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제75호)
면역정치를 넘어서는 돌봄의 상상력
1.
지난 몇 년 간 한국사회는 재난에 대해 무능력한 스스로의 민낯을 마주해야했다. 재난에 대한 면역정치는 서둘러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차별의 장소성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강화했다. 생명정치의 작동방식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사회는 재난의 피해자들을 사회 안정의 불안 요소로 낙인찍고 그들을 울타리 바깥으로 몰아내는 방식으로 호모사케르들을 끊임없이 생산했다. 이 얼굴이 무능력하고 무책임해 보이는 이유는 사회적 책임은 최소화하는 반면 개인의 책임은 최대화하는 비례성의 파괴 때문이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이 시스템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불안과 공포라는 비극양식의 감정에 놓이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문학은 타자의 불행에 대한 개인의 윤리성을 심문하면서, 또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자들과의 상호적 돌봄 수행을 문학의 의제로 소환하면서 저 비극적 양식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 중에 있는 듯하다. 특히 가족이라는 협소한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 탈가족주의적 돌봄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근래의 서사들1)은 재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결핍을 비판적으로 가리키고 또 그것을 역행하면서 돌봄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출구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유령』들에는 이 돌봄이라는 문제에 응대한 이진 작가의 이야기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2.
이진의 소설집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들이 돌봄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은 먼저 이들이 대부분 외로운 삶의 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 가족주의적 관계와 결별하면서 ‘싱글 라이프’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직장 여성(「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근근이 살아가는 집이 대부분인 동네”(p.42)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데에도 수입과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독신의 젊은 여성(「도도와 쭈아」), 진짜 자신의 아기는 한 번도 키워보지 못한 채 “성능 저하의 늪”(p.121)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놓인 대리모 여성(「초록 알람」), 그리고 결혼 10년이 넘도록 손주를 안겨줄 생각은 없이 강아지 ‘보니’에만 열중인 아들 내외가 못마땅한 독거노인 ‘심 여사’(「은행나무 협주곡」)까지 이들 인물들이 처한 환경은 정서적 교감과 지속적 관계망이 작동하지 않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메마른 장소성을 환기시킨다.
소설의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외로움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작가가 새로운 관계 맺음이 가능한 지평선으로 인물들을 이끌어가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또 하나는 이들에게 이러한 삶이 이미 익숙한 조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존주의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서적 유대는 경제적 보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열등감의 지표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것은 불필요한 피로를 유발할 뿐이다.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의 화자 ‘나’가 대표적 사례다. 결혼의 실패와 승진 누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고된 문턱을 넘어 온 화자에게 기존의 관계성은 피로와 히스테리의 원인에 가깝다.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가 보여주는 “과거 회귀에의 의지와 건강염려증”(p.11) 그리고 여기에 매일 퇴근 시간마다 ‘나’의 귀가를 종용하는 문자까지 더하면 아버지의 존재는 화자에게 강박적 피로의 원인이자 가족주의적인 협소한 공동체에 대한 관습적 사고를 표상할 뿐이다. ‘독한 각오’를 다지고 생존경쟁의 전투에 참여한 화자에게 가족이라는 전통적 관습은 성가시고 귀찮은 관계이다. 이러한 피로감은 과거에는 입사동기였고 친구처럼 가까웠으나 이후 ‘나’보다 먼저 승진하게 되면서 서먹해져버린 ‘피엘(part leader)’인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동일한 기득권자”(p.15)가 되고 싶었으나 경쟁에서 탈락한 ‘나’의 열등과 긴장은 현대사회에서 성과주체들이 느끼는 피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마주하고 간섭하는 끈끈한 정서적 관계망 대신 인물들은 비용-편익 분석의 경제적 언어에 더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초록 알람」에서 대리 임신의 관계에 놓인 주인공과 ‘의뢰인’ 사이에서 오가는 표현들이 대표적이겠다. 한 생명의 잉태는 일종의 ‘계약’이어서 이들의 대화는 “신선 이식이냐 동결 이식이냐에 따른 비용 차이”(p.118)로 시작되며, “내 자궁의 능력”(p.119)이나 ‘난자 sample1, sample2 sample3’ 등 실험 데이터 모집군의 “비율산정지표”(p.127)로 계약의 성공 여부가 평가되며, 주인공의 변심으로 인한 계약 파기 후 이들 사이에 오간 단어들도 ‘위약금’이나 ‘위자료’ 등과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정서적 돌봄의 관계는 경제적 교환관계 시스템 내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3.
특히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에서 ‘나’의 상황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생존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속도위반”으로 인한 임신과 결혼으로 인해 지난 승진 심사 대상에서 누락된 바 있었다. “몇 개월 내로 출산휴가 받을 사람을 승진시킬 회사” 따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이전 세대 여성들이었던 “우리의 선배들 대부분이 거쳐 간 길”이기도 했다. 이 길에는 “시집가고 애 낳더니 프로 정신이 사라졌”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경쟁의 무대에서 “별다른 저항도 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황황히”(이상 p.19) 사라져야 했던 여성 선배 세대들의 소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들이 한국사회의 여성노동자들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힘겨운 문턱이라는 점을 직시하게 한다.
‘가정(새로운 사회구성원의 생산과 남성들의 편안한 안식처의 역할)과 일(사회구성원으로서의 독립적인 경쟁 능력 증명)의 양립’은 예나 지금이나 가혹하고 힘겹다. 여기에 더해 소설의 화자는 3년의 결혼 기간 동안 거듭된 유산을 겪어야 했고, 임신과 출산이 삶의 최대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듯 휴직을 강요하는 시부모의 간섭에 노출되기도 했다. 따라서 화자 ‘나’가 선배 세대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으리란 독한 각오”(p.19)로 이혼을 결심하게 된 근저에는 오랜 기간 여성들에게 강요된 관습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감이 웅크리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제목에 쓰인 ‘싱글 라이프’는 코로나 시대만이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생존을 위해 여성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의 경험이 ‘인간의 취약성’(주디스 버틀러)과 상호의존적 돌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는 최근의 성찰에는 역설적으로 코로나 시대의 면역정치가 인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상호의존적이어야 할 공동체를 갈라치기의 방식으로 파편화했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면역정치의 시절 오염원으로 라벨링되면서 공동체의 외부로 감금되었던 감염자들은 기실 기저질환자, 노인, 경제적 소외계층 등 이전부터 취약한 존재들이었다. 재난은 평등한 불행처럼 보이지만 면역정치는 애초부터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경계선들을 복습하고 강화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었다. 이는 이전 사회에서 경쟁적 구조에서 패배자로 내몰린 존재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취해왔던 배제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즉 면역정치는 생존주의와 능력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양식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사회의 경계선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불안과 피로를 소설은 관계의 엇갈림과 단절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러나 이진의 소설들은 이러한 관계의 엇갈림을 전시하고 폭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새로운 관계성의 핵심에 ‘돌봄’의 확장과 주체의 성찰이 놓여있다.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먼저 「초록 알람」의 주인공은 대리모로서의 경제적 신체로 환원되던 자신의 몸에서 “강한 태동”을 느끼면서 “강렬하게 터뜨리던 첫인사를 들으면서도 일별조차 못 해본 내 아기들”(p.134)을 마주할 용기를 낸다. 이진의 서사에서 “돌봄이란 돌(아)봄의 다른 말”(<해설>, p.261)이라는 해석이 이 장면에 적합하다. 「초록 알람」이 보여준 이 극적 전환의 양상은 작가의 다른 소설들(「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 「우주적 사건 지평선 너머」)을 어떤 사건의 ‘종착점’(사건의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서사양식으로 읽어내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두 작품은 작가의 역작임에 분명하지만 돌봄을 주제로 리뷰해보는 이 글의 흐름에서는 생략했다. 다행히 작품집의 해설이 이 작품들에 대한 충분한 길라잡이를 해주고 있다.)
「도도와 쭈아」는 돌봄의 범주가 확장되는 가능성을 시험한다. 주인공이 데려온 길고양이 ‘도도’가 사실 어느 회사가 개발한 ‘최신형 고양이 돌보미 로봇 쭈아’였다는 사실과 넉넉지 못한 경제상황에서도 길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온 주인공의 돌봄 행위가 로봇 돌봄 고양이의 딥러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만을 언급해보자. 돌봄 로봇이라는 서사 장치는 인간들 사이의 돌봄 정서가 황폐화되는 현실과 형식화되고 기계적인 인간관계를 비판적으로 역설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돌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더 다가서는 읽기가 아닐까 한다.
이는 「은행나무 협주곡」에서 ‘심 여사’가 베어질 위기에 처한 아파트 단지의 은행나무들을 살려내기 위해 은밀한 작전을 시행하는 일, 그러한 심 여사를 묵묵히 따르며 잠시나마 서로 의지가 되어주던 ‘103호 누렁이’와의 관계에서도 변주되기 때문이다. 돌봄의 수행성을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동물을 비롯한 비인간적 대상에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진의 소설은 인간의 근본적 취약성을 넘어설 가능성을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체(또는 라투르 식으로 말하자면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모든 행위자. 인간과 사물과 자연을 모두 포괄하는 행위자)들 간의 상호적 관계성으로 돌봄의 문제를 사유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5.
이런 관점에서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를 재독하면 이 작품은 관계의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맺음의 시작으로 읽힌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종착점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꾀하는 작가의 방법론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있다. 일례로 어머니의 죽음 후 가족이라는 관습적 관계에 강박적이었던 아버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서로의 삶을 속박하는 관습에 머물렀을 때 죽은 아내에 대한 아버지의 애도는 종결되지 않는다. 반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마주보는 정서적 돌봄의 관계를 형성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불완전한 애도에서 벗어나게 된다(“아버진 영정 사진을 추모 공원에 있는 유고람 앞에 세워놓자고 했다.” p.32). 그러니까 작품은 “내 모든 이별의 완충지대로 남아 있던 아버지”(p.32)까지 주인공을 떠나게 되는 상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협소한 공동체에서 탈가족주의적이고 탈주체적인 돌봄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아버지의 행위는 소설의 화자에게도 전이된다. 관계성의 변화는 ‘나’와 입사동기이자 직속상관인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앞선 세대 여성들이 걸었던 소외의 역사를 비웃으며 철저한 성과주체로서 커리어 우먼의 길을 걸었다. 화자처럼 승진 심사를 앞두고 청접장을 돌리는 바보 같은 짓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과거 ‘나’가 처한 상황(혼전 임신과 경력 단절에 대한 불안)에 놓이게 되면서 관계의 반전이 일어난다. 이는 ‘나’와 ‘그녀’가 비록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이들은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 속에서 언제나 같은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구조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짝패(double)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이들은 경쟁관계였으나, 타자를 외부화하는 면역정치의 관점에서 이 두 인물은 ‘또다른 우리(us)’일 뿐이다.
소설의 화자는 아버지와 ‘그녀’라는 두 사람과 기존의 관계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이행하면서 가족주의와 능력주의라는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여성들 간의 연대(아쉽게도 소설은 이 지점으로의 이행을 명확하게 지시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호 돌봄 관계의 확장을 보여주는 다른 작품들의 방향성이 이를 가늠하게 한다.)를 통해 재난서사와 페미니즘서사가 만나는 통로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미안해, 그때 널 적극적으로 방어해주지 못해서”(p.19)라고 말할 때, 두 사람은 ‘싱글 라이프’가 사회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방어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구라도 언제든 울타리 바깥의 존재(감염자 또는 노동력을 상실한 임신여성)가 될 수도 있다는 것과, 그 불안을 관습적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는 비겁함으로 감추어왔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누구도 그녀들을 ‘방어’해 주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방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과, 그러므로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마주하고 돌아보고 돌보는 행위야말로 이러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비록 경제 가치로 환원되지 않더라도 그 돌봄의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 인생에서 젤 후회되는 건 동생이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 장남과의 결혼이었다고. 그리고 당신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은 낙태냐 결혼이냐의 갈림길에서 낙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어머니의 비논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늘 나의 존재였다. 한 자녀 출산을 국가시책으로 삼았던 그 시절엔, 낙태가 권장되고 불임시술이 장려되던 그 시절엔, 여성들의 임신 중지는 불법도 뭣도 아니었다고, 그럼에도 날 없애는 데 필요한 딱 3분을 차마 결심하지 못해 돌아선 그 순간이 당신 인생의 최고 순간이었다고.(「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 p.25)
그러니까 경제적 교환가치를 넘어서는 어머니의 ‘비논리’적 선택이 아니었다면, “요로케나 이쁘고 귀한 내 새낄 지워불 뻔”(p.25)했을 것이다. 이진의 소설집을 관통하는 돌봄의 시작이 어쩌면 이 어머니의 ‘비논리’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한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는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소설집의 다른 작품들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가늠좌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위험 요소를 서둘러 사회의 외부로 방출하고 타자를 울타리 바깥으로 배치하는 면역정치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성을 목도했고 그래서 상호적 돌봄의 필요성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다. 근래 한국문학의 비평장에서 돌봄의 문제를 화두로 삼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시대의 후위로서 또는 징후로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면, 이진의 소설은 현재 한국문학에서 발표되고 있는 여성작가들의 서사들과 함께 발맞추어 연대의 어깨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 1) 당장 떠오르는 작품들만 적어보더라도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문학동네,2023), 최은미의 『마주』(창비,2023),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민음사,2022),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 2023)에 수록된 돌봄 3부작들,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문학과지성사,2023) 그리고 최진영의 작품들까지 다양하다. 특히 <창작과비평>의 2023년 호들에서는 돌봄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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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표지를 본다. 정면을 보는 이의 옆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다(무엇이 들어있을까?). 그가 걷는 중인지, 잠시 멈춰 있는지, 혹은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가방과 모자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검은 눈이 어디/누구/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섯 편의 희곡을 연달아 읽고 나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움직임의 여부가 분명치 않은 발 역시 흑백의 세계에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건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은용 작가의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다섯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총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 희곡이다) 「세상의 첫 생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엄마, 엄마」 「가을 손님」.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문성”과 “아성”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사람1(A)”처럼 숫자 혹은 알파벳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로 적힐 때도 있으며, (「우리는 첫 생일」의 ‘사람 2’처럼) “아마도 여성”으로 소개될 때도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수록된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Metamorlphosis)’의 주인공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스물여덟 살의 에프티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여섯 살 시스젠더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사람.(65쪽) 이은용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이처럼 다양하며 세부적이다. 각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그려지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에프티엠 트랜스젠더이자 아마도 여성이며 하나의 이름 또는 기호를 가진 인물인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이고 여행하는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이자 어른이 사라진 세계에서 노동의 주체가 된 십대들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사회에 나뉜 구획들을 끊임없이 월경(越境)한다. 나아가 경계를 나눈 벽에 난 문을 연신 두드린다. 이 소리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다. 넘는 걸음이나 문을 두드리는 손짓 모두 삶에서 잦게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작’이다. 여기에 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계를 넘거나 문을 지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섯 편의 희곡에서 이러한 ‘동작과 반응’은 장면과 움직임 그리고 수차례의 질문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장막 ‘월경’에서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진희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그의 성별에 혼란을 겪는 검색대 직원들을 마주한다. 진희는 독백한다. “그들은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월경하기 위해서는 겨우 이것이 끝이다. 그리고 월경은 농담이 맞으니 웃어도 된다. 웃어라.” 그는 뒤이어 월경의 과정과 그 의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은 때로 벽 같아서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늘 서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국가를 떠나는, 월경하는, 나는 누구인가?”(31쪽) 독백의 마지막 질문은 진희와 만나는 검색대 직원들이 반복하는 질의이자, 이은용의 인물들이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현실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반복되는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주어를 비튼 이 물음을,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거듭 던진다. 이는 그들 앞에 벽으로 우뚝 선 세계를 더듬는 몸짓이기도 하다. 진희의 벗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2는 “진희야, 자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이니?”(37쪽) 하고 질문함으로써 그가 겪지 못한 신체, 벽으로서의 세상이 “들어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공간을 알아가고자 한다. 「세상의 첫 생일」 속 사람1의 “왜 스무 살이 넘는 어른들만 없앤 건데?”(141쪽)라는 물음은 그들의 세상이 겪은 중대한 ‘변신’(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의 증발)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작가인 준영이 꿈속에서 스무 살의 엄마 희수와 서로 “몇 살이야?”(161쪽) 하고 묻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교차된 ‘이해의 시간대’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세계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들’을제안한다. 한 가지 형태와 성질로 고정된 세계에 던져진 질문은 흑백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계의 표피를 관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심층까지 파고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금과 균열은 생겨난다. 얼핏 ‘균열’은 ‘경계’와 비슷한 선(lin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면의 선으로 이뤄진 경계와 달리, 균열은 다양한 방향의 선과 층층의 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선과 면은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틈의 형태와 성질은 다양하다. 계속 두드린 끝에 열린 문틈, 수많은 발자국이 만든 조그만 골,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구분지(너무도 명확히 나뉘어 있기에 오히려 한 덩어리로 보이는 땅)를 어그러뜨린 궤적 역시 틈으로 볼 수 있다. 실제의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틈은 많은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환경의 제한으로 미처 움트지 못했던 몸이 틈바구니로 자라나거나, 새로운 장소로 통하는 사잇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은용의 언어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이자 무대에서의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면서, 세계의 변신을 불러오는 움직임이 된다. ○ 덧붙이는 말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고(故) 이은용 극작가가 남긴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희곡집이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2020년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초연으로 그해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과 제57회 동아연극상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2019년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당선 소감에서 이은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첫 작품은 절대 정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체성은 내 삶의 한 부분일 뿐, 나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정체성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체성을 떼어놓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합니다.”*
읽는다는 것, 있다는 것 ―2024년 겨울의 시 “깨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잃어야 하죠.” (김경인, 「도토리 줍기」,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황선희 가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고 모처럼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풍성해지는가 싶었다. 그러다 마주친 12월 3일 계엄의 밤을 생각한다. 어제를 동여맨 막막한 공포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되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2024년 겨울은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발달하는 계절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돕고, 앞서간 이가 우리를 구한 시절.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또 얼마나 속속들이 연루되어 있었는지 알고, 놀라고, 배우게 되었던 시절. 먼 훗날의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시민들은 저마다 가장 소중한 빛을 들고 광장에 모여 따로 또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가기 위해서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여의도와 광화문을 수놓았던 빛은 남태령, 한강진을 밝히며 함께한다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했다. 동짓날 밤 험한 고개는 단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광장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도시에서/집이 없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강성은, 「네 집으로 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물으면서, 누구에게든 집이 있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았다. 빛의 물결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하는 동안 앞사람의 웅크린 어깨를 바라본다. 그 어깨는 얼마나 작은가. 그리고 얼마나 넓고 크고 단단한가. 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겨울은 소중하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별을 관측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코끝 시린 계절의 필요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겨울은 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는 겨울을 끌어안는 동안 더욱 밝게 빛난다.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을 밝게 빛냈던 이 계절의 시를 다시 읽는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우리는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광화문은 낯선 나라 같다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 그사이 선두에서 걸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서둘러도 따라잡히지 않는 친구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붉은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뻔한 장면이 펼쳐진다 성실하게 친구를 찾았다 똑같이 생긴 문을 여러번 열고 닫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긴장은 공포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고 있고 무언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너 도대체 어디냐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친구가 계단을 내려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데 그러면 난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어 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어색하게 포함된 채로 걸으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친다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 걸음을 멈춰도 아무것도 정지되지 않는다 나는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데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고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된다 ―김상희, 「잡을 수 없는 것」(『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김상희는 잡히지 않는 것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혼돈과 균열을 시화(詩化)한다. 시적 주체는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는다. 친구는 ‘나’와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 걷는 광화문’의 풍경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친구는 저 멀리 선두에서 걸어간다. 시적 주체가 아무리 서둘러보아도 친구는 잡히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친구를 따라 헤매며 ‘성실하게’ 친구를 찾던 ‘나’에게, 비슷비슷하게 생긴 붉은 벽돌집이 반복되는 뻔한 장면은 긴장을 넘어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은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가까스로 찾아낸 친구는 조바심 가득했던 ‘나’와 달리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서는 무언가 가득 든,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광화문에서 골목으로, 붉은 벽돌집에서 다른 벽돌집으로 이동하며 친구를 찾았던 ‘나’의 성실함은 금세 무용해진다. 다시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고 만다. 친구는 항상 조금씩 앞서 있고 ‘나’는 매번 조금씩 뒤처져 있는 상태이다. 뒤따르는 자의 미묘한 긴장과 함께 광화문에서 을지로로 향하는 행진은 시작된다.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포함된 ‘나’는 알 수 없는 구호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걸음을 멈춰 보기도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 무엇도 정지되지 않는다.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 나, 그렇지만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는 나,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나,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되는 나.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광장에 서 있지만, 혼란스럽고 낯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 된다. 설령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창한 사명감 없이도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조금 느리게 혹은 당신과 함께라면/아침에서 밤까지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지”(심재휘, 「연필과 지우개와 노래와 당신」,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라는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혼돈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이가 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부터 4시간 남짓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진 도심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습니다 나는 퉁퉁 부은 젖은 눈으로 거리와 병원을 찾아다닌 끝에 마주한 슬픔과 허무와 절망을 추스르지 못하는데 무표정한 얼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사가 아니라 손쓸 수 없는 사고라고 희생자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사망자라고 그날 그 시간에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미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아니 대비했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권한이 없었으므로 책임 또한 없다고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아니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넵니다 그만 잊으라고 이제 가슴에 묻으라고 그정도 했으면 됐다고 사고로 간 그들을 위해 사회의 안녕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지금은 혼돈을 거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온기 없는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점점 깊어지고 더 짙어지는 어둠 속에 떨리고 갈라지는 울음 섞인 목소리 치미는 슬픔과 고통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 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 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 얼굴 없는 사람들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추스르려 해도 추스러지지 않는 여전히 떠도는 그날, 그 밤의 말들 너무 소름이 끼쳐요 사고 날 것 같아요 위험해요 아수라장이에요 대형사고 일보직전이에요 사람들이 압사당하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누군가 와주세요 제발 여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이태원 뒷길이에요 그날 그 밤의 말들을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몸을 던집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온몸을 던집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던지고 또 던집니다 뙤약볕 아래 폭우 속에 혹한의 빙판길 위에 이어지는 오.체.투.지. 점점 멀어져가는 기억과 무관심을 향해 마지막 남은 몸까지 다 던지고 나면 무엇을 더 던질 수 있을까요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습니다 ―곽효환,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곽효환의 시는 ‘이태원역 1번 출구’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시적 주체 ‘나’를 세워 놓는다.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도심. 묻고 사유하고 걷기를 멈추지 않겠다던 말(「시인의 말」,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문학과지성사, 2023)은 참사가 덮친 그곳을 향한다.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다는 시적 주체의 전언은 고통보다 늦게 당도할 수밖에 없는 애도의 숙명을 보여 준다. 세월호 참사 때처럼 참사는 사고로 바뀌고, 희생자는 사망자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날,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말해진다. 섣부른 말들을 앞세운 뒤 아무 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나’는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함께 울어주지 않기를 택한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혹은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위로가 될 수 없는 위로를 건넨다. 그들이 건네는 회피와 강요의 언어는 이태원에서 있었던 일을 개인의 불운으로 돌리려는 시도다. 시인은 어둠, 울음, 슬픔, 고통 등의 감정어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애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과 ‘얼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돌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1) 참사의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는 현실 속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행위로 저항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몸’을 던지며 가장 깊은 참회와 애도를 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기억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 곁에서 시적 주체는 그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있음으로써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기억하는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 것인가?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았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했는데 아이는 자꾸 자라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하며 그래 오늘이 가면 네가 올 거야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 그 방에서 지치지 않고 노닥거리고 있으면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이 널찍한 등줄기에 새겨진 용 문신처럼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릴 거야 알록달록한 장난감이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 너는 올 거야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이마 위에 도사린, 캄캄한 흑판을 향해 나는 쓸 거야 아직 발설하지 못한 언어들이 나의 잠보다 먼저 도착하게 할 거야 도처에서 쇄도하는 너의 입김을 놓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나를, 필사할 거야 ―한세정, 「시는 어디에 있는가」(『문학인』 2024년 겨울호) 한세정은 일상과 가까운 언어로 삶의 지속을 노래해 왔다. 시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위 시의 주체는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고 곤혹스러워한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생활인의 삶. 이 시에서 ‘시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곧 ‘나’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가 제자리에 고여 있는 것 같은 삶을 지속하는 동안 아이는 자꾸 자라고 아이를 돌보는 나의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래 오늘이 가면/네가 올 거야”라고 곱씹으며 시적 주체는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에서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을 어루만져 본다. 아이의 장난감이 때로는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시적 주체는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너는 올 거야”라는 믿음으로 시를 기다린다. 시는 사실 언어를 통해 존재를 붙잡는 ‘나’의 곁에 늘 있다. 거리가 아니라 작은 방 안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시는 ‘있다’. 위의 시에서 ‘너는 올 거야’라는 말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이 언어를 통해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며,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2024년 겨울의 시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끝까지 붙잡고 기억하려는 태도가 있다. 이 시들은 가장 어두운 밤, 망각을 거부하며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온다. 이런 태도와 함께라면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다섯이 열이 될 수도”(박소란, 「침향무」,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 있다. 기억이 사라지고 존재가 희미해질 때, 시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다시 깨어난다. 우리는 읽음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함으로써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존재할 것인가. 1)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역, 필로소픽, 2018, 47쪽.
Ⅰ. 모멸과 폭력 - 김현주, 『메리골드』, 다인숲, 2024. 1. 김현주의 소설집 『메리골드』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만든 감정의 살풍경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자행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적 언어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예술로 포장된 인물들의 자기 방어기제는 소설 독해의 일차적 난관이다. 하지만 이는 김현주 소설의 성취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인물들이 사실 과거 연약한 주체(버려지거나 유폐되거나 모멸의 대상이기도 했던)였다는 점은 당혹스럽지만, 이들의 방어기제가 연약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형태로 노출될 때 의도치 않게 감추어진 상처가 드러나면서 해체된다는 점은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주의 소설들은 자기 방어에 능숙한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적 증상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사를 독해할 때 독자의 시선은 주체에게서 멀어지면서 타자에게로만 고착된다. 그러나 이 길을 역행하고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내면서 행간에 감추어둔 감정의 풍경을 응시할 때, 우리는 김현주 소설의 입구에 서게 된다. 2. 오독을 유도하는 방어기제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배치된 언어들의 함정을 피하고 마주한 풍경에는 모욕과 모멸과 수치와 같은 감정들이 흥건하다. 때로는 피가 때로는 비겁함이 때로는 자기혐오가 때로는 눈물이 그 자리에서 축축하다. 가령, 「빛의 감옥」에서 직장 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원장의 무고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비겁함은 모멸감이라는 깊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당신이 해고되지 않으려면 쉿, 이라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때, 모멸감을 느꼈다.”). 애도보다 망각이 정규직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죽음을 오래 애도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정상적으로 살려면 빨리 망각해야 했다”). 물론 정규직인 된 이후 ‘그녀’가 겪는 “불면증”과 “우울”과 “가슴 통증”은 모멸감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일요일마다 작은 교회에서 행한 “참회의 기도”는 그것을 투명하게 세탁해주었다. 주식 리딩방을 운영하는 「꿀」의 주인공 ‘그녀’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회원들(“꿀단지 옆으로 기어드는 개미들”)을 경멸하고(“가난한데다가 멍청하기까지. 의심 많은 인간들… 구제불능이야.”),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가사도우미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함으로써 동정을 소비한다(“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삼백만원은 없어. 그 대신, 삼십만 원 그냥 줄게. 안 갚아도 돼. 가사도우미는 모멸감을 느꼈다.”). 정작 가족을 포함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외된 듯 보이는 ‘그녀’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편두통, 불안 등 신경증적 증상을 주식시장의 개미들과 하이에나들의 욕망을 잽싸게 포획하면서 치료한다(“그녀의 웃는 표정은 먹이를 낚아챈 한 마리 잔인한 맹수 같았다.”). ‘그녀’는 이빨 사이의 흥건한 피로 자신의 상처를 은폐할 줄 아는 주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 3. 「붉은, 행간」은 김현주의 소설집에서 모멸과 폭력의 역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게 되는 괴로운 감정”(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1쪽. 이 글에 언급된 모멸감에 대한 사유들은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이다. 이 정의에는 모욕-경멸-수치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모욕’이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모욕감’은 타인에게 그러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의 응어리다. 그리고 ‘모멸’에는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적나라한 공격을 드러내는 언행이 모욕이라면, 무심코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경멸에 가깝다. 즉 경멸에는 적대적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낮잡아 보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를 직접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행위양식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포식성을 희석화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일 것이다. 모멸은 이러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김찬호;64)라고 할 수 있다. 「붉은, 행간」의 화자 ‘나’는 두 명의 남자(남편이자 작가인 ‘케이’, ‘나’의 정부이자 연극연출가인 ‘에스’)로부터 받은 모멸감을 그들의 작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아쇠’의 희생자이자 피의자이다. 그녀는 페이지가 찢겨나간 <중독>을 바닥에서 집어 들더니 책 무덤 위에 펼친다. 책 속에 접시 위의 과일을 집어넣는다.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책 속으로, 책 바깥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책들 위에 올라선 후, <중독>을 밟는다. 토마토와 청포도가 튀어 나가고 일부는 그녀의 발길질에 짓뭉개진다. 다시 책 위를 두 발로 힘껏 내리밟는다. 책 속은 젖어 얼룩 범벅이 된다. 과육은 책 속에서 으깨어지고 과즙은 행간으로 스며들 것이다. 짓밟고, 태워버리고 싶은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과즙 범벅이 된다. 책을 모독하고 싶다. (「붉은, 행간」, 23쪽) 그녀는 <중독>을 짓밟으며 무대 위에서 빛난다.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하면서 보다 파격적인 연기를 시도한다. 매회 무대 위에서 그녀는 에스를 다양한 부위별로 힘껏 물어뜯는다. 그때마다 에스는 신음을 내지른다.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에스의 야릇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관객을 열광시킨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반전이다. 그녀는 침착한 동작으로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젖은 혀로 부드럽게 천천히 핥는다.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붉은, 행간」, 39쪽) 인용문의 <중독>은 남편 ‘케이’의 유작이다. 무명 소설가였던 남편의 작품은 ‘나’와 불륜 관계인 ‘에스’에 의해 불멸의 작품으로 포장된 채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등장해 남편의 작품을 ‘모독’하는 퍼포먼스를 반복한다. 행위예술 특유의 난해함으로 승화되어버린 ‘나’의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남편의 소설에서 묘사된 아내 ‘나’의 모습은 수동적이며 무기력했다. 실재의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소설 속의 ‘나’는 “새장 속의 새”이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묘사되었다. 잠시 나가더라도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남편 케이에게 ‘나’는 그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영혼”일 뿐이었다. 남편 케이와 아내 ‘나’ 사이의 이 간극을 소설은 “틈”이라는 언어로 비유한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그녀의 불안과 케이의 애증으로 1502호는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격한 진동으로 실내의 벽, 틈은 무섭게 벌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부풀린 틈이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 더 크게 벌어졌다.”/ “집요한 틈새는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틈이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등) 이 ‘틈’은 남편 케이에게서 받은 ‘나’의 모멸감의 다른 표현이다. ‘틈’에는 1502호의 위장된 평화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위태로운 행복이 노숙자 같은 불안을 데리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20쪽)이라는 문장은 남편의 언어적 경멸과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나’가 느낀 모멸감이 가장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나’가 남편의 유작인 <중독>에게 가한 행위들(찢고, 밟고, 책 속에 과일을 넣고 짓뭉개는 등의 행위)은 모멸에 대한 되갚음으로써의 ‘모독’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세 가지 층위의 모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승인 과정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때, 모욕은 이러난 자존감이 손상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무명 작가였던 케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내 작품이 모호하다고 하는데 그건 인물의 내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지. … 상징을 잘 이해해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면 좋겠어.”) 세상은 그의 언어 속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욕이다. 케이의 죽음 후 그의 소설 <중독>은 에스의 연출에 의해 본래의 의미 맥락에서 이탈된 채 연극 <중독>으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에스는 작가의 죽음을 작품에 중첩시킴으로써 소설 <중독>의 행간을 영원히 감추어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모욕이다. 그리고 연극 <중독>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나’는 소설 <중독>을 짓이기고 찢고 밟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설에 묘사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지점으로 이탈시킨다. 더불어 연극이 반복 상연되면서 ‘나’의 모독 행위는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것이 세 번째 모욕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연극 <중독> 속에서 ‘나’의 예술적 행위의 승인 과정의 소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앞선 두 번째 인용문은 ‘나’의 행위가 연출가 에스의 의도를 완전히 역행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때 ‘에스’와의 관계를 통해 모욕당한 자신의 존재감을 재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에서도 ‘틈’이 발생한다. 남편 ‘케이’와 마찬가지로 ‘에스’ 또한 ‘나’를 자기 예술의 승인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로 수단화한 것이다. 연극 <중독>에서 ‘에스’가 ‘나’를 흡혈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따라서 앞선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에스’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에스’가 행한 모욕을 되갚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붉은, 행간」은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천천히 핥는 ‘나’의 붉은 입술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한 셈이다. 이로써 연극 <중독>은 ‘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김현주의 소설 「붉은, 행간」을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 인물의 신체와 정신이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예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모멸의 헤게모니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모멸의 폭력을 그대로 되갚는 방식으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모욕과 경멸에 노출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꼬리를 물면서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주체와 폭력의 거리는 자못 가까워진다. ‘훼손된 자아(spoiled self)’(어빙 고프먼)의 폭력적 자기 증명. 문제는 이런 방식이 주체의 훼손된 자아를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식의 예술행위 또는 글쓰기가 자기모멸의 늪에 빠진 주체에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자못 위험해 보인다. 다행히 작가는 「메리골드」에서 이러한 폭력성의 늪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스릴러의 양식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자기 응시를 수행하고 있다. 모멸감은 폭력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멸감의 해소 방식이 항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거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이 결핍되어 있을 때, 모멸감을 느낀 ‘훼손된 자아’는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타자에 투영하면서 폭력과 폭언을 통한 자기 증명에 매몰될 수 있다. 김현주의 「메리 골드」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갤러리 관장이자 도예가인 화자 ‘나’가 자신의 건물에서 무상으로 ‘꽃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훼손된 자아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자기모멸감에서 벗어나려는 뒤틀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싸구려 꽃으로 격조 있는 갤러리를 망쳐놓다니, 발코니랑 계단에 유치한 저것들, 당장 다 걷어내요!”/ “이렇게 예술적 센스가 없다니!”/ “당신의 예술적 감각은 형편없어요. 그래서야 카페 운영을 제대로 잘하겠어?”/ “그녀의 원피스는 시장에서 값싼 무명천을 떠다가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저급한 취향 때문에 화가 났다.” 등)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 ‘그녀’는 “무조건의 동정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가여운 존재”(79쪽)였다. 자신의 건물 2층을 내어준 ‘무상임대차계약’은 호의적인 주체가 동정의 대상에게 베푸는 적선으로써 상대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우울해보였던 그녀의 삶이 메리골드처럼 화사해지면서부터다. 적막했던 갤러리는 그녀가 온 뒤로부터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메리골드 덕분에 행인들이 들어와 일층 전시실을 구경하고 카페로 올라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볼품없어 보이이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쫓겨난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내 작품들은 이상하리만큼 볼품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박제동물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도자기의 미적 가치를 모르는 그녀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과 자신의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나’는 모멸의 가해자가 되었다. ‘나’의 모욕적인 말들과 무상임대를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조수처럼 부리며 멸시하는 장면들에는 자신과 그녀 사이의 위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여기에 ‘그녀’가 남편의 전처를 닮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모멸과 폭력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가령, 남편의 전처 사진을 칼로 긋는 장면(“환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나이프로 천천히 그었다. 후련했다.”)이나, 무기력한 대상이 자신에게 굴복했을 때의 쾌감을 묘사하는 장면(“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이 내 몸에 전율처럼 흘렀다.”)에서 ‘나’가 느끼는 쾌감은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생산하는 감정이다. 소설은 이러한 감정의 근원에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허영을 위한 싸구려 소비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불안감(“내 작품들, 원가에 내놓는다고 홀대하지 마세요. 이거 최상급이야. 전부 팔렸으면 좋겠네.”)과 ‘나’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에게서 버려졌다는 모욕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수치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착종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건물에서…어떻게 나보다 더 행복할 수 있어?”(100쪽)라는 말에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분노, 버림받은 자신이 행복질 수는 없다는 슬픔, 나보다 못한 위치의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억울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증상인 셈이다.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이러한 모독의 감정들은 「떠도는 영혼의 노래」와 「아무도 모른다」에서 각각 국가폭력과 면역 정치에 의해 잊혀진 죽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은 작품의 행간에 감추어진 죽음을 통해 스릴러로 서사화된다. ‘나’가 코엑스 전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라진 사건을 주목해보자. 화자는 “그녀는 노란 메리골드를 뽑지도 않았고, 붉은 샐비어를 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없는 동안, 갤러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99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언급된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나는 뒤틀린 손가락 관절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겁먹은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100쪽) 그러니까 일주일 전 ‘그녀’는 ‘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기억상실은 2층 카페를 가득 채운 “사라지지 않는 소독 냄새”라는 무의식적 진술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소설 맨 앞에 배치된 평범한 문장(“이층 카페의 탁자보를 걷어내면서, 나는 그녀를 느꼈다. 표백제를 푼 물통에 누런 탁자보를 담그고 카페 내부에 소독약을 뿌렸다.”)은 ‘나’의 무의식이 남긴 사후적 증거에 해당한다. 5. 소설의 스릴러적 플롯이 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메리골드」는 분명 자신이 자행한 폭력의 기억마저 멸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초라함, 모욕당한 자존감이 자기를 위협하는 외부 인자에 대해 보이는 면역학적 과잉 반응,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모멸감의 극단에서 어떻게 역진화하면서 파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단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모멸감의 근원에 오랜 시간 글쓰기로부터 멀어진 작가의 자기진단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현주 작가의 소설을 모멸감과 폭력의 역학관계로 독해하는 이 글의 시작점에는 「빅 블루」가 있었다. 이는 앞서 진술한 바 있는 말,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연관된다. 「빅 블루」는 작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문화 소비에만 매몰된 채 문학이라는 질병에 침전된 화자의 모습을 자기혐오와 시대와의 불화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자꾸 “아주 오랫동안 소설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겹쳐 읽힌다. 또 김현주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느끼는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섣부른 짐작 때문에 나는 다음의 문장들이 아프게 읽혔다.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천 일 동안 매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밤, 고통의 밤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이야기가 완성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불멸의 글쓰기,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아무 책도 읽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멍 때리며 노는 인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작가가 되었다.(「빅 블루」, 64쪽) 나는 어쩌면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깊이 잠수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빅 블루, 푸른 바닷속으로 책이 떠다니면서 작가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이, 작가가 썼던 문장들이 돌고래처럼 헤엄치거나 솟구쳐 오르는 것을 연상하면서 … 죽는다.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 막막한 소설의 바다. … 바다 맨 밑으로 들어간다. 바다 속, 눈이 어두운 심해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수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익사한다. (「빅 블루」, 68쪽) 여기서 ‘나’는 가혹한 자기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모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깊고 푸른 어둠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문학이라는 ‘질병’에 갇힌 화자의 무기력은 예술가로서의 승인과정에서 경험한 어떤 모욕에 대한 자기 심문으로 읽혔다. 글을 쓰기 위해 국가 행정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모독은 그 감정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생산 없이 소비로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공허함은 한 인간의 자기 실격 보고서임과 동시에 자기모멸의 감정을 통과하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대한 기록으로 읽혔다. 무엇보다 이 강도 높은 고해성사는 대단한 용기로 읽혔다는 점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서툰 짐작 끝에 생기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자기증명 과정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왜 어떤 사람들의 구조신호는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찢어야만 겨우 낮은 주파수나마 얻게 되는 것인지? 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하면서 그것이 어쩌면 자기 고백일 수도 있는 가혹한 지점에 서야만 하는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구 또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글을 읽는 세계에서 유폐되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공감 또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은 한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힘이라면 무한한 우주 어디라도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작가 김현주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한다. Ⅱ. 차별과 환대 - 김성훈, 『길목의 무늬』, 문학들, 2024. 1. 김성훈의 소설집 『길목의 무늬』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좌절과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성숙한 자아의 패배적 자전서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조신호에 기꺼이 응답하는 인물들의 환대와 연대 때문이다. 김성훈의 소설은 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제와 사회의 셈법에서 뺄셈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뒷골목에서 하위주체로 명명되거나, 정당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그늘진 외진 장소로 배치된 채 ‘비체’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의 대상들이다. 2. 소설집의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의 배경인 목포의 ‘다순구미’ 마을은 이러한 인물들의 장소이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는 의미와 달리 이곳은 “가난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사는 동네”(34족)로서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폐허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화자 ‘나’는 이른바 ‘파시의 아이’였다. 바다에서 서는 장을 파시라고 한다. 나는 파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산동 유곽에서 버림받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를 일컬어 누구는 임자도 여자라고 했고, 또 누구는 흑산도 각시라 했고, 더러는 산다이 색시라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절구질하는 입방아가 싫었다. (「길목의 무늬」, 37쪽) 그러니까 ‘나’는 바닷사람들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부모의 존재나 출생지조차 불분명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였던 셈이다. ‘파시’에서 몸을 팔던 어머니는 “어선이 입항하는 날, 나를 낳고, 기침하고, 다시 유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49쪽) 손님으로 만난 아버지에게 ‘나’를 맡김으로써 그녀는 장차 어린 아이가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벗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린 화자의 삶은 “태생의 천박함에 응시한 타인들의 시선”(37쪽)에 노출되었고, ‘다순구미’를 떠나 바깥 세계로 입문하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몸을 파는 어머니의 직업과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글씨는 ‘나’의 태생에서부터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사회의 정상적 성원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나’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달순’은 주인공이 겪은 사회적 차별을 젠더의 측면에서 강화하고 보충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외부화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순의 희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소규모 직장에서 경험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차별은 결국 ‘달순’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가 ‘달순’의 기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타국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존재들의 바깥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성훈의 등단작품인 「길목의 무늬」는 버려진 아이들의 실패서사로 읽히면서 사회적 차별을 서사화한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나’를 기꺼이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희생과 환대의 서사를 통해 소설을 패배주의와 우울에서 건져내고 있다. 양부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머리 검은 짐승 거둬 키워도 잘만 산다는 것”(49쪽)을 동네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나’를 차별의 늪에서 건져냈다. 그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우짜든지 너랑 나는 잘 살아야 해.”(49쪽)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달순 엄마’는 친모의 빈자리를 그 이상으로 대리보충한 ‘엄마’였다. 운동회고 소풍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줬던 달순 엄마였다. 그 품에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달순네 집에 들어가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발을 들이밀고, 유달산 자락에서 얻어온 도깨비바늘을 그 집 이불에 달라붙게 했다. (「길목의 무늬」, 39쪽) ‘달순 엄마’는 ‘나’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가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 등의 말들이 암시하는 거친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 그 “단어들이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쪽)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달순네’는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젖 냄새”가 배어있는 장소이면서 외로움과 자기비하에서 화자를 건져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의 출생에 얽힌 공백 위에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무조건적 환대를 중첩시킴으로써 어린 인물을 차별과 혐오의 늪에서 구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환대의 힘은 ‘나’가 이후 ‘견습 선교사’가 되어 케냐로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국가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산되는 장소, 달리 말해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환대를 타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달순 엄마’에게 새로운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면서 서사의 의미를 확장한다. ‘달순 엄마’는 버려진 아이가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이면서, 비밀에 부쳐진 인물들의 과거를 현재로 재송신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달순 엄마’는 과거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 있던 동네, 서산동, 그곳에서 산다이 색시들의 밥을 만들고, 빨래하며 품삯”(38쪽)을 벌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친모와 함께 “식모 일을 하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41쪽)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나’의 친모가 비워진 공백의 자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성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길목의 무늬」는 어머니의 실종으로 상징되는 공백의 장소에 과거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소녀들이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와 그녀들이 거쳐 온 사회적 장소들을 기입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속 도시로 이주한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을 상기할 때, 나’의 친모에 대한 서사적 누락과 죽음을 앞둔 ‘달순 엄마’의 쇠락한 신체는 그 시대 하위주체 여성들의 삶과 존재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기입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불어 친모의 부재는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이 역사의 서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달순 엄마’의 현재성은 이들의 삶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외부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김성훈의 소설 「길목의 무늬」는 ‘다순구미’와 같은 버려진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삶을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하위 주체들이 걸어 온 ‘길들의 무늬’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다순구미’라는 장소의 역설적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목포의 특정 장소에 한국 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3. 산업화 시대의 첨병 공간이었던 여수와 마산을 배경으로 쓰인 「정오의 끝자리, 빛」과 「홍콩빠 이모」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에 포획된 인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을 낙인찍고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배제했던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 전자의 소설이 그 대표적 낙인의 서사라면 후자의 소설은 이를 연대의 차원에서 극복하고 있다. 「정오의 끝자리, 빛」의 한덕수는 그 출생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덕수의 현재 시점에서 두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가혹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이다.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여수읍의 한 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부임 중이었다. 그러다 1948년 10월 어느 날 그는 빨갱이의 부역자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가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었다. “울 엄마가 그랬시야, 차라리 고아랑 놀아라, 빨갱이 자석하고 말 섞었다간 네 신세 조져분다고잉.” 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아이의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를 알았다. 피 묻은 돌멩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갯불이 내 몸을 지지는 듯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빨갱이’라는 뜻은 몰라도 그 단어는 무서웠다. ‘빨갱이’는 이후의 내 삶을 내 의지랑 상관없이 끌고 갔다. 땅의 중력처럼,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는 ‘빨갱이’랑 살았다. (「정오의 끝자리, 빛」, 61쪽) 인용문은 억울하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된 한 인물의 후손들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사회로부터 차별화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의 낙인은 사건과 무관한 후손들의 삶을 비극으로 색칠했다. 차이 나는 대상에게 혐오와 배제의 스티그마(stigma)를 라벨링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국가폭력이 생산한 어떤 오염물이 행여라도 주체의 내부로 침투할까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때나마 주체의 일부(가족이나 친족)였거나 아주 가까운 대상들(친구나 이웃)까지도 오염물로 치부하면서 주체의 바깥으로 뱉어내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이웃을 타자화하고, 이념적 차이를 악으로 규정짓고 차이가 있는 타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국가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정의로 위장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김성훈의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한 인물이 처한 사회적 의미를 역사적 시간을 소환하면서 계통 발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을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기점화함으로써 김성훈의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 소설로 멈출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국 사회의 차별적 구조가 생산된 발생지점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덕수의 어머니인 양순임의 탄생과정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강화한다. 그녀의 출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기입된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너무나 쉽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화한다. 외증조할머니의 원망은 그날 1학년 1반 교실에 모인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었다. 하지만 마흔 명의 사람 중에 엄마를 제외하고,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생살여탈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엄마에게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소리는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는 감각적으로 교실의 냉랭한 기운을 느꼈고, 당시의 운동장 흙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모진 말의 생김새를 봤다. (「정오의 끝자리, 빛」, 67~68쪽. 강조 인용자) 그러니까 한덕수의 어머니 양순임은 한덕수의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던 그날 그밤 그곳에서 태어났다. 양순임은 생사여탈권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던 그 잔인했던 폭력의 시간에, 모두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숨죽이던 그 시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저주와 원망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그 순간 태어난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가혹했을 외증조할머니의 저주의 언어는, 그 죽음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당대 민중들의 무지로 인해 죽음과 탄생의 엇갈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봉건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정작 그 본질적 원인에 해당하는 국가폭력의 무차별성과 비인간성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고서는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순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36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생 자체가 부정당한 양순임은 생의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생산한 두 층위의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셈이다. 4. 마산의 자유무역지구의 대폿집을 배경으로 쓰인 「홍콩빠 이모」는 「정오의 끝자리, 빛」이 보여주는 차별의 재생산을 반복한다. ‘홍콩빠’로 불리는 술집의 여주인 김명자가 느끼는 불안과 조바심을 통해 소설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공주의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한 번 오염물로 분류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그 주변까지 오염의 대상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자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낙인의 대상으로 라벨링되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겪은 사실은 그녀의 이런 조바심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록된 온갖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극화되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빠의 단골이자 1980년대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들’이 YH사건을 경험하면서 언어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명자의 가족들의 사정을 보면, 직업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김명자의 막내동생은 4·19 시절 목숨을 잃었다(“마산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동생은 시위대를 이끌다 산화했다.”, 87쪽). 김명자의 남편은 베트남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한 후 고장 난 신체와 정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대학생인 김명자의 아들은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이 생략한 작품의 백스토리를 상상건대. 김명자 아들은 이후 부마항쟁과 5·18로 명명되는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비극에서 피해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러나 김성훈 소설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홍콩빠’를 비롯한 마산자유무역지구 일대를 해방 공간으로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연대의 장면에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김명자가 아들 또래의 노동자 ‘육손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고, 그가 국가 폭력의 희생제물로 전락하는 순간을 막아서는 장면이다.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명자의 가슴팍에는 비가 흠뻑 젖었고 바지단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김명자는 육손이가 길거리에서 몰매는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옴마야. 점마 일 내것다 아입니꺼.” 김명자는 육손이에게 허둥지둥 다가가 포대기 감싸듯 그를 끌어 안았다. 옷을 적신 비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김명자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육손이의 입에서 흘리는 몸 냄새는 김명자의 얼굴에 닿아 체온을 데웠다. “불 끄입시더. 우리! 아, 저…우리 아, 얼굴 별빛에도 비추면 안 되입니더. 불 끄입시더. 이모들이요. 이 야, 어린 것 맨상부터 가리입시더. 퍼뜩 안 하고 뭐하십니꺼. 불 꺼!” 김명자는 기운을 뻗쳐 소리쳤다. 홍콩빠의 불빛이 하나, 둘 소등됐다. 이윽고 마산 시내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홍콩빠 거리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이 육손이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구름에 가린 조약돌 같은 별이 바다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크럼을 짰다. (「홍콩빠 이모」, 100~101쪽) 마산자유무역지구의 화려한 야경을 칠흑으로 변신시키는 “불 꺼!”라는 외침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은폐되는 국가폭력을 일시 정지시켰다. 또 김명자를 비롯한 홍콩빠 사람들의 “스크럼”은 김성훈의 작업이 기입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환대와 자기희생의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두운 시대의 좌절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도 이 환대의 자리에 「길목의 무늬」에 등장한 ‘달순 엄마’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김성훈 소설집의 해설을 쓰고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계엄 사태가 발생했다. 숨죽이며 상황의 흐름을 응시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국회와 그 인근의 거리에서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벌어준 30여 분의 시간이 한국사회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들의 신체가 맞닿은 스크럼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와 1987년의 시청 광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스크럼과 연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지녔던 어느 도시에 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준 장면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면서 2024년에 쓰인 김성훈의 소설들이 뒤늦은 첨언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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