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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과비평 | 2025년 봄호(제207호)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김미정 문학평론

2004년 계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등단, 2025년 현대문학상 수상. 평론집으로 『움직이는 별자리들』이 있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정동의 힘』(역서) 외 다양한 책의 필자나 역자로 참여해 왔다.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 ‘1인칭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1인칭-개인-소유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5월의 한복판”(212)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1인칭 주인공 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자기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207)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 2) 이른바 자기서사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 2024 참조.
  •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
  •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
  • 11) 같은 책, 212.
  •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 14) 같은 책, 26-27, 338.
  • 15) 같은 책, 337.
  •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
  •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
  •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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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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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지옥보다 낯익은

1.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문구는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탐문하려 할 때마다 타자의 시선이 끼어들고 타자의 언어가 개입하기에 온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갇히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말 속에 규정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온전한 자신의 시선과 언어로 자기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의 방식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허연이라면 “나는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내 사랑은」 부분 (『불온한 검은 피』, 1995) 요동치는 시선마다 깨닫는 것은 나를 나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적대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반기”의 흔적들로서, 나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에 대한 적대의 잔여들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행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치욕의 내 입맛들”도 씻기지 않는다.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모두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왜 그런가? 피가 “검은” 까닭에, 그 피가 “불온한” 탓에. 타자의 지옥을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이 벌써 지옥이기에,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허연 시작(詩作)의 시작, 자기 인식의 기원일 터. 그러나 자기라는 생(生)이 여전히 지속하는 한 지옥은 아직 예감일 뿐이다. 사랑을 곧장 지옥이라 부르기보다 “천국이 아닐 것”이라 유보하는 시구는, 시인이 선 지금-여기가 지옥과 천국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연옥과도 같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현재로도 미래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의 정체 속에 영원히 유동하기만 하는 기이한 장소에 ‘나’가 있다.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여정이 그의 운명이다. 성장도 없고 퇴행도 없는 이런 상황은 소년을 소년으로 멈춰 세운다. 언젠가 존재했으리라 믿을 뿐인 “푸른색의 기억”은 저 검은 피의 불온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 2. 벌어질 일은 반드시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 「천국은 없다」 부분 (『내가 원하는 천사』, 2012) 순전한 사랑에 대한 꿈과 열망, 그것은 천국이 실재한다는 믿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곤경이 가파를수록 우리는 사랑에 대한 꿈에, 천국에 대한 믿음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쩌랴. 두 다리가 디딘 발판은 “지긋지긋한” 지상의 한복판. 이 땅의 어디로 가든 지상에서의 열망과 믿음은 결국 제자리뛰기의 지긋지긋한 반복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걸 왜 모를까? 뛰면 뛸수록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고, 뜀은 끝내 멈추고 말리라. 십자가가 많았다. 왜 개별적 인간들은 임연수어가 있고 잘 끓여진 카레가 있고 심지어 맥박이 뛰고 끝도 없는 겹겹의 파도가 있는데 신을 보려고 할까? 망하기 전에 서둘러 망하려고 할까? - 「해변 정류장」 부분 사랑을 위한, 천국을 향한, 신에 대한 자유. 우리를 홀리는 저 말들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여기 지상에 머물다 끝내 여기서 소진하리라는 역설의 진실을 표현한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상이자 허상이요, 환상일 따름이니. 딴 생각을 하다 버스를 놓치고 낮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들었다 “잘 알아 두라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야” - 「해변 정류장」 부분 이러한 자유는 제자리를 맴도는 뜀뛰기, 수백 번 수천 번을 굴린다 해도 한 걸음 못 나아가는 쳇바퀴 달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각자 영위하며 생을 소모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리멸렬하고 사소한, 지상의 흙 한 줌 부스러기에 연연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길고양이가 있었다. 캠핑오는 사람마다 이름을 지어줘서 고양이 이름이 한 백 개끔은 된다고 캠핑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는 우리 텐트에 올 때만 레오였다. 레오는 우리 구역에선 한 번도 빠짐없이 레오였다. 이박 삼일동안 그랬다. 하지만 레오는 옆 텐트에 가면 줄리앙이었다. […] 캠핑은 지리멸렬했다. 사소했다. 끝까지 사소했다. 데크 바닥을 핥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였다. - 「지리멸렬하다는 것」 부분 “레오”는 사자의 이름이다. 동시에 “줄리앙”이기도 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타인에 의해 보여지고 명명되는 존재로 삶을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라 불리고 자신하든, 끝내 “데크 바닥을 핥는” “사소”한 존재가 그것. 치욕적이거나 불운한 운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생의 주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 「작약과 공터」 부분 작약이 피었다. 사람들이 먹고 놀며 흥청거리는 장소, 거기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작은 새의 사체 옆. 이를 신비롭다 할까, 아름답다 부를까? 살아 있는 “나”에 감사해야 할까? 내 시선에 들어온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 같기도 하고,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기도 하다. 우울한 감정을 불러내는 그 시선은 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다만 “잔인 속의 고요”를 품을 따름이다. 저 고요를 삶도 죽음도 통과하고 있다. 자살한 여성이든 슬픈 태도든 작약은 그 사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것은 마음대로 보고 제멋대로 명명한 “나의 재능”일 터. 분명히 해두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보며 내가 부르는 모든 것은 ‘이 나’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 자아의 잔상이라는 것을.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과 공터」). 3.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 부분 (『오십 미터』, 2016) 소년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성장을 거부한 채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타자의 영향을 받고, 타자의 시선 속에 자기를 두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꾸미는 일이다. 이는 자기의 길이 아닐 터이기에 소년은 사랑의 바깥에 머물고자 한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기를 원한다.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다 주고 약해지면 남는 건 없어 대신 ‘사랑’말고 필요한 것만 하는 거야 신념 같은 거 비웃으면서 그거 알아?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 이게 파도랑 가장 오래 노는 거야 절대 다 적시지 않는 거야 반 정도만 적시고 꼭 반을 남겨 두어야 해 - 「이끼 키우기」 부분 “‘사랑’ 말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란 무엇일까? 행하면서 행하지 않기, 혹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기. 사랑을 연기(演技)하되 사랑을 연기(延期)함으로써 사랑 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연기(緣起)가 아닐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끊지도 끊기지도 않도록 다만 곁을 맴도는 것. 그러니 사랑 대신 사랑하지-않기를 사랑하자. 알았지?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이끼에 물 주자 - 「이끼 키우기」 부분 소년이 성장하지 않듯 사랑도 성장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끼는 성장하겠지. 사랑 아닌 사랑을 누리며,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소년처럼. 그런데 소년은 정말 자라지 않는 걸까?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 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수없이 없이 많은 희안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뼈 속으로” 난 “길”은 내적 성장을 암시한다. 외형은 자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애인이 아닌” 듯 “사랑이 아닌” 듯 시간은 흐르고, 준 것과 남은 것이 이루는 반비례 속에 뼈 속의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명명이며, 성장 대신 내어주거나 얻은 것, “늘 그리워하는 병”(「오십 미터」)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희안한 초안들”이란 아마도 제대로 성장했다면 갖추었을 소년의 꿈이자 열망, 믿음이 아닐 것인가? 환상과 허상, 상상을 통해서나마 성장이, 어떤 성숙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애인은 혼자가 되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그런 성숙은 나눌 수 없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 터. ‘나라는 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간신히 표명되는 모종의 자기 감각일 테니.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불가능을 통해서만 바라고 믿을 만한 감각일 것이다. 차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Y는 하루가 차갑고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바다에서는 소녀들이 까르르대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해변이었다. […] 십일월의 바다는 Y에게 의미심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감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관리되지 않는 것 해변에서 Y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파묻었다 - 「Y의 해변」 부분 4.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 「생은 가엾다」 부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지옥이든 천국이든 삶을 버티고 이어간다는 사실은 가엾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들은 그 같은 생을 부대끼며 우리가 내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일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느 헐한 저녁/혼자 단무지를 씹”는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고, 그 하던 일들이 되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에 빠져들게 만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바로 그 같은 삶의 무상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야근조 몇이 둑방 위를 걸어간다 그들에게는 한 세계가 있고 마을에도 한 세계가 있고 남자들이 밤에 해당하는 몇 가지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은 마을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춘 채 하루를 세상 어디쯤 배치한다 […] 남자들은 늘 했던 일들을 하고 마을도 늘 했던 일들을 한다 약속 같은 게 없으니 망칠일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 잠자리에 든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하루가 간다. ‘제행무상’ 말없이 이루어지는 밤 - 「어둠과 마을」 부분 기약이 없는 일상,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다. 영원회귀처럼 찾아드는 “어둠과 마을”의 풍경은 지금-여기의 이 순간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낮게 속삭인다. 허무감의 극치일까? 동시에, 실재하는 순간 속에 꿈과 열망, 믿음을 투여하는 성실한 허무주의자, 초개인주의자의 나날이 그로부터 펼쳐질지 모른다.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 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 「판교」 부분 타자의 눈길과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나만의 나’ 속에 자신의 거소를 짓는 것. 성스러움일까, 아닐까? 저 지독스러운 고집과 고독, 무한한 자부와 겸손, 기이할 정도로 사소한 것과 존귀한 것이 얽혀들어 만드는 삶.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 「판교」 부분 생이 가엾다면 죽음을 멀리할 것이다. 오만하게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허무주의자는 죽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이 태어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장마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상(氣象)을 견디고 버티는 시를 길어낼 수밖에.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덕분이었다. - 「장마의 시」 부분 이 생애에서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천국이었으면,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어떤 종착지라면 우리는 초탈할 수도 있고, 완전한 체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작고 붉은 열매”가 떨어져 “포자로 피어났”을 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을 느꼈을 때, 그것이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소년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삶만큼이나 죽음도, 죽음만큼이나 삶도 알아버린 저 “장마” 속에서. 이곳에서는 다만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그 모든 것을 시로 길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답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성장하지 않는 소년을 멈춰 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문턱이 아닐는지.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 번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 「장마의 시」 부분 * 성장을 거부한 소년에게 시간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마도 내적 성장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을 흐르는 피가 ‘검고 불온하다’며 천국과 지옥을 뇌까리던 시절을 “오만”하다고 회상조차 하게 되었다. 신화처럼 ‘푸른색의 기억’을 찾기보다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시절의 “동네 이름”에 더 마음이 갔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그 동네 이름을 기억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때 번성했었다는 남녘 어느 도시로 문학 강연 가는 날 문화센터를 찾아 헤맨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달이 빨리 흘러갔다던 그 동네를 찾고 있었다 원로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시는 비명’이라고 오만한 말을 지껄이고 밤거리로 나왔다 - 「항구」 부분 상투적인 통찰의 몸짓 없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는 성장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 중인 소년일 터. 그가 여전히 ‘나쁜 소년’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리에 마냥 서 있지만은 않은 여정 속에 있음은 틀림없다.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도 세워두지 않은 채 여전한 걸음을 옮겨가는 누군가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권력으로 알지 않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무연고 시신처럼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가슴을 두드렸다 몇 알의 불안장애 약은 시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세월을 항구에 놓아두었다 - 「항구」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펴낸 지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가 나왔다. 그리고 4년을 주기처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나온 산문집이나 동시집, 시선집을 제외한다면, 다음 시집이 나올 시간을 놓친 셈이다. 아쉬워해야 할까? 시인 허연은 아직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방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무상했던 거부와 부정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지 않고 지금-여기의 순간으로 매번 끌어당기는 것은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이 지금의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내가 듣는 것. 허연에게 시란 그것을 멈춤 없이 계속하는 글쓰기이며, 생의 허무주의를 성실히 실행하는 행위일 테니까. 천국보다 낯설지만, 지옥보다는 낯익은.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개정판 자서」 전문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월간 현대시 최진석 허무주의소년성장무상성일상타자지옥인내자기인식 2025
이철주 임계점의 시학 ― 이다희

1. 지금 우리의 영혼이 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시속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맹목을 온 힘을 다해 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익숙해지고 말아, 어째서 이리 늘 쉽게 지치고 마는지 곧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하여 온 생을 걸어야 하는 몸과 영혼 사이에 주어진 가혹한 계약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의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히 드러내고야 만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쉼 없이 반복되는 중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까. 맹목의 속도와 방향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할 수 있다면 삶은, 시간은, 감각과 영혼은 얼마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몸의 시간에 안착하거나 가상의 자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며, 몸과 영혼 사이의 간극과 시차로 매번의 삶을, 한 번도 발설된 적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충실히 증명해낼 순 없을까. 이다희의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중력을 찾”으려는 “충혈된” 낮의 시간과 “중력이 희미해지”는 밤의 깊이(「햇빛이 오는 쪽」, 『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사이에서, 그 아득한 현기증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하려 한다. 이는 물론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자주 발견되었던 모티프일 테지만, 유독 이번 시편들에서 더 선연하고 돌올해 보인다. 중력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희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성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격렬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작지만 분명한 존재의 울음을, 눈길을, 선득한 혼란을 아득한 허공 위에 담담히 풀어놓는다. 무감해진 생의 감각과 굳어버린 언어의 몸에 작은 숨구멍을 내고(“그녀의 귓불에 점처럼 박힌 구멍을 본다”, 「귀걸이가 있다면」),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왔다 물러나는 존재의 충동과 생동하는 호흡을 문장의 심연 한가운데에 단단히 심어놓는다. 그렇게 중력과 허공이 뒤엉켜 범벅이 된 혼곤한 꿈들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 이다희 시의 울림은 중력과 허공의 경계를 섬세히 살피고 어루만지려는 시선의 견고함과 그 깊이로부터 온다. ‘너머’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시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에는 언어의 관성이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로서의 절박함이나 성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산문시의 차분한 호흡으로, 때로는 힘들이지 않고 찍어낸 스냅샷과 같은 이미지의 경쾌함과 리듬의 산뜻함으로, 우리의 삶과 감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유의 허방을 적확히 찌르고 그 폐부를 찬찬히 응시한다. 중력의 맹점이 음화로 인화되어 나타나는 위태로운 매혹의 순간을 담담히 매개하고,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며 뒤섞일 것 같은 팽팽한 임계점의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낸다. 다음의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카는 숫자 8이상을 세지 못한다. 조카는 숫자 8까지 세고 다시 1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8다음으로 17을 외쳤는데 누구도 조카에게 17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tv에서 보거나 책에서 봤겠지. 다들 나름의 추측을 보태었다. 나는 지니가 갇힌 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조카의 작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8다음에 왜 1이 아니고 17인지 알려줄래? 조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에 빠져든다. 조카는 훨씬 무거워진다. 잠의 중력이 나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바지에 침이 묻는다. 무릎을 내어주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잠에 빠진 인간은 잠으로 돌진하지만 무릎을 내어준 인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전히 혼자였다.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덩그러니. 문득 살아야 할 시간들을 헤아려보았다. 나는 나의 수명을 알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조롱은 많아지고. 내 마음은 진실을 불태웠어. 먼지가 된 진실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아, 바람에 흩날리네. 자동차는 가만히 있고 긴 고속도로가 타이어 아래를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다.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 눈물이 흐른다. 이 눈물은 마치 남의 눈에 매달려 있다가 내 볼에 툭 떨어진 것 같다. 만족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제 집에 가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 「크로마키」 부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중력과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작은 거짓과 착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안전하게 보증된 대리만족에 기대어 하루치의 허기와 갈증을 근근이 견디며 버텨내 보지만, 아주 가끔 아무리 정교히 꾸미려 해도 위장된 속임수들이 온통 속절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아찔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상상의 연기를 펼치는 “크로마키” 촬영 현장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조카”의 깊은 잠과 그 잠의 중력은,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각과 상념을 적나라한 허공뿐인 어둠 속으로 단번에 밀어내 버린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허공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그간 지상의 몸에 달라붙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어온 스스로 “불태워” “먼지가 된 진실”의 자리를 아프게 직시한다. 그러나 온전히 허공뿐인 것은 아니다. 화자는 스스로가 지워버린 진실의 텅 빈 자리만이 아니라, “조카”의 작은 비밀, 8 다음이 9도 아니고 1도 아닌 정확히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남는다. 중력에 거세당한 텅 빈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추궁과 협박에도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허공의 비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러니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는 고백은 이처럼 기나긴 우회 끝에 도달한 해방의 순간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도 뜨거운 헌사가 된다. 물론 이는 ‘중력’을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린 관념과 추상으로서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깊은 잠”을 촉구하기 위한 매개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도피나 회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훼손된 수수께끼와 진실, 허공의 자리가 다시 중력과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요한 안식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력과 허공이 뒤엉키며 어지러이 뿌리를 내리는 매혹의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명료히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참새가 지붕의 가장 끝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에 참새의 발이 저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겠지 곧 참새는 분주하게 날아가 버린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이 다시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대리석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물감이 터지지 않을까 - 「코가 붙듯이」 부분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이 품고 있는 지상의 중력은 그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는 “참새의 발”과 아스라이 균형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다. 참새는 언제라도 스스로가 품은 허공 속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자의 시선은 허공에의 투신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해방의 상상력보다는 중력과 허공이 만나 이루어내는 위태로운 균형과 혼란에, 잠재태들이 극에 달하는 임계점의 순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 허공이 중력 위에 다시 내려앉는 형상적 필연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는 “대리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무한한 잠재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감이 터지”듯 서로의 경계를 범람해 뒤섞이기 직전, 모든 혼란과 소란이 폭발하듯 촉발되기 직전, 영원한 시작의 순간들에 바쳐진 위와 같은 시들은 이다희의 문장이 오래도록 정박해 있고 싶어하는 풍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3.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위태로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에 깊이 천착해 있는 이다희의 시는, 화자에 의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도입된 ‘허공’이 촉발하는 리듬과 호흡의 운동성에도 긴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때로,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감각과 사유의 극한을 돌파하려는 그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다희 시 속 허공은 주체와 세계를 모두 지워버린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공마저도 감싸안으려는 타자의 구체적 체온으로부터, 서로가 품은 울음의 깊이를 공평히 나누어 가지려는 응시의 뒤엉킴으로부터 촉발된 가장 따뜻한 부재이자 간극으로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와 부재를 부산스러운 의미의 소란과 몸부림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 부재를, 침묵을, 설명될 수 없음을, 그 적나라한 맹점을 끌어안은 채, 그 허공이 품은 열기와 온기로 서로의 맹목과 허기를, 갈증과 결핍을 함께 앓고 견디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들이 가능해진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에 공기에도 노출된다. 종이와 공기가 파란 잉크를 나누어 가지는 순간에도 다음 문장이 필요해.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중략) 두 개의 스페이스 바, 두 개의 공백. 왼손 엄지에 하나 오른손 엄지에 하나. 두 개의 우주는 바깥을 원한다. 겨울을 원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외로웠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겨울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밤이 울적하다면 계절이 지구의 오래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우주로 다시 쓴다. 모든 꽃이 자해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꽃의 종류를 골라서 꽃집을 나온다. 머리보다 큰 수국을 높이 들고 달리는 저 여자는 대낮을 파란 불꽃으로 불 지른다. 기쁘다고 하기엔 바쁘고, 슬프다고 하기엔 꽃이 아름다워 눈물이 마른다. 지금 여자가 당신에게 윙크를 한다. 당신에게. 눈물이 아니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윙크. 윙크. - 「볼펜, 남편, 키보드」 부분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잉크와 종이가 만나는 단순한 사건에조차 함부로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 없는 허공이,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와 그 신비를 품은 우주가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대용 키보드 속 두 개의 스페이스바처럼 서로 꼭 닮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개의 공백과 허공으로, 간극과 평행선으로 남편과 자신을, “여자”와 “당신”을 나란히 놓아둔 채 차례로 호명한다. 두 개의 허공은 막힌 문장에 뚫린 이중의 숨구멍이 되어 시적 주체가 견디고 감내해야 할 중력의 시간을 “파란 불꽃”의 선연한 열기로 한껏 뜨겁고 풍요롭게 타오르게 만든다. 온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이 거꾸로 서로를 더 깊고 뜨겁게, “바쁘”게, “아름답”게 만드는 까닭은, “눈물”로 애타게 호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서로의 허공을 “윙크” 하나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품어줄 수 있다는 오래되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에게 깊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려 깊은 눈치와 배려는 꼭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명쾌히 밝혀주고 있듯, 이것은 결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가 오면 악기들이 퉁퉁 불어서 한참을 달래야한다. 이 차이를 알아낼 수 없다면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 연주자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한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찻잔 테두리에 둘러진 황금을 보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울음이 그녀의 말을 방해했지만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황금처럼 보이겠지만 황금이 아니라고.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나는 찻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마치 자기 자신을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사람처럼. 한결 맑아진 얼굴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렸다. 찻잔은 이제 텅 비어 있고, 자신의 영원한 불만족에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 「바로크 일기」 부분 손님을 맞는 데에 꼭 연주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을 맞는 행위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겉으론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리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주인인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든 응답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라는 ‘허공’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화자는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확인하고 선언한다. 그는 그녀의 “손에 찻잔을 쥐여” 준 채 떨리는 손이 잦아들어 “찻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 타자의 심연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위 시가 특별해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 간단히 환원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녀가 떠난 뒤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린다. 마치 원래부터 진짜 손님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허공이 끌고 들어온 어둠이었다는 것처럼. 이 어둠에 각인된 결코 지울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이 “영원한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이다희 시의 시적 주체들은 이미 이 어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하다. 부정하고 밀어내야 할, 길들이고 제거해야 할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자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어둠을, 허공을 정확히 응시하고 끌어안는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의, 허공의 순례자들이다. 허공과 중력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일순간 부풀어 오르고 불현듯 멈추어 서는 호흡의 중심에, 임계점의 날카로운 간극에 아득히 사로잡힌다. 4. 이다희의 문장은 언제나 하나의 쌍으로, 두 개의 호흡으로, 엇갈리며 뒤엉키는 두 벡터로서 존재한다. 중력으로부터 허공이 솟아오르고 허공으로부터 다시 중력이 자라나는 이 종결될 수 없는 존재의 충동과 반복은, 그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을 이 상보적 운동성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시는 관성과 중력에 굴복하지도 어둠과 허공을 향해 손쉽게 탈주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며, 너머에 진실이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도, 이를 향한 과장된 몸짓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길어 올리는 빛나는 순간들은 중력과 허공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견고한 침묵과 텅 빈 부재의 물성으로부터 세상 모든 빅뱅의 혼돈과 폭발의 열기를 읽어낼 줄 아는 극도로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이중의 시선으로부터 획득된다. 이다희 시의 독특한 인장은 이처럼 존재와 무가, 중력과 허공이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를 뒤바꾸며 영원히 그 임계점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존재론적 사유의 역동성과 그 충만함 속에 자리한다. 이를 임계점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버려진 밤들이 품은 내밀한 임계점의 순간들을 그의 문장이 초대한 또 하나의 깊은 맹목 속에서 캄캄히 발음해 본다. <끝>

월간 현대시 이철주 임계점중력허공부재타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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