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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들 | 2025년 봄호(제79호)

바람재에 앉아 무등의 진경을 그리다

김규성 시, 산문, 문학평론

2000년 『현대시학』에 시 「달동네 2」 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2015년 송순문학상 우수상, 2021년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중심의 거처』와 비평집 『남도 시의 현재와 미래』,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뫔』, 『모경(母經)』, 『산경(山徑)』 등이 있다. 창작 활동과 함께, 이태관 시집 『어둠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을 비롯하여 약 85편의 시평 및 시집 해설을 집필하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쳐왔다. 송순문학상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다양한 인문학 주제로 강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백수인과 이지담, 박현우는 남도의 서남해안이 고향이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바다의 원초적 기억과 집단무의식이 심리와 정서의 근간을 이루며 시의 원형적 모태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에는 산해진미가 어우러진 혼신의 생체리듬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수인은 선비적 기품과 육화된 지성, 이지담은 참신한 은유와 고결한 성정, 박현우는 원초적 고독으로 연마한 현실 초극의 지혜가 돋보인다. 모두가 남도와 한국 시단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주의 숨결로 흐르는 안분安分의 교향악

- 백수인 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


1.

백수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려면 고향 장흥 기산마을에 있는 그의 서재를 탐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산 증인인 고서古書가 은은한 묵향을 머금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획기적 장르로 꼽히는 가사문학은 남도를 배경으로 꽃을 피웠다. 그 효시인 『관서별곡』은 또 한 권의 기행가사인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삼당시인 중 하나인 백광훈,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산 팔문장’으로 꼽히는 백광안, 백광성 등을 배출한 백씨 가문의 문학적 적통을 계승한 시인이자 국문학자가 백수인이다. 백수인은 조상의 문혼文魂으로 충만한 종가에서 나서 자라, 청·장년기를 오월의 메아리가 생생한 광주에서 복무한 다음,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집(백씨가문)으로 귀의했다. 이번 제3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은 그 귀거래사의 서사緖詞다.


하얀 날개를 널리 펴고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라 하네

선비의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날고 있는 외로운 섬이라 하네

- 「장재도」 부분


이 시에서 “학”은 “고결한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수절해 온 고결한 선비정신을 표상한다. 이는 면면이 이어온 백씨 가문의 전통적 가치관을 암유하며 시인 자신에게 해당되는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행합일의 지표는 시 「겨울의 입구에서」 암묵적 인고와 결연한 의지로 체화된다. 


겨울의 입구에 서서

우리들의 오랜 동안거, 그 아득한 적막을 들여다보네

한 시절 견디고 부대껴야 했던 두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보네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었지


텅 빈 들판에는 찬바람만 가득하지만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

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네 

- 「겨울의 입구에서」 부분 


시인은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만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고 술회한다. 춥고 엄혹한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저항하며 오늘에 이른 견자의 서슬 퍼런 안목이 가슴을 적신다. 이 시는 시인의 귀향이 단순한 노후의 휴식이 아니라, 본연의 궁극적 자아를 추스르기 위한 새로운 동안거의 출발이라는 불퇴전의 각오를 새삼스럽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2.

바다를 원형으로 하는 유치환의 시 「파도」는 부드러운 물의 이미지가 난폭한 파도로 격랑을 일으키고, 용광로 같은 사랑의 불길로 달아오른다. 잔잔한 바다는 물의 원형으로 관조적이고 성찰적이다. 반면 물을 원형으로 하면서도 난폭한 바다는 물의 역동적 발화이다. 


흔히 물과 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의 대립관계로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두 원소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수적 요소다. 두 원소의 보완과 조화에 의해서만 생명체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기운이 있어야 차가운 기온을 따뜻이 할 수 있고, 물이 있어야 뜨거운 열기를 식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신세계의 동적 요소인 열정이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정적 요소인 이성은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이다. 이성은 열정에 의해 실천에 이르고 열정은 이성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둘의 조화에 의해 사랑은 결실을 맺고 정신은 그 건강을 유지한다. 물과 불의 아름다운 조화에 중용의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백수인의 고향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남해안 산자락 밑이다. 내륙의 끝이자 해양의 시원이다. 그 접점은 통상의 경계와는 개념이 다르다. 대립이 아닌 조화, 반목이 아닌 상생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수인의 시세계는 바다와 내륙이 경계를 지우는 소실점에 터 잡고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바다의 일상인 조수를 주제로 시 3편을 선보이고 있다. 그 함의와 이미지를 통상의 조수 순서와는 역순(썰물, 밀물과 썰물, 밀물)으로 환치해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다가 물러서기로 마음먹을 때

물의 벼랑은 무너지네


세상의 높이와 깊이가 모두 날아가 버리면

남은 건 펄 위에 찍힌 쓸쓸한 발자국뿐이네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

스산한 새벽바람이 일렁이는 뒷골목

희미한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이네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

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네

- 「썰물 이후」 전문


위의 시는 썰물을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견주고 있다. 이는 시 「밀물」에서의 역동적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장치다. 따라서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라는 마지막 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열거한 세 편의 시를 단계별로 한 데 아우르는 설계(역순의 배치)는 시 「밀물」에 앞서 중간 역할을 하는 다음의 시 「밀물과 썰물」에서 구체화된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버리고 돌아서는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 「밀물과 썰물」 부분


뒤돌아서 가는 썰물의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지는 정경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그 발자국이 깊고 깊”은 것은 새로운 밀물을 기약하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이때 썰물은 사적 욕망의 물결을 잠재우고 멸사봉공의 공동체적 불길/밀물로 역동화한다. 최후의 결전에 임하던 장흥 동학혁명군의 기세, 오월 금남로의 함성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등 떠밀려 마지못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것이다


하늘에 닿고도 남을 저 함성을 들어보아라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을 보아라

- 「밀물」 부분


“하늘에 닿고도 남을” 함성을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으로 재해석한 시적 예지가 예사롭지 않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밀물은 고향 바다의 원체험과 오월 광주의 실체험이 시공을 초월해 결합하는 교향악의 마지막 악장이다.


3.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53편의 시 제목들은 대부분 구체적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가 주축을 이룬다. 시집 제목도 겨울+언덕+백양나무+숲이라는 네 개의 구상명사를 관형격 조사 "~의"가 홀로 다리 놓고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관념어나 난해한 ‘안개 언어’를 배제하고 담백하면서도 진솔한 실사구시적 테제가 제목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부분은 시인의 자서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날마다 걷는다. 강가를 걷고, 해변을 걷고, 산골짜기를 걷는다. 걸으면서 거기에 깃들어 사는 존재들과 마주친다. 새들을 만나고 나무들과 마주 서고 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을 만나고, 흙과 돌멩이와 바위와 물결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빛깔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늘 길을 걸으며 사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어 이를 장자의 소요유적 직관과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로 내면화한다. 아래의 시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도 특별한 수식 없이 사물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존재자(시인)와 존재(시)는 관념의 늪을 떠나 격의 없이 한 데 어우러져 미분화의 축제를 이룬다.


들판을 걸었네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네

포기 사이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흰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네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리

꽹과리 소리 깨갱 깽깽

징소리 지잉~지잉~

장구소리 덩더꿍 덩더꿍

북소리 둥둥둥

태평소 소리 띠띠 떼떼

잔치 벌이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네


뒤를 돌아보니 논 가에 우뚝 서 있는

자귀나무 한 그루

그 안에 수백 송이 꽃들이

상모를 돌리고 있었네

-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 전문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시각), 덩달아 꽹과리 북소리(청각)가 들판에 가득 차자, 저만치 서 있던 자귀나무도 어느새 다가와 배경에서 전경으로 동참한다. 들판이 온통 “수백 송이 꽃(후각)들이 상모를 돌리”(촉각)는 공감각의 대연회를 이룬다. 오감이 풍성한 자연친화적 감각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는 절창이다.


소동파는 가는 곳 마다 비록 유배지임에도 그곳에서의 정착을 꿈꾼다. 장소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달관의 경지에서 현실에 초연한 단면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첫 유배지 황주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황주에서 오래 적거한 탓에 이젠 평안하게 이 땅에 안주할 수 있게 되어, 본래의 황주사람과 똑같다”고 여긴다. 또 두 번째 유배지 혜주에서는 “이제는 북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혜주사람이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 이와 같은 현지에의 귀속 의식은 낯선 마지막 유배지로 위리안치의 형극에 내몰린 해남도조차도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는 종명지로 여기게 한다.


백수인의 시에서도 이와 같은 현존재로서의 공간 의식에 숙련된 여유와 행간의 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거추장스런 수식이나 화려한 기교를 배제, 조촐하고 소박한 언어로 자연에 의해 정화된 감성을 소담하게 그린다. 이를테면 자연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한 폭의 수채화로 담아낸다. 그에게 현실은 유토피아로의 공상적 일탈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 속에서 일상의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실존의 향연이다. 그 소요유 속에서 지혜롭고 성실한 자기관리에 의한 ‘중용의 자유’가 일상화된다. 따로 상상력의 수고를 빌리지 않아도 주위의 대자연에 눈길만 돌리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만 하면 현실 속에서 탈속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문장으로 새긴 경건한 사유의 향기

- 이지담 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2004. 문학들)


1.

본성, 즉 마음의 바탕은 원래 티 없이 맑고, 두루 밝고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두려움도 없는 지고지순하고 지극한 경지이다. 온전한 마음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자아를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기에 수행자는 혹 그 마음이 잠시나마 흐트러질까 봐 외부의 훼방을 경계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동시에 그 지극한 경지를 어린애처럼 누린다. 온전한 마음에 지극히 머물며, 그 마음 씀을 오롯이 하면 텅 빈 마음이 맑고 고요함으로 충만해진다. 그 상태여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주의 유기적 분업체로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어느덧 이순을 넘어선 이지담의 시에는 본성에 천착하는 구도자적 포즈가 내면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제4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에는 먼 집, 먼 일, 먼 기억, 먼산바라기 등 ‘먼’이라는 시어가 수식하는 시 제목이 눈에 띈다. ‘멀다’의 활용형인 ‘먼’은 거리와 시간, 즉 시공간을 아우르는 수식어로 현재의 자아(가까움)를 부각시키려는 일련의 언어 장치이다. 이는 시의 제목뿐 아니라 다수의 시에서도 그 핵심어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성정의 고삐를 수시로 다잡는 자기 도야의 일환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시작된 혼자만이 건너야 할 길/아직 멀다(「출렁다리」)


너무 멀다, 보고 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침묵의 꽃」)


어둠과 빛이 출발선상에서 자세를 낮추고/ 멀리 보는 눈으로 또 다른 문장을 쓰는 중이다(「감자북을 쌓다」)


멀리 오름이 지표처럼 보이고 공포가 자라 잡풀이 무성한 곳(「다랑쉬굴 입구에서」)


먼 거리는 태생 이전부터 하나로 엮어 있다는 다른 말일 뿐인데(「먼나무」)


멀리 더 멀리 날아갔다 돌아오는 새를 반긴다(「먼나무」)


아침마다 뻐꾸기 소리 들으며 먼 길 배웅한다(「먼 길」)


먼 나라 아이들에게 손을 뻗어 빛이 되어 준 사람(「여행자 2」)


먼 이방인들이 발길 멈추지 않은 것은/예를 다하고 있는 풍경에 취하고 싶을 뿐(「면앙정에 올라」)


책상 위의 문양이 휘어지는 쪽에 앉아 멀리 보면/더 작아지지 않아도 되는 밤이 아직 남아 있었다(「라플레시아, 안녕」)


장자는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통해 자아와 우주만물의 상대성을 해체해 버린다. 우주 만상을 맘대로 재단하고 누리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술대 위에 놓이면 지상의 어떤 상처도 먼지 한 점으로 작아지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으로 부풀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래의 두 연은 시 「구겨진 종이」의 일부인데 연마다 “멀리”라는 수식어가 사건의 전말을 지시하고 있다. 장자의 우주적 스펙트럼을 내밀하게 재구성한 제2의 창조를 연상케 한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를 날려 봅니다

멀리 가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집니다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겨 버립니다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지니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봅니다

- 「구겨진 종이」 부분


아무리 깨끗한 백지도 넓게 펼쳐진 평면 자체로는 날지 못한다. 일단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공중에 띄워야 멀리 날아간다. 그런데 시인은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진다. 그것도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긴 것이다. 그리고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종이비행기의 비상은 상처/그늘과의 결별을 뜻한다. 그것은 백지, 즉 순수 본연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구심력의 일환이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 자신과 공존한다는 사실을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 깨친 시인의 실존적 자기 확인인 것이다. 심원하면서도 비근한 통시적 원근법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지담은 화려하지 않게 빛날 줄 아는, 평범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는 비결을 조곤조곤 일러주고 있다. 인류의 행복이나 위대한 업적에 가려 돋보이지 않을지라도, 작은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자세는 시인에게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이지담은 작고 하찮은 것 속에서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고 닦아 지성의 좌대에 올려놓는 세공사이다. 


2.

개체적 자아의 완성을 통해 전체적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이지담 시의 핵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인 나와 사회 구성원인 나의 이중적 존재이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완벽에 이른다. 자아를 도야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격의 가장 이상적 경지이다. 인격은 나와 우주/사회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대부분의 남도 지성이 그렇듯 이지담의 인격적 토양은 참신한 자아에서 사회적 결사結社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예컨대 건강한 역사의식을 배경으로 발화한 비판적 리얼리즘, 무궁한 생명애, 사회정의를 기표로 한 휴머니즘이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시를 통해 새롭게 승화된 역사적 과제는 제주(활주로 무덤)→광주(마지막 승객)→서울(딱 하루만)로 이어지며 꺼지지 않는 촛불의 숭고한 역사성을 공통의 의미소로 재현한다.


유채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착륙하고

꽃에 취한 사람들이 육지를 향해 이륙하는

활주로 바닥 아래

잠겨진 열쇠는 기억을 두드려 빚어내야 한다


한라산 중간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에

살던 집을 버리고 살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

잡풀인 듯 베어져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든 활주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 「활주로 무덤」 부분


괜찮니, 물음에 대답이 없다

텅 빈 차 안

유리창이 깨지고

승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흥건히 고인 피

멸종을 바랐을 밤은 새벽을 끌고 오고 있었다

- 「마지막 승객」 부분


그저 딱 하루만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소소하게 웃어보자고 나선 길

이태원길에서

해일처럼 밀려든 인파에 웃음은 난파되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SOS 문자를 보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 「딱 하루만」 부분


이지담은 민족적 비극과 비상식적 참극을 떠올리며 그 유훈을 일상의 평화와 새로운 기운에 상응하는 유채꽃(제주4.3), 새벽(광주 5월), 소소한 웃음(서울 이태원)으로 상징화한다. 나아가 사건의 핵심을 절제와 함축, 내면화된 육성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재조명한다.


3.

사색과 명상, 고요한 기도는 자신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칸트가 평생을 시골에 묻혀 오솔길 산책을 즐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별장의 대부분도 그런 고요와 한가함이 주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수행 정진을 일삼는 스님들도 한사코 깊은 산중을 찾는다. 자신과 만나는 것은 자신과의 내밀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 소로는 두 해 동안 오지의 숲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활한다. 거기서 『월든』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이지담의 이번 시집에도 자연을 벗 삼아 번뇌를 씻고 사색의 지평을 심화해 문향을 꽃피운 누정 문학의 산실·환벽당·면앙정·연계정 등을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환벽당 마루 위에서 장삼자락 늘인 채

버선발을 옮기며 영혼에 숨길을 불어 넣는다

춤사위는 이미 누군가에 전이되어

판소리 가락을 열고 들어가 옛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

나무들도 푸르름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백수를 누린다 해도

연못에 핀 연꽃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려나

- 「순간이 영원으로」 부분


죽창처럼 푸르던 벼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데

면앙정에서 책을 읽고 가르치는 강학소리

- 「면앙정에 올라」 부분


무거운 돌에 눌린 시간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허허벌판 말고삐를 잡고 달려오는데

멀리서 통행금지 해제를 올리는 파루의 종소리

가슴을 때린 적이 몇 번이던가

묵은 숙제를 풀며

국화주 한 잔 따라마시며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 「미암일기」 부분


편지 사이사이 묻어둔 행간

연못 위의 발자국을 지우며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

연계정은 홀로 앉아

물 위에 뜬 모현관을 들어 올린다

오랜 친구인 침묵을 품에 안고

한 구절도 고쳐 쓰지 않았으므로

먹구름이 세상을 뒤흔들 때마저도

그 너머에서 빛을 내는 볕을 키워냈던 것처럼 

뒤뜰 대숲을 흔든 바람이거나

참새들이 밤낮 소란스레 지껄이는 지저귐도

쌀뜨물 가라앉히듯 하였으니

너무 멀다, 보고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

눈 위에 발자국만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시간

뚜렷하게 보이는 침묵을 받아 적어 남긴다

가장 선명하게 피워낸 그 순간들

- 「침묵의 꽃」 전문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을 묶어 두려고 일부러 애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음은 억지로 다스리려 들 때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방어기제의 일환인 무의식 속 억압의 심연으로 잠수하여 끊임없이 존재감의 노출과 탈출을 시도한다. 따라서 제멋대로 고삐를 풀고 달아나려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제어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는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고 그 향방을 살피는 내면의 환기와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끄는 바깥 환경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산만하고 왜곡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맑고 상쾌하게 다독여 주는 산이나 강, 너른 들판, 고요한 호수, 쾌적한 숲, 한적한 오솔길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이지담은 그렇게 정화된 청정한 마음으로 자아를 다스려 이웃과 만나고, 이를 시로 형상화 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꽃의 수사修辭와 사색의 밀도

- 박현우 시집 『멀어지는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24.문학들)


1.

절실하게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치열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축제를 의미한다. 『백경』에서 고래와 싸우는 선장이 그랬고 또 소설을 쓰는 멜빌이 그랬다. 과거나 미래를 떠나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다. 잡념이나 상대적 관념 따위가 낄 틈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사물을 향한 순수하고 온전한 상태의 몰입은 작가에게 밀도 깊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선물한다. 박현우의 시는 사물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부터 “꽃”을 빌려 그의 시가 사물에 대한 몰입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꽃밭에는 수 없는 풀꽃들이 피고지고

나를 잃어버린 언어들이 윙윙거렸다.

꽃의 수사修辭,

사색에 익숙해질 무렵

꽃의 이면을 탐하는 벌 나비가 부러웠다.

아니다

가까이 잡꽃이 윙윙거리는

소박한 언어이고 싶었다

- 시인의 말에서


이를 방증하듯 이번 시집 2부는 하나같이 다양한 ‘꽃’들이 제목을 이루고 있다. 3부의 「달맞이꽃」, 「11월 철쭉이 피었다」, 4부의 「물봉선 비에 젖는」 등의 시도 꽃을 주제로 하고 있다. 1부의 「분갈이」도 꽃을 가꾸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호접꽃」을 보자.


생기 잃은 손 잡아주다

향기마저 잃은 채 멍울져 오던 초라함이

꽃이 되는 지상의 역설 마주하며

난감한 현실이 꿈이 되고

꿈꾸는 너의 색에 취한 취객일 뿐이라서

꿈이라도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인데

- 「호접꽃」 부분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구분하지 않고, 꿈속의 환상을 전경화 한다. 새삼 꽃에 대한 몰입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기 최면은 아래의 시 「천리향」에서 고차원의 사유를 동반한 실존적 자각으로 의미화 된다.


식목일 시청에서 나눠준 천리향 한 그루

뭉툭하게 잘린 뿌리 마음에 묻은 여러 해

천 리를 간다는 향에 취해 시름을 떨치던 일처럼


살도록 그늘 한 번 된 적이 없는 냉가슴 열어보니

나잇살이나 잡수신 맹환이네 팽나무가 느닷없이 다가와

사랑앓이나 하는 듯 아노래* 골목을 덮기도 하여

보고 싶단 말보다 더한 가슴을 달래주는 것이어서


무심을 붙안고

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이

그늘 됨을 알았네

*진도 고군 자막리 골목 이름

- 「천리향」 전문


시인은 이름처럼 "천 리를 간다는 향"이 실은 "무심을 붙안고/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으로 환치되는 사실을 깨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된 “그늘”을 사회적 메시지로 부각시킨다.


2.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보편적 가치와 자신의 세계를 성실하게 가꾸고 실천해 가는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어느 위대한 업적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행복의 요건 중에 크고 작고 따위의 구분은 따로 없다.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하찮은 것 속에서 귀한 것을, 숨은 것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눈과 귀와 감각이 필요하다. 박현우는 일상의 다반사인 “설거지”(작은 것)를 주제로 적폐 청산(큰 것)의 막중한 과제와 방법론을 환기시킨다.            


날마다 우리 살아 있음을

이토록 진지하게 씻어내는 일


빈부가 문제랴

누린 만큼 눌어붙은 고상한 찌꺼기들

저희끼리 냄새피우는 일 지천인지라

새삼 놀랄 일 아니라 쳐도


잠깐 한눈팔아 보시게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것들

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니

되도록 빠르게 뽀득뽀득 씻어내야 하네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

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

어디 쉽게 떨어지던가

- 「설거지」 전문


제철이라는 죽순나물 한 잎

오물거리다 말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

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왈칵 소름이 돋았네

- 「안아주기」 부분


시인은 “잠깐 한눈팔다 보”면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것들이/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라고 경계한다.(「설거지」) 그리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왈칵 소름이 돋”는다(「안아주기」)고 자신의 무감각에 스스로 일침을 가한다. 이와 같은 무감각은 그 파장이 사회적 적폐로 확산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따라서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어디 쉽게 떨어지던가”라는 자조적 청유를 빌려 무감각한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독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동반하기 마련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기는 쉽다. 다만 눈을 감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못 찾을 뿐이다. 상처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은밀히 숨어있다. 그러나 그 흉터는 크다. 자기 이외의 몸집까지 욕심껏 껴안고 있기에 덩치는 더 크다. 그럴수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상처의 실물은 비로소 가까이 다가온다.


3.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는 그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다. 반조가 따르지 않은 개혁은 정교하지 못하다. 신앙에도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반조와 참회가 따른다. 따라서 시의 미학에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뿐 아니라 상처를 다스리는 불완전한 존재, 즉 상처의 주체로서의 자신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철거 아파트 담벼락에

오누이가 앉아

볼록렌즈에 찬 빛을 담는다


참새 두 마리도

간이 빨랫줄에 앉아

시린 볕에 날개를 그을린다.

- 「데칼코마니」 전문


시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하는 종교와, 다분히 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철학에 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물을 새롭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이미 신이 창조한 사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창조해야 하기에 종교나 철학에 비해 추상적이고 고독하다. 우주를 설계하고 만물을 골고루 특이하게 빚은 신의 손길에 걸맞은 상상력과 언어의 조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박현우는 시의 도처에서 “손님은 갔는데 옆 교회 첨탑에서 까치가 운다(「술의 화법」)” “밤이면 구슬픈 여귀곡이 들렸다는 둠벙/비수 품은 달이 꽃단장한다(「궁녀둠벙」)” 등의 절묘한 구절을 선보인다. 아래의 시구도 음미할수록 맛과 멋, 향기를 더해주는 절창들이다.      


갈꽃 날리는 극락강에 낙싯대를 폈다


흔들리지 않는 찌불을 긴장으로 보라보는 것은

상처 난 잎들 가장 가벼운 여행처럼

극락강역 마지막 기적이 환청이길 바라서다.

- 「조락凋落」부분


오는 길 정 맞은 돌 몇 주워

빈틈 많은 생의 구멍을 메워볼까

하는,

- 「모난 돌」 부분


고향집 매화송이 눈을 뜨면

지시락 물 받던 대야 가득

어머니 빨랫물이 주인 없이 넘치겠다.                 

- 「봄비」 부분


짜낸 것만큼 얼룩진 시선들이 있어

비워야 빛나는 것들 주무르며

마음에도 걸레 하나 챙겨둘 일이다

- 「문득」 부분


타들어 가는 사랑이

길게 늘어선 화장터

슬픔이 슬픔을 화장하는 동안

- 「물봉선 비에 젖는」 부분


사위를 날아오르던 늙은 새

갑판 구석에 둥지를 틀어놓고

칠게 구멍 더듬다 와 졸고 있다

- 「벌포리 바닷가」 부분    


시인들은 창작이 원활할 때는 황홀한 자기만족을 맛보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심각한 내적 진통을 앓는다. 그러면서도 그 고통스런 작업에 혼신을 쏟아 몰입한다. 회임의 기대감과 출산의 희열은 고통조차도 산고의 통과의례로 음미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박현우의 시는 일상의 고통과 고독을 연마해 충일한 생명성으로 형상화한 인고의 결집이다. 그 저변에는 오랜 시적 내공과 연마, 대자연과의 물아일체에서 체화된 심층적 사유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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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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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격월간 릿터 조예은 추리미스터리장르문학사회파추리소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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