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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청색종이 | 2025년 여름호(제16호)

시선의 연금술로 열리는 사랑의 미래 ―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

이원기 문학평론

2023년 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들 -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읽기」 등이 있다.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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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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