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픽션들 — 집 , 여행 그리고 일기 , 편지 혹은 작별, 죽음 : 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행나무, 2024) 조해진,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2024)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1)
1. 픽션 너머 픽션들
창작된 것이 창작되지 않은 것처럼 제시되어야 한다는 픽션의 기본 원리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도 꽤 흐릿하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성 서사, 퀴어 서사 등으로 뚜렷한 경향성을 마련한 한국문학이 각종 에세이와 질병 서사 형태로 등장한 회고록 형식과 만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복원 역할을 지속해 온 한국문학의 성격이 강화된 길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사의 영역으로 옮겨진 실제적인 상황-사건과 창작된 것 사이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국면에서, 한국문학의 문화기술지적 면모와 자기서사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작된 있음직함(이것은 현실임직함이기도 하고 사실임직함이기도 할 터이다)이 진실성에 좀더 근접한다고 믿었던 픽션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불신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한 픽션의 경계에 대해 사유를 환기해보게 된다.2)
이는 독서를 지체시키는 창작된 것에 대한 검토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지체가 서사에 도입되어 있는 요소들, 가령, 공상, 환영, 꿈, 여담, 읽은 것과 본 것에 대한 회상,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이나 일기, 편지, 사진, 영상물과 같은 다양한 기록들이 야기하는 서사적 균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요소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동원하게 하는 픽션 충동을 환기한다. 흥미롭게도 배수아의 장편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과 조해진의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는 꽤 상반된 방식으로 그 픽션 충동을 살피게 한다. 화자나 인물 혹은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창문을 통해 창작된 것 내부로 진입해서 창문의 요소를 잊게 만드는 방식을 거절하며 끊임없이 창작된 것이 창작되었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두 소설이 낯선 독서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서사를 파편화하거나 서사의 일관성을 거부하는 위반성 자체가 창작의 목표는 아닌 것이다. 기존의 틀에 의해서는 결과적으로 소거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절박한 부여잡음이자 그러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조화하는 방식을 중단시키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조해진 식으로 말하자면, “배경은 아름답고 구도는 안정적이되 그 안의 사람들은 더 아프고 더 불쌍하게 보이는 사진, 혹은 끊임없이 잔인한 이미지를 징집해서 찍은 사진이 과연 세상의 분쟁을 막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3)와 같은 질문으로 구체화되는 예술에 대한 의심과 성찰을 통해, 사진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길이기도 하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과 『빛과 멜로디』는 집, 여행, 이주, 난민을 두루 우회하는 이동과 경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공히 새로운 경험의 지평을, 내내 있었지만 창작된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세계를 가시화한다. 그것은 공동체 없는 공통 경험의 가능성의 세계라 할 만한다.
2 순환하는, 기억하는 상상
배수아의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첫 문장인 “여행의 시작에 우체부가 왔다.”를 통해 이 책의 독서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임을 넌지시 알린다. 장면을 지시하는지 상황을 기술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어지는 “이것은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이다. 여행은 편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편지는 무엇으로부터 왔는가?”(p. 7)라는 문장이 더해져도 앞선 궁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인지,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인지도 확정되지 않은 채 소설은 계속된다. 창작된 것으로서의 소설의 층위가 묘사인지 기술인지 사유인지 확정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이 문장들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곧바로 창작된 것으로 진입하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지도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서 독서는 불확정성이 증폭되는 시간이다. 배수아 소설의 매력은 우선적으로 앤티크 풍의 그 불확정성에서 발생한다. 동일한 인물임에도 다르게 명명될 수 있는 맥락이 좀더 존중되고 기억의 작용으로 매번 정보의 정확성은 훼손된다. 서사의 진전은 수많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부가되는 정보들은 앞서의 확정된 상황이나 의미를 좀더 공고하게 하지도 안정화하지도 않는다. 독서 경험은 지금껏의 모든 장면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일면적인 시야가 만들어낸 잠정적인 것일 뿐임을 확인하게 한다. 인물들의 정체는 매번 미끄러지며 불완전한 채로 남겨진다. 우리의 삶이 그런 방식으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오히려 서사 자체의 규약을 다시 환기한다.
편지가 도착하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어떤 것과 우연히 마주친 직후였는데, 그것은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인 숲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한다.(7쪽)
하지만 곧 나는 기억하기를 멈추었고, 책을 잊었고, 책장에 손을 뻗기 전에 하고 있던 일, 편지 쓰기를 계속했다. 마치 그 사이-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곧 다시 멈추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의 눈앞에 주황색 X자 벌목 표시가 된 너도밤나무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산림감독관(그는 우체부와 비슷한 모양의 제목을 입고 있다)이 나타난다. 어렴풋이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분명 홀로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두막 앞에 홀로 있는 사냥꾼의 개. 나는 검은 털로 덮인 개의 얼굴을, 검은 웅덩이처럼 물이 고인 그늘진 눈동자를 눈앞에서 본 것만 같았다. 내게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을, 나는 본다. 한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9-10쪽, 밑줄 강조: 인용자)
의미 전복이나 재편의 연쇄에서 독서의 유희가 발생하며, 그것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선명한 풍경에 대한 끌림을 유발한다. 그러나 소설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우체부에게서 편지를 받은 일이라는 ‘오늘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불시에 야기한 연상의 소용돌이나 불러온 기억의 장면들에 더 가깝다. 좀더 정확하게는 생각의 소용돌이의 연쇄들, 이미지의 형태로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아니, 흘러가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는 일, 시간의 흐름의 진전을, 진전이 일어나는 순간을, 그 순간 속의 순간을 과거 속의 현재와 미래를 시제 활용으로 잘게 쪼개며 가시화한다. 시간의 흐름을 보이는 것으로 언어화한다. 그리하여 소설에서 시제는 뒤엉키고 화자와 대상 사이의 관계는 역전된다. 서사의 구조는 뒤틀리며 법칙은 파열된다.
랑시에르는 분류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제발트의 글들을 두고 픽션의 새로운 장르로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토성의 고리』와 같은 작품들에서 픽션의 지형을 구축하고 체계를 이루는 일련의 “간극들”의 작동을 발견한다. 제발트의 글을 “분류할 수 없는”(150쪽) 것으로 만드는 요소로 서술이 여담으로 대치되고 의미가 없는 세목 속으로 가라앉고, 시간과 공간들이 규칙 없는 몽상 속으로 흩어져 버린다는 점을 든다.4) 흥미롭게도 『속삭임 우묵한 정원』에서 기억의 여정 사이에는 편지에 대한 여담, 여행에 대한 상상,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 속의 사람들」을 둘러싼 상상, 숭배의 감정, 경찰의 조서, 꿈의 기록, 손님맞이용 식사 준비, 경찰관 부부가 인도 여행 중에 보낸 엽서 내용, 독립영화 촬영 그리고 “편지에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나며, 편지의 낭독 사이사이 배우들이 편지 내용을 연기로 보여주는 형식”(p. 250)의 연극에 대한 기술로 채워진다. 돈암동에 있(었)던 하숙집 풍경은 이국적이기보다는 다국적의 면모로 무국적의 공간처럼 구현된다. 기억, 회상, 상상, 꿈이 뒤엉켜 흐르지만 시간은 순환하거나 유전한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구축하는 심층의 충동은 경계 혹은 그 간극에 대한 질문이자 성찰이다.
1인칭 화자의 고백적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속삭임 우묵한 정원』의 서사를 고백으로만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 화자가 기술의 전권을 쥐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 스스로 반복해서 언급하듯 뭔가를 들었는지 보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을” “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고자 하는 의지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 앞에 화자가 노출된 것에 더 가깝다. 기억 혹은 떠오르는 시간의 흐름을 장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화자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기억이 자신에게로 당도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은 화자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은 기억이며 장면이고 사건이다.
편지에서 나는 마치 꿈을 묘사하듯이 집을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꾸며낸 거짓말은 아니다. 하숙집은 옛 모습 그대로 내 꿈에 종종 등장했으므로 그곳은 실제이면서 동시에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집은 점점 더 꿈의 영역으로 건너가버렸다.(85쪽)
기억의 여정에서 서사적 규약에 의한 진실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며 인물과 사건의 정보가 뒤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기억으로의 여행은 하숙집을 텅 비게 만들어버린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의 배경인 집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화자가 지붕 위에서 놀다가 아래로 떨어져 병원에 오래 있었다고 한다. 화자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장막 속에 가둬둔 망각된 과거를 복원한다. 아마도 화자는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실어증을 앓았기에 심리 상담을 받았고, 아동심리학자에게 쓴 진술서에서 그 사건의 가해자로 MJ를 지목한 탓에 이후 그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그것은 미제 사건으로 남은 친모의 영아살해, 열 살 난 딸 살해기도 사건으로 언급되지만, 그것의 진실 여부도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생일날 MJ로부터 편지를 받는 나는, 오랫동안 잊은 채로 지냈던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영혼의 거주지로서의 집을 향한 기억의 회로가 열리지만, 회상 행위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과 만나는 여행에 가깝다.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사건은 변주의 다발이 되었고 그리하여 기억은 가닿을 곳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삭임이 내 입을 통해서 속삭이는 것을 듣는다. 내 몸은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의 파편들이 거주하는 집이다. 내가 죽으면 그 말들은 또 다른 집을 찾아서 흘러갈 것이다.(165쪽.)
단 한 번으로 끝나버린 공연에서 프롬프터였던 화자에게 연극 대본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태초의 소리로 존재했다. 출처를 알지 못했던 그 속삭임은 연극 대본의 파편들로 화자에게로 돌아왔으며, 그러므로 “아주 멀고도 우묵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152쪽) 속삭임은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는 그 연극 대본이자, 그것을 쓴 MJ의 목소리이자 얼굴이고 그것은 또한 화자인 나의 다른 목소리이자 다른 얼굴이다. 화자는 “오랜 시간을 표류하다 다시” 그 자신에게로 돌아온 “속삭임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165쪽) 그리하여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 화자가 만나는 것은 잃어버린 기억도 그 기억의 원형인 사건의 확정도 그 자신도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자신이 개별자가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적인 반복이자 변이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 자매와 마찬가지로, 되돌아온 속삭임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며 그 소리가 자신의 몸에 잠시 거주한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엄마와 딸, 개인과 가족 그리고 집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무관해진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을 향한 복수의 일환으로 제 자식을 살해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속삭임의 이끌림을 통한 회상은 교통사고를 당한 MJ에게서 태어나던 날, 그 “최초의 순간”(323쪽)에 가닿는다. 임신한 MJ의 몸 안에 (아직 밀도 목주도 아닌) 태아로 존재하는 그때를 본다. 태아로의 회귀 열망은 죽음 충동으로 읽히기 쉽지만, 그것은 오히려 순환하는 운명, 혹은 여행, 과부로, 비제도적 결혼의 방식으로, 실패한 결혼으로, 반복되는 여성 3대의 운명의 연쇄를 건져 올린다. 화자가 탄생의 순간으로 회귀하는 여행의 기록으로서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흥미롭게도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로 여성의 삶을 반복하게 하는 커다란 궤적 같은 것을 소설 위로 밀어 올린다.
3. 수평한 연결, 사람들
소설집 『빛의 호위』(2017)에 실린 단편 「빛의 호위」를 장편소설화한 신작 『빛과 멜로디』는 희미하지만 단단하고, 보이지 않지만 명백한 어떤 흐름과 그 영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빛과 멜로디』는 2022년 11월 25일에 시작되어 2024년 2월 21일에 마무리되는 편지 형식의 기록물로 축조된 소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단편에서와 달리 서술 화자가 아닌) 승준이 초등학교 동창인 권은에게 블로그를 통해 전한 편지로 시작된 흐름이 승준의 아이인 지유를 수신인으로 한 권은의 편지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지면서 마무리된다. 후속 세대인 아기가 수신인인 마지막 편지가 말해주듯, 편지라고는 하지만 일기이자 정보의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갖기에 거기에는 꽤 많은 잉여적 관계와 사건이 삽입되어 있다. 형식적 간명함에도 불구하고, 승준과 권은 사이에서 오간 이 편지 형식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빛과 멜로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듯, 승준과 권은의 관계를 기성의 명명법으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친구, 가족, 동료처럼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사이가 아니다. 승준이 분쟁 현장의 사진을 찍어온 권은을 인터뷰하면서 둘은 이십여년 만에 재회하지만, 권은이 작가가 된 계기가 승준이 건넨 카메라임을 그는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자신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전했던 호의의 여파를 승준이 확인한 것은 7년의 시간이 흐른 뒤이지만, 이후로도 그들이 나눈 깊은 신뢰나 연대감은 사적인 친밀성과는 꽤 다른 질감의 것이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록이지만, 승준과 권은의 관계가 품은 시간이 30년에 달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들 사이에 놓인 사람들과 그 사연의 시간은 한 인간의 생과 맞먹는 부피를 갖는다. 소설 내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2013에서 2009년까지의 시간 역진은 말할 것도 없이 둘 사이에 놓인 기적과도 같은 ‘사람들-연결들’과 그들의 사연들로 백여 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오른다. 소설 내에서 그 시간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쇄로 방사형의 망처럼 촘촘하지만, 사실 그 시간은 전쟁의 시간이자 그곳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다. 그 시간 위에 사람들 사이의 연결선을 겹쳐 놓으며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156쪽)을 불러일으키는 구원과 희망의 시간이기도 했음을 전한다.
요컨대, 『빛과 멜로디』는 길고 긴 빛의 여정이자 멜로디의 여정이다. 빛의 여정이 한 갈래의 실처럼 이어지고, 멜로디의 여정이 다른 갈래의 실처럼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계기 삼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여정이 타래로 얽히며, 이 여러 갈래의 여정이 사람들을 스치거나 만나게 하면서 그물망처럼 퍼져간다.
어느 날 손에 들어온 카메라로 나는 다시 세상과 연결되었어요. …… “카메라는 나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물이었죠.”(128쪽)
“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을 생각하던 내게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준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127쪽)
빛의 여정은 학급 대표로 장기 결석 중인 반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열두 살의 승준이 죽음 가까이에 있는 듯한 권은에게 건넨 카메라로 시작된다. 멜로디의 여정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 당시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알마 마이어를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던 연인 장 베른으로부터 시작된다.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그들은 이후로 다시는 음악을 연주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장은 그녀를 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빌린 돈을 갚느라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그녀는 탈출한 이후에야 알게 된 임신으로 가정교사로 일하며 아들과 살았다. 장은 아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그들은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노먼은 장이 어머니를 살린 일을 자신의 생에서 반복하고자 했으므로, 그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게 했고 분쟁 현장에서 전쟁의 폭력과 사람들의 고통을 사진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죽음이 아니라 삶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173) 작업을 이어가게 한 것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84) 장이었다고 해야 한다. 쓰레기 같은 전쟁에서 죽을 뻔했던 여성을 살린 일은 노먼의 삶을 통해 반복되고 계승되었다.
게리 앤더슨이 노먼 마이어에 대해 찍은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를 통해 권은, 승준, 승준의 아내 민영이 순차적으로 알마 마이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영상의 바깥에서 권은은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영역을 알게 해준 그 게리 앤더슨을 통해, 정확히는 그의 사진과 그에 대한 그녀의 기고문을 통해 게리 앤더슨의 동생인 애나 앤더슨과 알게 된다. 권은이 그리스의 레스보스섬에 있는 대규모 난민 캠프에서 피사체로 만났던 어린 소녀인 살마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뿌리 내리고 정주할 틈을 마련해준 것은 일면식도 없는 애나 앤더슨이었다. 애나가 살마에게 베풀었던 대가 없는 호의는 권은을 통해 사연을 알게 된, 승준이 프로젝트로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전쟁터에서 잠시 피할 수 있도록 영국으로 초청함으로써 반복되고 다시 한번 확장된다. 빛의 여정의 끝에 나스차가 있었다면 멜로디의 여정의 끝에도 나스차가 있었다. 빛의 여정이 멜로디의 여정이었음을 나스차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 여정이 사랑의 여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거기가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그 여정을 뒤쫓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소설에는 꽤 많은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소설에는 알마 마이어와 노먼 마이어 가족, 게리 앤더슨과 애나 앤더슨 그리고 그의 아버지 가족, 난민 캠프로 오는 동안 가족을 잃고 이후 영국에 정착해서 학교에 다니고 시민운동을 하다가 결혼을 한 살마 가족, 약사인 남편을 전쟁터에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스차 가족, 나스차의 이웃인 옥사나 가족, 그리고 승준 가족과 마지막으로 권은 가족의 이야기가 복잡한 관계를 이루며 흩뿌려져 있고, 그들의 사연이 다소간 서사라기보다 정보로서 제시되어 있는 기도 하다.
물론 『빛과 멜로디』가 쉬이 읽히지 않는 것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연결망이 복잡해서는 아니다. 가난하고 고독했던 초등학교 시절 화자인 승준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가 계기가 되어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며, 시리아 난민 캠프로 취재를 갔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사진작가 권은, 사재를 털어 마련한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다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유대계 미국인 퇴직 의사 노먼 마이어 등 단편 「빛의 호위」와 소재와 모티프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창작의 방식을 구사한다. 단편소설 「빛의 호위」에서는 장편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는 호의의 연쇄, 장에게서 출발해 알마 마이어와 노먼 마이어를 거쳐 헬게 한센과 권은 그리고 화자인 ‘나’-승준에게로 이어지는 빛의 여정이 비교적 뚜렷한 선을 그리며 가로지르고 있으며 여러 인물과 사연이 원근법적인 조망 속에 배치되어 있다.
『빛과 멜로디』에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자가 따로 없으며 언급된 많은 인물이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는 듯 서술되어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차별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목해야 할 특징이다. 무엇보다 어떤 서사적 역할도 하지 않는 인물들, 말하자면 서사적 잉여로 불릴 법한 이들의 대한 자세한 소개는 독서를 지연시키는 동시에 다른 작업의 시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게리 앤더슨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그의 아버지로 독일 드레스덴에 소이탄을 퍼부은 영국 공군 소속 조종사 출신인 콜린 앤더슨(2022. 7. 21.)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온 나스차(2023. 1. 16.) 그리고 나스차의 이웃 할머니로 전쟁터에 남겨진 러시아 출신의 옥사나(2023. 2. 13.)의 목소리와 그 사연은 『빛과 멜로디』가 호의의 궤적으로만 이루어진 낭만적 세계에 대한 기록이 아님을 보여준다.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전쟁의 폭력을 가해자의 자리에서 행사했던 이의 목소리와 잔혹한 굶주림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 참혹함을 기록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그 죽음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강력한 의지의 표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전언에 따르면, 이들은 태생이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며, 가난과 전쟁과 폭력적인 상황이라는 조건은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행운을 통해서나 간신히 비껴갈 수 있는 개인 너머의 것이다.
『빛과 멜로디』는 픽션이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할 힘의 위계, 서사의 주요 인물과 주변에 놓인 인물 사이의 위계를 거부하며 인물들의 사연을 동일한 무게를 갖는 증언이자 기록으로 다루면서 소설 전반에 걸쳐 배치한다. 소설은 빛과 멜로디의 여정이 가닿는 사람들, 그들이 공유하는 사연들을 풀어 놓으며, 각각의 에피소드에 동등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소설 내에서의 기능적 중요도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무게, 그 역사의 무게가 갖는 비교 불가능성을 지면의 할애를 통해 구현하고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게 서사의 본래적 폭력성에 대항한다. 일기 혹은 편지 형식으로, 블로그를 통해 줌을 통해 전해지고 되돌려지는 목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고 서울, 런던, 레스보스섬, 가자지구, 바그다드, 브뤼셀, 우크라이나를 연결한다. 다양한 방식의 기록을 통해 증언하고 부재와 현존을 연결시킨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무고한 죽음에 맞서는 픽션 열망은 그렇게 소설을 “근본적으로 수평으로 구축하는 방식”5)을 통해 구현된다. 픽션에 대항한 픽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빛과 멜로디』는 증언의 윤리를 획득한 그 세계 안에서 누구도 주인공은 아닌 채로 권은을 포함한 인물 모두를 성장시킨다.
- 1)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문학동네, 2023, 82쪽.
- 2)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50쪽.
- 3) 조해진, 빛과 멜로디 , 문학동네, 2024, 172쪽.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성찰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은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자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빛과 멜로디 , 60쪽.
- 4)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50쪽.
- 5)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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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비로소 더 잘 실패하기 김근의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에게서 에게로』는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본연의 기능에는 관심이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거부하고 의미의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문시가 많고 시의 행도 긴 편이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자유연상을 따라 말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의미는 저 멀리 달아난다. 출처를 규명할 수 없는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를 끌고 간다. 김근의 시는 무언가 선명하게 비추거나 재현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을 끌어당긴다. 김근의 시는 빛에서 어둠으로 이행 중이다. 시집의 맨 처음 놓인 「이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준 적 없는데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이사」) 이 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집주인이지만 “흘려놓은 흔적들”로 존재하는 당신을 점점 기다리고 당신의 어둠을 단속하다가 급기야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들어” 간다. ‘나’는 당신과 어둠 속에서 오는 말들에 매혹당한 자이다. 「이사」의 화자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 않는 당신의 어둠 속에 살기로 한다. 대상을 알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살던 집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저 밝은 곳에 남겨”(「이사」)진다. 이 시집은 독자 역시 의미의 집을 나와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실체가 드러나도록 대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러나 대상을 명료하게 하는 일은 그것을 가두고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는 다른 지각과 인식을 만난다. 그것은 언어가 수행하는 명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가려진 문장」)이 그렇게 태어난다. 서러우니, 에는 어떤 거리들이 몰아쳐와 들러붙는 것이어서 생으로 떨어져 젖은 이파리 같은 것들 잘은 또 떨어지지는 않기는 않았기로서니 아프니, 쪽에 살아만 있는 꽃향기 자욱만 하고 지독만 하고 몽롱한 봄날 하늘 갑작스럽게 날 흐리고 스산하고 주어도 없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형들 거기로 서러우니, 하는 목소리도 아프니, 하는 목소리도 죄 빨려들어가더란 이야기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 「서러우니, 아프니,」 중에서 언어는 편리하지만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호이다. ‘서러우니’, ‘아프니’는 ‘이파리’와 ‘꽃향기’처럼 가깝고 서로 감각적으로 구분되는 말이지만 이 말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헝들”로 “죄 빨려들어가” 버린다. 의미 기능에 충실한 언어는 쉽게 관성의 늪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거느리는 느낌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는 소거된다. 통상적인 문법은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는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를 외면한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바깥”에 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자는 기존의 문법이나 재현에 의존한 완성이 의미가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완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김근의 시는 부사어를 좋아한다. 부사는 문장의 완성과 관련 없지만 상태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확신할 수 없고, 희끗, 그저 희끗, 희끗거리는”(「희끗」),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어슴푸레」) 모르는 상황에 어울린다. 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된 말은 유희적이다. 언어는 의미 대신 리듬으로 흘러넘친다. 김근의 시는 “‘너’가 있었다”는 문장을 다시 쓴다. “너는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있었다고/추측된다 너를 둘러싼 적막이 얼마나/시끄러웠는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다만/있었고 있었다고 추측될 뿐 지금 없다 없었다고는//차마//추측되지 않는다”(「혼자 있는 사람은」)라고. 무엇을 확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너’는 ‘사이’에 있고 추측에 불과하다. ‘사이’는 사실과 추측, 현재와 과거, 적막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김근의 시적 화자는 말할수록 이방인이 되어간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고 벗겨내도 벗거내도 다는 벗겨지지 않는 그저 얼룩인” “난 당신이 방금 봤던 내가 확실한 거야?”(「사이사이」). 언어가 실재와 상관 없는 추상적 기호라면 이 세계도, ‘나’, ‘너’, ‘당신’도 이름만 있을 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사이사이」는 매트릭스처럼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 ‘사이’의 존재론을 펼친다. “누가 우리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만 기록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은 주체의 확고함을 의심한다. 화자는 우리를 “시 안에서 꼼짝없이 가둬놓고 거기 바깥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넌, 넌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이’는 안과 밖, 말하는 자와 글쓰는 자가 지워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는 그저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게 아니오?”(「정류장」).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개념이다. “영원히 지연”되는 기다림 속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윤슬」)다. 문법적 주어만이 아니라 단일하고 견고한 자아 정체성으로서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김근의 시에는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켜켜이 깃든 누군가”이고 그래서 ‘나’라는 관념 역시 “그만 산산이/깨어져버리”(「거기, 없는」)고 만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오류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지닌 관념과 인식, 생각들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임시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곡우’라는 낱말이 “본뜻과 헤어져버려 본뜻이 무엇인지 떠올려지지도 않게끔. 떠올려봤댔자 이미 모르게만 되어버”(「곡우」)리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뚜렷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특정할 수 없는, ‘에게서 에게로’ 가는 과정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언어와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근의 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모른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세 사람이」). 그의 시는 주체의 의도와 의지를 놓아버린 채 낱말들의 중얼거림에 시를 내맡긴다. 이를 두고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을 불신하는 해체주의 실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수동성이 “반짝임과 반짝임 사이 어둠 속으로”(「윤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 틈새가 시의 자리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라고 말했다.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익숙한 관념을 벗어나 의미의 불안정한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는 시도이다. 시는 애초의 의미를 허물고 “잘 잘못 써진다. 비로소 시는 잘 실패한다”. 김근의 시가 증명하듯 의미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지만 “다시 더 잘 실패”하고 “더 더 더 실패”(「세 사람이」)하는 형식으로서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에게서 에게로’, 낯설고 모르는 곳으로. 잘 실패하는 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최전선이다. 다행히 김근의 시는 잘 실패하고 있다. 시, 자기 구원의 여정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이루어진다”(「진흙연못」). 이 구절은 김태형의 시의 중심 문장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의 음악에 자기 심장 뛰는 소리를 포개어 놓는다. 살아 있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화자들은 기꺼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서정시의 문법은 세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다. 김태형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성찰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흑백고원」에서 늙은 나무들이 화석이 되어 비와 햇빛을 견디는 모습을 “자기 자신을 견디는 동안”으로 이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계기이다.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심장을 내가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과 후회가 “부는 바람”에 지나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는 바람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온통 황막한 벌판”에 서 있는 늙은 나무들에게서 시작된 삶의 지혜이다. 자연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을 일깨워우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넘쳐흐르고도 남은 말이 있었으니/물고기 한 마리가 느닷없이/네 푸른 입속으로 뛰어들었다”(「잉어」)도 그런 경험에 해당된다. “자꾸만 차오르고 넘쳐흘러 튀어”오르는 마음 속의 말은 잉어와 같다. “어느 때인가/나를 치고 올라”오는 말과 잉어의 속성은 은유를 통해 연결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같다는 인식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작용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변 동물의 생태는 그에게 삶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바닥처럼 자기를 움쳐쥐고 있다”(「도마뱀」)거나 “쫓기다 살아남은 고양이 한 마리/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사체를 냄새 맡는 고양이”(「허리가 긴 흰색 고양이」), “제 울음소리를 부러진 발톱으로 할퀴어 놓기만 하다 가는 고양이”(「야윈 고양이의 달」)는 관찰자의 예상을 비켜가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속으로 울음을 품은 것이 고양이만은 아닐 것이다. 김태형의 시에서 ‘나’와 동물의 거리는 가깝다. 예측불가능한 삶의 속성과 훼손되는 생명의 실상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동물을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행자이다. 그는 “잔물결이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내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다 들려주고 가는”(「여행자」) 풍경 속에 있다. 김태형의 시적 화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흑백고원」)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을 고백하는 대신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 만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여정, 이번 시집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에서 만난 ‘죽은 개’는 인간의 희로애락도 한 시절이며 모든 것들이 소멸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가만히 알려주고 있다. “나 역시 나를 지나가고 있”(「죽은 개가 내 이마에 침을 흘리며 지나간다」)다. “나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달의 뒤쪽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다」)는 인식 역시 그러한 자기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김태형 시의 화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거나 듣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성찰의 힘을 잃지 않는다. 느릿느릿 커다란 트럭이 앞서 가며 모래와 부서진 자갈을 뿌린다 경사진 길을 오르지 못할까 싶어 바짝 따라가다 바람이 얼어붙은 곳까지 다다랐다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은 절벽을 다 내던진다 누가 이곳까지 올라와 긴 숨결을 한없이 내려만 놓고 있었는지 내 입술에 묻은 하늘마저 파르르 떨린다 한차례 묵은 눈가루가 흩날리자 한 줌의 그림자가 햇볕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벽은 절벽 앞에 서 있다 그러자 묵은 눈이 또 내린다 눈은 내리고 나는 허공에다 입을 벌리고 저녁으로 서서 하얀 입김이 되어 있다 ― 「어느 절벽」 전문 절벽은 절정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이 시의 절벽은 말하는 이의 마음 풍경처럼 읽힌다. 바람이 얼어붙고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리는 곳. 절벽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결빙과 해빙이 동시에 일어난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나무는 결박된 것을 스스로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을 만든다. 절벽 위에서는 절벽도 절벽을 다 내던진다고 한다. 절벽은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는 고백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절벽이 어디쯤 있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절벽 앞이다. 다 놓아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다 놓아줄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은 정직하고 소중하다. 고통 없이는 그런 깨달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쌓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묵은 눈이 또 내린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이 되는 ‘나’는 가볍다. 절벽 앞은 두려움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고, 숨 쉬는 것처럼 그렇게 삶은 계속될 테니까. 시집의 표제작인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에서 마지막 양 한 마리는 자기 자신이다. 고작 열 마리 뿐인데도 사라진 양과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어렵사리 양을 세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는 약간의 우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라는 대목은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니, 하지만 양을 세는 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반대로 이해하자면 마지막 양 한 마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절벽까지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양을 찾는 데만 급급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열 마리의 양을 세는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내면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은 자기 구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나의 일과”(「저물녘에 돌 하나 던지다」)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라는 통찰을 얻는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 선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경험이라 울림이 있다. 김태형의 시가 좋은 서정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무엇이라도 곁에서 곁에서” 듣기 위해 “내 작은 귀는 햇빛처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있었”(「귀」)고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벽의 거대한 허공에 맞먹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있다. “마냥 길을 따라 흘러가다 길이 되어 버릴” “바람만을 따를 뿐인”(「진흙 연못」) 이 커다란 자유의 여정이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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