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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가을호(제13호)

남아 있는 것들 ― 마윤지와 박소란의 시

최선교 문학평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1. 문제


  자신의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류의 오래된 욕망이라면, 역설적으로 쓰레기만큼 역사상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한 존재는 없다.1) 인간이 쓰레기를 분류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쓰레기 같은 삶과 인간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쓰레기는 강력한 실존이자 비유이다. 쓰레기를 통한 사유는 대개 어떤 존재가 폐기되거나 위생적이며 진보적인 삶에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되어 비가시적인 장소로 이주되는 과정에 작용하는 폭력을 주목한다. 인간의 현실을 형성하는 설계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유에서는 쓰레기를 범주화하는 권리를 가진 힘이 존재하며, 그러한 힘이 유용한 생산품과 쓰레기의 구분을 관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설계가 있는 곳에 쓰레기도 있다”2)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어떨까? 폐기되어야 한다는 본분과는 별개로 쓰레기만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우리의 삶을 (이미) 침범한 것이 없다는 것. 우리는 쓰레기를 보이지 않게 처리했으며 그럴 수 있다고 믿지만, 한편 이 사실을 완벽한 진실로 믿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우리의 삶과 쓰레기 하치장의 구분이 가끔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풍경은 쓰레기 풍경”3) 이다.


  2024년에 20~30대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가 7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쉬었음’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 중에서 질병이나 장애 등의 이유 없이 ‘그냥 쉬었다’고 응답한 경우를 가리킨다. 쓰레기가 현실을 육박하고 있다는 서술 뒤에 노동하지 않는 인간과 관련된 사례를 덧붙이는 것이 어쩐지 부적절해 보인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가치를 재생산하는 서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쓰레기─잉여와 여분으로 취급되며 공인받지 못한 인간 집단─를 분류하는 강력한 기준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다방면으로 재고되어야 하는 당위이다. 그러나 가치 없는 것,폐기되어야 할 것을 가르는 당위를 재설정하기도 전에─그리고 그러한 당위들이 재설정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안은 없다는 확신으로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인간쓰레기로 분류된 자들(혹은 현상들)에게 필요한 것이 쓰레기라는 가치 체계의 폭력에서 구제되는 것‘뿐’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어떤 것을 쓰레기로 분류하는 힘을 재배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쓰레기로 분류되지 않을 경우에 달성될 목표 자체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표의 모호성(그리고 종종 기만성)이 문제”4) 가 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쓰레기로 분류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이미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이 육박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복원하지 않고 방기하는 힘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른다.5)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쓰레기에 관한 이야기는 욕망과 가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동하는 욕망과 변경되는 가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본주의라는 ‘생태 질서’가 붕괴하고 부패하면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그것의 유효 기간과 대체품을 고안하는 이야기는 포화상태이다. 가치가 소진되어 욕망이 회수된 것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쓰레기가 없는 곳은 없다. 쓰레기는 가장 깊은 바다에서부터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 살아 있다. 쓰레기는 “공기 중에도, 물속에도, 키치적인 물건으로 그득한 뒤뜰 벼룩시장 좌판에도, 잡동사니들이 서까래 높이로 쌓인 집에도, 유독성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구름이 퍼져 나가는 우주 공간에도”6)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방식의 서술에는 사실과 비유가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물질적인 쓰레기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옳고 선한 가치를 묻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비유로 전환될 수 있다. 일상을 침범한 쓰레기 앞에서누구든 ‘일단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공유하게 된다. 안 보이는 곳을 찾아서 다시 쓰레기를 폐기하든, 쓰레기를 소각하면서 배출되는 화학적 잔여물들을 아직까지 우리의 지구가 감당하리라 믿든, 그것을 재활용하든, 아니면 아예 쓰레기를 만들지 말자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가든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현실이 용량을 훌쩍 초과한 거대한 폐기물 더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지금 현실의 쓰레기 풍경과 한때 위엄을 자랑했던 웅장한 도시의 멸망이 남긴 폐허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쓰레기가 침범하는 현재의 풍경은 폐허를 감상하듯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현실 앞에서 폐허나 종말의 단어를 떠올리는 일은 인간 종 절멸의 구호로 공포심을 자극하며 글로벌 자본주의적 맥락을 삭제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문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낭만주의적인 소구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다. 고대 건축물의 잔해를 바라보는 과정에는 일종의 경이로움이나 시적 영감을 불어넣는 낭만성, 시간과 물질의 유한함을 목도하며 경험하는 슬픔, 절망 등의 강렬한 감정 등이 삽입된다.7)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라는 쓰레기 풍경은 명백하게 파괴된 것, 폐기되기를 기다리는 것, 유해하고 성가신 것,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왜 이것이 쓰레기로 분류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일과 함께, 이미 유해하다고 분류된 것들이 완전히 폐기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적거려야 한다. 문학의 관심이 언제나 변두리였다면, 현실을 덮친 쓰레기의 감각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장소 역시 그곳이다.



2. 죽어서 사는 것들 : 마윤지 『개구리 극장』 (민음사, 2024)


  『개구리 극장』이 펼쳐 놓는 공간에는 빈틈이 많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충분히 보아 왔던 것을 그리는 최소한의 언어로부터 시가 탄생한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완감이 되레 새롭다. 이런 특징은 자칫 시집의 얕은 밀도나 묘사의 평이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혹은 여름의 계절감이나 “투명 위에 투명을 엎지르는 기쁨”(「가을 인사」)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최근의 젊은 시집들에서 으레 발견되곤 하는 공통된 미감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윤지가 구사하는 최소한의 언어는 사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용히 불어난다.


군용지 주변의 땅이 꺼지면서 교통사고가 났다

물렁거리지 않게
무덤은 깊고 넓을수록 평평해야 한다고 했다

작년 동해에서 가져온 돌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이들이 비린내 나는 강가에서 돌을 주워 왔다
사람들이 며칠씩 고기를 못 먹었다
― 「연천」 전문


  이 시는 충분히 “깊고 넓”게 파지 못한 무덤 때문에 지반이 붕괴되어 교통사고가 난 상황으로 시작한다. “교통사고”에서 연상되는 (어떤 의미에서) 일상적인 사건은 평평하게 마감되지 못하고 묻힌 어떤 종류의 다량의 “고기”들이 만든 “물렁”거리는 땅과 연결되며 불쾌하고 찝집한 기분을 남긴다. 현대 사회에서 ‘무덤’이 연상케 하는 죽음은 일상적이며 그만큼 신속하고 완전하게 처리되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죽음(“무덤”)은 또 다른 죽음(“교통사고”)으로 연결되며, “사람들이 며칠씩 고기를 못 먹”을 정도로 비위를 상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연쇄한다. 연쇄하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기괴한 생명력을 반영한다.8) 매장된 죽음이 죽지 않고 기어코 삶을 육박하는 현상 속에서 폐기되고 묻힌 것들의 존재가 되살아난다.


  마윤지의 시집은 대체로 까다롭지 않고 단출한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와중에 느껴지는 뒤숭숭한 정서는 ‘묻혀 있는 것’들로부터 탄생한다. 어떤 물건/정서/존재를 보이지 않게 쌓아 덮어 두면서 그것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방식의 서술로부터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동지」)라고 하는 시적 태도가 배어 나온다. ‘묻는다’는 행위는 어떤 존재의 생살권을 소유할 때 가능한 것이지만, 「연천」과 같은 시에서처럼 비가시화된 “고기”는 죽어서 묻힌 뒤에도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언가를 묻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로 수렴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고 그것이 사라졌다고 믿고 싶은 대상이나 정서가 마윤지의 시집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묻힌 상태에서 끝나지 않은 생명력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낸다고

그러면 상주와 가족들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을 받는다고

사흘장이 끝날 때면 목이 아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했습니다

(...)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초여름

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
―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부분


  “우리는 농담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집단 상담을 하기 위해 모인 듯한 사람들을 그리다가 문득 안동 지역의 조문객들이 사흘장을 치르는 내내 소리를 내어 우는 장례 풍습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슬픔의 뿌리를 뽑아낼 것처럼 과장된 소리를 내며 우는 시간을 매듭짓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독대 안에 “분명”히 있는 매실이 익어가고 있다. 가시화된 곡소리라는 형태는 암묵적인 재현 수단일 뿐이고, 가시화된 형식을 통해 해소되지 않은 정서의 잔재는 장독대 안의 매실처럼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둥글게 둘러앉아 나누는 내밀한 이야기나 주고받는 곡소리는 모두의 암묵적 합의 아래 진행되는 불완전한 주고받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쓰고 쓰고 쓰다가 남은 정서의 잔재이다.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이라는 시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불완전한 주고받음 속에서 모종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묻혀 있는 것의 정체를 상상해 본다.


  「여름 촉감」은 여름날에 분수 광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그리면서 문득 “광장 밑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름 햇빛과 투명한 물에 젖은 아이들의 몸 이미지를 그리는 와중에 불쑥 삽입된 묻혀 있는 사람들은 “몸의 몸/ 더 끝에 있는 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섬약하지만 강렬하게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살아 있는 몸의 생동감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몸, 형체를 그릴 수 없는 묻힌 사람들의 몸과 겹쳐지며 극단의 비현실감을 통해 묘사된다. “한없이 예쁜/ 저 입체가 두렵다/ 바라볼 뿐인데”.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젖은 몸과 묻혀 있는 사람들의 더 이상 몸 아닌 몸이 포개지며 한 공간에 존재할 때, 다시금 그 공간에 잔존하는 비가시적인 존재들의 역동성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모르는 묻혀 있는 것들의 역동성은 경쾌한 생명력보다는 불길함을 자아내는 종류의 것이지만, 오히려 마윤지의 시집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눈 한 번 깜빡 할 때마다/ 새 한 마리가 죽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유리 벽은 어디에나 있지만/ 부딪친 새는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훨씬 기괴하기 때문이다(「새에 대한 믿음1」).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혀 죽은 새들의 사체는 어디로 갔을까? 불결한 것, 유해한 것, 가치를 훼손하는 것들은 쉽게 사라진다. 그것과 그것들이 남긴 흔적이 말끔하게 치워질 때, 우리는 무엇이 그 존재의 살아 있음을 박탈했는지를 잊어버린다. 「새에 대한 믿음1」에서 화자는 “한 번에 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 있는 생명을 쓰레기(사체)로 만드는 유리벽에 “동그랗고/ 하얀/ 스티커를 붙인다”. 스티커가 붙는 순간, 잘 보이지 않던 투명한 유리벽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쓰레기가 발생하는 빈도 혹은 시간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지연되기 시작한다. 마윤지의 시집에는 무엇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잠시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묻힌쓰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처리된 것일 뿐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묻고 싶어”(「우리 영혼의 바닥까지 줄을 내려 사랑을 길어 올리는 동안」)하는 이유이다. 잃어버린 것을 환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시들에서도 드러난다.


이사 온 집에는 작은 쪽문이 있다
그 문으로 부엌도 가고 옥상에도 간다

이번 여름
텃밭의 토마토는 내내 연두색

이 골목의 집들은 마루 같은 큰 창이 있어
앞집 옆집 무얼 들여오는지
무얼 버리고 떠나는지 다 들리고 다 보인다

윤지야 왜 또 문을 닫아 맞바람이 시원한데

아빠가 1층 계단 앞에 써 붙인 글씨

모종은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생활은 액자, 안마기 가져가세요

집집마다 모종이 많다
집집마다 모종이 많이 죽는다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지만
아빠는 처음 보는 씨를 얻어 와 심으며

알아?

양배추에서도 꽃이 난다

모종은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생활은 액자, 안마기 가져가세요
씨앗 소량 양배추
―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부분

  

  창이 크게 난 집들이 모여 사는 골목길에서는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 있는데 없는 듯이 살아 있는 것들도 없다. “앞집 옆집 무얼 들여오는지/ 무얼 버리고 떠나는지 다 들리고 다 보인다”. 화자는 이 큰 창으로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모두가 아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창을 닫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아빠는 “맞바람이 시원”하다며 다시 창을 연다. 이 골목에 사는 동안 자기에게 필요가 없고 가치가 다한 것은 더 이상 보관하거나 돌봐야 할 이유가 없는 폐품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집집마다 그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을 그려 놓고 정작 사람들을 그리진 않는다. 다만 “1층 계단 앞에” 놓인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액자, 안마기” 따위의 사물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그린다. ‘가져가세요’라는 글씨를 써 붙여두면 버려지는 것들도 추가의 구제 과정을 거친다. 마치 앞선 시에서 동그랗고 작은 스티커를 붙여 지연시킨 죽음의 시간처럼, 필요가 다한 물건들은 “1층 계단 앞에”서 연장될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을 가져갈 누군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창을 열면 맞바람이 칠 수 있게 연결된 공간들에서는 굳이 사람이 그려지지 않더라도 사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려진 사물들 이면에서 연결된 사람들이 보인다.


  옮겨심기 위한 식물인 ‘모종’의 본분은 옮겨 심어지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 “집집마다 모종이 많”고 그래서 “모종이 많이 죽는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지 않는 모종은 재산이 되지 못하고 썩어 버린다. 하지만 어디선가 “처음 보는 씨를 얻어 와 심”는 ‘아빠’ 같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양배추에서도 꽃이 난다”는 사실이 가능해진다. 효용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옮겨 심어 살릴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창을 열면 맞바람이 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려지는 사람이 없이도 생명력이 가득하다. 숨구멍이 송송 뚫려 아무것도 쉽게 죽지 않을 것만 같다. 없던 생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집에서 화자의 집으로 이동되어 그제야 살게 된 양배추는 다시 ‘가져가세요’ 목록의 맨 아랫줄에 추가된다. “씨앗 소량 양배추”.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는 동안 사라지지 않고 증식하는 생명력이 소박한 풍경 속에서 최대의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3. 감히 미래를 기약하는 법 : 박소란 『수옥』 (창비, 2024)


  박소란의 시집 『수옥』이 그리는 일상의 삶과 정서 속에는 완벽하게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들이 섞여 있다. 일관성이나 항상성이 파괴된 현상으로서의 삶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하다기보다, 진짜에 가까운 묘사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도 나오고 결국 사랑은 아니었던 거지, 도 나오고”(「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는 것처럼 깨끗하게 건져 올리고 싶은 일관된 정서에는 언제나 잔존하는 잔여물들이 지독하게 따라붙는다.


상수도 공사 후 수돗물에 이물질이 섞여 나온다
민원을 넣는다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도무지,

흙이 나오고 쇳조각이 나온다
누가 저질렀는지 모를 알들이 쏟아져 나온다
알은 부서지기도 한다
알에서 뭔가 태어나기도 한다 살 수가 없어요 살 수가, 울먹이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요령을 알 수 없다

사랑도 나오고 결국 사랑은 아니었던 거지,도 나오고

그 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군다
밥을 말아 먹는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키가 자라는데

특집 쓰레기 인문학 · 85

점점 흐려진다 나는 차가워진다
물 흐르듯 흘러
어디든 당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지체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잠을 한 컵 떠들면 미세한 꿈들이 순순히 가라앉고

아침을 깨우는 드릴처럼 말끔한 수도사업소의 안내문처럼

보란 듯 파헤쳐진 골목을 유유히 걸어갔다 걸어온다
번쩍이는 파이프가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으로
집은 여전하고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해결하지 않는다

철썩거리며 흘러가는 매 순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둥둥 떠 있다
―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부분


  “상수도 공사”를 하고 난 어느 날부터 “수돗물에 이물질이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모든 불순한 것들이 걸러진 결과물이 흘러야 할 곳에서 “흙이 나오고 쇳조각이 나온다”. 위생에 유해한 것들을 말끔하게 걸러내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갈라진 틈 사이로 이전까지는 말끔하게 차단되었던 불순물들이 새어나온다. 화자가 넣는 민원의 내용은 “살 수가 없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순물이 섞여 나오는 수돗물에는 “누가 저질렀는지 모를 알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뭔가 태어나기도”하는 장소로서의 알. 깨끗하고 완전한 수돗물로 유지되는 삶과, 그 삶의 질서가 깨졌을 때 가시화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삶의 기이한 공존이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어지는 삶에서 화자는 “그 물에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군다/ 밥을 말아 먹는다”.


  상반된 것이 혼합되어 구성하는 삶은 “아름다웠다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더러웠다고 지옥만큼 끔찍했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는”(「그냥 걸었다는 말」) 종류의 것이다. 이런 지독함은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삶과 정서의 잔인한 진실이며, 그 가운데서 지속되는 “얼굴을 씻고 머리칼을 헹”구고 “밥을 말아 먹는” 행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키”를 자라게 만든다.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긍정과 체념의 중간에 걸쳐 있는 미진한 삶의 태도이다.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체화함으로써 이어나가고 있는 삶의 원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살 수가 없어요 이대로 도무지”라는 울먹거림에도 불구하고 불순물이 걸러지지 않은 삶은 “여전하고”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삶의 주도권이 화자에게 주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해결하지 않는다’는 선언만으로 삶의 키를 쥐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해결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이 시집에서 삶이 굴러가는 모양을 살피는 일이다.


  위의 시를 포함하여 박소란의 시집에서는 ‘물’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흘러서 삶의 잔여물이 쓸려나가는 위생적인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행이 섞인 삶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되짚어봐도” 그것은 “다만 흐를 뿐”이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쪽으로”(「그 병」).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라는 민원의 답변처럼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요령”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물이 흐르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지속된다’는 ‘흔한’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시집은 “고인 물 썩은 물 악취가 진동하는 물, 그런 물에서도 알은 태어난다”(「물과 구슬」)는 사실에 주목한다. 흐르지 않을 수도 있는 물, 고여 있어서 썩어 버리기 쉬운 물에서도 가능한 생명을 상상한다. 썩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이다. “썩는다,/ 가짜는 썩지 않는다”(「여름 노트」). 썩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진실 앞에서 폐기된 것, 불순한 것, 유해한 것의 혼합물로서의 삶은 정수된 상태로 재탄생되지 않고 당분간 어떻게든 조금씩 연장되는 방식으로 지속된다.


변기를 바꿔야겠어요 언제 이렇게 낡은 건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잠에서 깨어 진통제를 한알 털어 넣고서 미지근한 물을 머금고서
나를 본다 선산 구덩이만큼 퀭한 눈으로

내 너머 구부정한 창이 부려놓은 캄캄한 골목을

아버지는 망설인다
변기, 변기라니

매시간 화장실을 드나들면서도
사는 게 암병원 같다고 끝없이 이어진 흰 복도 같다고
꺼지지 않는 빛
그런 게 얼마나 잔인한지

아버지는 화를 낸다 대장을 한뼘 넘게 잘라낸 뒤

미래, 미래라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냐?

쓰는 거예요 그냥

꼭 사기 같다 그런 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나는 감히 살 수가 없어
살 수가 없다

앓다 기진한 아버지 곁에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는 기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질금질금 흐르겠죠
악취를 풍기며 역류하겠죠 때때로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
꿈이나 영원이 아니라 비유로 꽉 찬 처방전이 아니라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그런


한알의 작고 둥근,

아버지는 그만 화를 낸다 꽉 막힌 삶에 시위라도 하듯
맹렬히 잠든다
TV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먼 나라 먼 도시 먼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찢어진 텐트 속에서

채널을 돌리면 낯모를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데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
형제종합설비에 전화를 걸어요 묵은 쌀을 불려 죽을 끓이고
조금 울다가
멀고도 가까운 웃음에 덩달아 조금 웃다가

미래, 미래라니
혀를 끌끌 차면서

오늘, 그리고 오늘,

오늘의 고지서를 챙기고 오늘의 달력을 넘기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를 떠올리며

조금 더 살아요
― 「병중에」 부분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현재의 생생한 고통 앞에서 정말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병이 들어 고통받는 ‘아버지’는 낡은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말 한마디로도 무너진다. “미래, 미래라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냐?” 대장을 한 뼘 넘게 잘라낸 ‘아버지’에게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나’의 말은 미래에 대한 끔찍한 기약처럼 들린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공포. 오늘의 이 어마한 고통이 꺼지지 않는 빛처럼 지독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운 예감.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화자의 말 속에 미래가 온다는 전제는 “잔인한” 사실이다. ‘아버지’에게 미래란 무언가 나아진 새로운 시간이 아니다. 현재의 고통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연장될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병든 ‘아버지’ 곁에 있는 화자는 현재와 미래를 어떤 자세로 지낼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미래가 “꼭 사기 같”고 “그런 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나는 감히 살 수가 없”는 것처럼 다가온다면, 화자는 어떻게 미래를 그릴 수 있냐는 질문에 “쓰는 거예요 그냥”이라는 말로 대답한다. 아픈 ‘아버지’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화자는 감히 “꿈이나 영원”이나 “비유로 꽉 찬 처방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버지’에게 현재란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이란 그런 추상적인 언어로 꾸릴 수 없는 생생한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미래를 말할 수 없는 현재와 무관하게 “시간은 질금질금 흐”른다. 찾아오는 고통으로 인해 시간은 조금씩 새어 흐르다가 그치는 방식으로 가끔은 “악취를 풍기며 역류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아주 간신히” 흐른다. ‘아버지’와 화자에게 고통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이 연장될 뿐인 미래가 지독히도 확실하게 기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화자가 하는 유일한 기약의 내용은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이라는 말이다. 고통이 나아질 것이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은 없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매시간 화장실을 드나”드는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사실은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이라는 단 하나의 기약을 가능하게 한다. 변기를 바꾼다는 것은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낡은 변기는 살아 있는 순간에는 기어코 오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삶을 보여 준다.


  「병중에」는 고통스러운 현재와 변하지 않을 고통의 미래가 확정된 상황에서 가능한 단 한 가지의 기약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다. 변기를 바꾸자는 약속이 무엇을 더 낫게 만들어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약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거창한 미사여구나 모호한 희망이 진정시킬 수 없는 현재의 고통 속에서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그런/ 시”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현재의 고통이 연장되는 미래보다도, 아무것도 기약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현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화자가 병든 ‘아버지’에게 제안하는 최소한의 기약은 그들에게 가능한 최선의 기약이 된다. 최대의 기약이 된다. “오늘의 고지서” “오늘의 달력” 그리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로 연명하는 “오늘, 그리고 오늘”에 들이쉬는 “한번의 숨”은 확정된 미래가 덮쳐오는 현재에서 “조금 더 살아요”라는 기약이 기어코 가능해지는 이유이다. 시집을 닫는 산문 「병과 함께」는 “병과 함께 건강하시길. 충만하시길”이라는 말로 우리의 안녕을 빈다. 무엇도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는 현재의 삶을 그래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책임한 약속은 잠시 내려두고 삶에 달라붙은 잔여물을 격리하지 않은 채로 그것과 함께 오늘을 연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을 되뇌는 것이다.



4. 나가며


  오직 인간이 쓰레기를 만든다. 쓰레기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인류세 시대란 무엇이 쓰레기로 가치판단 되는지를 면밀하게 살피는 한편, 생산된 쓰레기로 포화상태가 된 현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마윤지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격리해 둔 현상과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묻힌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쓰레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다. 무엇도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맞바람이 치는 공간 속 오가는 연결만이 모종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생명이 연장되는 소박하고 우렁찬 원리이다. 박소란의 시집은 쓰레기 자체를 가시화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달라붙어 끈질기게 삶을 구성하는 불순물을 그대로 놓아두고 흙과 쇳조각이 섞인 물을 먹고 마시는 와중에 연장되는 삶을 그린다. 아침에 눈을 떠서 변기를 바꿔야겠다는 최소한의 기약으로부터 지독한 현실이 계속될 수 있는 이유를 찾는다.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삶에서 연장되는 미래 정도는 기약할 수 있다. 건강하고 충만하고 싶은 소원에 따라붙는 ‘병과 함께’라는 수식을 그대로 남겨두고, 일단은 조금 더 살아보자는 최소한의 기약으로 미래를 연장할 수 있다.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라는 구절처럼 이 세계에는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다. 이건 세계가 멸망한 이유이면서, 세계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말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일단은 문학의 장소인 변두리를 두리번거리며 달갑지 않은 사물과 현상과 정서를 이것저것 손에 쥐어 본다. 소개한 두 권의 시집은 적어도 쓰레기를 처리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의 수칙을 일러 주고 있다.


  • 1) 브라이언 딜, 『쓰레기』, 플레이타임, 2017, 13쪽.
  • 2)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2008, 64쪽.
  • 3) 브라이언 딜, 14쪽.
  • 4) 지그문트 바우만, 39쪽.
  • 5) 문제는 가치가 없다는 낙인이 찍힌 자들(현상들)이 어떠한 수단을 활용해 유용함에 부합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경우 그들의 가치가 구제될 가능성이 있느냐/없느냐가 아니다. “이제 분명하게 규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발견해, 그러한 수단을 단단히 틀어쥐고 최대한 노련하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목표의 모호성(그리고 종종 기만성)이 문제이다 ─ 목표는 우리의 손이 닿기도 전에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리며, 고정되어 있지도 신뢰할 만하지도 않고, 통상 헌신적으로 매진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쪽)
  • 6) 브라이언 딜, 12쪽.
  • 7) 같은 책, 15쪽.
  • 8) 마윤지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연천」이라는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힌 바 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연천에 밭일을 하러 갔어요. 더위를 식히려고 근처 천에 몸을 담그고 큰 플라스틱 바구니를 튜브 대신 가지고 놀았어요. 졸업하고 몇 년 뒤에 그 천과 천에서 이어지는 강까지 온통 핏물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사진 속 강은 너무 달라서, 알아보기 어려웠어요. 열병 유행 때문에 돼지를 마구 생매장했는데 당연히 땅은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 했어요. 물과 땅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도요. 아마 소화하지 않은 것일 수도요. 이후에 「연천」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어요. 써야만 했어요.” (마윤지 “다 사라지고 시 앞의 사람만이 있길 바라며 엮었어요” https://ch.yes24.com/Article/View/5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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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유계영박지일서윤후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박동억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김안변혜지엄시연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침묵하기/눈감기/세계와 만나기 ― 한강『희랍어 시간』

1. 글자들을 연달아 읽는다. 또는 연이어 쓴다. 복수의 단어나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연결한다. 이 일을 거듭하다 보면 글자와 마주 접촉하기 어려워지는/괴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여기서 ‘글자’란 문학으로 불리는 텍스트뿐 아니라, SNS 안에서 빠르게 휘발되는/스크롤되는 게시물이나 우연히 들른 장소의 벽에 부착된/전시된 글 역시 포함한다.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매 순간 글자와 공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글자를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글자 역시 나를 읽지 못해 버벅대는 것 같다. 글자와 내 사이 공간이 흐려지는,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제대로 벌어지지 못하는 느낌은 여러모로 불쾌하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체 자체가 글자를 거부하는 듯한 현상이다. 드물지만 종종 읽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다. 몇 문장을 연달아 따라가는 것만으로 눈이 아프고, 머릿속에 지진이 일며, 눈과 뇌 사이에 놓인 통로가 복잡하게 뒤틀린다. 비슷한 순간이면 겁이 난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되면 어쩌지? 어떤 글을 읽어도 감정의 동요는커녕, 책 읽는 지루함과 싸우는 일에도 번번이 패배하게 된다면? 글을 읽는 것이 가장 즐겁고 흥미로운 시기는 내 삶에서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후 오래도록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내게 의무적인(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행위이자 그럼에도 분명히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일, 그러므로 계속해서 뛰어드는 사건이 되었다. 이 같은 점에선 걷거나 헤엄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길 위나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매번 번거롭고 피로하며, 직접 움직이는 순간도 썩 신나진 않지만, 행위를 끝낼 즈음에는 매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을 구성하며 또한 지탱하고 있다고. 따라서 글자를 읽는 것이 내게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더 나아가 도무지 불가능한 행위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슬그머니 두려워졌다. 이것 없이 살아갈 결심을 여러 번 반복했어도, 이 일 없이 살아가는 미래는 여전히 흉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글과 내가 맞부딪히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에 어떤 칼/스파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나 근래 읽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이같은 나의 섣부른 고민이나 두려움, 지루함 등을 금세 허물었다. 더불어 내 안에 놓인 줄도 몰랐던 여러 천장과 기둥 그리고 바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2. 한국어로 책을 읽게 된 이후, 그리고 ‘한국문학’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조금씩 접하기 시작한 이후, 근래처럼 한 작가의 이름이 여러 플랫폼에서 오르내리고 또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토록 큰일이었으며, 다양한 시사점을 갖고 우리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독자·편집자·작가를 비롯한 주변 ‘문학인’들의 SNS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한강 작가와 책의 사진을, 작가의 인터뷰나 낭독 영상이 담긴 뉴스를, 그의 소설이 전하는 역사/참사를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의 수상 소감이 각종 글에 인용되어 퍼져나가는 모습 역시 보았다. 몹시 많은 글자였다. 각 글자가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울림도 분명 있었으나, 그 울림의 형태를 살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글이 밀려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 읽지 못한 그의 책 한 권과 독대하는 방식으로 이 위기를 거쳐나가고자 마음먹었다. 하나 책장을 펼친 후, 나는 몇 번이고 독서를 멈춰야 했다. 문장들이 쌓일수록 숨이 막혔고 종래에는 몸 안쪽 어딘가가 허물어졌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보다 ‘덜 괴로운/어두운’ 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책은 내가 그간 읽은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과 시, 산문만큼이나 괴로웠다. 혹은 그보다 더욱 힘겨웠다. 『희랍어 시간』의 두 화자는 어느 날 말을 잃은 ‘그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기 특수한 삶의 맥락에 놓인 두 개인의 몹시 사적인,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또 세계를 마주한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거시적인 혼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놓이기 이전, 그리하여 세계의 입술과 눈꺼풀을 거침없이 만지던 짧은 유년기가 끝나면 삶은 도리 없이 복잡해진다/부풀어오른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타인의 신체처럼, 작동 방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괴물/기계의 몸처럼. 언어도 그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을 털어놓다가도 문득 미시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언어 하나하나가 지닌 밀도가 문득 실감나고, 그것들이 어긋나며 생기는 폭발이 보인다. 멀미하지 않으려면 언어의 밀도를 아예 모른 척하거 나, 폭발에 무뎌져야 한다. 이는 이미지/형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보는 것, 그리하여 인지하는 행위는 간혹 그 자체로 칼이 된다. 내가 방금 찔린 자국을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범이 시작된다. 세계 속에서 무엇이 넘쳐흐르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넘쳐흐른다. 『희랍어 시간』은 이 홍수에서 침묵하거나 눈 감은 이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침묵하거나 눈 감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 시작점은 고요와 어둠을 그저 부재로만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점차 어두워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사랑과 관계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고, 그녀는 자신의 침묵을 진단하고자 하는 의사에게 거듭 말한다/적는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11쪽) 3. 말을 잃고 빛을 잃어가는 두 인물의 손안에 희랍어가 있다. 낯설고 오래된 언어. 수동태와 능동태 대신 재귀적으로 주어 자신을 향하는 제3의 태를 지닌 말.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26쪽)을 갖춘 채 쓰이던 언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와 소리로 오간다. 희랍어의 중간태/재귀태는 문맥에 따라 주어가 동작에 참여하는지, 혹은 동작이 주어에 가해지는지 등의 여부를 표현한다.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형식처럼, 희랍어를 사이에 둔 그녀/그는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 날로 더해가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거나, 손바닥에 느리게 글자를 적어가는 방법을 터득한다.『희랍어 시간』은 망가진 세계를 복원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제자리로 돌려두지 않는다. 다만 무너진 자리에서/눈 감거나 침묵한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령 끝없이 어긋나는 접촉,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하여 이어지는 언어 같은 것. 다만 이 소설과 독대한 이후 무너진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괴로운/외로운 경험만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한강한국소설희랍어시간문학문학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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