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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가을호(제13호)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영원히 믿을 때 미래는 온다 ― 차도하, 『미래의 손』(봄날의책, 2024)을 맞잡고

김다솔 문학평론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1.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 시대의 불안

 

불안이 상시화된 시대다. 전쟁이 횡행하고, 일상적으로 거리를 걷는 일조차 두려울 만큼 원인과 방향을 특정할 수 없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세계 내부에서 쉬지 않고 들려온다.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사회적 불안과 이에 따른 내적 강박 등 여러 불안이 팽배하지만, 최근 가장 날 선 대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여성혐오, 페미니즘과 관련한 불안일 것이다.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은 ‘너 페미야?’라는 말과 함께 마녀사냥과 유사한 낙인찍기의 관행이 되었고, 딥페이크 성범죄와 교제폭력 살인의 수위와 빈도는 끔찍하리만치 높아졌지만 관련 법률의 제정과 사회적 협의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기업을 위주로 행보를 이어 온 ‘집게손가락 논란’ 혹은 ‘집게손가락 괴롭힘’은 정당한 소비자 운동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동시에 벌어지는 중이다.

이를 지켜본 소회를 다소 거칠게 말해보자면, 지금이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 시대’가 아닌지 묻고 싶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판단에 의해 무언가는 유용한 것으로, 또 다른 무언가는 쓸모를 잃고 폐기 처분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쓰레기를 구분하는 판단 주체의 자리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인간의 자의적인 척도가 불완전하며 편협하다는 사실이 더없이 사실감 있게 전해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잣대가 여전히 유효할까. 더불어 쓸모와 유용성의 여부를 가리는 이 오래된 잣대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지금의 혼란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와 수행들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겠다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고려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못 쓸 것으로 끌어내리려는 폄훼와 이에 맞서 페미니즘을 더욱 효용성 있고 올바른 것으로 좌정시키려는 단순한 운동만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여성을 비롯해 차별받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수행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정언명령도 재생산하지 않는 절대성의 총체적 ‘무화’에 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와 옹호의 움직임은 반대항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정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전제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진영 모두 페미니즘을 유용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실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이를 저급하고 유순한 것으로, 혹은 더 순결한 것으로 만들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양자 모두 일종의 오염과 그로 인한 무너짐을 향한 불안으로부터 기인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겠다. 전자는 젠더 차이에 의해 영속되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오염시킬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고, 후자는 추구하는 페미니즘적 가치를 수호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정결한 무언가를 고수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이, 두 움직임은 모두 정화를 새로운 문법으로 위치시킬 뿐, 끝내 현재의 배타적 전체성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고수해야 할 가치 따윈 없다는 사실만이 페미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라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매 순간 상기되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이제 ‘오염’을 자기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더러움’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역전될 것이다.”1)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의 시대에, 무언가를 필요치 않은 것으로 만들어 몰아내려는 시도를 모조리 거부하고, 더러움과 오염을 기꺼이 껴안고서 나아가는 여성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다. 당차고 폭발하는 이 음성은 어리고 여린 소녀-여성 차도하의 것이다. 차도하의 시는 결코 다듬어져선 안 되는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표출하며 어떤 의미화와 집단성에도 쉽게 녹아들지 않는다. 작고 뜨거운 불꽃으로 타오르고, 차갑고 단단한 돌멩이처럼 묵직하게 심장을 내리누르는 차도하의 목소리에 이끌려 세계의 무너짐과 재건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의 흔들리는 불안이 미래에 대한 상상의 불꽃으로 점화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2. 현존재를 젠더화하기: ‘자신만의 세계’에서 ‘모두의 세계’로

하이데거에게 기분이란 이성과 감정 모두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존재와 실존의 뿌리이다. 그중에서도 근본기분(Grundstimmung)은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기분이 아니라, 전체존재 일반에 대한 기분으로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특정 행위로 유도하여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는 특수한 기분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이전까지는 감정이나 심리상태에서 주로 이해되던 통속적인 기분(mood)을 실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바라봄으로써, 이를 인간 즉 현존재가 존재 그리고 세계와 만나는 근원적 ‘사건’을 뜻하는 말로 바꿔 놓는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세계 그리고 세계 내 존재자들과 각기 그때마다 만나고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바로 기분인 것이다. 그의 철학을 ‘기분의 존재론’이라 이름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2)

다소 난해하지만 조금 더 풀어 나가보자. 기분이 존재자와 관련된 ‘존재적’인 층위가 아니라 존재와 관련한 ‘존재론적인’ 차원과 연계된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여러 존재자들과 함께 세계 ‘안에-있음’이라는 존재양식을 통해 거듭 구성된다. 이는 현존재가 특정한 것의 내부 또는 속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여기 혹은 저기라는 실존론적 공간성의 모든 곳에 있고 어떤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에도 닫혀 있지 않은 채 열어 밝혀져 있으면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3)

그런데 하이데거 자신도 강조한 바와 같이, 현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는 채 ‘존재’하려면 그는 세계 내에서 이미 일상적으로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 실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기-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균적 기준에 맞춰 그들-자신으로 먼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돌아서 타자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현존재에게서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을 발견한다. 불안은 다름이 아니라 전체라고 믿어온 세계와 존재자에 대한 의미체계들이 무(無)로 드러나면서 현존재에게 엄습하는 기분이다.4) 그러나 이 무는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허무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와 같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뜻5)에서 존재를 새롭게 열어 밝혀주는 개시의 사건이 된다.

불안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은 인간의 두 가지 선택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현존재는 지금까지 믿어 온 세계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불안을 느낄 때 본래적인 자기의 삶을 등지고 타인에 맞춘 삶으로 돌아서 버린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불안은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무화 작용 앞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독단자로서 결단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을 떠나보내는 죽음을 선취한다. 불안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을 외면하거나, 자기 자신이 될 선택의 기회를 대면한다.

불안은 인간의 자의적인 느낌이나,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느껴지는 공포와 달리 세계와 시대 상황 자체로부터 무언가가 현존재를 엄습하며 찾아온다. 그 부름에 양심을 움켜쥔 자는 이전의 비본래적 실존과는 달리,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수행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6)을 추구하여 현존재의 기초존재론 구조를 확립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밝힐 때, 시간성의 탈자태이자 각기 변화하는 현존재로서의 그의 인간에게서 동일자의 형상이 은근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결단을 통해 단독자가 된 현존재가 ‘자신만의 죽음’을 선취해 실존적 방향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기투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게 된다는 주장이 지나치게 우뚝 서 있는 근대적 주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무를 경험했지만, 그 자신은 무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부동의 움직임. 이것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순 있어도 ‘모두의 세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듯 위대한 사명을 엄숙히 수행하는 주체들이 언제나 성차화, 젠더화된 위계에 의해 나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개인의 본래적 실존을 선취하는 존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는 (백인) ‘남성’ 현존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기존의 세계가 무너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불안이 시대마다의 존재 망각의 상황을 일깨워주는 각기 다른 기분으로 때마다 엄습해온다면,7) 같은 사건에서도 현존재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불안과 세계 개시가 발현되어야만 한다. 불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생길 수 있으며 세계-내-존재를 근본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하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본래적 실존을 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에 유의미하지만, 그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근본적으로 더욱 취약하고 처절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 손쉽게 지워지는 이들과 거짓으로 부풀려진 의미까지도 덧입고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세계에서 다른 존재자들에 몰입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를 성취할 자격은 오직 후자에게만 주어진다. 각 존재자들이 고유한 존재의미 자체로 자신을 밝혀오는 우리들의 세계, 모두의 세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형성될 수 없다.

 

3. 기억할 만한 죽음과 잊어야만 하는 의미

차도하의 시적 주체들이 시대적 근본기분으로서 젠더화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이라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결단하는 현존재가 지닌 결함을 더욱 여실히 보여준다. 시인이 그린 여성들은 분명히 남성보다 처절하게 존재의미를 부정당하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기에 기존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단독자로 고립되지 않고, 자신처럼 차별받는 또 다른 여성과 타인들에게 얽힌 채로 공동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간다. 고정되지 않는 의미들로만 가득 찬 미래를 상상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가까스로 뻗은 손과 그 손을 절대 모른체하지 않는 집념에 기반하고 있다.

차도하의 시세계에서 발 딛고 선 세계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불안의 기분은 주로 다른 이의 죽음으로부터 온다. 「부고」에서는 독특하게도 계절인 “여름”의 죽음이 ‘나’에게 찾아온다. 여름이 죽었다는 소식은 외출 준비를 하던 중별다르지 않게 찾아오는데, 이는 죽음에 한없이 무감한 화자의 태도와 연결된다. 계절의 죽음은 “하긴 누군가 신도 죽었다고 했고 재작년 이맘때쯤 김희지도 죽었는데 계절이라고 못 죽을 거 있나” 하는 서술과 겹치며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죽은 이후에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까지도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라는 기이할 정도로 덤덤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토록 무감한 태도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은 거라면 역시 자살인가, 자살이겠지, 그러나 나는 여름이 왜 죽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게 예의라고 배워서.” 비정상적인 실종을 “못 죽을 거 있나” 싶은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원인을 파악하는 일을 “예의”에서 벗어난 일로 치부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 무정하고 무의미한 독백을 늘어놓는 ‘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부자연스럽게 사라졌을 때 죽음의 원인을 묻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에서 그러한 힘이 구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어그러지게 만드는지로 이어진다. 해당 시에서는 “복숭아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과/ 딸기 디저트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이/ 어느 날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일은 죽은 친구의 영혼을 각자 한 사람씩 더 업고 있었던 둘이 서로 마주쳤음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를 마무리하고/ 남은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무감함의 강요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 오늘의 교통 상황에 숫자로 기록되”듯이 인간 본연의 존재 의미를 망각하고 수치화하는 권력의 행태가 “영혼에 대한 믿음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앗아간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렇듯 죽음의 경험을 평균화하는 힘은 죽음의 이유를 묻지 못하게 하고, 각자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세상의 기준에 걸맞은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만든다. 본래 타인의 죽음은 기존의 세계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무화의 경험을 선사하는 불안의 촉매다. 가까이 있는 이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무척 중요한 사건이지만, 위의 시들처럼 연결되었던 이의 죽음마저도 덧없는 것으로 만드는 힘은 어떤 죽음 앞에서도 불합리성을 향해 질문할 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차도하의 시적 주체들은 침묵을 종용하는 힘 앞에서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잊어도 좋을 것으로 치부 당하는 죽음들을 기억할 만한 것들로 되바꾸기 위해 불안에 전율하면서 질문을 반복한다.

 

왜 우는 것임?

왜 식당에서 남이 죽은 이야기를 하며 우는 것임?

 

(...)

 

그가 죽은 이유 궁금하지 않았음

모르는 얼굴들이 식당에서 나가기를 바랐음

그들의 대화는 길어졌음

아는 사람 앞에 부사가 끝없이 붙었음

그건 내가 모르는 사람의 삶

나는 두부를 꼭꼭 씹었음

 

식당 안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었음

일어날까? 일어나자 이제

모르는 얼굴들이 식당에서 나갔음

나는 그 후로도 한참 앉아 있었음

나 원래 밥 먹는 속도 느림

- 「명사형 죽음」 부분

 

「명사형 죽음」의 화자는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얼굴만 아는 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엿듣게 되고, 죽은 이를 말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말하며 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가 죽은 이유”도 궁금하지 않다고 단언하지만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 죽음의 이유를 찾을 수도 없고, 그래야 하는 이유도 모르지만 왜인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여운을 느낀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향한 질문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지니는 날카로운 자율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서 결코 돌아설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죽음을 미지근한 상태로 느끼도록 만드는 힘은 더 많이 죽는 이들과 더 무감한 이들을 만들어낸다. 여성은 더 많이 죽고, 남성은 더 무감하다. 「시선」에서는 모두가 쉽게 다니는 산책로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는 ‘나’와 ‘나’로부터 늘어난 수많은 여성들, 폭력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로 확대되었다. “산책로에서 성폭행이 일어났다/ 나는 더는 쓸 수 없다/ 나는 백 명으로 천 명으로 만 명으로 늘어나/ 산책로를 뛰었다// 나는 우르르 넘어졌고 나를 밟았고 압사를 당했고/ 나를 뛰어넘어 겨우 살았고// 산책로는 점점 짧아지고/ 하나의 점이 되어/ 나의 모두가 그 위에 쌓여// 하늘을 뚫고 우주를 뚫는 첨탑이 되었다// 과장이 아니에요/ 나는 한 번도 현실을 앞지른 적 없습니다”. 하늘을 뚫을 정도로 많이 쌓인 수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시적 표현은 “한 번도 현실을 앞지른 적 없”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요절복통」의 화자는 “갑자기 터지는 웃음처럼/ 강간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상황을 마주한다. 속수무책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폭력 앞에서 발생한 죽음은 “그러나 꾸민다는 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니?”라고 말하던 여성의 죽음을 한 송이의 “흰 국화”로 정갈하게 정돈하여 유의미한 흔적들을 제거한 채 예쁘게 꾸며낸다.

그런데 차도하가 드러내는 죽음의 종용과 축소는 비단 남성 중심적인 권력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순결성을 응시하는 힘 있는 발화가 그의 시편들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도발적인 당혹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시인의 시어들은 이내 그 ‘당혹스러운 불안감’ 앞에 우리를 멈춰 세우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세련」의 시어들처럼 말이다. “이국적인 문양을 갖고 있는 접시를 잘 닦아서 유리장 안에 넣어놓듯이 시를 쓰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에 ‘그녀’는 “방치된 공원의 쓰레기통 같은/ 오래된 병원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주사기를 모아놓는 상자 같은/ 질염 찌꺼기가 가득한 보지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솔직한 쓰기를 향한 여성의 욕망을 풀어놓는다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뒤의 사건에서 밝혀지는데, “요즘 젖가슴이라는 말을 누가 쓰나요?/ 중년 남성이 쓴 시를 놓고 트위터 사람들이 욕을 하고 있었”던 상황을 목도한 그녀가 “자신의 시에 젖가슴을 쓰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차도하는 여성을 향한 사회적 억압에 적대한다는 단선적인 전선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말들의 의미 역시도 함께 무너트리고자 한다. 따라서 “도발적이네요, 하지만 이게 꼭 필요한 표현일까요, 누구누구의 시를 읽어보셨나요” 하는 인사치레들이 오가다가 “이건 이미, 끝난 시예요”라는 말을 들은 화자가 유리장의 금을 깨고 나가려는 여성 언어가 정결화되면서 생긴 또 다른 억압에 “유리장 따윈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절멸로 응수하는 장면은 유의미하다. 시인에게 여성과 차별 받는 이들을 지키는 언어는 세련된 빛의 언어가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경험을 거치고서라도 영원히 전달될 “주술적인 힘”을 지닌 언어(「지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호를 긋는 순서를 모르고.

성경을 펼쳐본 적 없고.

십계명을 모르지만.

 

나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다.

 

두 손을 맞잡지 않은 채로 필사적으로 바라고 있다.

 

그녀가 죽지 않기를.

 

신이 그녀를 속여도. 전 재산을 잃어도. 강간을 당해도. 소설을 읽을 수가 없고. 선한 인물이 싫어지고.

자두를 먹어도 단맛이 느껴지지 않고

끈적한 진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릴 때도.

 

보지에서 코에서 입에서 눈에서 피가 줄줄 쏟아지고.

 

살아라

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

 

그래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에도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 「지키는 마음」 부분

 

침묵하게 만들고 폭력을 감행하는 신의 사랑(「침착하게 사랑하기」)이 아니라, “왜 그가 아니라 내가 남았나요?”(「동반자」)라고 이유를 묻는 절절한 사랑이 차도하가 지키고 싶은 마음이자 시적 태도다. “살아라/ 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 정합적 의미와 매끄러운 맥락들이 아니라 상대가 악착같이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만이 상대의 존재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날것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차도하 시의 정수를 이루는 레즈비언 화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들의 발화와 더불어 “빛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중얼거리는 사내의 손을 잡고/ 없어도 돼요” 말하며 춤을 추는 시적 주체들은 모든 집단성을 벗어던지고 오직 눈앞의 대상에게 투신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의미를 잊는다.

 

4. 잿더미에서 다시 쓰는 손

 

이렇듯 정해진 의미와 기존의 세계를 이루는 구조들을 전부 거부하겠다는 차도하의 힘 있는 시는 ‘불태우는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나도 너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친 표정으로 말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나’는 “지구를 불태우기엔 충분한 개수였고/ 내 집을 불태우기엔 충분한 개수”의 “성냥개비를 낳”고(「선택」). “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지/ 왜 죽은 사람은 죽어야 했는지”(「추모」)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가득하고 커다란 질문을 쥔 이가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큰 화재가 발생한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했다.

미친놈이 그랬다고 했다.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끝없이 옮겨붙었다.

도시가 불탔다.

 

영원히

 

재가 된 도시 속에서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

내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시신을 옮기고

연구실에서

나를

내 손을 오래 바라보다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는 무척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다

 

일지를 쓰다 엎드려 잠든 그의 꿈속으로부터

 

도시가 재건되고 있었다.

- 「추모」 부분

 

 

화자는 여성과 여성과 남성도 아닌 이와 아이와 노인과 같이 느닷없이 죽고 쫓겨난 이들을 은폐하는 세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서성인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 하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불안이 곧 질문이 되어 도시 전체를 불태운 불꽃이 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나 “미친놈”의 소행 정도로 일단락시키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은 도시를 “영원히” 불타게 만든다.

그러나 불안 앞에서 모든 존재 의미의 무를 발견한 뒤 새로운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는 차도하는 결코 어떠한 영원도 믿지 않는다. 다시금 만들어진 질서 역시도 배제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도하의 글쓰기는 남성 중심적 권력성에 단순히 반대하는 전복성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권력을 삭제하고 폐허로부터, 잿더미로부터 다시 쓰려는 창조적 회복성에 집중하고 있다. 시인은 돌을 던져 강을 메울 수 있다면 돌 던지기를 멈추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렇지만 돌 던지기는 계속될 것”(「돌 던지기」)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앉기 게임의 규칙을 아예 변경 시켜버리는 세계에서 더는 새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최초의 시인”(「최초의 시인」) 역시 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뜨거운 것을 쥐고 죽은 화자를 바라보며 도시를 재건해 나가는 또 다른 주체는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다. 시인은 자신이 쥔 질문으로 기존의 의미를 잿더미로 만드는 폭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면서, 그 폭발 역시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믿는 자에게 ‘재건의 힘’을 뒤이어 맡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보다 나은 유의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세계’를 위한 단초를 다져준 화자는 죽고, 다시 열리는 세계 앞에 우리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시의 끝에서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 재건의 현장에 시인과 함께 있을 순 없는 걸까.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 「미래의 손」 부분

 

 

뜨겁고 단단한 손을 잡기 위해, 아니 그 손과 손을 스쳐라도 보기 위해 표제작 「미래의 손」을 살펴본다. 시에서 중학생인 시인, 차도하는 의미를 무의미로 만드는 자다. 시대의 불안을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세계의 의미에 대해 반복해서 고뇌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때 중학생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는데, 앞서 살펴본 시에서와는 달리 미미한 불꽃이지만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 갈 때 “세상의 필터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비어 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되 기존 의미에 속박된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중학생은 미약한 불빛으로 세상의 의미를 찬찬히 지워나간다.

일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 기존의 가치체계를 지워버리고 “비어 있는 곳”, “공터”만을 남긴 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라는 사실은 극도의 허무 앞에 선 어린 소녀의 무화시키는 힘과 정확히 그에 비례하는 쓸쓸함을 동시에 전달한다. “원래란 뭐지?” 질문하려는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체벌”에 의해 다시금 텅 비어간다. 이처럼 세계의 부조리 앞에서 불안을 감지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실존으로 나아가려는 결단은 젠더화되고 위계화된 차이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그렇기에 애초에 비워진 채인 공터를 내면에 간직한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이 근본적인 무에 기반하여 모든 의미와 세계를 다시 써나갈 힘을 보유하게 된다. 그렇게 힘을 낼 수는 없을지라도 포기하지는 않는 중학생이 산책 중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이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입국 심사」)라고 다짐하는 차도하. “그러니까 내가 작가라면 계속 쓸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이 정도 길이인가 싶다가도 문장이 아직 남아서 계속 잴 수 있으니까 계속”(「독서 유예」)이라던 차도하가 주머니 속 어떤 작은 손을 움켜쥐는 장면은 어떤 말을 덧붙이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재생과 재건의 힘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끝내 역접의 접속사로 미래에서 온 시인의 존재가 다시금 지워지는 결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는 현실에서, 뜨거운 손이 맞잡고 지나간 시간은 중학생이 꿈꾼 찰나의 미래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비관하고 낙담하기 전에, 시인이 늘 자신이 딛고 선 ‘현재’로 되돌아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겠다. 차도하의 폭발과 재건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 너머, 현재 이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 뿌리 내리고 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발에 땅이 닿는 감각을 되새”(「레이스」)기고, 현실에서 자신을 탈출시킨 이후에도 “모두를 두고 나온 우주 바깥에서 어리둥절 서성”이다가 “땅으로 돌아와 더럽고 차가운 맨발을 씻”(「시선」)는 이가 곧 시인이었다. 그런 시인에게 “평생 쫓겨 다녀서”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한 미래는 “사실은 도망치지 않았고/ 문밖에서 내내 기다렸”던 무언가임이 밝혀진다.

그러니 세상의 낙인과 오명을 모조리 지워 공터로 만드는 중학생의 손을 맞잡은 시인은 새로운 배치를 세우고 또 무너트리기 위해 끝없이 되돌아가는 운동성을 반복하는 자다. 어떤 영원도 믿지 않는 시인의 역동성은 덧없음을 한탄하는 좌절이 아니라 위치변경을 거듭하는 세계의 재배치화를 일궈낸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미래가 현재를 기다리게 하고, 현재에 미래를 풀어놓음으로써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꼭 맞물리는 만남이 아닐지라도, 영원한 접촉은 없을지라도 잠시간 맞잡은 손의 열기만으로도 세상은 무너지고 미래는 새롭게 떠오를 수 있다.

불안함에 흔들리면서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영원히’ 믿을 때, 무엇도 단정하지 않고 상정하지 않는 의심에서 불안이 불꽃으로 바뀌는 장면을 함께 목격할 때, 어떤 오염과 더러움도 겁내지 않고 살아남으라고 일으켜 세우는 목소리를 들을 때, 그렇게 미래는 오게 될 것이다. 잿더미에서 끈질기게 다시 쓰는 “미래의 손”을 맞잡고서, 이내 다시 스쳐 가면서. “그래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에도/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는 차도하의 마음. 내가 유일하게 믿고 싶은 영원은 오직 그것뿐이다.
  • 1) 심진경, 『더러운 페미니즘』, 민음사, 2023, 7쪽
  • 2) 강학순, 「하이데거의 ‘기분의 존재론’에 대한 고찰」, 『현대유럽철학연구』 71, 한국하이데거학회, 2023, 98-10쪽 참조.
  •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183-185쪽 참조.
  • 4) 불안이 현존재에게 상기시키는 무는 “손안에 있음 중의 어느 것도 아님”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기인하는데, 이 세계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불안이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세계-내-존재 자체”인 현존재의 무에 대한 깨달음과 그로 인한 가능성 그 자체에 있다. 여기서 바로 무 앞에서 결단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위의 책, 255쪽.)
  • 5) 이은주, 「하이데거에게서 불안과 죽음의 의미」, 『존재론 연구』 15, 한국하이데거학회, 2007, 24쪽 참조. 강조 인용자.
  • 6)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250쪽.
  • 7)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에서 근본기분 불안은 통시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후기에는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현시대의 근본기분으로서 존재 망각을 상기시키는 변화한 불안의 성격을 말한다. (박찬국,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불안 개념에 대한 비교 연구」, 『시대와 철학』 10,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9, 217쪽 참조.) 이 글에서는 후기 불안의 역사적 성격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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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지 비좁게 버티며 잇기 - 읽기

아무래도 삶은 고통에 가까운 걸까? ‘잘 먹고 잘살자’는 슬로건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쪽으로 옮겨가다가 아주 보통의 하루를 소명으로 살라 한다. 결코 그것을 초과하지 말라는 듯 점차 쪼그라드는 소망의 크기는 퍽 현실적이라 그건 또 트랜드라 명명된다. 노동의 자리는 차츰 더 쪼개진다. 비정규, 비전임, 하청, 임시, 기간제와 같은 용어를 앞세운 계약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갱신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계약이 불발하면 사는 공간이 위협받는다. 전세금은 누군가의 먹잇감이기 십상이고 슬금슬금 오르는 월세의 부담은 가장 먼저 취향을 뒷전으로 민다. 일터에서 삶터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협은 존재의 위상을 쪼그리고 접고 나누게 한다. 다주택을 보유하고 일주일에 며칠은 도시에서 일하고 한적한 곳에서 나머지 날을 보내는 삶은 확실히 ‘아주 보통의’ 사례는 아니다. 겨우내 누군가는 한 줄도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현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임에도 어떤 낌새도 개연성도 없는 소요를 두고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겨우 한고비나마 추스른 다음 어렵사리 꺼내놓았을 소설들이 어느 지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 계절을 통과하며 먼저 읽는 단편소설이 미학적, 정치적, 시장 경제의 문제와 같은 지점에서 장편 소설과 다른 무엇을 선취한다면 미덕 중 하나는 그 기민함에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불안정의 와중에 발견되는 단편소설의 공통 감각이란 소설의 미학적 보편성이나 작가의 감각이라는 개별성, 특수성을 초과하는 시대 감각, 그 징후의 포착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연극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기성의 공간분할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르라는 플라톤의 진단에서 랑시에르는 미학이 수행하는 감성의 분할이라는 역할이 다분히 정치적임을 포착한다. 우리의 글쓰기에서 어떤 지형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징후이기도 하면서 사회구조의 재편 가능성을 향해 기존의 레짐이 해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2025년 봄의 단편소설들이 먼저 읽고 감각하는 정치적 삶의 지형도는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이어진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소설이 소묘하는 생은 좁아지고 접힐 것을 종용하는 공간과 그것을 체현하는 몸을 통해 다시금 감각과 경험의 재배치를 전경화하는 중인 듯 보인다. 어려서 이해가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누군가는 왜 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는 불행 쪽에 서 있다. 이제 보니 그런 일은 드물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흔하다. 조경란의 「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문학과 사회』, 2025, 봄)에서 양지의 삶이 결코 성공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양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 강사로도 일했지만 쉰 살이 넘도록 교수임용은 기약이 없다. 일찌감치 교수가 된 현 선배의 빈집을 돌보며 그 집에서 자신의 전공 서적을 바라봄은 타인의 성공과 나의 패배를 여실히 대비하는 잔혹한 한 폭의 그림이다. ‘타인의 공간’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유사한 점유의 경험이 있다.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된 모 교수를 대신해 강의한 것 역시 현 선배의 소개 덕이었다. 당시 교수의 배려로 그의 연구실을 사용하면서 양지는 공간의 안락함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한 인간의 증명을 대리하기도 하는 공간의 위력 앞에 양지는 교수가 영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봐야 양지는 엄연히 그 공간의 주인이 아니고 교수가 완전히 부재하게 되자 잠깐의 꿈을 허락했던 공간에서마저 완전히 내쫓기게 된 터였다. 다시 타인의 공간에서 지내게 된 여름은 온통 물난리로 하천이 범람하고 실종자가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재난의 와중인데, 양지는 이곳으로 종소를 들인다. 말랑한 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둘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도 임용이 되지 못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양지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모성에 대한 결핍이라는 곤궁이 있는 반면 종소는 모성의 과잉 쪽이라는 것만이 둘을 가르는 차이다. 현 선배가 없는 현 선배의 집 식탁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구도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가운데 괴괴하다. 이 집의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제법 어린아이만 한, 저주 인형이라고 불리는 밀짚 인형과 함께.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타인의 공간이 양지에게 준 것이 있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오브제 보듯 낯설게 조망하는 타자화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 시선의 전유 안에서 종소가 임용과 관련한 추악한 소문의 주인공이며 어쩌면 유서일지도 모를 글을 썼다는 것, 그것을 본 어머니가 끝내 아들의 여정-그것도 제자의 기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다소 가능해진다. 그들을 당겨놓고 바라보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양지가 결코 접지할 수 없는 모자의 관계가 양지쪽으로 일정한 폭만큼 거리를 벌린 채 존재하는데, 뜻밖에 양지는 종소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경유함으로써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맥없이 풀어져 버림을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양지의 미움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놓아버리는 능숙함을 택한다.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종소의 어머니가 발견된 곳이 뚜껑 열린 맨홀이나 넘실대는 개천이 아닌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맨손체조의 대열인 것은, 어머니가 잃은 것도 실은 일상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균열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독자 앞에 힘겹게 밀어 올린다. 가장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일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 일상이란 또 얼마나 각자의 허상에 기반한 것인지 궁구하게도 한다. 누군가는 깨어진 일상 위를 더 오래 걷지 않나? 어쩌면 바라는 일상은 기실 꿈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학위나 성실함이 미래의 일상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런 이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란 그저 남의 것을 기웃대거나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임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제자의 죽음과 임용에 실패한 양지와 종소 그리고 저주 인형을 품고 사는 현 선배의 삶은 어쩌면 하나의 선 위에 놓인 가능성에 대한 확률 게임처럼도 읽히며, 그것들은 정말 한 끗 차로 보인다. 현 선배가 양지나 종소와 달리 교수임용에 ‘성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시(詩)를 역전시키는 소설의 묘미는 현 선배의 저주 인형과 혈압 보조제가 그 답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 나뭇잎이 빗방울을 끊임없이 받아내고 끈질기게 ‘버티는’ 중이듯이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견디는 중이라는 게 생의 비밀은 아닐는지. 양지는 더 버텨야 할 테지만, 그 버팀을 위한 그의 지금 현실은 너무 비좁기만 하다. 공간의 영향력이란 퍽 실재적이면서 감각적이기도 해서 때때로 공간이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매일 온몸으로 공간을 체현하며 그 경험의 체현물인 몸조차 공간이다.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지만 이것은 점점 더 요원하기만 하다. 이토록 비좁은 현실에서 금비가 가진 공간이란 ‘캐비닛 두 개’다. 이상하의 「캐비닛 비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의 금비는 근근이 독립해 살던 원룸 보증금을 빼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엄마와 이모가 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캐비닛‘마저’ 비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여성 청년의 버티기를 쓴다. 스물여덟 살의 금비는 분양사무소 바이럴 마케터다. “선캡족”(76쪽)으로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하청직원인 것과 달리 금비는 “회사 소속 현장 직원”(75쪽)이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길거리에서 분양사무소로 호객을 하는 것, 그게 이들의 일이다. 이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했지만 태블릿 피시와 줌 체제로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한 엄마, 금비가 중학생일 때 실직한 뒤로 줄곧 아르바이트만 하며 함께 살고 있는 이모는 각각 재편한 시장의 그림자처럼 금비의 생에 다소 누추하게 걸쳐 있다. 얼핏 계산을 해보면 엄마의 직장 생활과 이모의 실직,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변화는 국가부도 이후 체제의 개편과 함께 시작되었을 테다. 이제 와 이 집에 금비가 차지할 공간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고 70개가 넘는 이력서를 뿌리고 겨우 잡은 직장에서 금비가 필사적인 건 지당하다. 버티어야 재계약이 가능하고 그래야만 독립을 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회사 소속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남들은 하나 쓰는 캐비닛을 금비만 두 개 쓸 수 있게 허락했다. 금비는 거기에다 원룸에 있던 원목 수납장을 옮겨놓고 개인 소품을 넣어두는데, 그 목록이 자잘하고 소박하기만 하다. 금비는 자신의 무기를 분명히 알고 선캡족을 이기기 위해 나름 유니폼을 갖추고 구두를 신는다. ‘아줌마’들은 입지 못할 작은 사이즈의 옷에 몸을 구겨 넣는 그런 노력은 육체적 차이를 토대로 사회적 가치를 구분하는 몸의 수치화에 다름 아니지만 그건 반드시 실적의 수치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제발, 한 번만, 도와줘”(78쪽)로 호객을 하는 선캡족의 실적에 밀린 지 오래다. 길바닥을 일터로 삼으며 머리에는 선캡을 쓰고 발에는 수면양말을 껴 신고 막무가내 호객을 하는 “5,60대 여성 아르바이트 생”(74쪽)들을 혐오하면서도 무력한 엄마나 이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면서도 가족과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심정. 그런 심경을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건 저들의 버티기에도 나름의 선, 궁색할지언정 최소한 자존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1) 현실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은 엄마, IMF 이후로 내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이모 그리고 계약직 바이럴 마케터 금비로 이어지는 한 가계의 구조는 실은 이 사회의 정체, 그 지연을 여실히 되비춘다. 머무르다시피 내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퇴행하는 이 사회의 잔여물처럼 자꾸만 자리를 좁혀가며 독립할 수 없는 저들의 사정에 기댈 때, 기대수명 120세 시대의 지당한 지침일 ‘저속노화’란 말조차 삐딱하게 들리는 건 노동의 측면에서라면 몸은 언제나 수단일 따름이기에 생산력을 보유한 일하는 몸을 오래 유지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종국에 두 개의 캐비닛 중 하나마저 새로 온 선캡족에게 내어주는 금비에게 저 수납장을 옮겨놓을 오롯한 자기만의 방은 어째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엄마와 이모, 금비 중 그 누구에게도 독립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것은 이들의 자유라는 범위를 좀 더 한정할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감한다. 독립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 집만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고 얘기한다. 차은영, 「고립어 배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에서 화자는 지금 여행 중이다. 먼 미래를 위해 1종 대형 면허를 땄지만 근미래는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는 화자의 여정 내내 따라 붙는 것은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가입하지 않은 ‘자갈 보험’ 옵션이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이혼하고 전화나 걸어오는 아버지는 생명보험을 들먹이면서 내가 죽으면 그건 네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살아있다. 아버지의 ‘자살 보험’과 여행길의 ‘자갈 보험’은 그렇게 나란히 먼 미래와 아주 가까운 미래(혹은 지금)의 화자를 둘러싼 안전장치로 나란히 대비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갈 보험은 옵션에서 빠져 있고 자살 보험은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어느 쪽도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지점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다. 그는 동료에게 주말 근무 교대를 부탁했는데 동료는 주말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자살했다. 어쩌면 지난 소설 속 인물들이 과잉 윤리의식으로 인해 내면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이 대단한 사건이 2025년의 인물에게는 “왜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지”“해명을 요구하”며 “죽음으로써 모든 형태의 해명을 궁극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97쪽). 소설은 죄책감을 종용하거나 그의 책임 여부를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내내 아이슬란드의 자갈길 위에서 자갈 보험에 들지 않은 차를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 이국의 어떤 풍경에도 넋을 빠뜨리지 않게, 가족사를 회고하는 일에 깊이 골몰하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길을 더듬어가는 여정을 담백하게 그릴 뿐이다. 균형잡기란, 내 탓이라기보다 그게 나일 수도 있었고 그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 마음 그러니 조금은 더 약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다짐 비슷한 것으로, 이 소설의 저류에 묵음처리 되어 있는 음성을 가시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하여 화자가 끝내 완성한 문장이 “아버지, 죽지 마세요”(109쪽)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성장과 화해의 감각조차 달라진 ‘요즘’의 생존 감각은 아닐까. 자갈 보험과 자살 보험은 보험의 용어를 빌렸달 뿐, 결국 이 세계에서 존재란 죽음이나 삶 어느 쪽에서든 위험 앞에 균형을 잡고 버티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기미도 해명도 없이 죽음 쪽으로 발길을 돌린 저 동료처럼 「흰옷 빨래의 날」(안담, 『문장웹진』, 2025, 04)속의 마지도 그러하다. 증명할 수 있는 가난을 소유한 청년인 화자는 전세임대주택제도 덕에 역에서 멀지만 산에서는 가까운 집에서 큰 개를 키우며 지낼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다양하고, 펫시터, 원룸청소, 주말 보습학원의 데스크, 호프집 마감 직원, 자기 소개서 대필 등이 그 목록이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중증 우울을 앓는 친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그전에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옆방 남자와 사귀는 동안 그 남자의 옷에 밴 치킨집 기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곳을 떠났던 터였다. ‘냄새’는 화자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외모를 전혀 가꾸지도 심지어 잘 씻지도 않는 마지의 체취는 만만치 않다. 참다못한 그는 마지에게 세탁법을 알려주는데, 마지는 아주 간단한 생활의 기술 이를테면 세탁기 사용법조차 모르고 있다. 차츰 청소며 정리를 시작하는 마지가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다름 아닌 ‘유튜브’다. 그러니 얻는 정보는 산만하고 산발적이다. 유튜브가 마지를 데려가는 방식은 알고리즘이니, 그건 현실의 개연성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마지는 알고리즘에 따라 이것저것 살림 ‘꿀팁’을 얻어오고 청소 세제와 수납함을 구입한다. 잡다하고 목록화되지 않은 알고리즘의 경로는 그를 음모론의 세계로 데려가고, 집회로 이끌기도 한다. 태극기 집회, 장애인권, 기후 정의,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 집회까지 목록은 다양하다. “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어쩌면 이 문장은 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사는 게 서툴렀”고 “사는 정도가 아주 미약”한 사람, “사람이 덜 되었다는 피드백을 듣곤” 했던 마지에게 일상, 보통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당위성으로 갈음되곤 한다. 그건 정상성의 규정에 대한 모종의 합의를 전제하기에 일상이 누군가에게 버거운 것이라면 그에게 일상의 영위는 보편성이라는 텅 빈 것의 추구이자 폭력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가 남자친구의 옷에 밴 기름 냄새가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이 실재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될까 봐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마지의 냄새에 자신의 삶이 한데 뭉뚱그려질까 봐서 비싸고 향이 나는 세제를 고집해온 것이라면, 마지에게 그런 향기로 감싸인 공간은 끝내 곁을 물리는 행위,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켜주는 묵언의 죔쇠였던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삶은 한 번 더 층위를 구분해나가는 방향으로 마지를 몰아댔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기일에 마지의 흰옷 빨래를 하는 일은 그를 기리는 것이면서도 그 공간에 더는 없는 마지의 육체성을 마치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옷으로 대체하는 이 행위는 진정한 애도의 행위인가 부재의 확인라는 남은 자의 자기 보존인가. 그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의 빨래를 자꾸 빨아 그의 냄새를 휘발하는 행위에 마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행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던 데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곁을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희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는 광장의 숱한 깃발 중 어느 항목에도 퓨섭될 수 없었던 마지만의 깃발을 세우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이 행위의 저변은 차은영의 인물과 나란히 두고 읽게 한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죽음의 원인을 자신에 두지 않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안간힘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 실은 세계라는 외부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라는 저울의 추를 버티어내는 개인의 승리 쪽으로 점점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사후적인 윤리의 냉담을 엿보게 한다. 마지가 일상을 향해 웅얼거리던 말은 끝내 ‘버겁다’가 아니었나. 한 인간의 삶이 사회적 관계와 더불어 공간 내에서의 관계성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레짐을 형성해간다고 한다면, 마지의 죽음이 실족사였든 자의적 선택이었든 자명한 것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허용받지 못했던 마지의 죽음은 저 바틀비의 죽음이 가치와 그 가치를 수용할 공간의 말소이듯 일종의 사회적 죽음으로 수렴되는 면이 있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 가진 것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속되나. 남의 집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을 꺼내 먹어 치우는 몸, 그 몸은 빈집을 임시로 채운다(「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 임시라는 말은 각종 유사어로 위장해 부지불식간에 잠입했고 우리 세계를 점유했다. 재계약에 실패하면 남의 집 달걀이라도 먹으며 버텨야 하는 것은 대학원을 나온 시간 강사나 학습지 교사나 주방 아르바이트생이나 바이럴 마케터나 마찬가지다. 계약이 끝나면 제 몸을 둘 공간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교수의 방을 대신 쓸 수 없고, 캐비닛을 비워야 하며,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누군가의 집에 월세를 내고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가거나 고시원으로 가야 한다. 또 누군가의 몸은 냄새나고 어디에서도 구실하지 못하는 것, 곁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삶은 고단하다. 잔뜩 고통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곁에 있던 너마저 죽는다. 정당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니체의 말마따나 오로지 미적으로만 세계가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현실보다 좀 더 정당성을 가질 소설에 기대 이어 나가 보니 그건 이 사회의 레짐이 점점 협소한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악화 쪽으로 기우는 소묘들이다. 어지러운 정치의 모형들이 우리를 더 좁은 곳으로 내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어가거나 살아가는가. 쩨쩨하게도, 삶은 그럼에도 지속된다. 삶은 아무래도 고통 쪽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삶일지라도 덤벙덤벙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어쩌면 그것만이 내가 나를 존중하는 가장 비좁지만 오롯한 존엄의 태도가 아닐까. 이 계절의 소설을 읽으며 달라진 세계의 지형도를 쓸쓸하게 음미해본다. 조금 더 잘 버티기 위하여. 1) 나는 여성의 일과 자리 그리고 이름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일터에서 여성 청년이 자리를 지키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들의 ‘버티기’는 금비의 표현에서도 보이듯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받는다. 그들은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도 소외받지만 젊은 여성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거기에 하청, 하청의 하청과 같은 구조가 덧붙어 이들은 쉽게 ‘민폐 아줌마’로 전락한다. 졸고는 「비주류 생존기-여성의 호명과 자리」, 『문장웹진-콤마』, 2022.

월간 현대문학 황유지 버티기공간여성청년비정규직조경란이상하차은영안담 2025
임지훈 세상의 모든 추한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계간 청색종이 임지훈 전동균미추「미제레레」서정 2025
이소 어른의 서정 :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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