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제11호)
서로가 서로와 겹치는 자리를 발견하는 일 — 이종민, 민구, 강혜빈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공동의 자리에 관하여
— 이종민, 민구, 강혜빈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공동의 자리에 관하여
시 한 편을 읽는 일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이다.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은 길고 가늘다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은 걸음이 빨라서 나와 걸을 때면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그리며 걸었을 것이다 겨울을 기다리는 일이 비를 피하는 일보다 몸이 더 젖고 선뜻 우산을 함께 쓰고 싶은 사람과는 오이냉국 한그릇으로 오래 더위를 달랠 수 있다 그럴 때 등골에 스미는 한기에는 오뉴월에 잡은 손으로 모여들던 웃음이 있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탐나서 읽은 책은 두껍고 제목이 길었고 길을 찾으러 들어간 숲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났다 숲을 나와서야 그곳에 사시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부르는 내 이름에는 뜻이 없고 소리만 있었다
— 이종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창비, 2021) 전문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시의 목소리는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의 모양을 묘사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어서 그 손이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움직임을 닮은, ‘그리는 사람’의 ‘나’와 함께 걷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모습을 가리켜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거리며 걸었을 것”이라 말한다. 이 시의 제목에는 “문성식,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cm, 2006.”이라는 주석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미술 작품의 작가와 제작 형식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렇다, 이는 시의 제목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을 화가 문성식의 작품 이름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히기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는 그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와의 만남으로부터 비롯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측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문성식의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는, 시에서 노래하는 바다의 이미지라든가 그에 잇따르는 장면들이 직접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는 그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게다가 바다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곤 하는 ‘파란색’과 같은 색채를 그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에서 ‘바다를 잘 그리는 손’에 관한 이야기를, 또 그 손에 의해 그려지는 물이랑과 갈매기의 비슷한 모습에 관해 말하는 목소리와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은 정보들만 나열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어째서 나무를 그린 작품과의 만남에서 시인이 바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의 목소리는 그림과의 만남에서 비롯한 바다에 관한 이야기들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바로 그 만남에서 기계적 인과 같은 것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독특한 움직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독특한 움직임에 시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주제에 곧바로 진입하기 전에,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바다 자체에 관해 직접 이야기하는 대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에서의 ‘나’가 전하는 ‘바다’의 모습은, 그이가 실재로서 마주하거나 현실에서 경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림과의 만남에서 떠오른 일종의 상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에는, “걸었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나’의 추측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추측이란 미루어 짐작하는 막연한 판단을 이른다. 즉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한 것이기에 또한 불확실한 동시에 한 가지 모습으로 획정할 수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판단은 때때로 인간의 인식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인지과정은 연속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을 분절하고 틀을 씌움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떤 대상 하나를 명확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이 분명한 경계로 둘러싸임으로써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종민의 시에 제시된 것과 같은 일종의 모호한 말하기의 방식은 때때로 서로를 구분되도록 하는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서로 겹치는 곳을 발견하고, 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을 서로 포개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상상을 표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세계의 실상 가운데 하나로 하여금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다.
시를 다시 반복하여 살펴보자.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는 시인이 나무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쓴 시이다. 그렇게 쓰인 시에서, 노래하는 ‘나’는 “바다를 잘 그리는 손”을 떠올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함께 걸을 때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듯 “가슴속에 하늘 천 자를 크게 두번 그리며 걸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의 움직임은 일견 시인의 시쓰기 가운데 이루어지는 자율적이고 미학적인 움직임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자율적’이라는 말로 가리킨 움직임은, 그 일이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고립된 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그렇게 나타난 존재의 고유함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른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고유한 존재는 또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작품의 자율성과 그것을 감상하는 ‘나’라는 존재의 자율성이 만나 이루어진 예술의 장에서 서로의 힘이 교통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자율성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자신과는 다른 무엇의 침범을 가로막는 모습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고유한 무언가로 표현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나타남은 언제나, 그 존재 자신과는 다른 타자들이 이루어낸 만남으로부터 비롯한다. 나아가 스스로를 고유한 무언가로 표현하도록 하는 움직임 역시 그 자신과는 다른 타자와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객체가 회화 작품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상하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자율성을 표현하기 위해선 해당 작품을 독자가 읽고 있어야 한다. 이는 비단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들만이 아니라, 이 글의 존재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누군가 감상하거나 읽지 않는다고 하여, 혹은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존재들이 없는 것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행사하는 힘은 자신과 다른 존재와 만나지 않는 이상 잠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다, 자율성이라는 것은 타율성 즉 타자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 타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이종민의 시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우리는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라는 회화 작품의 자율성과 만날 때 이루어지는 독특한 미학적 연쇄과정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미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단순히 어떤 감성적인 기호를 발산하고 있음을 이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는 또한 그렇게 발산된 기호들이 그 기호와 만난 이의 정서와 함께 변용됨으로써 스스로의 모습과 다르게 되어가는 과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는, 그림과 만나 떠올리게 된 바다의 모습이 그림 그리는 사람과 함께 걷는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는 곧바로 “겨울을 기다리는 일이 비를 피하는 일보다 몸이 더 젖는” 상황으로 바뀐다. 또한 ‘젖는’이라는 말로 불러일으켜진 감각은 “우산을 쓰고 싶은 사람과는 오이냉국 한그릇으로 오래 더위를 달랠 수 있다”라는 특별한 경험의 나눔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며 이어진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서 시의 목소리가 전하는 풍경들은, 이렇듯 그림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와의 만남에서 비롯한 정서의 나눔과 변용, 그리고 그 감각적 이미지가 이웃해 있는 곳으로 흘러가며 스스로와 달라지는 과정을 표현한다. 우리는 「말을 걸어오는 나무 2」를 함께 읽는 과정에서, 시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았던, 마치 살아있는 듯한 바다의 모습과 그 감각이 전하는 다양한 풍경들의 정서와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만남이 이루어내는 독특한 문학의 공간에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만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일으키며 달라진다. 나아가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며 계속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간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변화의 움직임은 단순히 작품과 독자라는 두 항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시의 문장은 시인 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올 터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우리가 작품이라 부르는 것이 나타나는 과정에는 한 인격 혹은 주체가 행사하는 능력의 실행만이 아니라, 그러한 움직임을 이행할 수 있게끔 한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라 여겨지는 것들과의 수많은 만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여러 영향의 얽힘이 또한 함께한다. 「말을 걸어오는 나무 2」에 ‘사람’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시에 제시된 다른 이미지나 요소들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물이랑을 갈매기와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이거나 “선뜻 우산을 함께 쓰고 싶은 사람”이라며 인간 아닌 것들과 접속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가 “부르는 내 이름에는 뜻이 없고 소리만 있었다”라고 하는 말처럼, 인격적인 성격보다는 물질성이 부각된다. 여기서 강조된 ‘소리’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물질성은, 앞서 “숲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났다”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받아 이루어진 반복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장의 배열은, 인간이 인간과는 다른 무엇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으면 또한 함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와 다른 하나의 연결을,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달라짐의 과정을 기술하는 까닭은, ‘시’가 수행하는 독특한 나눔의 과정과 연대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온 일련의 생태적 사유 흐름이 ‘육지의 상상력’으로 머무름으로써, 다른 존재자들과의 조화를 인간 중심에서 꾀할 수밖에 없었던 태도에 대한 반성과 그 대안으로 제안된 ‘지구환경과 블루 인문학’이라는 것을 요청받은 데(이 글은 계간 『청색종이』 2024년 봄호의 기획특집 ‘지구환경과 블루인문학’에 싣기 위해 쓰였다)에서 생각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지구환경’이라는 것에 대해 그동안 반복해 논의되어온 방식을, 이를테면 기후위기라든가 탈성장 등을 살피는 생태학적 접근법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과 조화라는 길 역시 모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식은 여전히 인간과 자연을 서로의 대립물로써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틀에 기대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간 아닌 것들을 살피는 것 역시 이 글에서는 수행하지 않는다. 한편, 이 글이 실리게 될 코너의 주제어이자 ‘녹색’에 대한 대항 개념으로 제시된 ‘블루’라는 낱말 역시 인간중심적인 시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색’이라든가 ‘푸름’이라는 색채의 상징 역시 ‘녹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통감을 전제하며,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의 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인간의 수준에서만 살펴보더라도 ‘청색’이라는 말로 바다라든가 지구와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은 해당 색채를 지각할 수 있는 이들에 한정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인간적인 조건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에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스스로가 완벽하게 비인간에 관해 사유하고 또 표현한다고 말하는 일은 기만적인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사유되어온 일련의 흐름에 대한 반성으로, 인간과 자연을 서로 대립된 개념으로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시선에 이르고자 시도하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아온 일들로 인해 은폐되거나 망각된, 혹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존재에 관해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관해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을 서로 분리되고 대립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일과는 다른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일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다른 자리에 이르는 움직임을 연습하는 일, 이는 기성의 척도 및 사회적인 선과 같은 규율을 반복적으로 신체에 각인함으로써 능력을 함양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즉 인간중심적인 시선의 틀과 능력을 덜어내는 움직임을 되풀이하며 시도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습에 반(反)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보는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반-연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연습’의 예를 안태운의 시 「시퀀스를 연습하세요」(『산책하는 자의 기쁨』, 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해당 작품에 관해서는 졸고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딩아돌하』 2023년 봄호)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살피지는 않겠다.] 시를 쓰는 일, 그리고 시를 읽는 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반-연습을 수행하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 그리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무엇으로 되어보는 일을 반복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무언가가 되어보는 연습을, 즉 반-연습의 한 예를 민구의 시 「마리모」에서 만나보자.
마리모가 말했다// 슬플 땐 슬픔이 약이라지만/ 오늘은 맛있는 걸 먹자// 식사가 끝나면 네가 잠들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마리모는 작지만 또렷하게/ 자기의 탄생 배경과 좋아하는 온도/ 번식 방법과 물갈이 주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물속에 잠긴 기분이 들었지만/ 그가 일 년에 얼마나 성장하는지/ 홋카이도 호수가 사진과 어떻게 다른지 또한 알 수 있었다// 마리모는 말했다/ 내가 물에 뜨면 소원을 빌어/ 그는 그것이 마리모 세계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했다// 나는 너희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이라고 반박하려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초록 생물이 귀여워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정말 백 년을 살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만약 네가 백 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 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이 들었다
— 민구, 「마리모」(『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 전문
위에 인용한 시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마리모는 일본 홋카이도의 아칸 호수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공 모양으로 뭉쳐 자라는 담수성 녹조류의 일종이다. 한자 표기로는 ‘구조(毬藻)’라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 모양의 마름(조류)’라는 뜻이다. 일종의 파래와 같은 수초인 마리모가 시에서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일에서 「마리모」의 노래가 시작한다. 그 건네는 말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듯, ‘나’에게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난 듯하다. 그런 ‘나’에게 마리모는 “오늘은 맛있는 걸 먹자”며 따뜻한 말을 건네고 또 “네가 잠들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만 본다면, 마치 마리모라는 식물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관습적인 문학 독법에 따른다면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을 일컬어 의인법이라 할 터이지만, 시에 나타나는 마리모의 모습이나 행동 등을 사물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수사법과 온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 마리모가 말을 건네는 장면을 전함으로써 시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바는,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 구조를 허물고 둘 사이에 자리해 있으리라 여겨지는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일을 시도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시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대립 구도를 허무는 일이 둘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 차이 자체를 지워서도 안 될 것이다.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개체로서 저마다의 자율성에 따라 움직이고 또 그래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물에 뜨면 소원을 빌어”라고 마리모가 건네는 말에 “나는 너희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이라고 반박하려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초록 생물이 귀여워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라고 하는 대목이 바로 그 한 예이다. 마리모가 수면으로 떠오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풍문이 있다. 어쩌면 ‘나’의 생각처럼 소원을 빌라는 마리모의 말은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상술”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같은 생각은 ‘나’에게 말을 건네며 자율성을 지닌 모습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마리모의 실존적 성격이 ‘상품’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문제 하나는 마리모가 상품이라고 하여 존재론적으로 인간 혹은 다른 자연물보다 낮은 위계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고파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 시에서는 그와 같은 점이 그에 대해 마음껏 처분을 내릴 수 있음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에서 마리모는 ‘나’에게 있어 돌봄의 대상이자, 또한 나를 돌보는 행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떠받들며 함께하는 흐름에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때문에 시의 말미에 제시된 바와 같이 ‘나’와 마리모의 관계와 환경이 역전되는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이 들었다”라며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마리모가 ‘나’에게 따스한 말을 건넨 것처럼 그때는 ‘나’가 마리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이렇듯 ‘나’와 마리모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 아닌 것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져 있다.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역할을 대신 떠맡는 일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은 상상의 영역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현실의 우리를 비롯해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은, 민구의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 「미래」에서 “씨를 뿌리면 십 년 뒤에 거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는데/ 당장 내일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발가락만 꼬물거리는데”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가 보이는 태도와 같이 당장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상한다는 것, 이러한 일은 주어진 현실의 조건과는 다른 관점에 이르도록 하는 첩경이자 타자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통로를 연다. “먄약 네가 백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라는 시간과 상황에 참여하는 일은 상상의 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시에서의 ‘나’는 상상의 힘과 함께 ‘마리모’가 되는 연습으로써,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이를 수 없었던 곳에 도달하고자 시도한다.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인간과는 다른 관점에서 상상해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상상은 단지 공상적인 것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활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이로 하여금 주변과 맺는 관계에 대한 태도를 그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도록 이끈다. 시는 그와 같은 반-연습을 이행하는 훌륭한 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연습을 이행하는 또 다른 사례를 우리는 강혜빈의 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서 만날 수 있다.
[……]//3D 프린터는 빠르고 정확한 피자를 만들 수 있다는데/ 어쩌면 기쁨이나 슬픔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버리게 되었어도/ 미래의 토마토만은 변질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마음은 얼려두는 게 좋아/ 빛의 속도로 달려 나가서/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면// 원래는 원래를 지키려 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을 밀고 나가려 한다면// 머지않아 종이 책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그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것에 특화된/ 어떤 종이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납작한 마음이 두꺼운 마음으로 변모할 때/ 진짜 토마토와 가짜 토마토는 차츰 비슷해지고// 지구는 지금도,/ 우리의 발바닥을 밀어내는 중이다// 나는 밀어냄의 반동으로/ 무게를 갖고 싶어진다// 토마토 박스로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삶보다 근사하다면// 나는 기꺼이/ 덩그러니
— 강혜빈,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미래는 허밍을 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부분
강혜빈의 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는, 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토마토 한 상자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걸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시의 제목에는 주석으로 신문 칼럼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는데, 해당 기사의 제목 역시 시의 제목과 동일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이다. 인용된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당도 8브릭스(brix)를 기준으로 그 이상을 ‘대저 짭짤이 토마토’ 그 이하는 ‘대저 토마토’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것, 그리고 “시중에 가짜 대저 토마토가 너무나 많다”(문정훈,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 《한국일보》 2019년 5월 10일, 29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런데 주석에 인용된 이러한 문구를 발견하는 순간 그 내용을 읽지 않았더라면 생각해보지 않았을 물음, ‘시에 등장하는 토마토는 진짜 대저 짭짤이 토마토일까’와 같은 생각을 잠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본문에 ‘대저 짭짤이 토마토’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듯, 그 진위여부를 생각하는 일은 무용해 보인다.
“3D 프린터는 빠르고 정확한 피자를 만들 수 있다는데/ 어쩌면 기쁨이나 슬픔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와 같은 시의 물음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보다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혹은 마음을 보다 잘 살피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3D 프린터’라는 인공물로 물질적인 것과는 대척점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혹은 마음을 “자세하게 조립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태도에는 이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릿하거나 지워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시의 목소리가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까닭은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버리게 되었”는데 그에 반해 “미래의 토마토만은 변질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에 이른 어떤 발견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친구의 마음이 예전과 다르게 변해버린 모습을 마치 감자에 싹이 난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눈에 보이는 식물의 모습으로 비유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서로 별개의 것이라 여겨지던 존재자 간의 경계를 허무는 미학적인 움직임의 이행으로 이어진다.
한편, 서로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보이던 존재자들이 각자를 가두고 있다고 여겨지던 경계를 허물고 넘는 일은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서 ‘종이’라는 것이 지닌 의미와 물성으로 종횡무진하며 이루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을 시에서는 이미 “토마토 한 박스”라는 시어와 “프린터”라는 시어 등으로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면”이라는 대목에서 그 외형에 빗댄 비유로 등장했던 것이, “머지않아 종이 책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그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될 거라고 대답했다”라는 대화 가운데에서는 어떤 끝(대화에 제시된 상황만이 아니라 그러한 말을 나누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의 종언을 이르는)에 대한 결정적인 장치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시에 산세리프 이탤릭체로 제사처럼 씌어진 “마음은 열 번 이상 접을 수 없다는 실험 결과로,/ 더 평평하고 얇은 마음만이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접다’라는 말이 ‘거두다’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종이의 물성을 또한 끌어당기며 ‘꺾어서 겹치다’라는 의미로도 겹쳐서 나타난다. 이렇게 잇따르는 과정과 함께 시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어떤 종이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라고 하며 ‘나’와 ‘종이’라는 존재를 포개어 놓는다. 시에서 노래하는 이로 하여금 이와 같은 생각에 이르도록 한 계기는 아마도 가깝게 여겼던 누군가와 서로의 생각이 달라짐으로 인해 일어난 말다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경험에서 시에서 노래하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것에 특화된” 존재라 여기게 되었을 터이다. 아울러 종이를 접듯 상대에 대한 마음을 접는 과정에서 ‘종이’와 ‘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하기에 이르렀을 터이다.
‘나’는 항상 같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의 변화를 헤아리는 상황에 놓이며,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의 모습과 그 ‘미래’로 도달하게 된 지금 사이의 괴리 혹은 간극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가 반드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지금 이루어지는 일들의 자취가 누적됨으로써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나타나지 않게 되더라도 그와 같은 일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그려봄으로써 현재의 조건을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한 일이다. 이처럼 변하려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시간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시에서의 ‘나’가 마음을 접는 일은 상대에 대한 감정을 거두는 일에서 토마토를 담는 상자처럼 자신과 다름을 담아내는 종이접기와 같은 움직임으로 변모한다.
“납작한 마음이 두꺼운 마음으로 변모”하는 그때 “진짜 토마토와 가짜 토마토는 차츰 비슷해”질 것이다. 하나와 다른 하나를, 그리고 진짜와 가짜라는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의 희미하게 만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질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겹치는 자리에서 개체 간의 분리를 뛰어넘어 저마다의 존재를 서로 나누는 소통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원래’ 변치 않으려는 힘과 ‘새로움’이라는 변화하려는 힘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사랑’과 ‘미움’을 서로 넘나들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접는 일은 이제 토마토를 담은 상자와 같이 ‘나’와 다름을, 그리고 ‘나’를 이루는 다름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용기처럼 “두꺼운 마음”이 되어간다.
미래를 지금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는 일은, 그리고 그러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와 서로의 존재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창출하는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구는 지금도,/ 우리의 발바닥을 밀어내는 중이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구 궤도 운동에 떠밀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선 또한 그렇게 발바닥이 지구와 맞닿아 소통하는 움직임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른다. 그리고 시의 ‘나’는 그러한 상호교통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밀어냄의 반동으로/ 무게를 갖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무게를 갖는다는 것, 이는 또한 구체적인 실감을 갖는 것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바람인 동시에 그러한 실감을 통해 당신과, 그리고 타자와 만나 서로 소통하는 장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구체적인 실감으로 존재하는 일은 반드시 ‘인간’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토마토 박스와 같이 ‘다름’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면, “토마토 박스로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삶보다 근사하다면”이라는 생각에 시의 목소리는 “나는 기꺼이/ 덩그러니”라고 말한다. 이 발화는 술어로 말을 맺지 않고 그 뒤를 침묵으로 남겨둔다. 이와 같은 말하기가 향하는 길이 어느 곳으로 이어지는 지는 쉽게 획정할 수 없으나, 그 길은 아마도 ‘나’와 ‘다름’ 혹은 ‘타자’를 모두 긍정할 수 있는 방향일 것 같다. 그와 같은 방향에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가,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자리해 있을 것이다.
「대저 짭짤이 토마토의 미래」에 나타나는 미래를 탐색하는 움직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모습은, 바로 시의 목소리가 인간과 비인간을 특별히 구분 짓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라 여기는 것들이 서로 소통가능하고 호환 가능한 존재로 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강혜빈의 시에는 유기물과 무기물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이항 대립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와 넘나들고 또 뒤섞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생명체, 나아가 유기물이라 이르는 것들은 모두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제 안에 포함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오히려 시의 목소리를 통해 발화되는 모습이야 말로 이 세계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그동안 인간들에게 주도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인본주의적 관점은 세상을 편향되게 바라보도록 하는 예외적인 동시에 공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에 인간의 행위로 인해 어떤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면, 이러한 태도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비롯되었고 또 누적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시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를 넘나드는 상황을 드러내는 일은, 단순히 시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고 그에 담긴 이념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아가 한 시인이 어떤 특정한 의도로 시를 썼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의도가 무엇인지는 시를 읽는 일에 있어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모습들과 우리가 만날 때, 인간적인 것이라 여겼던 것 안에 비인간적인 것이라 여겼던 타자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그 반대라 생각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찬가지로 나와 타자를 이루는 경계가 고정된 것으로 견고하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한 드러내기도 한다. 인간은 인간 아닌 것들의 영향을 받으며 또 그러한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인간 아닌 것이라 여겨지는 수많은 존재자들에도 역시 인간에 의한 영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오늘날을 이른바 ‘인류세’라 부르는 까닭은, 단순히 이 지구에 인간이 끼친 영향력이 거대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인류세’라는 말에는 인간이 일으켜왔던 일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른바 ‘비인간’으로 여기던 존재자들 역시 모두가 서로 함께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 상호 소통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변화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그에 관해 탐색하고 사유하도록 요청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나아가 생명과 생명 아닌 것들이 대립적인 것으로 분리되고 고립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그리고 모두 함께 서로 겹치는 자리에 관해 살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거대한 사슬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그에 관한 완전한 앎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 관한 절대적인 지식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깨뜨려 돌멩이로 만들고, 그 돌멩이를 깨뜨려 모래로 만들고, 그 모래를 분해하여 분자로, 다시 원자로…… 끝없이 나누더라도 우리는 그 안을 볼 수 없다. 역으로 그 바위가 속한 세계의 전체를 보는 일 역시 불가능 하듯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인간이 지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일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과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실천해야 모두가 함께 더 나은 미래에 이르게 되는지 역시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일 역시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 여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물음을 던지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에 물음을 던지고 고정된 것이라 여기는 것에 다른 모습은 없는지 헤아려보는 일,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상상하고 또 시도해보는 일을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다른 무엇과 겹치는 자리를, 하나와 다른 하나가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사슬의 흐름을 발견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에 관해 헤아려보며 지금과는 다른 무엇에 함께 이르는 일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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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더 잘 실패하기 김근의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에게서 에게로』는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본연의 기능에는 관심이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거부하고 의미의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문시가 많고 시의 행도 긴 편이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자유연상을 따라 말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의미는 저 멀리 달아난다. 출처를 규명할 수 없는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를 끌고 간다. 김근의 시는 무언가 선명하게 비추거나 재현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을 끌어당긴다. 김근의 시는 빛에서 어둠으로 이행 중이다. 시집의 맨 처음 놓인 「이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준 적 없는데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이사」) 이 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집주인이지만 “흘려놓은 흔적들”로 존재하는 당신을 점점 기다리고 당신의 어둠을 단속하다가 급기야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들어” 간다. ‘나’는 당신과 어둠 속에서 오는 말들에 매혹당한 자이다. 「이사」의 화자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 않는 당신의 어둠 속에 살기로 한다. 대상을 알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살던 집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저 밝은 곳에 남겨”(「이사」)진다. 이 시집은 독자 역시 의미의 집을 나와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실체가 드러나도록 대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러나 대상을 명료하게 하는 일은 그것을 가두고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는 다른 지각과 인식을 만난다. 그것은 언어가 수행하는 명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가려진 문장」)이 그렇게 태어난다. 서러우니, 에는 어떤 거리들이 몰아쳐와 들러붙는 것이어서 생으로 떨어져 젖은 이파리 같은 것들 잘은 또 떨어지지는 않기는 않았기로서니 아프니, 쪽에 살아만 있는 꽃향기 자욱만 하고 지독만 하고 몽롱한 봄날 하늘 갑작스럽게 날 흐리고 스산하고 주어도 없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형들 거기로 서러우니, 하는 목소리도 아프니, 하는 목소리도 죄 빨려들어가더란 이야기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 「서러우니, 아프니,」 중에서 언어는 편리하지만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호이다. ‘서러우니’, ‘아프니’는 ‘이파리’와 ‘꽃향기’처럼 가깝고 서로 감각적으로 구분되는 말이지만 이 말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헝들”로 “죄 빨려들어가” 버린다. 의미 기능에 충실한 언어는 쉽게 관성의 늪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거느리는 느낌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는 소거된다. 통상적인 문법은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는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를 외면한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바깥”에 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자는 기존의 문법이나 재현에 의존한 완성이 의미가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완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김근의 시는 부사어를 좋아한다. 부사는 문장의 완성과 관련 없지만 상태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확신할 수 없고, 희끗, 그저 희끗, 희끗거리는”(「희끗」),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어슴푸레」) 모르는 상황에 어울린다. 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된 말은 유희적이다. 언어는 의미 대신 리듬으로 흘러넘친다. 김근의 시는 “‘너’가 있었다”는 문장을 다시 쓴다. “너는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있었다고/추측된다 너를 둘러싼 적막이 얼마나/시끄러웠는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다만/있었고 있었다고 추측될 뿐 지금 없다 없었다고는//차마//추측되지 않는다”(「혼자 있는 사람은」)라고. 무엇을 확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너’는 ‘사이’에 있고 추측에 불과하다. ‘사이’는 사실과 추측, 현재와 과거, 적막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김근의 시적 화자는 말할수록 이방인이 되어간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고 벗겨내도 벗거내도 다는 벗겨지지 않는 그저 얼룩인” “난 당신이 방금 봤던 내가 확실한 거야?”(「사이사이」). 언어가 실재와 상관 없는 추상적 기호라면 이 세계도, ‘나’, ‘너’, ‘당신’도 이름만 있을 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사이사이」는 매트릭스처럼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 ‘사이’의 존재론을 펼친다. “누가 우리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만 기록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은 주체의 확고함을 의심한다. 화자는 우리를 “시 안에서 꼼짝없이 가둬놓고 거기 바깥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넌, 넌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이’는 안과 밖, 말하는 자와 글쓰는 자가 지워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는 그저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게 아니오?”(「정류장」).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개념이다. “영원히 지연”되는 기다림 속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윤슬」)다. 문법적 주어만이 아니라 단일하고 견고한 자아 정체성으로서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김근의 시에는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켜켜이 깃든 누군가”이고 그래서 ‘나’라는 관념 역시 “그만 산산이/깨어져버리”(「거기, 없는」)고 만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오류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지닌 관념과 인식, 생각들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임시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곡우’라는 낱말이 “본뜻과 헤어져버려 본뜻이 무엇인지 떠올려지지도 않게끔. 떠올려봤댔자 이미 모르게만 되어버”(「곡우」)리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뚜렷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특정할 수 없는, ‘에게서 에게로’ 가는 과정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언어와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근의 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모른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세 사람이」). 그의 시는 주체의 의도와 의지를 놓아버린 채 낱말들의 중얼거림에 시를 내맡긴다. 이를 두고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을 불신하는 해체주의 실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수동성이 “반짝임과 반짝임 사이 어둠 속으로”(「윤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 틈새가 시의 자리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라고 말했다.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익숙한 관념을 벗어나 의미의 불안정한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는 시도이다. 시는 애초의 의미를 허물고 “잘 잘못 써진다. 비로소 시는 잘 실패한다”. 김근의 시가 증명하듯 의미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지만 “다시 더 잘 실패”하고 “더 더 더 실패”(「세 사람이」)하는 형식으로서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에게서 에게로’, 낯설고 모르는 곳으로. 잘 실패하는 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최전선이다. 다행히 김근의 시는 잘 실패하고 있다. 시, 자기 구원의 여정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이루어진다”(「진흙연못」). 이 구절은 김태형의 시의 중심 문장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의 음악에 자기 심장 뛰는 소리를 포개어 놓는다. 살아 있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화자들은 기꺼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서정시의 문법은 세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다. 김태형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성찰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흑백고원」에서 늙은 나무들이 화석이 되어 비와 햇빛을 견디는 모습을 “자기 자신을 견디는 동안”으로 이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계기이다.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심장을 내가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과 후회가 “부는 바람”에 지나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는 바람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온통 황막한 벌판”에 서 있는 늙은 나무들에게서 시작된 삶의 지혜이다. 자연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을 일깨워우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넘쳐흐르고도 남은 말이 있었으니/물고기 한 마리가 느닷없이/네 푸른 입속으로 뛰어들었다”(「잉어」)도 그런 경험에 해당된다. “자꾸만 차오르고 넘쳐흘러 튀어”오르는 마음 속의 말은 잉어와 같다. “어느 때인가/나를 치고 올라”오는 말과 잉어의 속성은 은유를 통해 연결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같다는 인식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작용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변 동물의 생태는 그에게 삶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바닥처럼 자기를 움쳐쥐고 있다”(「도마뱀」)거나 “쫓기다 살아남은 고양이 한 마리/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사체를 냄새 맡는 고양이”(「허리가 긴 흰색 고양이」), “제 울음소리를 부러진 발톱으로 할퀴어 놓기만 하다 가는 고양이”(「야윈 고양이의 달」)는 관찰자의 예상을 비켜가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속으로 울음을 품은 것이 고양이만은 아닐 것이다. 김태형의 시에서 ‘나’와 동물의 거리는 가깝다. 예측불가능한 삶의 속성과 훼손되는 생명의 실상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동물을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행자이다. 그는 “잔물결이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내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다 들려주고 가는”(「여행자」) 풍경 속에 있다. 김태형의 시적 화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흑백고원」)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을 고백하는 대신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 만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여정, 이번 시집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에서 만난 ‘죽은 개’는 인간의 희로애락도 한 시절이며 모든 것들이 소멸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가만히 알려주고 있다. “나 역시 나를 지나가고 있”(「죽은 개가 내 이마에 침을 흘리며 지나간다」)다. “나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달의 뒤쪽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다」)는 인식 역시 그러한 자기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김태형 시의 화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거나 듣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성찰의 힘을 잃지 않는다. 느릿느릿 커다란 트럭이 앞서 가며 모래와 부서진 자갈을 뿌린다 경사진 길을 오르지 못할까 싶어 바짝 따라가다 바람이 얼어붙은 곳까지 다다랐다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은 절벽을 다 내던진다 누가 이곳까지 올라와 긴 숨결을 한없이 내려만 놓고 있었는지 내 입술에 묻은 하늘마저 파르르 떨린다 한차례 묵은 눈가루가 흩날리자 한 줌의 그림자가 햇볕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벽은 절벽 앞에 서 있다 그러자 묵은 눈이 또 내린다 눈은 내리고 나는 허공에다 입을 벌리고 저녁으로 서서 하얀 입김이 되어 있다 ― 「어느 절벽」 전문 절벽은 절정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이 시의 절벽은 말하는 이의 마음 풍경처럼 읽힌다. 바람이 얼어붙고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리는 곳. 절벽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결빙과 해빙이 동시에 일어난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나무는 결박된 것을 스스로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을 만든다. 절벽 위에서는 절벽도 절벽을 다 내던진다고 한다. 절벽은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는 고백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절벽이 어디쯤 있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절벽 앞이다. 다 놓아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다 놓아줄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은 정직하고 소중하다. 고통 없이는 그런 깨달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쌓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묵은 눈이 또 내린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이 되는 ‘나’는 가볍다. 절벽 앞은 두려움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고, 숨 쉬는 것처럼 그렇게 삶은 계속될 테니까. 시집의 표제작인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에서 마지막 양 한 마리는 자기 자신이다. 고작 열 마리 뿐인데도 사라진 양과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어렵사리 양을 세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는 약간의 우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라는 대목은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니, 하지만 양을 세는 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반대로 이해하자면 마지막 양 한 마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절벽까지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양을 찾는 데만 급급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열 마리의 양을 세는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내면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은 자기 구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나의 일과”(「저물녘에 돌 하나 던지다」)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라는 통찰을 얻는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 선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경험이라 울림이 있다. 김태형의 시가 좋은 서정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무엇이라도 곁에서 곁에서” 듣기 위해 “내 작은 귀는 햇빛처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있었”(「귀」)고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벽의 거대한 허공에 맞먹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있다. “마냥 길을 따라 흘러가다 길이 되어 버릴” “바람만을 따를 뿐인”(「진흙 연못」) 이 커다란 자유의 여정이 계속되길 바란다.
채집과 이식, 박탈과 이산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려 했던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황제의 자리에는 그의 아들 순종이 즉위한다. 순종이 거처를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移御],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은 창경궁 내에 동·식물원과 같은 근대 시설을 설치하고 이를 민중에게 개방한다. 조선왕조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공원으로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것은 조선 왕권에 대한 모독이자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박물관이나 동·식물원은 당대 조선인에게 매혹적인 근대 시설이었으며, 빈민층이나 지방민들도 헐값에 근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창경궁이 처한 곤경은 식민 지배와 근대화가 착종되어 전개된 한국의 왜곡된 근대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창경궁에 이질적으로 서 있는 대온실을 소재로 하지만,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제국주의-근대화의 폭력 속에서 제자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대온실의 설계자 후쿠다 노보루를 매혹한 '신세계'는 “이국의 살아 있는 문물이 모인 경이로운 광장이자 파종과 배양과 식생으로 이룰 궁극의 낙원”(p. 58)인 식물원이다. 제국이 개척한 교통로로는 군대와 상품만 이동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개체로서 캘리포니아산 호두, 인도네시아 자바의 버섯, 인도산 기린초, 러시아의 포플러 씨앗,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커피 묘목 등도 수송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채집된 동식물은 제국의 지방으로 전락한 조선의 창경원에도 도착했다. 대온실에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난과 분재, 국화와 달리아 같은 다양한 식물이 쉴 틈 없이 자라고 바나나와 파파야, 멜론까지”(p. 174) 있었으며, 그 옆의 동물원에는 “대만, 일본, 히말라야, 필리핀,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수십마리의 원숭이”(p. 131)를 비롯하여 요크셔 돼지, 늑대, 왕관앵무, 펠리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수송되어 온 “그 모든 것이 이식에 안착한 것은 아니었고 더러는 시들시들하거나 썩었다”(p. 58). 살아 있는 존재들을 생존의 터전에서 분리하여 채집하고, 환경의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일은 교육이나 문화생활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졌지만, 기실 그 이면에는 세계의 모든 지역과 그곳의 생명체들을 근대 문명으로 정복하려는, 포획되지 않은 바깥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존재한다. 또한, 아프리카 선주민을 '전시'한 19세기 후반 서구 제국의 만국박람회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박물관은 '보는 이'의 인식 체계를 준거로 '보이는 대상'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 시선의 정치학을 작동시킨다. 창경궁에 설치된 조선 최초의 동·식물원은 일본 제국의 근대성을 과시하고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동식물을 인간 문명에 포획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동·식물원이 제국주의와 인간중심주의 폭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구 각지에서 수송되어 온 생명들에게는 유일한 생존지라는 점이다. 따라서 동·식물원의 폐쇄는 그곳 생명체들에게 해방이라기보다 절멸을 의미하게 된다. 소설에서 (관람객이 아닌) 박영출, 박목주와 같은 노동자들이 박물관이 작동시키는 시선의 정치에서 비껴나 동식물을 생명으로 대하는 것이나,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물을 (풀어주는 게 아닌) 살처분하는 데서 동·식물원의 역학이 잘 나타난다. 이때 제국이 채집하고 제국이 살리는 장소로서 대온실의 의미는 낙원하숙의 본래 용도였던 '관사(官舍)'와 상통한다. 하숙집이 창경궁 관리의 관사로 쓰일 때, 이곳에는 식물원 주임 박목주와 그의 어린 자녀들이 살았다. 아마 박목주의 일본인 부인이 결혼하며 데려왔을 마리코[眞理子]는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정체화하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의부와 함께 조선에서 살고 있다. 조선에서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일본인 소녀 마리코의 삶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그녀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제국이 제공한 조선총독부 소유의 관사이다. 그런 점에서 제국의 몰락 이후 마리코가 창경원 동식물과 같은 처지에 놓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임박해져 창경원 동물들이 몰살당할 때 마리코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고 '박진리(朴眞理)'가 되었으며, 친일 부역자를 처단하려 했던 이들이 6·25전쟁과 함께 들이닥쳤을 때 마리코는 더는 관사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마리코와 그의 어린 동생이 대온실 지하에 숨어들어 그곳에 남아 있던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장면은 제국주의의 욕망에 의해 본래 장소를 박탈당한 존재들의 공동 운명을 보여준다. 보존이 아닌 수리 대온실 지하에 숨어 있던 마리코는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집과 가족을 모두 잃는다. 이후 그녀는 죽은 여성의 호적을 받아 안문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집을 되찾아 낙원하숙을 운영한다. 그리고 낙원하숙은 본래 그 집이 마리코에게 그러하였듯, 자기 장소를 떠나온 이들에게 집이 되어준다. 법대생 삼우, 연극을 하는 유화,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 온 딩 아주머니, 좀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리사와 '나'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마리코 자신이 장소와 이름을 박탈당한 채 살아야 했던 사람이다. 이는 다시금 지구 각지에서 채집되어 온 식물들의 집이었던 대온실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오래된 하숙집에는 “한옥 대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리 손잡이”(p. 52)가 달려 있었는데, 아마도 마리코는 대온실의 손잡이와 비슷하게 생긴 유리 손잡이를 “달아놓고 누군가 문을 열고 돌아와주기를”(p. 308) 평생 기다렸던 듯하다. 마리코는 대온실 지하에서 이별한 남동생이 죽은 줄 알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단념할 수 없는 그리움은 기다림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리코가 기다리는 존재를 굳이 가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마리코가 혼자서 도망친 그날 창경궁에는 남매와 함께 죽음의 문턱에 있던 수많은 동식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낙원하숙은 대온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제국은 몰락하면서 그 영역 안에 살고 있던 존재들까지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마리코의 낙원하숙은 그렇지 않다. 리사처럼 하숙집을 팔아서 이득을 취하려 하든, '나'나 삼우처럼 하숙집 식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든, 그곳은 텅 빈 채 홀로 낡아가면서도 한때 그곳에 살았던 이들을 '살게'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마리코가 진작에 낙원하숙을 문화재로 등록해두었더라면, 리사처럼 잇속만 챙기는 이로부터 혹은 속수무책으로 낡아가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가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소설은 “역사적 보존이 필요한 한옥들 상당수가 지정문화재는 아니더라도 등록문화재 정도의 푯말은 달고 있”는데, 낙원하숙은 “어째서 문화재청 산하에서 관리되지 않는지”(p. 240) 슬며시 독자에게 묻기도 한다. 안문자라는 이름으로나마 집의 법적 소유주였던 마리코가 문화재로 등록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 정확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는 아마도 국가를 통한 '보존 conservation'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운명을 국가의 흥망성쇠에 내맡겨버리는 일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하숙집을 '온실 conservatory'로 만드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마리코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온실은 장소를 박탈당한 존재들을 자기 영역 안에 보호할 뿐, 그 존재들이 온실 바깥에서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낙원하숙이 '보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덕에 리사는 그 집을 탐냈지만, '나'는 이해(利害)와 상관없이 마리코의 뜻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한다. 마리코가 남긴 글을 찾아 읽고, 그 집에 살았던 마리코 가족 그리고 그들과 같은 운명에 놓여 있었던 동식물들의 비극을 재구성한다. 그러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리코의 남동생을 만나기도 하고, 리사에게 넘어간 하숙집의 소유권을 되찾는 일에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에 '나'가 개입하게 된 이유를 찾자면, 마리코의 진심을 두 번이나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나'가 리사 일당의 음모에 걸려들어 학교를 그만둘 때, 마리코는 끝까지 '나'를 믿어주고 '나'에게 용기를 주려 했었다. 그러나 '나'는 마리코를 믿고 용기를 내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 '나'는 마리코 “할머니의 진심을 못 본 척”(p. 278)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모른 척을 한다면, '나'는 두 번이나 마리코의 진심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사실 '나'는 마리코의 진심만을 못 본 척한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을 통째로 억압하고 회피해왔다. 그러나 '나'는 마리코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차마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 시절 다이어리를 꺼내”(p. 321) 본다. '나'의 행동은 마리코의 유언이 제대로 집행되도록, 다시 말해 낙원하숙이 보육원에 넘어가 또 다른 취약한 이들을 '살게 하는' 집이 되도록 하는 데 미약하나마 기여한다. 동시에 지금껏 회피하고 있었던 상처에 대한 직시가 된다. 뒤늦게 도착한 마리코의 진심은 '나'로 하여금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고[受理] 삶을 고쳐나갈[修理] 수 있게 한다. 마리코의 낙원하숙은 그곳에 살았던 존재들에게 그곳을 떠나서도 '살게 하는' 집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숙집은 취약한 생명들을 오직 자기 안에만 '보존'하는 (그리하여 '소유'하는) '대온실-관사'와 구별된다. 더하여 소설에는 옆 사람을 '살게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의젓한 초등학생인 산아는 학교폭력의 후유증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전학생 스미를 각별하게 챙기고, 산아의 도움으로 스미는 다시 입을 열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 이름이라 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한 '스미'라는 말이 어린 마리코가 쓴 동화 속의 곰 '쿠마 센세이', 그러니까 창경원에서 탈출시킨 뒤 엄마가 있는 일본까지 함께 가려 했던 '쿠마'와 상통하는 뜻이 있다면 이것은 우연일까. 곰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 '쿠마(熊, くま)'는 구석지고 으슥한 곳을 의미하는 '쿠마(隈, くま)'와 동음이의어인데, 이는 구석이라는 뜻의 '스미(隅, すみ)'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마리코-쿠마'와 '산아-스미'는 소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짝패가 아닐까. 스미의 말을 되찾아준 산아는 쿠마를 구하지 못한 마리코와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리코가 유리 손잡이를 붙여놓고 기다린 이들 중에는 쿠마 센세이도 있었을 터, 산아와 스미의 성장을 지켜보는 '나'가 쿠마를 구하지 못한 마리코의 애틋한 마음에 기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었다면, 스미가 다시 말하게 된 데에는 오랜 시간을 건너온 마리코의 기다림 또한 작용한 게 아닐까. '나'가 자신의 삶을 수리하고 다른 누군가의 삶이 수리되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의 돌봄과 배려가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관성을 수리하는 일일 것이다. 남겨진 것들 물론 소설에는 수리되지 못한 채 남겨진 것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창경원 관리의 요직에 있던 이창충(가마야마 마사시)은 박목주를 죽이고 마리코를 겁탈하려 했던 악인이자 식민지 시기 같은 조선인을 멸시하고 해방 후 왕실의 재산을 빼돌린 반민족 행위자이지만, 소설에서 그는 단죄되지 않는다. 이창충은 마리코의 저항으로 얼굴에 흉터를 지닌 채 살았으나, 횡령한 재물을 바탕으로 사회적 명망까지 얻어 말년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마리코의 동생 유진은 이창충을 은인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나'는 살날이 많지 않은 유진에게 차마 진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는 이창충처럼 단죄되지 않은 악인이 무수히 존재한다. '수리되지 못한 것' 또한 역사의 일부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글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삶/생'에만 집중된 시선은 권력 구조 속에서도 수호되어야 할 인간의 윤리를 생존의 문제로 치환하기 쉬운 맹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가치판단이 비교적 용이한 완전한 악인 이창충 외에, 후쿠다 노보루, 박목주 등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유보되어 있다. 국가를 위해 수입된 외래종을 개량하여 '신세계'를 만들겠다는 후쿠다의 집념은 세계사적·지구사적 지평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후발 제국의 지식인이 서구 제국을 동경하며 식민지의 궁궐에 온실을 설계한 행위는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는가. 기노시타 코주로서 식물원 주임이 된 조선인 박목주를 역사의 피해자로만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유보된 채 '역사소설'이 완성될 수 있는가. 폭력적인 상황은 인간을 윤리적 시험대로 내몬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신을 향한 것이지만, 시험에 든 인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역사소설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관(史觀)이 요청된다. 삶/생에 대한 옹호만으로는 삶/생을 폭력적 조건 속에 밀어 넣는 권력 구조와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러한 권력 구조에 복무하는 행위에 대한 판단을 간과하기 쉽다. 그리하여 사관은 갱신되어야 하지만 부재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조건 속 인간 행위에 대한 사법적·윤리적 판단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지금, 소설은 미완의 '수리'를 독자에게 남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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