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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딩아돌하 | 2025년 봄호(제74호)

아보하는 가능할까

황유지 문학평론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공동 산문집 『관내 여행자-되기』를 썼다.

 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T?’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T?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31」)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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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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