되는 장소, 달리 말해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환대를 타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달순 엄마에게 새로운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면서 서사의 의미를 확장한다. ‘달순 엄마는 버려진 아이가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이면서, 비밀에 부쳐진 인물들의 과거를 현재로 재송신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달순 엄마는 과거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 있던 동네, 서산동, 그곳에서 산다이 색시들의 밥을 만들고, 빨래하며 품삯”(38)을 벌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 친모와 함께 식모 일을 하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41)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의 친모가 비워진 공백의 자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성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길목의 무늬는 어머니의 실종으로 상징되는 공백의 장소에 과거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소녀들이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와 그녀들이 거쳐 온 사회적 장소들을 기입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속 도시로 이주한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을 상기할 때, 의 친모에 대한 서사적 누락과 죽음을 앞둔 달순 엄마의 쇠락한 신체는 그 시대 하위주체 여성들의 삶과 존재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기입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불어 친모의 부재는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이 역사의 서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달순 엄마의 현재성은 이들의 삶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외부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김성훈의 소설 길목의 무늬다순구미와 같은 버려진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삶을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하위 주체들이 걸어 온 길들의 무늬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다순구미라는 장소의 역설적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목포의 특정 장소에 한국 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3.

산업화 시대의 첨병 공간이었던 여수와 마산을 배경으로 쓰인 정오의 끝자리, 홍콩빠 이모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에 포획된 인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을 낙인찍고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배제했던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 전자의 소설이 그 대표적 낙인의 서사라면 후자의 소설은 이를 연대의 차원에서 극복하고 있다.  

정오의 끝자리, 의 한덕수는 그 출생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덕수의 현재 시점에서 두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가혹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이다.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여수읍의 한 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부임 중이었다. 그러다 194810월 어느 날 그는 빨갱이의 부역자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가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었다.

 

울 엄마가 그랬시야, 차라리 고아랑 놀아라, 빨갱이 자석하고 말 섞었다간 네 신세 조져분다고잉.”

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아이의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를 알았다. 피 묻은 돌멩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갯불이 내 몸을 지지는 듯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빨갱이라는 뜻은 몰라도 그 단어는 무서웠다. ‘빨갱이는 이후의 내 삶을 내 의지랑 상관없이 끌고 갔다. 땅의 중력처럼,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는 빨갱이랑 살았다. (「정오의 끝자리, 」, 61)

 

인용문은 억울하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된 한 인물의 후손들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사회로부터 차별화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의 낙인은 사건과 무관한 후손들의 삶을 비극으로 색칠했다. 차이 나는 대상에게 혐오와 배제의 스티그마(stigma)를 라벨링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국가폭력이 생산한 어떤 오염물이 행여라도 주체의 내부로 침투할까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때나마 주체의 일부(가족이나 친족)였거나 아주 가까운 대상들(친구나 이웃)까지도 오염물로 치부하면서 주체의 바깥으로 뱉어내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이웃을 타자화하고, 이념적 차이를 악으로 규정짓고 차이가 있는 타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국가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정의로 위장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김성훈의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한 인물이 처한 사회적 의미를 역사적 시간을 소환하면서 계통 발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을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기점화함으로써 김성훈의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 소설로 멈출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국 사회의 차별적 구조가 생산된 발생지점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덕수의 어머니인 양순임의 탄생과정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강화한다. 그녀의 출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기입된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너무나 쉽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화한다.

 

외증조할머니의 원망은 그날 1학년 1반 교실에 모인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었다. 하지만 마흔 명의 사람 중에 엄마를 제외하고,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생살여탈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엄마에게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소리는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는 감각적으로 교실의 냉랭한 기운을 느꼈고, 당시의 운동장 흙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모진 말의 생김새를 봤다.

(「정오의 끝자리, 」, 67~68. 강조 인용자)

 

그러니까 한덕수의 어머니 양순임은 한덕수의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던 그날 그밤 그곳에서 태어났다. 양순임은 생사여탈권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던 그 잔인했던 폭력의 시간에, 모두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숨죽이던 그 시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저주와 원망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그 순간 태어난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가혹했을 외증조할머니의 저주의 언어는, 그 죽음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당대 민중들의  무지로 인해 죽음과 탄생의 엇갈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봉건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정작 그 본질적 원인에 해당하는 국가폭력의 무차별성과 비인간성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고서는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순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36)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생 자체가 부정당한 양순임은 생의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생산한 두 층위의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셈이다.  

 

4.

마산의 자유무역지구의 대폿집을 배경으로 쓰인 홍콩빠 이모정오의 끝자리, 이 보여주는 차별의 재생산을 반복한다. ‘홍콩빠로 불리는 술집의 여주인 김명자가 느끼는 불안과 조바심을 통해 소설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공주의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한 번 오염물로 분류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그 주변까지 오염의 대상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자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낙인의 대상으로 라벨링되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겪은 사실은 그녀의 이런 조바심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록된 온갖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극화되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빠의 단골이자 1980년대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들YH사건을 경험하면서 언어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명자의 가족들의 사정을 보면, 직업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김명자의 막내동생은 4·19 시절 목숨을 잃었다(“마산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동생은 시위대를 이끌다 산화했다.”, 87). 김명자의 남편은 베트남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한 후 고장 난 신체와 정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대학생인 김명자의 아들은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이 생략한 작품의 백스토리를 상상건대. 김명자 아들은 이후 부마항쟁과 5·18로 명명되는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비극에서 피해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러나 김성훈 소설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홍콩빠를 비롯한 마산자유무역지구 일대를 해방 공간으로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연대의 장면에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김명자가 아들 또래의 노동자 육손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고, 그가 국가 폭력의 희생제물로 전락하는 순간을 막아서는 장면이다.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명자의 가슴팍에는 비가 흠뻑 젖었고 바지단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김명자는 육손이가 길거리에서 몰매는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옴마야. 점마 일 내것다 아입니꺼.”

김명자는 육손이에게 허둥지둥 다가가 포대기 감싸듯 그를 끌어 안았다. 옷을 적신 비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김명자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육손이의 입에서 흘리는 몸 냄새는 김명자의 얼굴에 닿아 체온을 데웠다.

 “불 끄입시더. 우리! , 우리 아, 얼굴 별빛에도 비추면 안 되입니더. 불 끄입시더. 이모들이요. 이 야, 어린 것 맨상부터 가리입시더. 퍼뜩 안 하고 뭐하십니꺼. 불 꺼!”    

김명자는 기운을 뻗쳐 소리쳤다. 홍콩빠의 불빛이 하나, 둘 소등됐다. 이윽고 마산 시내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홍콩빠 거리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이 육손이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구름에 가린 조약돌 같은 별이 바다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크럼을 짰다. (「홍콩빠 이모」, 100~101)

 

마산자유무역지구의 화려한 야경을 칠흑으로 변신시키는 불 꺼!”라는 외침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은폐되는 국가폭력을 일시 정지시켰다. 또 김명자를 비롯한 홍콩빠 사람들의 스크럼은 김성훈의 작업이 기입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환대와 자기희생의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두운 시대의 좌절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도 이 환대의 자리에 길목의 무늬에 등장한 달순 엄마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김성훈 소설집의 해설을 쓰고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412월 어느 날 계엄 사태가 발생했다. 숨죽이며 상황의 흐름을 응시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국회와 그 인근의 거리에서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벌어준 30여 분의 시간이 한국사회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들의 신체가 맞닿은 스크럼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와 1987년의 시청 광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스크럼과 연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지녔던 어느 도시에 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준 장면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면서 2024년에 쓰인 김성훈의 소설들이 뒤늦은 첨언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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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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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지옥보다 낯익은

1.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문구는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탐문하려 할 때마다 타자의 시선이 끼어들고 타자의 언어가 개입하기에 온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갇히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말 속에 규정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온전한 자신의 시선과 언어로 자기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의 방식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허연이라면 “나는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내 사랑은」 부분 (『불온한 검은 피』, 1995) 요동치는 시선마다 깨닫는 것은 나를 나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적대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반기”의 흔적들로서, 나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에 대한 적대의 잔여들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행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치욕의 내 입맛들”도 씻기지 않는다.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모두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왜 그런가? 피가 “검은” 까닭에, 그 피가 “불온한” 탓에. 타자의 지옥을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이 벌써 지옥이기에,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허연 시작(詩作)의 시작, 자기 인식의 기원일 터. 그러나 자기라는 생(生)이 여전히 지속하는 한 지옥은 아직 예감일 뿐이다. 사랑을 곧장 지옥이라 부르기보다 “천국이 아닐 것”이라 유보하는 시구는, 시인이 선 지금-여기가 지옥과 천국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연옥과도 같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현재로도 미래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의 정체 속에 영원히 유동하기만 하는 기이한 장소에 ‘나’가 있다.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여정이 그의 운명이다. 성장도 없고 퇴행도 없는 이런 상황은 소년을 소년으로 멈춰 세운다. 언젠가 존재했으리라 믿을 뿐인 “푸른색의 기억”은 저 검은 피의 불온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 2. 벌어질 일은 반드시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 「천국은 없다」 부분 (『내가 원하는 천사』, 2012) 순전한 사랑에 대한 꿈과 열망, 그것은 천국이 실재한다는 믿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곤경이 가파를수록 우리는 사랑에 대한 꿈에, 천국에 대한 믿음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쩌랴. 두 다리가 디딘 발판은 “지긋지긋한” 지상의 한복판. 이 땅의 어디로 가든 지상에서의 열망과 믿음은 결국 제자리뛰기의 지긋지긋한 반복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걸 왜 모를까? 뛰면 뛸수록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고, 뜀은 끝내 멈추고 말리라. 십자가가 많았다. 왜 개별적 인간들은 임연수어가 있고 잘 끓여진 카레가 있고 심지어 맥박이 뛰고 끝도 없는 겹겹의 파도가 있는데 신을 보려고 할까? 망하기 전에 서둘러 망하려고 할까? - 「해변 정류장」 부분 사랑을 위한, 천국을 향한, 신에 대한 자유. 우리를 홀리는 저 말들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여기 지상에 머물다 끝내 여기서 소진하리라는 역설의 진실을 표현한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상이자 허상이요, 환상일 따름이니. 딴 생각을 하다 버스를 놓치고 낮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들었다 “잘 알아 두라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야” - 「해변 정류장」 부분 이러한 자유는 제자리를 맴도는 뜀뛰기, 수백 번 수천 번을 굴린다 해도 한 걸음 못 나아가는 쳇바퀴 달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각자 영위하며 생을 소모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리멸렬하고 사소한, 지상의 흙 한 줌 부스러기에 연연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길고양이가 있었다. 캠핑오는 사람마다 이름을 지어줘서 고양이 이름이 한 백 개끔은 된다고 캠핑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는 우리 텐트에 올 때만 레오였다. 레오는 우리 구역에선 한 번도 빠짐없이 레오였다. 이박 삼일동안 그랬다. 하지만 레오는 옆 텐트에 가면 줄리앙이었다. […] 캠핑은 지리멸렬했다. 사소했다. 끝까지 사소했다. 데크 바닥을 핥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였다. - 「지리멸렬하다는 것」 부분 “레오”는 사자의 이름이다. 동시에 “줄리앙”이기도 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타인에 의해 보여지고 명명되는 존재로 삶을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라 불리고 자신하든, 끝내 “데크 바닥을 핥는” “사소”한 존재가 그것. 치욕적이거나 불운한 운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생의 주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 「작약과 공터」 부분 작약이 피었다. 사람들이 먹고 놀며 흥청거리는 장소, 거기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작은 새의 사체 옆. 이를 신비롭다 할까, 아름답다 부를까? 살아 있는 “나”에 감사해야 할까? 내 시선에 들어온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 같기도 하고,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기도 하다. 우울한 감정을 불러내는 그 시선은 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다만 “잔인 속의 고요”를 품을 따름이다. 저 고요를 삶도 죽음도 통과하고 있다. 자살한 여성이든 슬픈 태도든 작약은 그 사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것은 마음대로 보고 제멋대로 명명한 “나의 재능”일 터. 분명히 해두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보며 내가 부르는 모든 것은 ‘이 나’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 자아의 잔상이라는 것을.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과 공터」). 3.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 부분 (『오십 미터』, 2016) 소년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성장을 거부한 채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타자의 영향을 받고, 타자의 시선 속에 자기를 두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꾸미는 일이다. 이는 자기의 길이 아닐 터이기에 소년은 사랑의 바깥에 머물고자 한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기를 원한다.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다 주고 약해지면 남는 건 없어 대신 ‘사랑’말고 필요한 것만 하는 거야 신념 같은 거 비웃으면서 그거 알아?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 이게 파도랑 가장 오래 노는 거야 절대 다 적시지 않는 거야 반 정도만 적시고 꼭 반을 남겨 두어야 해 - 「이끼 키우기」 부분 “‘사랑’ 말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란 무엇일까? 행하면서 행하지 않기, 혹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기. 사랑을 연기(演技)하되 사랑을 연기(延期)함으로써 사랑 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연기(緣起)가 아닐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끊지도 끊기지도 않도록 다만 곁을 맴도는 것. 그러니 사랑 대신 사랑하지-않기를 사랑하자. 알았지?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이끼에 물 주자 - 「이끼 키우기」 부분 소년이 성장하지 않듯 사랑도 성장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끼는 성장하겠지. 사랑 아닌 사랑을 누리며,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소년처럼. 그런데 소년은 정말 자라지 않는 걸까?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 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수없이 없이 많은 희안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뼈 속으로” 난 “길”은 내적 성장을 암시한다. 외형은 자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애인이 아닌” 듯 “사랑이 아닌” 듯 시간은 흐르고, 준 것과 남은 것이 이루는 반비례 속에 뼈 속의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명명이며, 성장 대신 내어주거나 얻은 것, “늘 그리워하는 병”(「오십 미터」)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희안한 초안들”이란 아마도 제대로 성장했다면 갖추었을 소년의 꿈이자 열망, 믿음이 아닐 것인가? 환상과 허상, 상상을 통해서나마 성장이, 어떤 성숙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애인은 혼자가 되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그런 성숙은 나눌 수 없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 터. ‘나라는 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간신히 표명되는 모종의 자기 감각일 테니.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불가능을 통해서만 바라고 믿을 만한 감각일 것이다. 차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Y는 하루가 차갑고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바다에서는 소녀들이 까르르대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해변이었다. […] 십일월의 바다는 Y에게 의미심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감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관리되지 않는 것 해변에서 Y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파묻었다 - 「Y의 해변」 부분 4.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 「생은 가엾다」 부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지옥이든 천국이든 삶을 버티고 이어간다는 사실은 가엾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들은 그 같은 생을 부대끼며 우리가 내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일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느 헐한 저녁/혼자 단무지를 씹”는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고, 그 하던 일들이 되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에 빠져들게 만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바로 그 같은 삶의 무상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야근조 몇이 둑방 위를 걸어간다 그들에게는 한 세계가 있고 마을에도 한 세계가 있고 남자들이 밤에 해당하는 몇 가지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은 마을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춘 채 하루를 세상 어디쯤 배치한다 […] 남자들은 늘 했던 일들을 하고 마을도 늘 했던 일들을 한다 약속 같은 게 없으니 망칠일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 잠자리에 든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하루가 간다. ‘제행무상’ 말없이 이루어지는 밤 - 「어둠과 마을」 부분 기약이 없는 일상,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다. 영원회귀처럼 찾아드는 “어둠과 마을”의 풍경은 지금-여기의 이 순간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낮게 속삭인다. 허무감의 극치일까? 동시에, 실재하는 순간 속에 꿈과 열망, 믿음을 투여하는 성실한 허무주의자, 초개인주의자의 나날이 그로부터 펼쳐질지 모른다.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 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 「판교」 부분 타자의 눈길과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나만의 나’ 속에 자신의 거소를 짓는 것. 성스러움일까, 아닐까? 저 지독스러운 고집과 고독, 무한한 자부와 겸손, 기이할 정도로 사소한 것과 존귀한 것이 얽혀들어 만드는 삶.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 「판교」 부분 생이 가엾다면 죽음을 멀리할 것이다. 오만하게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허무주의자는 죽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이 태어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장마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상(氣象)을 견디고 버티는 시를 길어낼 수밖에.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덕분이었다. - 「장마의 시」 부분 이 생애에서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천국이었으면,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어떤 종착지라면 우리는 초탈할 수도 있고, 완전한 체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작고 붉은 열매”가 떨어져 “포자로 피어났”을 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을 느꼈을 때, 그것이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소년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삶만큼이나 죽음도, 죽음만큼이나 삶도 알아버린 저 “장마” 속에서. 이곳에서는 다만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그 모든 것을 시로 길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답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성장하지 않는 소년을 멈춰 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문턱이 아닐는지.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 번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 「장마의 시」 부분 * 성장을 거부한 소년에게 시간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마도 내적 성장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을 흐르는 피가 ‘검고 불온하다’며 천국과 지옥을 뇌까리던 시절을 “오만”하다고 회상조차 하게 되었다. 신화처럼 ‘푸른색의 기억’을 찾기보다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시절의 “동네 이름”에 더 마음이 갔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그 동네 이름을 기억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때 번성했었다는 남녘 어느 도시로 문학 강연 가는 날 문화센터를 찾아 헤맨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달이 빨리 흘러갔다던 그 동네를 찾고 있었다 원로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시는 비명’이라고 오만한 말을 지껄이고 밤거리로 나왔다 - 「항구」 부분 상투적인 통찰의 몸짓 없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는 성장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 중인 소년일 터. 그가 여전히 ‘나쁜 소년’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리에 마냥 서 있지만은 않은 여정 속에 있음은 틀림없다.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도 세워두지 않은 채 여전한 걸음을 옮겨가는 누군가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권력으로 알지 않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무연고 시신처럼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가슴을 두드렸다 몇 알의 불안장애 약은 시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세월을 항구에 놓아두었다 - 「항구」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펴낸 지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가 나왔다. 그리고 4년을 주기처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나온 산문집이나 동시집, 시선집을 제외한다면, 다음 시집이 나올 시간을 놓친 셈이다. 아쉬워해야 할까? 시인 허연은 아직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방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무상했던 거부와 부정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지 않고 지금-여기의 순간으로 매번 끌어당기는 것은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이 지금의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내가 듣는 것. 허연에게 시란 그것을 멈춤 없이 계속하는 글쓰기이며, 생의 허무주의를 성실히 실행하는 행위일 테니까. 천국보다 낯설지만, 지옥보다는 낯익은.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개정판 자서」 전문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월간 현대시 최진석 허무주의소년성장무상성일상타자지옥인내자기인식 2025
이철주 임계점의 시학 ― 이다희

1. 지금 우리의 영혼이 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시속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맹목을 온 힘을 다해 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익숙해지고 말아, 어째서 이리 늘 쉽게 지치고 마는지 곧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하여 온 생을 걸어야 하는 몸과 영혼 사이에 주어진 가혹한 계약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의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히 드러내고야 만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쉼 없이 반복되는 중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까. 맹목의 속도와 방향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할 수 있다면 삶은, 시간은, 감각과 영혼은 얼마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몸의 시간에 안착하거나 가상의 자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며, 몸과 영혼 사이의 간극과 시차로 매번의 삶을, 한 번도 발설된 적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충실히 증명해낼 순 없을까. 이다희의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중력을 찾”으려는 “충혈된” 낮의 시간과 “중력이 희미해지”는 밤의 깊이(「햇빛이 오는 쪽」, 『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사이에서, 그 아득한 현기증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하려 한다. 이는 물론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자주 발견되었던 모티프일 테지만, 유독 이번 시편들에서 더 선연하고 돌올해 보인다. 중력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희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성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격렬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작지만 분명한 존재의 울음을, 눈길을, 선득한 혼란을 아득한 허공 위에 담담히 풀어놓는다. 무감해진 생의 감각과 굳어버린 언어의 몸에 작은 숨구멍을 내고(“그녀의 귓불에 점처럼 박힌 구멍을 본다”, 「귀걸이가 있다면」),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왔다 물러나는 존재의 충동과 생동하는 호흡을 문장의 심연 한가운데에 단단히 심어놓는다. 그렇게 중력과 허공이 뒤엉켜 범벅이 된 혼곤한 꿈들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 이다희 시의 울림은 중력과 허공의 경계를 섬세히 살피고 어루만지려는 시선의 견고함과 그 깊이로부터 온다. ‘너머’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시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에는 언어의 관성이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로서의 절박함이나 성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산문시의 차분한 호흡으로, 때로는 힘들이지 않고 찍어낸 스냅샷과 같은 이미지의 경쾌함과 리듬의 산뜻함으로, 우리의 삶과 감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유의 허방을 적확히 찌르고 그 폐부를 찬찬히 응시한다. 중력의 맹점이 음화로 인화되어 나타나는 위태로운 매혹의 순간을 담담히 매개하고,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며 뒤섞일 것 같은 팽팽한 임계점의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낸다. 다음의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카는 숫자 8이상을 세지 못한다. 조카는 숫자 8까지 세고 다시 1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8다음으로 17을 외쳤는데 누구도 조카에게 17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tv에서 보거나 책에서 봤겠지. 다들 나름의 추측을 보태었다. 나는 지니가 갇힌 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조카의 작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8다음에 왜 1이 아니고 17인지 알려줄래? 조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에 빠져든다. 조카는 훨씬 무거워진다. 잠의 중력이 나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바지에 침이 묻는다. 무릎을 내어주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잠에 빠진 인간은 잠으로 돌진하지만 무릎을 내어준 인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전히 혼자였다.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덩그러니. 문득 살아야 할 시간들을 헤아려보았다. 나는 나의 수명을 알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조롱은 많아지고. 내 마음은 진실을 불태웠어. 먼지가 된 진실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아, 바람에 흩날리네. 자동차는 가만히 있고 긴 고속도로가 타이어 아래를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다.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 눈물이 흐른다. 이 눈물은 마치 남의 눈에 매달려 있다가 내 볼에 툭 떨어진 것 같다. 만족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제 집에 가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 「크로마키」 부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중력과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작은 거짓과 착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안전하게 보증된 대리만족에 기대어 하루치의 허기와 갈증을 근근이 견디며 버텨내 보지만, 아주 가끔 아무리 정교히 꾸미려 해도 위장된 속임수들이 온통 속절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아찔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상상의 연기를 펼치는 “크로마키” 촬영 현장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조카”의 깊은 잠과 그 잠의 중력은,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각과 상념을 적나라한 허공뿐인 어둠 속으로 단번에 밀어내 버린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허공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그간 지상의 몸에 달라붙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어온 스스로 “불태워” “먼지가 된 진실”의 자리를 아프게 직시한다. 그러나 온전히 허공뿐인 것은 아니다. 화자는 스스로가 지워버린 진실의 텅 빈 자리만이 아니라, “조카”의 작은 비밀, 8 다음이 9도 아니고 1도 아닌 정확히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남는다. 중력에 거세당한 텅 빈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추궁과 협박에도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허공의 비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러니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는 고백은 이처럼 기나긴 우회 끝에 도달한 해방의 순간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도 뜨거운 헌사가 된다. 물론 이는 ‘중력’을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린 관념과 추상으로서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깊은 잠”을 촉구하기 위한 매개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도피나 회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훼손된 수수께끼와 진실, 허공의 자리가 다시 중력과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요한 안식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력과 허공이 뒤엉키며 어지러이 뿌리를 내리는 매혹의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명료히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참새가 지붕의 가장 끝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에 참새의 발이 저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겠지 곧 참새는 분주하게 날아가 버린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이 다시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대리석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물감이 터지지 않을까 - 「코가 붙듯이」 부분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이 품고 있는 지상의 중력은 그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는 “참새의 발”과 아스라이 균형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다. 참새는 언제라도 스스로가 품은 허공 속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자의 시선은 허공에의 투신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해방의 상상력보다는 중력과 허공이 만나 이루어내는 위태로운 균형과 혼란에, 잠재태들이 극에 달하는 임계점의 순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 허공이 중력 위에 다시 내려앉는 형상적 필연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는 “대리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무한한 잠재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감이 터지”듯 서로의 경계를 범람해 뒤섞이기 직전, 모든 혼란과 소란이 폭발하듯 촉발되기 직전, 영원한 시작의 순간들에 바쳐진 위와 같은 시들은 이다희의 문장이 오래도록 정박해 있고 싶어하는 풍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3.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위태로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에 깊이 천착해 있는 이다희의 시는, 화자에 의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도입된 ‘허공’이 촉발하는 리듬과 호흡의 운동성에도 긴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때로,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감각과 사유의 극한을 돌파하려는 그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다희 시 속 허공은 주체와 세계를 모두 지워버린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공마저도 감싸안으려는 타자의 구체적 체온으로부터, 서로가 품은 울음의 깊이를 공평히 나누어 가지려는 응시의 뒤엉킴으로부터 촉발된 가장 따뜻한 부재이자 간극으로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와 부재를 부산스러운 의미의 소란과 몸부림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 부재를, 침묵을, 설명될 수 없음을, 그 적나라한 맹점을 끌어안은 채, 그 허공이 품은 열기와 온기로 서로의 맹목과 허기를, 갈증과 결핍을 함께 앓고 견디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들이 가능해진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에 공기에도 노출된다. 종이와 공기가 파란 잉크를 나누어 가지는 순간에도 다음 문장이 필요해.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중략) 두 개의 스페이스 바, 두 개의 공백. 왼손 엄지에 하나 오른손 엄지에 하나. 두 개의 우주는 바깥을 원한다. 겨울을 원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외로웠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겨울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밤이 울적하다면 계절이 지구의 오래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우주로 다시 쓴다. 모든 꽃이 자해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꽃의 종류를 골라서 꽃집을 나온다. 머리보다 큰 수국을 높이 들고 달리는 저 여자는 대낮을 파란 불꽃으로 불 지른다. 기쁘다고 하기엔 바쁘고, 슬프다고 하기엔 꽃이 아름다워 눈물이 마른다. 지금 여자가 당신에게 윙크를 한다. 당신에게. 눈물이 아니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윙크. 윙크. - 「볼펜, 남편, 키보드」 부분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잉크와 종이가 만나는 단순한 사건에조차 함부로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 없는 허공이,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와 그 신비를 품은 우주가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대용 키보드 속 두 개의 스페이스바처럼 서로 꼭 닮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개의 공백과 허공으로, 간극과 평행선으로 남편과 자신을, “여자”와 “당신”을 나란히 놓아둔 채 차례로 호명한다. 두 개의 허공은 막힌 문장에 뚫린 이중의 숨구멍이 되어 시적 주체가 견디고 감내해야 할 중력의 시간을 “파란 불꽃”의 선연한 열기로 한껏 뜨겁고 풍요롭게 타오르게 만든다. 온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이 거꾸로 서로를 더 깊고 뜨겁게, “바쁘”게, “아름답”게 만드는 까닭은, “눈물”로 애타게 호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서로의 허공을 “윙크” 하나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품어줄 수 있다는 오래되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에게 깊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려 깊은 눈치와 배려는 꼭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명쾌히 밝혀주고 있듯, 이것은 결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가 오면 악기들이 퉁퉁 불어서 한참을 달래야한다. 이 차이를 알아낼 수 없다면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 연주자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한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찻잔 테두리에 둘러진 황금을 보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울음이 그녀의 말을 방해했지만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황금처럼 보이겠지만 황금이 아니라고.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나는 찻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마치 자기 자신을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사람처럼. 한결 맑아진 얼굴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렸다. 찻잔은 이제 텅 비어 있고, 자신의 영원한 불만족에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 「바로크 일기」 부분 손님을 맞는 데에 꼭 연주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을 맞는 행위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겉으론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리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주인인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든 응답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라는 ‘허공’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화자는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확인하고 선언한다. 그는 그녀의 “손에 찻잔을 쥐여” 준 채 떨리는 손이 잦아들어 “찻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 타자의 심연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위 시가 특별해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 간단히 환원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녀가 떠난 뒤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린다. 마치 원래부터 진짜 손님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허공이 끌고 들어온 어둠이었다는 것처럼. 이 어둠에 각인된 결코 지울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이 “영원한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이다희 시의 시적 주체들은 이미 이 어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하다. 부정하고 밀어내야 할, 길들이고 제거해야 할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자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어둠을, 허공을 정확히 응시하고 끌어안는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의, 허공의 순례자들이다. 허공과 중력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일순간 부풀어 오르고 불현듯 멈추어 서는 호흡의 중심에, 임계점의 날카로운 간극에 아득히 사로잡힌다. 4. 이다희의 문장은 언제나 하나의 쌍으로, 두 개의 호흡으로, 엇갈리며 뒤엉키는 두 벡터로서 존재한다. 중력으로부터 허공이 솟아오르고 허공으로부터 다시 중력이 자라나는 이 종결될 수 없는 존재의 충동과 반복은, 그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을 이 상보적 운동성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시는 관성과 중력에 굴복하지도 어둠과 허공을 향해 손쉽게 탈주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며, 너머에 진실이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도, 이를 향한 과장된 몸짓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길어 올리는 빛나는 순간들은 중력과 허공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견고한 침묵과 텅 빈 부재의 물성으로부터 세상 모든 빅뱅의 혼돈과 폭발의 열기를 읽어낼 줄 아는 극도로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이중의 시선으로부터 획득된다. 이다희 시의 독특한 인장은 이처럼 존재와 무가, 중력과 허공이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를 뒤바꾸며 영원히 그 임계점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존재론적 사유의 역동성과 그 충만함 속에 자리한다. 이를 임계점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버려진 밤들이 품은 내밀한 임계점의 순간들을 그의 문장이 초대한 또 하나의 깊은 맹목 속에서 캄캄히 발음해 본다. <끝>

월간 현대시 이철주 임계점중력허공부재타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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