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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 2025년 봄호(제149호)

자주, 계속 실패해보겠습니다 :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김다솔 문학평론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과 망함[]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

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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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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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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