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비평 2024년 봄호(제18호)
고통이 사랑일 수 있을까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0.
영상이 아닌 소설이 지닌 서사 윤리가 따로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시대 소설의 윤리적 고민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덜컥 수락했으나, 글을 써야할 시점에서야 제대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 혹은 말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적 참사,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기부를 모금하는 영상 속 누군가의 고통. 그러한 영상 앞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에 바빴다. 저 타자의 고통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두려워서? 타자의 고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이 싫다는, 도덕적인 척 하는 자신이 실은 그저 무책임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그저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으려는, 얕은 연민일 뿐인.
그러나 타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그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타자의 고통을 ‘본다’는 것과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인정은 기자로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해야 할 때 겪어야하는 윤리적 고민-‘어떤 고통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저널리즘’이 타자의 고통을 “볼거리로 전락”시켜 “폭력적으로 소비”하는지, 아니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 “사회적 공감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 방향이 갈라지는 “개별의 저울질”은 하나의 고통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정말이지 매번, 미지의 영역”1)일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치열한 고민을 거쳐 재현된 타자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할까. 앞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하는 영상을 내가 피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피하기 전에 이미 보아버린 이미지가 있다. 정지된 이미지는 잘 지워지지 않고 때때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수전 손택은 “최초의 자극만 제공”하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타자의 고통이 나, 우리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2)기 위해서는, 사진의 ‘충격을 주는 능력’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지만을 기억하면 그 이미지로는 표현되지 않은 무엇, 이를테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서사’가 요청된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3) 즉, 하나의 이미지에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 고정된 이미지 속 타자의 고통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고통이 왜 일어났고, 어떠한 성질의 고통인지, 그 고통을 당한 자의 내면은 어떠한지 등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
물론 모든 서사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공감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공감해보려 할 때, 그것이 진심이라면 곧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나는 타자의 고통을 모른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일 테니까. 그렇지만 수전 손택이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4)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이미지의 충격에서 나아가 이해와 행위를 위한 ‘서사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리고 김인정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의 “기억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며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나갈 때 “슬픔을 나눈 공동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5), 나는 두 사람의 말에서 이미지 속 ‘너’의 고통을 그저 ‘너’의 고통으로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나’와 ‘우리’가 무언가를 행해야만 한다는 다급한 호소를 듣는다. 타자의 고통을 단순히 ‘고통의 스펙터클’로 ‘구경’하거나 ‘좋아요’를 누르고 넘어가 버리지 않는, 그렇다고 타자의 고통을 마치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고통의 심연을 봉합해버리지도 않는, 어떤 방향이 있을까.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향해, 타자의 고통과 함께 어떤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정말로 서사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영상이 아닌 소설의 서사만이 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는 어떤 것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저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소설들이 몇 권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6)도 그 중 하나로, 소설 속 ‘인선’으로 하여금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208쪽)라는 느낌을 처음 경험케 한 것은 제주 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견된 뼈들을 담은 사진을 본 후였다. 아마 소설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지점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1.
총 3부로 구성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한 분기점이랄 수 있는 『소년이 온다』7)로부터 7년이 지나 발표되었다.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광주’를 서사화했던 작가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제주 4·3’과 ‘보도연맹 사건’에 가닿는다. 역사적 사건이 지닌 고통스러운 진실에 더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무거운, 마치 물기를 머금은 눈 한 송이 한 송이들을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감각적인 문장들로 인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는 마치 깊은 눈밭에 한 발 한 발 발을 빠뜨리며 힘겹게 나아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고통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이 소설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시작점에 놓이기도 한다. 평론가 황정아는 역사적 사건이나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때 “오로지 고통의 강렬함에 의지하는 방식”은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대전제를 고민하는 ‘나’를 중심에 세우고 그 고민의 진정성으로 재현의 책임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즉, “재현의 윤리” 자체에 빠지다보니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8)하는 질문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 평론가 이소는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으로 향하는 대신 철저히 감각의 차원에 천착”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역사와 사회를 고통의 감각으로 보는 것에는 늘 위험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평자 모두 감각적인 차원에서 제시되는 ‘나’의 재현에 대한 고통이, 역사적 사건 자체 혹은 그것을 재현하는 형식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의 ‘모호성’, ‘애매성’에 대한 형식에 대한 언급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이는 특히 2부에서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어떻게 갑자기 제주에 있는 ‘나’-경하 앞에 나타났는지, 인선이 영혼으로 찾아온 것인지, 2부 자체가 ‘나’가 꾸는 꿈의 일종인지, 혹은 ‘나’가 죽은 후 영혼으로 인선을 찾아온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는 “감각의 생생함에 비해 경하와 인선이 4·3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9)거나, 특정 대목의 “묘사들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설정의 모호함”으로 인해 “전체적으로는 흐릿한 인상”10)에 그치고 만다고 평가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두 평론의 핵심적인 비판을 다소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이 소설은 구체적인 시공간을 지닌 정치적·역사적인 사건을, 모호하고 애매한 설정과 더불어 ‘나’라는 개인의 감각적인 고통의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위험이 있지 않은가?’일 터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고통의 영역 바깥으로 확장될 가능성”11)을 찾는 일이 이 소설에서 어려울 수도 있지만, “고통의 진정성이라는 센티멘털리즘의 회로”12)에 갇혀버릴 위험이 이 소설에 있을 수도 있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어려움이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캄캄한 허공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냐고, 그러므로 바로 저 ‘한 걸음’에 주목해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2.
앞서 『소년이 온다』가 한강 작품 세계의 분기점이라고 했거니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부터 다루어보아야 할 것 같다. 『소년이 온다』를 관통하는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13)를 놓고 볼 때, 기존의 한강 소설이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에 방점이 찍혀있었다면, 그래서 인간의 근본적인 폭력성에 주목하면서도 그 폭력성을 부정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고, 그래서 인간의 저 도저한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솟아나는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향해 어떻게든 한 발자국 더 가보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쩌면 저 폭력과 사랑, 둘 사이에 놓인 것이자 둘 사이를 연결하는 끈이 바로 ‘타자의 고통’일 수도 있을까.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민하는 ‘나’는 『소년이 온다』 이후 한강 소설에서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다음해에 발표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희곡을 쓰던 ‘나’는 자신이 타자의 “고통의 바깥에 있다”14)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을 그 타자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소설의 끝에는 그 재현의 불가능성에 갇혀 있지 만은 않은 순간도 존재한다.
이제 손을 꺼내 눈을 향해 내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손은 얼마나 차가울까. 거기 닿은 눈은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15)
인간은 “시간에 갇혀”(39쪽) 살아가는 존재이고 죽음은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는 결코 그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소설 속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렀다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라고(12쪽)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이 소설 속에는 있다. 우리에겐 시간의 흐름에 갇힌 채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시간뿐 아니라, 때론 그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서로의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 서로의 “평화를” 기원하는 순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은 ‘그’와 살아 있는 ‘나’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시간에 갇”힌 ‘나’가 “시간 밖”(42쪽)에서 잠시 ‘그’와 만나는 순간이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과 ‘눈 한 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의 만남. 소설의 끝에 이르러 타자의 고통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한계선에서 한 발을 더 내딛고자 한다. 이 소설의 다음 발표 작품인 『흰』의 ‘나’가 한 고백처럼.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16)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없어 글쓰기를 중단했던 ‘나’는, 그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다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런 ‘나’는 더 이상 ‘재현의 윤리’에만 갇힌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음을 각오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애도하고자 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타자를 애도하고자 하는 주체는 “자신의 전환”17)을 받아들이는 주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계속해서 한강의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나’는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기보다는, 타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3.
그렇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의 ‘나’는 어떨까. 이 소설의 ‘나’ 역시 『소년이 온다』 이후 타자의 고통 바깥에 있다는 사실로 고민하던 ‘나’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나’는 ‘인선’으로부터, 인선은 자신의 어머니인 ‘강정심’으로부터 역사적 사건과 그 속에서 살아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전해 듣는다. 전하는 이도 전해 듣는 이도,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도 고통스럽게 하는 이 ‘고통의 재서술’ 속에는, 그러나 고통의 순간뿐 아니라 그 고통에 필적하는, 그 고통을 비집고서라도 솟아나고야 마는 ‘사랑의 재서술’이 또한 흐르고 있다. 죽음에 가까워져 가던, 차라리 죽고 싶어 하던 ‘나’가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134쪽)가 있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가까스로 비껴난 것처럼. 인선의 아버지가 한 눈으로는 인선을 보면서 동시에 다른 한 눈으로는 인선의 “몸 너머 다른 빛”(165쪽)을 보았던 것처럼. 뒤돌아보면 돌이 되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건지고 싶은 사람”(242쪽)이 있다는 이유로 기어코 뒤돌아보고야 마는 심정처럼.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날 때 믿을 수 없게도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316쪽) 사실처럼. 이 소설에는 죽음과 삶, 어둠과 빛, 고통과 사랑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양립하는 혹은 서로를 향해 스며드는 짧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타자를 향한 ‘나’의 그 뒤돌아봄-사랑 이전에, ‘나’를 향해 뒤돌아보는 타자의 사랑이 먼저 있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타자가 ‘나’를 뒤돌아보고 삶-초를 건네주었다는 것, ‘나’는 몰랐으나 바로 그 행위로 ‘나’를 이미 한 번 살렸다는 것. 이 소설은 ‘나’와 타자가 서로를 뒤돌아보며 서로에게 초를 건네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이미-먼저 구했음을 증명하는 서사다. 경하, 인선, 새들-아미와 아마, 강정심, 강정훈, 아이 등 그 모든 관계들이 마치 비와 바다와 눈이 순환하듯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이야기다.
4.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는 당사자의 직접 발화가 아닌 누군가를 거친 간접 발화와 누군가로부터 전해진 자료들을 통해 서사가 진행되는데, 이로 인해 서사에는 명백하거나 확실한 인과관계보다는 무언가 빠진 것 같고 불충분한 것 같은 어떤 ‘빈틈’이 발생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의 직접성으로서는 부적합할 수도 있을 이 빈틈은, 그러나 그 말이나 자료를 전해받는 이로 하여금 “두 걸음의 간격”을 의식할 것을 요청한다.
인선의 발자국만 디뎌갔지만 운동화와 바지 밑단이 젖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두 팔을 뻗어 균형을 잡으며, 두 걸음의 간격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며 나는 계속 나아갔다. 속눈썹에 눈송이들이 맺힐 때마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 선득함이 인선에게도 느껴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뺨에도 이 눈이 녹아 스며드는지. 그녀가 혼이라면 어디까지 나를 데려가려 하는지. (305쪽)
위 대목에서는 ‘나’가 초를 든 ‘인선’을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고 있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의 느슨함-모호성으로 인해 독자는 이 소설 전체를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게 된다. 타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겠다는 오만도, 타자의 고통과 나는 무관하다는 방기도 아닌, 타자의 고통에 대한 하나의 자세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앞선 황정아와 이소의 논의에서 비판적으로 제기되었던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사적 애매함이나 모호성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뼈에 구멍이 있기에 새가 날 수 있듯, 눈 한송이와 한송이 사이에 빈 공간이 있기에 자기 자신인채로 서로 결합할 수 있듯, 서사의 모호성-빈틈은 독자가 이 서사에 개입하고 따라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특성을 『소년이 온다』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소년이 온다』 소설 속 에필로그의 ‘나’는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 속 인물의 고통이라는 타자를 마주하여 책임을 지고자 한다. 에필로그의 ‘나’가 ‘작가의 말’이 아닌, 소설 속 또 하나의 장인 ‘에필로그’에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 자체를 타자로 마주하여, 이 소설에 책임을 지고자 소설을 쓴 자로서의 ‘나’를 내세워야만 했을 수도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로 말해보자면, 주체의 기존 존재 방식을 문제 삼고 주체로 하여금 거부하기 힘든 요구-명령을 내리는 타자와 주체의 관계는, 기존 한강의 소설에서는 주로 소설 속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를 변곡점으로 하여 이 관계는 소설 속 인물과 작가로 추정되는 ‘나’ 사이로까지 이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면 그 이어짐은 독자에게까지 확장된다. 소설 속에서 ‘나’가 ‘인선’이라는 타자를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듯, 독자 역시 그런 ‘나’의 걸음을 역시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가게 된다. 즉, 이제 책임의 주체로 서야 하는 것은 바로 독자가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독자에게 책임의 주체로 설 것을 요청한다. 직접성과 즉각성이라는 영상 및 이미지의 특성에 맞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간접성과 애매성이라는 ‘틈’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틈을 상상하고 생각하게 한다. 타자의 고통과 온전히 겹치지도, 그렇다고 그 발자국을 끝까지 따라가보는 일을 포기하게 두지도 않는, 온전히 적극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특유의 방식으로 독자를 고통과 사랑의 서사에 참여시킨다.
5.
앞서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과 그 폭력에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사랑, 그 둘 사이에 ‘타자의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었다. 소설 속 인선은 강정심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뻐근한 사랑”을 느끼며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쪽)를 깨닫는다. 잔혹한 폭력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고통의 그 크기만큼 사랑도 그만큼 크다는 뜻일까. 나는 사랑하는 이를 따라서 과감히 죽어버리고 싶지만, 그 사랑하는 이가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 바로 내 기억 속이기에 차마 쉽게 죽어버릴 수도 없는. 혹은 나의 책임을 요구하며 나로 하여금 끝까지 살아가게 하는. 바로 그것이 ‘사랑’인 것일까. 그렇게 “두 세계를 사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한 곳을 정처(定處)로 둘 수 없기에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엇나가고 비틀리는 날들이겠지만, 또 그 나날들 속 어떤 한 순간에는 잠시 어딘가에 머물기도 할까. 그 사랑의 몇 몇 순간들로 고통의 나날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랑하는 자가 고통 받는다는 것, 사랑하는 자만이 기꺼이 고통을 받고자 하리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본다. 사랑은 고통을 요청하는가? 아니, 고통이 사랑을 요청하는가? 아니, 어쩌면 저 뿌리 깊은 인간의 ‘폭력성’에 맞서야할 때 ‘고통’과 ‘사랑’은 동시에 요청되는 것일까?
- 1)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웨일북, 2023, 17쪽.
- 2)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쪽.
- 3) 위의 책, 135-137쪽.
- 4) 위의 책, 154쪽.
- 5) 김인정, 같은 책, 262쪽.
- 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 표기.
- 7)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소년이 온다』가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한 분기점인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한 편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염두에 두기에, 그리고 이미 많은 논의들이 주목한 바 있는 바, 『소년이 온다』에 이르러 기존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전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소설의 ‘에필로그’에 역시 그간의 한강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로 추정되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일단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재현’과 ‘작가로서의 나’라는 특성은 이후 발표된 소설들에서도 나타나는 바, 이 두 특성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직은 구체화하지 못한 필자의 생각이다.
- 8) 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26쪽.
- 9) 이소, 「제주에서 보낸 한철」, 《쓺》 2022년 상권, 108-109쪽.
- 10) 황정아, 위의 글, 25쪽.
- 11) 이소, 위의 글, 109쪽.
- 12) 황정아, 위의 글, 27쪽.
- 13) 한강, 『소년이 온다』, 95쪽.
- 14)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문예중앙, 2015, 45쪽.
- 15) 위의 책, 51-2쪽.
- 16) 한강, 『흰』, 난다, 2016, 11쪽.
- 17)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역, 경성대출판부, 2008,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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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장 아메리, 프리모 레비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인간성이 지닌 외면하고 싶은 추악함과,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숭고함에 관한 깊은 고찰을 남기고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이런 의미를 넣어도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디아스포라는―그 일부 지식인은―‘인간성이라는 심연까지 도달하는 말들을 남기고 자살하는 존재’이다.1) 역사 내 인간이 기다리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해진의 소설은 주로 국가와 민족 같은, 경계를 통해서 타자화되는 존재들에 대한 탐문으로 쓰여왔다. 타자의 탄생은 보통 폭력의 주체를 고발하는 일과 동시에 이뤄진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 비해 단순한 표현이겠지만 조해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계 내 타자에 대한 주목과 문제 제기를 위해서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을 두고 누군가는 역사와 소설의 관련성을 질문하며 팩션faction으로서 이야기의 가치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실제 역사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역사 서술 주체에 따른 타자화의 문제 및 그 시대의 주된 이념과 가치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해진의 소설이 실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아 그 시대를 살았음직한 인물을 내세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기왕의 의미 자체를 허무는 무엇이다. 주체와 타자, 이념과 반-이념, 선과 악, 행과 불행 등 인간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만들어놓은 의미의 경계를 무화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 달리 말하면, 기억들의 사이를 벌려놓으면서 지나간 일들이 매끄럽게 하나의 사건으로 봉합될 수 없게 만드는 감각적 존재를 관찰하고 그들의 연결이 빚어내는 새로운 해석, 혹은 세계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하는 데 그의 소설의 독보적인 존재 의미가 있다. 조해진의 소설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역사서의 구성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역사가 선조적인 시간을 따라 사건을 나열하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명백하게 기술하는 텍스트라면 조해진의 소설은 나열된 시간의 한 지점에서 전후좌우의 지점으로 이동함으로써 특정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다각도에서 살펴보게 한다. 그로써 소설은 역사에 이론異論의 여지를 마련하기보다 이론으로서 역사를 새로 쓴다. 「우리 세희」에서 “엄마가 선생님의 형과 달리 정치 스파이로 조작되지 않았던 건 결혼이라는 제도와 국적 변경 덕분이었음을 알게 됐다”(170쪽)2)는 “연주”의 고백으로 쓰이는 역사의 한 국면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여동생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주기 위해 자진해서 북으로 건너간 오빠(연주의 외삼촌)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세희”(연주의 엄마)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주체적인 삶을 어느 정도 체념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남한으로 이주한다. 대문자 역사는 국경을 넘는 이들의 심경까지 기록하지는 못하며, 합법과 위법의 경계로 그들의 행위를 판별할 뿐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지닌 불안과 체념, 긍지와 보람은 법의 판단과 무관하게 이뤄지기도 한다. 결혼과 국적 변경이라는 제도에 의해 겉보기에는 비교적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 ‘세희’가 과연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오빠보다, 혹은 감옥에 갇혀서도 이념에 투항하지 않은 “선생님”의 형보다, 아니 그들 삶과 자신의 것을 경계 지으면서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이처럼 대문자 역사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세세한 질문들을 새로 새긴다. 내력과 박력이 충돌할 때 「우리 세희」에서 세희는 소설의 초점 화자 ‘연주’의 엄마다.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 이미 죽은 엄마는 ‘나’의 매 순간을 함께한다. 취재차 영국에 간 ‘나’는 담배를 피우러 호텔 밖으로 나갔을 때, 다국적 기업인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을 때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하는데, 그때 내가 내뱉은 “연기”(172쪽) 속에, 혹은 사과를 요구하는 내게 카페 직원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사과하며 “옅은 한숨”(205쪽)을 내쉬는 것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이국의 습한 공기’ 속에도 엄마의 숨이 섞여 있다고 여긴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그리움처럼 떠오를 만한 순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혹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같은 아시아인 여성을 무시하는” “이주민인 그녀”(204쪽)를 보고 엄마를 포함한 역사상 모든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을 혐오와 차별이 헤아려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들숨과 날숨, 눈물의 성분 같은 것에 ‘엄마’가 포함되어 있다고 쓴다. 오래전 내가 엄마의 몸에서 빚어져 나왔지만 이제는 엄마가 내 몸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감각은 기왕의 역사관을 뒤집고 거스르는 소설의 관점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연결감’의 한 비유로서 쓰인다. 실제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과 연결된,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중요하게 말한다. ‘나’만 하더라도 “자이니치[在日]”(176쪽)였던 엄마와 외삼촌, 나아가 외조부모의 삶에 깊이 영향받은 존재이며 그 영향력은 “제이비 류”라는 “일본계 영국인” 예술가의 전시에 관련한 기획서를 제출하고 취재를 위해 먼 나라까지 오가는 일을 자처하는 ‘나’의 오늘로도 증명된다. ‘나’는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그의 작품에 주목하면서, 어쩌면 “그의 가계가 한국과도 연관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167쪽)으로 인터뷰를 기획하는데 이 만남은 주목받는 예술가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경험한 가계 속에서 성장했을 또 다른 ‘나’의 비언어적 발화에 관한 이끌림처럼 보인다. 그 예로 ‘나’는 그의 전시를 관람하며 죽음을 소리로 풀어내고 그 “압도적인 소리가 귀가 아닌 온몸으로 흡수”(198쪽)되는 체험을 한다. 그 신비로운 체험은 ‘나’에게 ‘선생님’의 환영을 보고 듣게 한다. 실제로는 병원에 누워 있을 ‘선생님’이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듯 나타나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독자는 환영이라는 말의 다의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허상이라는 점에서 환영幻影이지만, “소리가 안내하는 긴 여정”(204쪽)을 따라 살아 있는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웠던 삶 그 자체였던 ‘선생님’이 되어본 듯한 체험을 통해 ‘나’ 역시 디아스포라로서 살게 될 것을 예감했다는 점에서 이는 그들과 이어질 삶에 대한 역설적 환영歡迎이기도 하다. “우리 세희”는 세희를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그녀를 애틋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우리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세희에게는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고”(182쪽, ‘나’의 외삼촌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했던 말)] 세희와 그의 딸 연주가 동일한 정체성으로 연결되어 ‘우리’라는 대명사를 무리 없이 쓰게 된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으로도 볼 수 있겠다. 연주는 그녀의 방식대로―제이비 류의 작품 같은 비언어적 세계의 문법을 동원해―세희의 삶을 이어서 산다. 그 연결은 구체적인 기억을 통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식적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재의 특정 순간들이 엄마가 들려준 기억과 증언을 불현듯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엄마와 딸은 생사로 나눠진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기억(의식)뿐만 아니라 딸의 숨결과 눈물(무의식) 같은 부분으로 엄마라는 세계, 자이니치와 같은 개별적 삶의 조건이나 정체성이 유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주는 자신의 엄마와 외삼촌, 나아가 외조부모의 불행한 삶의 조건들을 그 자신으로 증명할 뿐만 아니라, 엄마가 돌아가신 후 부모처럼 여기게 된(이와 연관한 연주의 고백은 반대로 자식이 없는 ‘선생님’과 ‘센세’가 자신을 딸처럼 여긴다는 진술로 쓰인다)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로도 기록한다. 이렇게 「우리 세희」에서는 어떤 삶에 가해지는 폭력과 배척보다도 그 삶들의 연결이 강조된다. 세희는 죽기 전 연주에게 자신의 삶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들려주려 했으며(“마치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자료를 다른 건축물로 이전하듯이”, 181쪽), 엄마의 오랜 인연으로 알게 된 ‘선생님’ 부부와 ‘나’의 관계 역시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각별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중심 기둥 역할을 한다는 데서 작가가 이 두 서사를 특별히 강조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와 선생님 부부는 ‘나’의 삶의 증인들이자 ‘나’로 하여금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이니치라는 개별적이자 보편적인 삶의 형식과 내용을 전수하면서 삶을 지탱하는 조건에 무심하지 않도록, 어떤 삶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역할을 한다. 몸이 하는 말 소설의 현재 시점상 연주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국가인 영국에 잠시 체류 중이다. ‘제이비 류’의 전시를 관람하고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녀가 먼 이국으로 떠난 이유를 그렇게만 설명할 수는 없다. 때와 장소를 차치하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모국에서 이국으로 이동하는 데에서 생사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삶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녀의 이동 역시 출장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제이비 류가 1940년대 후반 제주에서 있었던 제노사이드를 다룬 작품을 신작으로 발표한다는 데에 연주가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도 있는 두 삶의 조건을 암시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불가해한 역사의 어떤 국면들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지침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연주는 제이비 류의 작품을 보면서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이해나 시각적 정보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청각과 촉각을 통한 유일무이한 경험을 한다. 앞서 보았듯 그녀는 전시실에서 ‘선생님’의 환영과 대화를 나누는 영적 체험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고통을 이어받는 경험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한 ‘선생님’은 파친코에서 일하며 지하의 좁은 숙소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관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상상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거기에서 “형이 고문받고 구타당하는” 것을 상상하면 실제로 침에서 “피 맛”이 났고, 몸을 말고 누우면 “내장이 타들어가는 소리”(200쪽)가 들려왔다. 이렇게 연주는 제노사이드를 다룬 제이비 류의 작품을 통해 ‘선생님’과 선생님의 형 등 고통받는 존재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은 감각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소설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쓰인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퍼진 반전운동의 영향권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 국가들을 향한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너무 쉽게 망각하고 합리화해버리는” 기성세대에 대항해 “정의롭고 싶은 학생들의 열기로 팽만해”(176쪽) 있던 일본 사회에서도 자이니치에 대한 대우는 비인간적이었다. 이국에서도 조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그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품음으로써 차별과 혐오를 통한 고통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다. 조해진의 소설이 보여주듯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고 새로운 고통을 낳는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말보다 몸으로 쓰이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형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두들겨 맞은 듯한 고통을 감각했듯, “사람의 몸이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는 것”(201쪽)을 일깨워주는 상대에 기대어 사랑을 감각했듯 말이 가닿지 못하는 곳에 몸이 먼저 도달해 있다고 소설은 거듭 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는 한국어로 말했는데, 언어를 바꾸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다. 선생님이나 센세와 대화할 때면 일본어를 주로 구사하다가 감정 형용사만은 한국어를 쓰곤 했고, 엄마와는 그 반대였다. (168쪽)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멀리 있는 ‘나’에게 알려온 ‘센세’에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전하는 부분이다. 엄마가 죽고 흡사 고아와 같은 처지인 ‘나’에게 선생님 부부가 부모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나’의 “미안해요”라는 표현에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는, 바로 이 말로밖에는 전할 수 없는 ‘나’의 본연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달리 말해 ‘나’의 몸이 하는 말이자 홀로 ‘선생님’의 침상을 지키며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는 중인 ‘센세’에게 연주가 건네는 말이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의 부조리한 제도에 치여 끝내 자유로운 삶을 누려보지 못한 자의 죽음 앞에서 모국어로 전하는 인사이기도 할 것이다. 상처 입은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는 아마도 동족의 사회와 문화, 역사가 빚어낸 감정의 형태와 빛깔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할 수 있는 소리, 그들의 모국어가 아닐까. 아무리 외양이 닮았어도, 이름까지 바꿨어도 끝내 그 “태생”을 알릴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발음과 억양”(167쪽)이라는 조건이 있었듯이 말이다. 엄마와 아빠를 고유한 언어로, 특유의 발음과 억양으로 부르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때의 발음과 억양은 신체 그 자체다. 자신을 살린, 자신을 먹이고 가르친 존재의 영향이 몸을 이루는 낱낱의 세포가 되었을 것이다. 부모의 시간이 자식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어머니를 “오기보상[お義母さん]도 아니고 오카상[お母さん]도 아닌, 전라도 사투리 그 자체인 어무이”라고 부르는 ‘센세’와 “외할머니를 오마니, 외할아버지를 아바이, 라고 부르던 엄마”(188쪽)를 보며 ‘나’ 역시도 절로 입속에서 궁굴린 말이 있을 것이나 그 소리는 우리가 저마다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한 세계를 구원하는 말 ‘세’ 뒤에 ‘희喜’를 넣어 ‘세희世喜’를 완성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세이지sage의 꽃말은 ‘구원’. 그러니까 ‘세희’는 세상을,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희야, 라고 불리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고도. (207쪽) 소설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으로 꼽을 만한, 엄마와 아빠가 고심해 딸의 이름을 짓고 오빠가 그 여동생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상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나’의 엄마는 끝내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했을까. 아마도 연주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세희’는 연주의 기억과 기록 속에서 그가 애정과 신뢰를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그녀 삶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는지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기쁜 세계이자 ‘우리’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 역사에 대한 전망은 이름을 지어주는 일과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라는 두 행위를 모두 통과해 비로소 어떤 가능성의 차원이 된다. 서로 간에 소중하게 여길 만한 가치를 전수하고(이름 짓기) 몸으로 그것을 받아안을 때(이름 부르기) 연대하는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소설의 말미에 밝혀 썼듯 작중 “서정우”의 모델이기도 한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그들은 “고향, 국가, 가족, 혈통 같은 허구의 관념에 믿음을 두지 않기에” 적어도 글쓰기로써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3) 부모가 물려준 이름 외에는 아무런 “보호막”을 갖지 못했던 개인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각성은 관념을 넘어 감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우리 세희’라고 말할 때 동그란 우리는 기차가 지나가는 기나긴 길처럼 펼쳐진다. 또한 그 길은 저마다의 억양과 발음으로 휘어지고 뻗어 나갈 것이다. 그 길가 어느 한편에는 세이지 한 무더기가 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1) 서경식, 『어둠에 새기는 빛―서경식 에세이 2011-2023』, 한승동 옮김, 연립서가, 2024, 56쪽. 2) 조해진, 「우리 세희」, 『현대문학』 4월호, 이후 쪽수만 표기. 3) 서경식, 앞의 책, 58쪽.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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