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제11호)
‘빈’자리의 시학, 거기 있는 마음 ― 유희경론
‘빈’자리의 시학, 거기 있는 마음
-유희경 론1)
1. ( )을 잃고 나는 쓰네
원고를 준비하며 다섯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남쪽으로 며칠의 명절 휴가를 다녀와야 했다. 어려서 가만히 책가방을 메고 오가던 길가에는 이른 봄꽃이 피고 가족들의 온기는 그에 더해져 계절을 한껏 당겨 놓은 듯 온몸과 맘을 훈기로 휘감았다가, 나를 내려놓았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만난 것은 진눈깨비였다. 그것은 곧 폭설로 이어져 마음을 우두커니 서 있게 했는데, 오래 반복한 여정이면서도 돌아오는-떠나오는- 일은 온몸으로 쿨럭이며 감기를 앓게 했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 김기림, 「길」 부분2)
그런 여정은 너의 진짜 자리가 거기가 맞느냐고 묻는다. 느닷없는 의심은 돌아온 자리와 떠나온 자리의 위치를 삽시간에 뒤바꾼다. 그러면 문득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주머니를 뒤적이게 되는 것이다. 어딘가 삐끗했다는 마음의 연원은 상실로부터 오고 그건 ‘빈’자리로 남아 상실이라는 지난 사건을 반복적으로 주시하길 요청한다. 계절이 온 땅에 함께 오지 않고 생활의 터와 위안의 자리가 공명하지 않아 돌아오는 일이 떠나오는 일이 될 때, 말고도 숱한 시간은 나와 별 상의도 없이 지나가 버린다. 홀홀해진 마음으로 남겨질 때, 누군가는 쓴다. 그럴 때 남겨진 마음이란 삐딱하게 벼린 것이기는커녕 과거도 현재도 잃어버린 탈-시간적 ‘나’, 그 가여운 것에 가깝다. 마음은 그렇게 어둔 회색빛으로 한참을 머무는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문장은 문학적으로 가히 참인 명제다. 그건 저 문장구조와 성분의 얼핏 어긋난 듯한 ‘사이’로 인해 더욱 빛나는 통찰로 두고두고 읽힌다. ‘사랑을 잃고 나서 시를 쓴다’ 혹은 ‘사랑을 잃어서 시를 쓴다’로 읽힐 때 그것은 인과라는 관계나 시간상의 순서를 포함한다. 그러나 저 문장은 간명한 도치로 인해 사랑의 잃음이라는 사건 가운데 나라는 주체의 권한을 무참히 박탈한다. 그리하여 저 문장으로부터 사랑은 제 발로 총총 매정하게 걸어 나가버리고 나만 오도카니 남긴다. 그럴 때 남겨진 나는 쓰는 일밖에는 달리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럴 때 사랑은 이미 없고, 그 빈자리와 나에 대한 연민은 쓰기를 통과하며 점점 더 또렷이 각인된다.
상실, 그 탈각의 결핍감이 숱한 문학을 잉태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희경의 시도 그 언저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우리가 더듬을 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니라 ‘빔emptiness’이라는 사건과 ‘빈empty’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건, 그의 시들이 어떤 대상의 재건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남아있는 마음을 두고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실과 상실감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상실함-빔-상실감-빈’이란 도식이 가능하겠다. 이 분할은 상실이 고유의 시차를 내포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빔’의 찰나, ‘빈’ 상태를 ‘사건’으로 인식하는 지점이 바로 유희경 시가 고유성을 써나가는 자리이다. 상실 그 자체보다 비게 된 사태가 일으키는 소요는 한 시인의 마음을 붙들고, 그 마음은 사건의 시간을 무한으로 붙들고 늘어뜨린다. 내 곁에 이미 없는 상실을 향한 칭얼거림이 아닌, 지금 남겨진 것이 빈자리라는 데서 오는 도저한 마음의 모양새를 한 ‘이야기’이다.
2. 부재의 형식
기억은 과거를 이미 떠나왔다. 그것은 현재에 다다르지만 결코 현재가 포착할 수 없고 현재를 획득할 수도 없다. 현재에 포섭되지 못한 기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만 이제 기억에는 그러는 순간조차 현재완료의 형식이 되고마는 새로운 시간이 덧입혀질 뿐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기억과 달라진 그것은 주체가 망각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무한히 왕복 운동한다. 그런 한 기억은 현재성의 의미를 재구성하며 새롭게 성립되는-정립되지 않는-과거의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푸코를 닮은 인식의 와중에 소실과 강화를 거듭하는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과 함께 왜곡을 향해 걸어간다.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아픔(algos)을 고대인들은 노스탤지어라 이름 붙였다. 이는 상실한 것을 되찾으려는 정신의 작업 즉 기억과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욕망의 대상 부재와 장소 상실은 불가능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빔’으로 내밀어지며 상처적 기입으로 포개어진다. 그런 향수, 기억하기는 글쓰기라는 또 다른 부재의 형식과 공명 가능성으로 열린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나는 코트 속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젖은 발처럼 내 코트 속 아버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낯섦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버지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흐릿한 자국들
-「코트 속 아버지」 부분,①
“어떤 기억들은 끈질기게 희미해지”는가 하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 기억들을 영영 잃어버렸음을 직감”할 때, 우리는 적잖이 당황한다. (「이야기-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⑤) 잃을까 두려운 기억이 있다. 잃으면 안 되는 기억이 있다. 코트 주머니는 지갑이 있던 자리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아버지가 느껴진다. 그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전의 흔적, 아버지를 닮은 나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아버지의 빈 자리이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내게서 아버지를 확인하는 것은 낯선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아버지에게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의 부재란 내게서 그의 지난 젊음을 확인하게 하고, 어느 미래에는 아버지가 살지 못한 늙음을 확인하게도 한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빈 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확인함은 마치 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는 듯한 환각을 부른다. 어떤 자국들은 아무리 흐릿해도 분명히 보이는 것이겠지만 부재의 깨달음이야말로 앞에 놓인 어둠 속에서 날아 가버리는 새, 즉 아버지의 부재를 수식하며 그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것이다. ‘나’와 관계된 것, ‘나’의 모습을 한 것들은 차마 잃기 힘들뿐더러, 잃을지도 모른다는 영구적 원본 상실에 대한 불안은 바로 ‘나’의 존재론적 복제를 일깨우는 사건, 그 부재의 지독한 형식이다.
나는 아주 작고 아득한 단어를 날리고
세어본 것이다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것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
-「단어」 부분,②
문학이 발화의 형식이라 할 때 그것은 애초에 불확실성으로 감싸여 있다. 쓰는 자가 감내해야 할 이 불확실성은 둥둥 떠다니는 단어를 낚아채 표현의 수단으로 삼되 그런 행위로 발생하는 결과물은 쓰는 자를 즉시 문밖으로 내쫓는다. 기호일 따름인 어렴풋한 단어의 예감이란 단 한 번도 진실로 쓰는 자의 것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쓰기가 운명적으로 소외에 다가가는 행위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시는 쓰는 자를 소외시키는, 시의 운명으로서 윤리적인 시라 말할 수 있다.
...아이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라고 적은 문장은 지우기로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마조마하다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깨질 듯 종내 깨져버리지 않고 거기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너무 많다 그런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무사」 부분,②
“한 아이에 대해 쓰는 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일종의 고해성사에 가깝다. 그것은 시의 무능이자 마음의 불능을 가리키는데, 실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시의 능력이 아닌 아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길을 배우는 저물녘은 시를 쓰는 일처럼 깜깜할 테지만 아이를 염려하는 마음은 문자 기호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시는 앞을 보지 못하고, 아이가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있어 좁고 아득”할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저 아이의 어둠은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다. 시를 빌려 말하자면 “눈을 감은 채 바라보는 빛은 사람의 내부”(「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③)이기에 아이의 어둠은 아이만 볼 수 있다. 이때 시어도 시력도 사건도 우리 앞에 모두 부재할 뿐이지 않겠는가. 그 현존하지 않음 앞에 시는 고독의 형식이 된다. 그런 타자성은 언어, 시어의 한계이면서 시인의 언어 윤리를 압박하며 숨막히는 고뇌를 추동한다. 그럴 때 아이를 향한 짐작으로의 어둠은 기호화되는 즉시 저 아이를 약자로 배치하는 시선의 권력을 확보할 위험으로 성립한다. 일면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적 책임을 지닌 주체를 발견한다는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감각은, 유희경 시의 선(善), 즉 시선의 위계 없음에 기대어 있다.3)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나의 윤리적 감각을 발견하는 장소라 할 때 타자가 나의 시각적 상관자로 연결됨은 현상학자가 아닌 시인에게 되레 엄정한 윤리적 잣대를 한 번 더 작동케 한다. 유희경의 시는 시선의 권한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내가 볼 수 없는 자는 내 권한이 거머쥘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다.4) 시는 아이만이 자신의 어둠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 뿐이다. 시인은 그 자리를 위해 시어를 싹싹 긋고 지운다. 그렇게 염려를 ‘빈’ 자리로 내어준다. 거기만이 시인의 마음이 머물 약간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 시선을 지운 자리에 귀를 대어 본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귀는 평온해 보인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사원 만월 빛에 젖어서. 귀는 소리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으려 한다. 누가 나를 부른 것도 같지만, 귀는 아닐 것이다. 귀는 듣는다. 귀는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사월 만월」 부분,⑤
시선에 대한 욕망 대신 거머쥐는 것은 듣는 일, 소리를 좇는 일이다. 쓰는 자와 읽는 자는 하나가 아닐 수 있지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하나 될 가능성은 확률 면에서 압도적이다. 듣기, 그건 책상에 귀를 대보는 기울임의 자세이자 위계의 시선을 방지하는 겸허한 태도로도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을 ‘당신’ 혹은 ‘그것’에게 조심스레 내미는 일, 그것은 일말의 낯가림마저 지우고 함께 나란한 수평선을 닮았다. 그런 ‘귀’는 아버지에게 받은 것인데, 아버지가 준 것 중 가장 믿을만하고 괜찮은 유산이랄 수 있겠다. 귀는 애초에 타자를 향해 한껏 열려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리하여 그것은 혈연의 연대기로 부여받은 역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바깥’을 감각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인 듣기를 수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깥은 시인에게 모호한 곳이다. 대체로 ‘창’을 경유해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깥에 있는 것 중 믿을만한 것은 ‘나무’인데, 나무는 시인의 대리물이며 시적 화자의 분신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심어준 호두나무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밑동만 남긴 채 잘리지만 “나는 나무를 품고” 살고, “나와 나무의 시간은 같다”고 여기는 식이다. “어떤 시간이 아득하게 지나가도 거기에 있는”(「잊기도 찾기도 하는 나무의 시간」, ②) 나무는 제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타인을 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지워 보이는 형식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
3. 텅 빈 죽음
묵은 단어들을 나무의 가지처럼 잎사귀처럼 우렁우렁 키우고 빈자리를, 떠난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여미고 챙기던 시인의 고왔던 필치는 여전하지만 가만가만 오래 묵은 마음을 한 겹 접어두는 시는 ‘살해’를 말하기도 한다.
빌어먹을,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버렸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거나 내가 당신을 밀쳐내거나 둘이 손을 잡고 도망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그것도 살해입니다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새들이 날아오르고 한가득 날리던 검은 깃털들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이야기를 어디에 유기했던가요 차라리 분실했습니까 왜 말이 없나요 내가 벌린 이야기 때문인가요
...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
-「이 다음 봄에 우리는-고백 6」 부분, ④
나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당신이 나를, 이야기를 유기했다. 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버리는 일 그건 살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살해의 꿈을 꾸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고백의 시는 살해당한 이야기이자 살해 충동의 이야기다. 삭제된 이야기란 이 시인에게 끔찍한 것이다. 기실 ‘죽음’은 내내 시 아래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거나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기시감의 공포, 나의 질병 등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잔혹한 사건은 혈육의 죽음이라는 기필코 마주하게 마련인 필연을 가리킨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빔의 사건일 것이다. 단언코 당신을 볼 수 없다는 단 하나의 확실성의 사건, 그 자체 부정의 형식으로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선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런 죽음 말고도 이야기의 유기란 이 시인에게 죽음과 동일한 무게로 놓인다. 죽음은 내달리던 이야기를 느닷없이 중단시키고 말아, 팔다리가 잘린 미완의 이야기는 이제 왜곡과 유실의 가능성이라는 불안을 껴안은 채로 빈자리가 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날리지 않”고, “단단하게 여물어 열리지 않는 길”로 걸어간 사람이다.(「지워지는 地圖」,①) 죽음은 그토록 끔찍한 것인데, 이제 그가 살해를 선고한다. 당신이 내다버린 이야기, ‘이야기’를 쌓아나갈 가능성을 삭제한 당신, 이미 나를 살해한 당신, 그런 당신에 대한 미움이 엉켜 “잃어버린” 계절(「잃어버린 사월과 잊어가는 단 하나의 이야기-고백10」,④), “추모”(「추모의 방식-고백11」,④), “묘지”(「산중묘지-고백12」,④), 검고 낯선 노트(「노트-고백13」,④)와 같은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생애란 얼마나 짙은 그림자인가”!(「연작戀作」,④)5)
4. 하지 않은 일들과 없는 당신
두 편의 시를 나란히 놓아보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는 자리를 떠났고 그 자리에는 깊숙한 발자국만이 남아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내가 들은 까치 떼의 울음소리가 실제인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식어버린 석유난로에 불을 넣을 시간 누가 볼 때까지 춤을 추어야 하는
-「안가」 부분, ④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므로 내게 무슨 일이냐 묻지 않았으므로. 까치 때 딱딱한 울음소리마저 어두워지고 입김조차 보이지 않을 때. 누가 문을 여는 것 같군. 식어버린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어. 그리고 겨울밤 간절함은 사람의 춤과 같은 신비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지독하게 추웠던 어느 밤」 부분, ⑤
네 번째 시집과 다음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는 주어만 바뀐 채로 같은 풍경을 소묘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안에서 밖을 조망하는 것에 대비해 밖에서 안을 기웃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이 시는 석유난로에 불을 붙여주기를 그 따스한 온기의 주변에서 누군가 춤을 추기를 소망한다. 얼핏 소망과 그 화답으로 놓일 법한 두 편의 시는, 기대와 달리 두 사람 간의 다정한 대화가 아니다. 두 편의 시에서 일어나는 실제 행위는 없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지만 그건 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또, 그것이 발생한 일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의 어깨는 툭 치지 않았으니까” 그는 나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이들은 동일인이다. ‘시선’이 그 증거로 내밀어질 수 있는데, 모든 정황을 일치하도록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란 애초에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통의 욕망은, 행위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루어질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타자의 빈자리만을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빈자리의 형식은 이제 정물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 급기야 “나를 제외하기 위하여 문을 잠근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오후는 이제 아무런 의자도 없고 그것은 다행의 범주에 속한다 아무런 의자가 없는 것과 아무도 없는 오후 사이 나는 잠근 문을 풀어놓는다 창밖에는 아무도 없다 오후가 끝나가고 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면서
–「의자들 있는 오후」 부분, ④
아무도 없는 오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앉지 않는 때와 아무도 없는 때 사이에는 느닷없이 환한 창밖이 있고 여전히 아무도 없는 오후. 나는 나를 제외하기 위하여 문을 잠근다.
아무도 없는 오후는 앉으려는 의지 없이 저물어 간다. 끝나가고 있다. 어디쯤 끝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야기-나의 오후」 부분, ⑤
시인은 밤을 기다리며, 밤에 깨어 뒤척이는, 들끓어 오르는 이야기들과 밤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에게 밤이라는 시간은 깨어있음으로 인해 그 시간을 맞이하고 또 그럼으로써 밤의 일(잠)을 거부하는 때이다. 잠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밤을 현전하는 사람인 것이다.6)
유희경의 시는 분명 밤의 불면이라는 까마득한 감정(“까마득한 불면을 견디고 있다 불면은 생각이 아니고 감정인 것 같아”-「한밤의 기분」,④)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고독은 안팎의 말썽7)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하여 밤을 가르고 시인이 건져 올리는 것은 사건들의 현실이 아닌 그림자, 대상이 아닌 이미지라는 글쓰기의 매혹이다.8)
그러한 밤의 행위를 경유하며 이런 문장을 축출해보자. (이 문장들의 순서에는 우열이 없고, 변증법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 당신은 없다 ( ) 당신은 나다.
- 나는 나무다 ( ) 나는 창밖을 본다.
- 나는 빈 사물이다 ( ) 나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 나는 죽어간다 ( ) 나는 살아있다.
나는 이야기를 한다 ( ) 나는 문을 잠근다.
시인의 감각과 사유 사이에 들어앉은 괄호, 그것은 어떤 것으로든 채울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없다. 저 괄호라는 빈자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누군가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자리가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인해 존재하는 자리, 주와 객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뭉뚱그리는 자리, 그리하여 그런 채로 놓여있을 그림자와 이야기의 자리일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이름의 기대는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으로 제 마음의 문을 잠근다.
5. 비움의 형식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 쓰는 행위라는 블랑쇼의 말에 기댈 때, ‘이야기’를 접사처럼 달고 있는 다섯 번째 시집의 시편들이 전작에서 미결정, 미완으로 남아있던 시어들의 흔적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미결정의 시간성이 무한한 반복으로 돌아오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끝낼 수 없게 만드는 난관이면서도, 닫혀 있는 끝없는 장소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발레리를 향한 블랑쇼의 말은 기어이 ‘이야기’ 시편을 써낸 한 시인에 대한 이해의 발판이 되어준다.9) 무한 작동의 원리,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 이 비서사적 이야기는 그에게 ‘굿’과 같은 제례이기라도 한 걸까?
밤의 고독 사이에 누워 그는 이야기 속으로 침몰한다. 시인은 밤과 잠의 사이에서 이야기 안에 자신을 누인다. 그런 마음은 이야기로 “소급”(「이야기-해제」,⑤)된다. 그러니 ‘이야기’ 시편은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인줄 알면서도 긴 밤 내내 걱정하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한 시인의 자정(自淨) 행위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창밖은 짙어가는 어둠 토끼와 토끼가 아닌 것 사이에서 나는 고통스러워 더 이상 창밖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는데 다시 혹한의 겨울밤이 되면 마른 바람이 찾아와 창문이 덜컹이고 뼛속까지 시려 잠이 들지 못하는 그런 밤이 찾아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토끼를 걱정하게 됩니다 너무 추운 것은 아닐까 토끼는 무사란 것일까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 부분,⑤
이야기의 샘을 파고 감은 눈으로 나의 어둠을 들여다보며 기억을, 시간을, 자리를 쓸고 들이고 비우고 채운다. 그렇게 이야기는 결국 스스로의 구멍, 빈자리를 채우려는 자기 기원의 원형 서사일 테다. 어쩌면 답은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빈자리라는 사건은 발생 이전으로 돌릴 수 없다. 상태가 아닌 사건이므로. 빈자리를 서사로 채운다는 것은 의자에 앉았다 밤이 되면 떠나는 당신과 같은 것, 애초에 빈자리를 구원해줄 신은 없었던 건지도.
결국은ⵈⵈ모두 이어져 있다는 생각만 든다. 끝을 자주 의식했다. 바닥난 것은 내 인내심이었다. 이야기는 허방이다. 그저 거기 있을 뿐.
-「이야기-해제」 ,⑤
‘거기’ 있는 것은 이야기이겠거니와, 이야기가 허방이라면 시인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때로 방문객의 모습을 한 그것은 자주 늦게 온다. 그런데 “늦게 온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다는 생각에 뒤따르는 것은 “그것을 던져 커다란 창문을 박살 내고 싶다”(「이야기-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에 휩쓸려 다닐 뿐이지요」,⑤)는 전에 없던 힘센 욕구이다. 언제나 창밖을 보고 있었던 시인이 문을 잠그고 빈집에 가둔 것들은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마음일 터, 저 정지의 시간으로부터 이제 스스로를 제외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만 ‘헤어질 결심’은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제 거기 있던 시인의 마음은 어디로 가게 될까? 시인을 위하여 빈 의자를 내어주고 싶은 밤이 오고 있다. 창밖의 나무가 저마다의 이야기로 흔들린다.
- 1) 이 글에서 다룬 유희경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①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 ②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7. ③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④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1. ⑤ 『겨울밤 토끼 걱정』, , 현대문학, 2023. 인용 시 책 제목은 번호로 표기한다.
- 2) 김기림, 『길』, 깊은샘, 1993.
- 3) 그의 시에는 시선의 권위는커녕 ‘뒤집힌’ 시선이 등장하는데, 그건 가히 카메라상(像)의 원리를 닮아있다. 「위치연습位置演習」④을 참고하면 그건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카메라라는 개인의 역사에 닿는다.
- 4)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215쪽.
- 5) 2부<고백은 필요 없는 것>에는 응어리진 마음의 고백이 이어진다. 아침달에서 출판된 두 번째와 네 번째 시집에는 시집의 쪽 번호 옆에 별도의 번호가 줄곧 따라붙는다. 그건 내내 0이다가 네 번째 시집의 3부 <이야기의 테이블>의 시편에서 1로 바뀐다. 네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는데, 그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이제 준비가 된 모양이다. “그림자가 말했다. 천천히 들려줘요. 이제 나는 준비가 되었다.”-시인의 말.
- 6)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0, 387쪽.
- 7) “시인은 인간 속에서 하나의 뜻하지 않은 사건, 안팎의 어떤 말썽에 의해 잠이 깹니다.” 폴 발레리, 『발레리 선집』, 박은수 옮김, 을유문화사, 1999, 189쪽.
- 8) 블랑쇼에 의하면 작가는 반복적으로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며 시작을 통해 미결정의 시간 속에서 고독을 앓는다. 그런 강박적 반복은 시작하면서도 시작되지 않는 것을 보존하고, 사건들의 현재가 아닌 그림자에 대상이 아닌 이미지에 관련하고, 단어들 그 자체가 외현이 되게 한다. 모리스 블랑쇼, 같은 책, 19쪽 참고.
- 9) 모리스 블랑쇼, 같은 책, 15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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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충분한 대화를 연습할 겨를 없이 월드 와이드 웹 체제로 진입한 것은 어쩌면 재앙이 아닐까. 표현의 자유와 의사 개진의 평등이 얼굴을 가린 채로 재빠르게 닮은 꼴을 찾아 커뮤니티란 이름으로 뭉칠 수 있는 곳은 기어이 ‘다크’한 것을 필연적 찌꺼기처럼 만들어낸다. 특정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통신망을 의미하는 다크 웹은 마약 거래, 성 착취 콘텐츠의 온상으로, 그 자체 범죄이면서 파생적으로 하위문화를 양산하곤 한다. 근자에 이런 다크 웹 문화는 음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는 지상으로 올라와 사이버불링(cyberbullying), 악플, 온라인 성 착취 등을 하나의 놀이 문화로 만들고 있다. 범죄-놀이 문화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더해서 기저에 깔린 것이 혐오의 정동이라는 점은 더 많은 악재를 내포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사용자들을 한데 묶는 공통 감각인 동시에 사용자들끼리는 도덕성을 내세워 특정인을 처벌한다는 일종의 사회정의 실천이라는 명분의 기제가 다름 아닌 혐오인 것이다. 2021년 한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게임 업체의 광고에 쓰인 집게 손 모양이 남성의 신체를 조롱하는 것이라며 문제 삼은 사건은 성별 기준에 따른 혐오의 생성과 편 가르기, 유명인에 대한 마녀사냥, 악플 공격이 순차적으로 실행된 대표적인 예인데, 이를 기점으로 혐오 심벌 캐기는 걸핏하면 사건화된다. 사용자들은 ‘사냥꾼’을 자처하며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타깃으로 ‘찍히면’ 사이버불링, 즉 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시작된다(때로 위협은 사이버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 사냥과 고발의 진정성은 전혀 담보되지 않은 채로 사냥꾼들은 사람을(동물을) 잡는다. 그러니까 WWW 체제는 ‘댓글 부대’와 같은 명칭에서 보듯 매체 사용자가 언어 주체에 포개지면서 쉽사리 권력화되는 시스템이다. 조진주의 「초모랑마는 바다였다」(『현대문학』, 2025, 6월호)에서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인터뷰 도중 ‘중심이 서지 않는다’는 표현을 해 남성성 비하 혐의를 쓴다. 타깃이 되자 사냥꾼들은 지수의 과거 발언들까지 탈탈 턴다. 반추하다는 고추가 반 토막 났다는 뜻으로, 평등과 계급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공산주의로 호도되는 식. 말도 안 되는 유추래도 상관없다.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데 맥락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말에는 발화자의 욕망이 묻어있고 그건 발화자를 떠남과 동시에 수용자(수신자)의 욕망이 붙을 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 발화자와 수신자, 각자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말은 자주 불일치와 오역 가능성이 짙은 텅 빈 기표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부쩍 늘어나는 여성 혐오 담론과 그와 함께 등장하는 남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불안정한 남성성의 위기를 보여주는 예라는 바넷 와이저(Banet-Weiser)의 말을 가져오면 이런 사회적 현상은 상실했다고 믿는 무엇, 자신의 몫인데 가지지 못했다는 패배 의식을 증오나 배척으로 돌려세움으로써 허약함을 방어하려는 거부의 방식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우리는 혐오의 기원이 위험에 대한 인식과 결부됨을 아는바, 어렵고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서라면 혐오의 차원으로 밀어버림으로써 그 단단한 덩어리에 의존해버릴 수 있게 되므로 바넷 와이저의 저 문장에 동의는 어렵지 않다. 신지수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스스로 곡을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으로 온라인 공격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왜곡해 던지는 질문이 제 속에 정말로 있진 않은지 자문하고 검열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금하는 어휘가 늘어나고 허용되는 어휘는 그만큼 줄어든다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그럴 때마다 지수는 티베트인 어머니와 한국과 미국 혼혈 아버지를 둔 루시 윌리엄스의 인터뷰 영상에 접속한다. 티베트어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지수는 그 영상에서 어떤 질문을 들은 것만 같다. 어쩌면 수신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를 그 문장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67쪽) 루시가 지수에게 보낸 이메일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루시에게 티베트 말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장에 쓸모도 없는 그 말을 얼마나 배우기 싫었던지. 그런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어머니에게 남은 단 한 줄기의 언어는 티베트어이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이는 루시뿐이다. 아버지에게는 건너가지 못하고 루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뇌 손상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을 한 사람의 정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며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거나 삼켜지는 맥락이 있을 것인데,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경유할 때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 중일까? 아버지에게 건너가며 삭제되는 듯 보이는 말은 실은 번역을 위해 듣고 있는 루시의 온몸으로 흡수되는 중이고, 그건 말이 더 나중을 향해 건너간다는 뜻이 아닐까. 당장에는 번역되지 않을지 모를 그 말은 루시의 몸과 시간을 느리게 통과한 뒤 어느 날 불현듯 기억되는 식으로 번역될 것 같다. 지수가 자신의 내부로 질문을 던진 것은 퍽 윤리적이고 성숙한 태도랄 수 있다. 타인에게 말의 고삐를 간단히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기를 노래하기 시작한 터이지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혐오 심벌을 조장하고 마녀사장을 일삼는 온라인 집단은 여전하다. 온라인이라는 매체 자체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운용되는 말은 발전의 방향과 전혀 상관없이 비이성적 활용은 물론 그것을 정식화하여 도덕률로 삼고 심판의 권위를 거머쥐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맥락에서 말을 오려내어 읽는 중일 때, 말은 상징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다. 그럴 때 말은 차라리 상징계에서 누락 되는 식으로 실재계로 이동하여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잘려 나간 말은 이제 주인 없이 떠돌며 마구잡이로 오염된다. 그렇다면 보다 엄정한 말 앞에 선 연구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일까? 최은미의 「김춘영」(『창비』 2025, 여름호)에서 ‘운탄고도’로 불리는 폐광촌을 꼬박 1년째 찾고 있는 아카이브 연구팀 박정윤은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여성을 주체로 놓는 생애사 기술 작업에서 김춘영의 구술 채집을 맡았다. 기존의 탄광과 광부를 중심에 놓는 구술자료를 위한 면담이 김춘영이란 여성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라 장담하는 정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윤은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243쪽). 면담 내내 신중함을 견지하며 김춘영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포함한 그러한 태도는 정윤의 연구 윤리와 닿은 것일 테다. 소설이 소환하는 것은 일명 ‘사북 사건’으로,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민영 광산에 일어난 어용노조와 광부들 간의 충돌에 공권력이 개입하면서 사상자를 내고 광부들은 고문을, 그 아내들은 성고문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0년 4월의 일이니 시절의 흉악함을 조심스레 짐작해봄직하다. 면담의 마지막 날, 4월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폭설로 정윤은 발이 묶이게 되고, 거기에 트래킹을 하던 부부와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 둘이 합세하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김춘영이 응당 광부의 아내 아니면 여성 광부(선탄부)일 거라 여기며 존중하려는 듯 말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김춘영은 시종일관 주춤거린다. 그는 동네에서 술을 팔던 사람이었던 것. ‘막장 인생’, ‘한센인 다음 광부’라는 자조로 운을 떼는 한 광부의 회고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속으로 제 목숨을 매일같이 밀어 넣어야 했던 광부들에게 김춘영의 술집은 숨구멍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광부의 아내 입장에서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으리라.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데 일종의 사원증인 인감부를 맡기고 내일도 없이 외상술부터 마셔버리니 월급날이면 자동으로 먼저 김춘영에게 술값이 공제되고 그 나머지를 받는 형국이라 광부의 아내들에게 김춘영은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면 김춘영을 좀 덜 싫어하더라는 이야기 속에서 김춘영은 탄광촌의 가장 바깥, 탄광촌의 타자다. 사실 아카이브 팀은 조심스러운 한편 김춘영에게 사북 사건에 대한 증언을 얻고 싶어 늘 질문을 준비해 다니는데, 이 질문의 목록을 들여다보자니 김춘영을 관찰자 내지는 목격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김춘영이 목격자가 아니라면? 김춘영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누락 된 설정값을 다시금 세팅한다면 저 물음들은 가해의 언어로 뒤바뀔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더해서 김춘영을 증언자로만 대할 때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은 김춘영이라는 사람이 아닌 김춘영의 ‘말’이 될 수밖에 없기에 정윤의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증언자의 구도에서 모종의 위계를 배제하기란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물을 때 어떤 말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자리를 벌려놓는다. 그런데 그 자리란 게 미약하여 판단이 미리 점치는 쪽으로 마련되기 십상. 김춘영의 포지션이 광부의 아내나 여성 광부 중 하나일 거라 의심치 않는 저 악의 없는 부부의 태도에서 김춘영은 자신의 자리 없음만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식이다. 분명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공동체로부터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있었을 김춘영에게 그들의 목격자로서 진술을 얻고 싶어 기회를 살피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정당할까, 얼마나 윤리적일까? 그건 소설 밖 우리의 현실, 증언이 유일한 통로인 역사들이 산재하기 때문이기에 간절한 한편, 누군가의 기억을 돌이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한다. 김춘영이 광부들에게 숱하게 팔았을 돼지두루치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손님상’에 어울려 앉지 않는 것은 과도한 엄정성일 수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려는 모종의 태도, 실낱같은 자존을 막장의 바깥에서 붙들 유일한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사건의 목격자이길, 그리하여 쓸모 있고 충실한 증언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바람은 지워질 뻔한 역사의 복원이라는 선(善)의 차원에서 발원한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 예비 된 질문에서마저 바깥에 놓인 미처 짚지 못한 김춘영의 고통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어쩌나. 쉽게 꺼낼 수 없이 몸에 각인돼 버린 그 기억 앞에서 면담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 눈치 밝은 사람이 모를 리도 없겠건만. 기다리는 답과 말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 나타난 군인의 얼굴이 겹쳐 만든 이 4월이 김춘영을 바닥에 주저앉히고 오줌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을 때 그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모양새가 김춘영이 그날 겪거나 보았을지도 모를 일을 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타게 기다리는 증언의 한 줄보다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할 사람들은 소설 밖에 있다. 김춘영의 회고에는 언변이 좋았던 그가 마을 여자들이 탄광에 바람을 공급하는 압축기실 온수로 목욕할 수 있도록 탄광 관계자와 다리를 놓아주는 장면이 있다, 냉각수가 데워지면 그 물로 여자들이 탄가루가 묻은 몸을 씻곤 했던 것인데, 춘영은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257쪽)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빼라 마라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말미에는 김춘영의 이 이야기만 유독 구술 채집록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어쩌면 김춘영이 자신의 생애사에 남기고 싶은 순간은 단 한 순간, 진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 한 토막의 이야기, 마을 여자들이 옷을 훌훌 벗고 빈 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환대했던 순간, 그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수 있는 자신의 효용을 증명한 그 순간, 그때가 아닐까, 더도 덜도 아닌 그 순간 광부의 아내도 여성광부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김춘영이라는 사람도이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소설은 증언과 채집의 순간, 그 분위기를 소설로 엮어내며 누군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을 밀어 올림과 동시에 침묵의 이유를 사려 깊게 짚는다. 어떤 말은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는 듯이. 증언자-연구자라는 일대일 구도는 폭설의 밤, 증언자-연구자-(소설 안)청자로 확장되며 거기에 (소설 밖) 청자를 자연스레 불러들이고 말의 이동 범위를 한껏 넓혀 놓는다. 그런 장면에서 어떤 말들은 끝내 말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말할 수 없는 말ㄹ을 그렇게 우리 앞에 내민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말은 날조된 채로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물질로 환원될 가능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도덕은 역사적 감정의 산물이라 했던가. 성해나의 「신포도밭」(『문학동네』, 2025, 여름호)은 (거짓)말이 인간을 어떻게 직조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삼대에 이어지는 가계도로 전승되며 계보학적 형성과 변이를 추적한다. 동란의 틈에서 세 살 매석의 뇌리에 남은 희미한 기억 한 줌은 기와집 솟을대문과 그것이 사대문 안이었다는 것이다. 매석은 그것을 악착같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씨앗으로 붙들고 일가를 일군다. 전국을 돌며 약을 팔던 매석은 직업에 걸맞게 ‘약 파는’ 재주, 즉 말재간이 뛰어났고 엄정성 없이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는 식으로 자기를 재정립할 줄 알았다. 장녀 매돈규와 그녀의 아들 호림이 이혼 후 성씨를 바꾸며 매씨의 대를 잇는 과정을 통해 이들의 ‘종자’는 반복 재생산된다. 호림에 이르러 그것은 다소 헐거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나면 철석 들러붙어 증식할 것이기에 헐겁거나 줄어든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매씨 일가의 중심에는 저 ‘포도밭’이 있다. 돈을 쥐고도 크게 투자할 줄 몰랐던 매석이 망설임 끝에 강남에서 밀리고 밀려나 겨우 마련한 땅으로, 개발의 희망만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신기루처럼 딱 눈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희망을 주는 그런 땅. 그건 언제까지고 강남인 듯 아닌 강남 같은 땅이다. 개발은 언제까지고 요원한 것이라 그 땅에 매석은 농약을 들이부어가며 포도를 키우고 매돈규는 짝퉁 명품 거래소 강남살롱을 연다. 매씨 일가가 날조나 다름없이 명명, 정의하는 포도밭이라는 장치는 여우의 우화를 연상케 한다. 포도를 먹고 싶지만 애써도 되질 않자 그것이 신포도일 것이라고 왜곡해버리는 여우의 이야기. 이것이 장기적, 반복적으로 누적 강화될 때 그리하여 그것이 분개가 될 때 이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한다. 매씨 일가가 일구어낸 신포도밭의 계보학, 만성적이고 무능력한 르상티망에 정확하게 호응하는 이 소설에서 개발이 되지 않는 포도밭에다 줄을 죽 그어놓고 우리가 강남이라면 강남이라거나, 오렌지처럼 보이는 여성의 명품 가방이 가짜인 것을 보고는 어차피 다 똑같다며 가짜 상품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믿는 행태는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위법적이기까지 하다. 르상티망이 자신의 무능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감정’, re-feeling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볼 때 대를 거쳐도 나아지기는커녕 반복되며 악화하는 이들의 계보는 근대의 합리성을 맘껏 조롱하는 성해나의 인식에 더해 소설의 축을 단단히 쌓아올린다. 호림에 이르러 이들의 지독한 자기 세뇌로 빚는 긍지는 다소 주춤하는 듯싶다가, 매돈규가 상표법 및 개발제한구역법 위반 등으로 입건되자 호림에게서 ‘매씨’의 강점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내 일가의 성정을 부정하는 듯 보였던 호림은 뜻밖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은행 청원경찰인 그가 은행 용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별 소득 없이 번호표만 반복해 뽑고 있는 이유미를 돕고 그 대가로 5천 원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사코 거절해도 쥐여주는 돈이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이 말할 땐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던 행원이란 호칭이 생판 남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진실처럼 와닿았”(253쪽)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호림은 조금씩 ‘재개발’된다. 그러다 이유미의 욕망을 보자 그것은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철석 들러붙는다. 미처 정돈하지도 못한 방치된 포도밭을 성급히 정리한답시고 휘두른 낫에 허벅지를 베이고 저 멀리 아른거리는 강남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그가 포효하는 장면은 매호림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은 호림의 그런 변화를 이지러진 근대 괴물의 탄생처럼 그려내며 시종일관 우스꽝스럽던 소설에 서늘한 리얼리티를 툭하고 던지는 것이다. 근대성이 결코 합리성과 등가가 아님을 내내 설파하는 소설적 장치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불어 호림의 변화를 우리는 결코 성장이라 말하지 않을지라도 증식이라고는 표현할 수 있겠다. 외부와 결탁한 음험한 자기최면의 말은 이제 겁도 없이 자라날 것 같다. 이정자로 살던 노년의 여성이 이유미로 개명한 것 역시 그녀가 여전히 욕망의 주체로서 살아감을 증명하듯 말이다. 나이 들어 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개명 후 통장 명의 변경과 같은 사소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비견해 홀로 불쑥 커 보인다. 그런 균형의 어긋남이 이유미를 기괴하게 보이게끔 한다. 묵혀 둔 고액 예금과 개발될지도 모르는 아파트가 바꿔다 줄 전원생활을 꿈꾸며 5천 원씩 5만 원씩 비밀을 나누는 그녀는 어쩌면 매씨 일가와 퍽 닮은 구석이 있다. 덮개 기억(Deckerinnerung). 사소하고 무의미한 듯한 기억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일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정작 큰 것을 가린 작은 덮개일 수 있음을 뜻한다. 매석에게 기왓집의 대문이란 덮개 기억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합리를 도모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은 덮개로 일생을 가리고 “되뇌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은 진실이 되”(227쪽)는 삶을 착실히 쌓아놓은 일가가 낳은 것은 작정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술술 풀어낼 줄 아는, 거짓말을 돈으로 교환하려는 매호림이다.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본 도귀분-매돈규와 매호림-이유미 사이에서 누가 누구의 먹이가 되는가? (거짓)말의 점유, 그것만이 이들을 구분할 따름이다. 선수 치지 않으면 나와 닮은 그가 나를 속여먹는 게임, 그것이 이들이 이해한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편집된 말이 신포도밭을 가진 한 가계를 통째로 정립할 때,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편집된 말의 세계에서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는다. 라싸를 걸으며 그는 혐오 심벌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 적당히 삭제된 말을 하는 대신 자기 내면을 여실히 타진한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를 가리키는 티베트어로 대지의 여신, 세상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영국인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로 대체 되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조지 에베레스트로 대체될 때 저들이 잃은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를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러면서 어떤 말은 영영 그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결코 뱉어질 수 없는 침묵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어떤 기억의 자락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김춘영에게 그것은 발화되는 대신 차라리 신체에 깊숙이 찔리듯 새겨진 채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돌아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제 와 대의를 위해 정치적이고 공적이 존재가 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발 없는 말’이란 표현은 말이 얼마든지 뛰쳐나갈 본성을 갖고 있음을, 그 대단한 움직임의 위력을 함의하는 듯하다. 인간은 의미의 자장 안에서 내내 진동하는 존재일진대, 지금 우리의 말은 어디로 가는가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중일까. 말은 이성의 산물이라는 문장을 전복하는 현실들은 이제 말을 조련할 힘을 빼앗긴 듯 보인다. 발 없는 말은 고삐 풀린 말이되고,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말의 먹잇감이 되고 자주 말의 발길에 차인다. 다시금 말의 고삐를 점검해 본다.
아무래도 삶은 고통에 가까운 걸까? ‘잘 먹고 잘살자’는 슬로건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쪽으로 옮겨가다가 아주 보통의 하루를 소명으로 살라 한다. 결코 그것을 초과하지 말라는 듯 점차 쪼그라드는 소망의 크기는 퍽 현실적이라 그건 또 트랜드라 명명된다. 노동의 자리는 차츰 더 쪼개진다. 비정규, 비전임, 하청, 임시, 기간제와 같은 용어를 앞세운 계약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갱신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계약이 불발하면 사는 공간이 위협받는다. 전세금은 누군가의 먹잇감이기 십상이고 슬금슬금 오르는 월세의 부담은 가장 먼저 취향을 뒷전으로 민다. 일터에서 삶터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협은 존재의 위상을 쪼그리고 접고 나누게 한다. 다주택을 보유하고 일주일에 며칠은 도시에서 일하고 한적한 곳에서 나머지 날을 보내는 삶은 확실히 ‘아주 보통의’ 사례는 아니다. 겨우내 누군가는 한 줄도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현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임에도 어떤 낌새도 개연성도 없는 소요를 두고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겨우 한고비나마 추스른 다음 어렵사리 꺼내놓았을 소설들이 어느 지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 계절을 통과하며 먼저 읽는 단편소설이 미학적, 정치적, 시장 경제의 문제와 같은 지점에서 장편 소설과 다른 무엇을 선취한다면 미덕 중 하나는 그 기민함에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불안정의 와중에 발견되는 단편소설의 공통 감각이란 소설의 미학적 보편성이나 작가의 감각이라는 개별성, 특수성을 초과하는 시대 감각, 그 징후의 포착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연극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기성의 공간분할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르라는 플라톤의 진단에서 랑시에르는 미학이 수행하는 감성의 분할이라는 역할이 다분히 정치적임을 포착한다. 우리의 글쓰기에서 어떤 지형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징후이기도 하면서 사회구조의 재편 가능성을 향해 기존의 레짐이 해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2025년 봄의 단편소설들이 먼저 읽고 감각하는 정치적 삶의 지형도는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이어진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소설이 소묘하는 생은 좁아지고 접힐 것을 종용하는 공간과 그것을 체현하는 몸을 통해 다시금 감각과 경험의 재배치를 전경화하는 중인 듯 보인다. 어려서 이해가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누군가는 왜 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는 불행 쪽에 서 있다. 이제 보니 그런 일은 드물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흔하다. 조경란의 「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문학과 사회』, 2025, 봄)에서 양지의 삶이 결코 성공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양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 강사로도 일했지만 쉰 살이 넘도록 교수임용은 기약이 없다. 일찌감치 교수가 된 현 선배의 빈집을 돌보며 그 집에서 자신의 전공 서적을 바라봄은 타인의 성공과 나의 패배를 여실히 대비하는 잔혹한 한 폭의 그림이다. ‘타인의 공간’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유사한 점유의 경험이 있다.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된 모 교수를 대신해 강의한 것 역시 현 선배의 소개 덕이었다. 당시 교수의 배려로 그의 연구실을 사용하면서 양지는 공간의 안락함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한 인간의 증명을 대리하기도 하는 공간의 위력 앞에 양지는 교수가 영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봐야 양지는 엄연히 그 공간의 주인이 아니고 교수가 완전히 부재하게 되자 잠깐의 꿈을 허락했던 공간에서마저 완전히 내쫓기게 된 터였다. 다시 타인의 공간에서 지내게 된 여름은 온통 물난리로 하천이 범람하고 실종자가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재난의 와중인데, 양지는 이곳으로 종소를 들인다. 말랑한 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둘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도 임용이 되지 못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양지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모성에 대한 결핍이라는 곤궁이 있는 반면 종소는 모성의 과잉 쪽이라는 것만이 둘을 가르는 차이다. 현 선배가 없는 현 선배의 집 식탁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구도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가운데 괴괴하다. 이 집의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제법 어린아이만 한, 저주 인형이라고 불리는 밀짚 인형과 함께.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타인의 공간이 양지에게 준 것이 있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오브제 보듯 낯설게 조망하는 타자화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 시선의 전유 안에서 종소가 임용과 관련한 추악한 소문의 주인공이며 어쩌면 유서일지도 모를 글을 썼다는 것, 그것을 본 어머니가 끝내 아들의 여정-그것도 제자의 기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다소 가능해진다. 그들을 당겨놓고 바라보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양지가 결코 접지할 수 없는 모자의 관계가 양지쪽으로 일정한 폭만큼 거리를 벌린 채 존재하는데, 뜻밖에 양지는 종소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경유함으로써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맥없이 풀어져 버림을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양지의 미움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놓아버리는 능숙함을 택한다.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종소의 어머니가 발견된 곳이 뚜껑 열린 맨홀이나 넘실대는 개천이 아닌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맨손체조의 대열인 것은, 어머니가 잃은 것도 실은 일상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균열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독자 앞에 힘겹게 밀어 올린다. 가장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일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 일상이란 또 얼마나 각자의 허상에 기반한 것인지 궁구하게도 한다. 누군가는 깨어진 일상 위를 더 오래 걷지 않나? 어쩌면 바라는 일상은 기실 꿈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학위나 성실함이 미래의 일상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런 이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란 그저 남의 것을 기웃대거나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임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제자의 죽음과 임용에 실패한 양지와 종소 그리고 저주 인형을 품고 사는 현 선배의 삶은 어쩌면 하나의 선 위에 놓인 가능성에 대한 확률 게임처럼도 읽히며, 그것들은 정말 한 끗 차로 보인다. 현 선배가 양지나 종소와 달리 교수임용에 ‘성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시(詩)를 역전시키는 소설의 묘미는 현 선배의 저주 인형과 혈압 보조제가 그 답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 나뭇잎이 빗방울을 끊임없이 받아내고 끈질기게 ‘버티는’ 중이듯이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견디는 중이라는 게 생의 비밀은 아닐는지. 양지는 더 버텨야 할 테지만, 그 버팀을 위한 그의 지금 현실은 너무 비좁기만 하다. 공간의 영향력이란 퍽 실재적이면서 감각적이기도 해서 때때로 공간이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매일 온몸으로 공간을 체현하며 그 경험의 체현물인 몸조차 공간이다.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지만 이것은 점점 더 요원하기만 하다. 이토록 비좁은 현실에서 금비가 가진 공간이란 ‘캐비닛 두 개’다. 이상하의 「캐비닛 비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의 금비는 근근이 독립해 살던 원룸 보증금을 빼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엄마와 이모가 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캐비닛‘마저’ 비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여성 청년의 버티기를 쓴다. 스물여덟 살의 금비는 분양사무소 바이럴 마케터다. “선캡족”(76쪽)으로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하청직원인 것과 달리 금비는 “회사 소속 현장 직원”(75쪽)이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길거리에서 분양사무소로 호객을 하는 것, 그게 이들의 일이다. 이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했지만 태블릿 피시와 줌 체제로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한 엄마, 금비가 중학생일 때 실직한 뒤로 줄곧 아르바이트만 하며 함께 살고 있는 이모는 각각 재편한 시장의 그림자처럼 금비의 생에 다소 누추하게 걸쳐 있다. 얼핏 계산을 해보면 엄마의 직장 생활과 이모의 실직,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변화는 국가부도 이후 체제의 개편과 함께 시작되었을 테다. 이제 와 이 집에 금비가 차지할 공간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고 70개가 넘는 이력서를 뿌리고 겨우 잡은 직장에서 금비가 필사적인 건 지당하다. 버티어야 재계약이 가능하고 그래야만 독립을 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회사 소속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남들은 하나 쓰는 캐비닛을 금비만 두 개 쓸 수 있게 허락했다. 금비는 거기에다 원룸에 있던 원목 수납장을 옮겨놓고 개인 소품을 넣어두는데, 그 목록이 자잘하고 소박하기만 하다. 금비는 자신의 무기를 분명히 알고 선캡족을 이기기 위해 나름 유니폼을 갖추고 구두를 신는다. ‘아줌마’들은 입지 못할 작은 사이즈의 옷에 몸을 구겨 넣는 그런 노력은 육체적 차이를 토대로 사회적 가치를 구분하는 몸의 수치화에 다름 아니지만 그건 반드시 실적의 수치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제발, 한 번만, 도와줘”(78쪽)로 호객을 하는 선캡족의 실적에 밀린 지 오래다. 길바닥을 일터로 삼으며 머리에는 선캡을 쓰고 발에는 수면양말을 껴 신고 막무가내 호객을 하는 “5,60대 여성 아르바이트 생”(74쪽)들을 혐오하면서도 무력한 엄마나 이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면서도 가족과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심정. 그런 심경을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건 저들의 버티기에도 나름의 선, 궁색할지언정 최소한 자존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1) 현실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은 엄마, IMF 이후로 내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이모 그리고 계약직 바이럴 마케터 금비로 이어지는 한 가계의 구조는 실은 이 사회의 정체, 그 지연을 여실히 되비춘다. 머무르다시피 내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퇴행하는 이 사회의 잔여물처럼 자꾸만 자리를 좁혀가며 독립할 수 없는 저들의 사정에 기댈 때, 기대수명 120세 시대의 지당한 지침일 ‘저속노화’란 말조차 삐딱하게 들리는 건 노동의 측면에서라면 몸은 언제나 수단일 따름이기에 생산력을 보유한 일하는 몸을 오래 유지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종국에 두 개의 캐비닛 중 하나마저 새로 온 선캡족에게 내어주는 금비에게 저 수납장을 옮겨놓을 오롯한 자기만의 방은 어째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엄마와 이모, 금비 중 그 누구에게도 독립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것은 이들의 자유라는 범위를 좀 더 한정할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감한다. 독립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 집만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고 얘기한다. 차은영, 「고립어 배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에서 화자는 지금 여행 중이다. 먼 미래를 위해 1종 대형 면허를 땄지만 근미래는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는 화자의 여정 내내 따라 붙는 것은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가입하지 않은 ‘자갈 보험’ 옵션이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이혼하고 전화나 걸어오는 아버지는 생명보험을 들먹이면서 내가 죽으면 그건 네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살아있다. 아버지의 ‘자살 보험’과 여행길의 ‘자갈 보험’은 그렇게 나란히 먼 미래와 아주 가까운 미래(혹은 지금)의 화자를 둘러싼 안전장치로 나란히 대비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갈 보험은 옵션에서 빠져 있고 자살 보험은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어느 쪽도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지점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다. 그는 동료에게 주말 근무 교대를 부탁했는데 동료는 주말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자살했다. 어쩌면 지난 소설 속 인물들이 과잉 윤리의식으로 인해 내면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이 대단한 사건이 2025년의 인물에게는 “왜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지”“해명을 요구하”며 “죽음으로써 모든 형태의 해명을 궁극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97쪽). 소설은 죄책감을 종용하거나 그의 책임 여부를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내내 아이슬란드의 자갈길 위에서 자갈 보험에 들지 않은 차를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 이국의 어떤 풍경에도 넋을 빠뜨리지 않게, 가족사를 회고하는 일에 깊이 골몰하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길을 더듬어가는 여정을 담백하게 그릴 뿐이다. 균형잡기란, 내 탓이라기보다 그게 나일 수도 있었고 그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 마음 그러니 조금은 더 약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다짐 비슷한 것으로, 이 소설의 저류에 묵음처리 되어 있는 음성을 가시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하여 화자가 끝내 완성한 문장이 “아버지, 죽지 마세요”(109쪽)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성장과 화해의 감각조차 달라진 ‘요즘’의 생존 감각은 아닐까. 자갈 보험과 자살 보험은 보험의 용어를 빌렸달 뿐, 결국 이 세계에서 존재란 죽음이나 삶 어느 쪽에서든 위험 앞에 균형을 잡고 버티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기미도 해명도 없이 죽음 쪽으로 발길을 돌린 저 동료처럼 「흰옷 빨래의 날」(안담, 『문장웹진』, 2025, 04)속의 마지도 그러하다. 증명할 수 있는 가난을 소유한 청년인 화자는 전세임대주택제도 덕에 역에서 멀지만 산에서는 가까운 집에서 큰 개를 키우며 지낼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다양하고, 펫시터, 원룸청소, 주말 보습학원의 데스크, 호프집 마감 직원, 자기 소개서 대필 등이 그 목록이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중증 우울을 앓는 친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그전에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옆방 남자와 사귀는 동안 그 남자의 옷에 밴 치킨집 기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곳을 떠났던 터였다. ‘냄새’는 화자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외모를 전혀 가꾸지도 심지어 잘 씻지도 않는 마지의 체취는 만만치 않다. 참다못한 그는 마지에게 세탁법을 알려주는데, 마지는 아주 간단한 생활의 기술 이를테면 세탁기 사용법조차 모르고 있다. 차츰 청소며 정리를 시작하는 마지가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다름 아닌 ‘유튜브’다. 그러니 얻는 정보는 산만하고 산발적이다. 유튜브가 마지를 데려가는 방식은 알고리즘이니, 그건 현실의 개연성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마지는 알고리즘에 따라 이것저것 살림 ‘꿀팁’을 얻어오고 청소 세제와 수납함을 구입한다. 잡다하고 목록화되지 않은 알고리즘의 경로는 그를 음모론의 세계로 데려가고, 집회로 이끌기도 한다. 태극기 집회, 장애인권, 기후 정의,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 집회까지 목록은 다양하다. “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어쩌면 이 문장은 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사는 게 서툴렀”고 “사는 정도가 아주 미약”한 사람, “사람이 덜 되었다는 피드백을 듣곤” 했던 마지에게 일상, 보통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당위성으로 갈음되곤 한다. 그건 정상성의 규정에 대한 모종의 합의를 전제하기에 일상이 누군가에게 버거운 것이라면 그에게 일상의 영위는 보편성이라는 텅 빈 것의 추구이자 폭력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가 남자친구의 옷에 밴 기름 냄새가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이 실재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될까 봐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마지의 냄새에 자신의 삶이 한데 뭉뚱그려질까 봐서 비싸고 향이 나는 세제를 고집해온 것이라면, 마지에게 그런 향기로 감싸인 공간은 끝내 곁을 물리는 행위,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켜주는 묵언의 죔쇠였던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삶은 한 번 더 층위를 구분해나가는 방향으로 마지를 몰아댔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기일에 마지의 흰옷 빨래를 하는 일은 그를 기리는 것이면서도 그 공간에 더는 없는 마지의 육체성을 마치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옷으로 대체하는 이 행위는 진정한 애도의 행위인가 부재의 확인라는 남은 자의 자기 보존인가. 그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의 빨래를 자꾸 빨아 그의 냄새를 휘발하는 행위에 마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행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던 데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곁을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희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는 광장의 숱한 깃발 중 어느 항목에도 퓨섭될 수 없었던 마지만의 깃발을 세우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이 행위의 저변은 차은영의 인물과 나란히 두고 읽게 한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죽음의 원인을 자신에 두지 않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안간힘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 실은 세계라는 외부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라는 저울의 추를 버티어내는 개인의 승리 쪽으로 점점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사후적인 윤리의 냉담을 엿보게 한다. 마지가 일상을 향해 웅얼거리던 말은 끝내 ‘버겁다’가 아니었나. 한 인간의 삶이 사회적 관계와 더불어 공간 내에서의 관계성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레짐을 형성해간다고 한다면, 마지의 죽음이 실족사였든 자의적 선택이었든 자명한 것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허용받지 못했던 마지의 죽음은 저 바틀비의 죽음이 가치와 그 가치를 수용할 공간의 말소이듯 일종의 사회적 죽음으로 수렴되는 면이 있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 가진 것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속되나. 남의 집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을 꺼내 먹어 치우는 몸, 그 몸은 빈집을 임시로 채운다(「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 임시라는 말은 각종 유사어로 위장해 부지불식간에 잠입했고 우리 세계를 점유했다. 재계약에 실패하면 남의 집 달걀이라도 먹으며 버텨야 하는 것은 대학원을 나온 시간 강사나 학습지 교사나 주방 아르바이트생이나 바이럴 마케터나 마찬가지다. 계약이 끝나면 제 몸을 둘 공간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교수의 방을 대신 쓸 수 없고, 캐비닛을 비워야 하며,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누군가의 집에 월세를 내고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가거나 고시원으로 가야 한다. 또 누군가의 몸은 냄새나고 어디에서도 구실하지 못하는 것, 곁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삶은 고단하다. 잔뜩 고통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곁에 있던 너마저 죽는다. 정당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니체의 말마따나 오로지 미적으로만 세계가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현실보다 좀 더 정당성을 가질 소설에 기대 이어 나가 보니 그건 이 사회의 레짐이 점점 협소한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악화 쪽으로 기우는 소묘들이다. 어지러운 정치의 모형들이 우리를 더 좁은 곳으로 내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어가거나 살아가는가. 쩨쩨하게도, 삶은 그럼에도 지속된다. 삶은 아무래도 고통 쪽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삶일지라도 덤벙덤벙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어쩌면 그것만이 내가 나를 존중하는 가장 비좁지만 오롯한 존엄의 태도가 아닐까. 이 계절의 소설을 읽으며 달라진 세계의 지형도를 쓸쓸하게 음미해본다. 조금 더 잘 버티기 위하여. 1) 나는 여성의 일과 자리 그리고 이름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일터에서 여성 청년이 자리를 지키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들의 ‘버티기’는 금비의 표현에서도 보이듯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받는다. 그들은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도 소외받지만 젊은 여성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거기에 하청, 하청의 하청과 같은 구조가 덧붙어 이들은 쉽게 ‘민폐 아줌마’로 전락한다. 졸고는 「비주류 생존기-여성의 호명과 자리」, 『문장웹진-콤마』, 2022.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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