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문학들 | 2024년 봄호(제75호)

얼굴 없는 목소리 ―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 쓰기

송승환 문학평론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로포름』『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평론집 『측위의 감각』 『전체의 바깥』 공저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바깥의 문학』 등이 있다. 현재 반년간 『쓺-문학의 이름으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 나와 마주하는 시간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Personal branding writing). 이것이 2020년대 한국에서 첨예한 글쓰기의 목표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기업의 이윤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브랜딩처럼 개인의 수익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나’, 자신의 직업과 경력, 특별한 기술과 경험, 차별화된 정체성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나’만의 상품 가치 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특정 분야에서 ‘나’ 스스로를 고유 상품 브랜드로 만들어서 소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표상’ 작업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한 직업 기술과 능력, 성공 사례와 세계관, 실패담의 서사를 친근하게 정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폭 넓은 선호도와 높은 인지도 확보를 목표로 삼는 글쓰기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을 구축한다. 무엇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미디어의 발달, 그 중에서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등의 손쉬운 SNS 채널 개설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인터넷 온라인을 바탕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평생직장과 정년제의 소멸, 노동 수입만으로 영위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연봉 향상을 위한 이직에서 ‘나’의 정체성과 장점을 강조할 수 있는 ‘나’의 브랜드 필요성 등의 노동 환경 변화에서 요청된 것이다. TV와 SNS에서 쌓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온라인 클래스를 개설해서 고수익을 얻고 있는 어느 소설가의 경우처럼 개인의 글쓰기가 미디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개인의 브랜드 구축과 경제적 수입을 마련해주는 유용한 기술이 된 것이다. 미디어의 독점 체제에서 미디어 민주주의로 이행되면서 글쓰기의 민주주의와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미디어 사회가 전개한 개인의 글쓰기와 미디어 민주주의의 효능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나’의 상품 가치와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개인들과 자본 사이에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나’의 노출 빈도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 시각 이미지와 음악, 전문성과 분위기 연출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은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품 브랜드로서 ‘나’의 ‘드러냄’을 만들어내는 소외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있음 자체, 실재의 ‘나’는 사라지고 브랜드가 된 ‘나’의 이미지, 상품의 물신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나’가 나타난다. 소비자와 구독자가 매혹되는 것은, 상품 물신성의 신비에 휩싸인 ‘나’이다. 상품 물신성의 신비와 환상 속에서 실재의 ‘나’는 부재하다. 지속적인 유용성과 상품 가치를 창출하려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속에서 실재의 ‘나’와 상품가치의 ‘나’ 사이의 간극은 심화된다. 그 간극의 심화를 불러일으키는 무한 경쟁에서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하는 ‘나’의 유용한 글쓰기는 당연하게도 소수이다. “부자나 유명인사와 같이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소유하고, 상징 시장과 명성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게 이미지를 관리”1)하는 소수이다. 소수의 성공담은 화려하게 드러나고 다수의 실패담은 조용히 사라진다. 화려한 성공담의 ‘나’는, 상품 물신성의 환상 연출 노동으로 더욱 치닫는다. 실패담의 ‘나’는, 성공한 소수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면서 우울과 자괴감에 빠진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문화 산업 구조 속에서 수많은 나‘들’의 드러남과 사라짐은 무한 반복된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 ‘나’의 표상들은 저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생산 구조와 일정한 상동성을 지닌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나’처럼 1인칭의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일상의 삶에서 길어 올린 소소한 경험과 상처의 풍경을 나열하고 재현한다. 1인칭의 시적 주체, ‘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동영상에 노출된 일상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일상적인 나의 경험과 기술적 능력은 화려한 이미지와 감성적인 음악으로 편집된 글과 영상으로 편집되어 소비자와 구독자가 즉각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매혹과 난이도의 글쓰기로 노출되듯이 1인칭의 시적 주체인 ‘나’가 진술하는 시적 정서와 시적 언어의 양상도 유사하게 노출된다. 그것은 유용한 재현의 시쓰기이다. 그러나 백은선의 시는 일관되게 ‘나’의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재현’의 시쓰기를 넘어서서 ‘암시’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백은선의 암시의 시쓰기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시대에 유용성의 글쓰기와 거리를 두면서 어떻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2)을 발명하는지를 제시한다.


2. 이피게네이아의 얼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은 근친 살해와 복수의 폭력으로 치닫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3)의 첫 작품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일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출전을 방해하는 폭풍과 직면한다. 그는 폭풍을 달래기 위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고 희생 제물로 바친다. 마침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귀향하고 욕실로 향한다. 지난 10년 동안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 아가멤논을 욕조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첩으로 삼고 데려온 전쟁 포로 캇산드라도 함께 살해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아가멤논」 비극적 서사의 기원에는 무엇보다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있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수반이자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체현자이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살해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자로서의 명예를 향유하면서 적군의 딸 캇산드라를 첩으로 삼고 귀환한다. 동시에 그는 귀환한 국가의 권력자이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향유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폭력적이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일 만큼 국가주의자이다. 그는 전승자의 지위를 통해 적국의 딸을 첩으로 삼고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 가해자이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여성을 첩으로 삼는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자이다.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쓴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지배적 이념이다.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정의의 여신 아테나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181)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해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고 복수한 아들 오레스테스를 처벌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을 정의로 판결하고 폭력의 성(gender)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그 판결에 이르기까지 「아가멤논」의 여성들은 희생 제물(이피게네이아), 부정(不貞)을 저지른 암살자(클뤼타이메스트라), 성적 노예(캇산드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 비극의 기원,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의 무대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국가주의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진술에 의해서만 기억된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희생된 그녀의 얼굴은 무대 위에 없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의 무대 위에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은 없다.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억울한 희생을 진술하는 동안만큼만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과 아테나의 판결 이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망각된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도 매일 희생되고 망각되는 여성들, 이피게네이아들은 많다.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여전히 한국에서 지배적이며 그 폭력은 지속적이다. 다름 아닌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그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피게네이아의 부서진 얼굴로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을 암시한다.


3. 얼굴의 파토스

  백은선의 시집4)에서 시적 주체의 실존과 가족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적 주체 ‘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다. “입을 틀어막는 아버지 허리띠를 풀어 쥐는 아버지 벽에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는 아버지 포르노를 보는 아버지”(1:141)이다. 아버지에게는 새엄마가 있다. 나는 “새엄마가 즐겨 입던 어두운 초록 재킷을 훔”(1:63)친 적 있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죽었다. 나는 “죽은 언니를 생각할 때의 죄책감과 은밀한 기쁨”(3:50)을 동시에 느낀다. “왜 내가 아니었을까,”(3:50)라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감과 안도감이다. 쉬운 영어만 할 줄 아는 엄마는,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1:180)에서 “검은 남자가 오면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나의 등을 슬며시 떠밀”(1:180)었다. “여고생 때 일기장을 펼치면, 선생님 널 죽여버릴 거야, 라고”(1:176) 쓸 만큼 나는, 선생님에게 살의를 느낀 적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나는,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3:30) 있었다. 나는 동급생들에게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리고” “#죽어. 죽어. 죽어.#”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3:30)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1:100)었다. “아이가 닫힌 문을 두들고 있었”기에 “세 번 목을 매고 세 번 실패”(3:167)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의 엄마, 너는 아이의 아빠”(2:80)가 되었는데, 남편이 된 남자, “네가 뺨을 때리던 날”, 나는 “그것을 지옥이라고 생각”(4:36)하였다. 끝내 나는 “협의이혼”(3:154)한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엄마. “아이가 새근거리며 몰아쉬는 숨소리만”(3:54) 가득한 방 안에 있다. 나는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고 “팔 년을 돌아보며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4:52) 같다. “맨발로 찾아간 날에는 꼭/양말을 신겨주던”(4:128) 할머니의 기일에 “누구나 태어날 때 한 권의 책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4:128) 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적 주체,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한 여성의 실존적 초상이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내 기억의 상상 속에서만 있다.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은 아버지의 폭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첫 시집 『가능세계』(2016)에서 네 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2023)까지 8년 동안 집중 출간된 4권의 백은선 시집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한 권의 책, 하나의 얼굴로 읽힌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5)이 깊이 새겨진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1:195) “구겨진 얼굴”(2:94), “비틀린 얼굴”(4:41), “허물어진 얼굴”(2:134), “물 위를 떠가는 뒤집힌 얼굴”(1:23)이다. “낯설고 차가운 얼굴”(1:189), “민둥 얼굴을 하고 표정 없이 말없이”(1:201) “텅 빈 얼굴”(3:167)이다. “미친 것 같은/얼굴”(3:16)이고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2:144)이어서 “문득 얼굴/나는 지워지고”(2:167) 싶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지고 파괴되어 구겨지고 허물어져 비틀린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남성의 폭력은 나의 얼굴에 기록되어 지속된다. 현재 나의 얼굴은 폭력이 자행된 과거의 현존이며 지울 수 없는 미래의 현전이다. 얼굴에 새겨진 흔적은 잔존하는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1:17)하면서 내가 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폭력이 잔존하는 얼굴의 파토스(pathos)6)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는 나의 얼굴과 전면적으로 마주설 수 없다.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폭력으로 일그러져 부서진 얼굴의 파토스를, 고통의 총체적 기억과 파괴된 실존의 성채를 한꺼번에 출현시키고 ‘나’를 고통의 심연으로 침몰시키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얼굴을 텅 비우고 거의 죽은 사람의 얼굴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서지고 구겨지고 비워지는 얼굴의 조각들을 바라본다. 살아남으려는 힘과 죽어버리려는 힘이 단속적으로 교차하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순간 솟아오른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얼굴의 조각들 배후에서 얼굴 없이 죽은 여성들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백은선의 시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를 붙잡는다. 얼굴의 조각들이 불러일으킨 얼굴의 파토스를 통해 ‘폭력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증언 욕구와 ‘나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모두 말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표출한다. 얼굴의 파토스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의 기억과 부서진 얼굴 조각들의 시. 완전한 사라짐을 거부하는 얼굴 조각들의 시. 가려지고 흐릿해진 얼굴들을 기억하고 파편적으로 재현한 조각 형상들의 시. 그녀의 시쓰기는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얼굴 조각들의 잔존 기억을 지닌 한 사람의 살아있음, 살아있음이 저항이며 삶의 지속이며 지속된 폭력을 증언하는 몸의 발언임을 환기한다. 그녀의 시에서 얼굴 조각들은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노출하고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얼굴 이미지가 ‘지금-여기’의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현시하는 심미적 정치성을 발현한다.


4.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 언어의 몽타주

  첫 시집 『가능세계』는 백은선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적 입장과 언어 방법을 응축하고 있다.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마음의 근육이 새겨져서 나타나는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다. 얼굴은 시간의 흐름과 피부의 변화가 새겨진 주름과 피부 빛깔의 형상으로서 한 사람의 인상을 드러낸다. 현재의 얼굴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도착한 형상의 인상(人相)이며 미래의 시간에 흔적으로 남는 형상의 인상(印象)이다. 그 얼굴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으로 무참히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비틀린 형상의 인상으로 지속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은 파괴되고 부정당한다. 파편적인 얼굴의 조각들에는 폭력의 흔적과 고통의 기억이 잔존한다. 폭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에 깊은 상흔을 남길 만큼 강력한 것인데, 폭력에 대한 그녀의 시적 입장은 아이러니하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시작해서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다고 끝맺는 원환(圓環) 구조의 변론7)을 통해 인간의 무지(無知)를 아이러니로 드러낸다면 백은선은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로 시작해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도움의 돌」)고 끝맺는 나선형적 원환 구조의 진술을 통해 남성의 폭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낸다. 그녀는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낱낱이 기억하고 폭력의 상흔을 체현하고 있는 얼굴의 담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폭력을 기억해내는 고통의 강도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정하는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더한 폭력을 감내한 엄마와 언니의 고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증언의 불가능을 인식하고 ‘나는 모른다’, 선언한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생존자의 안도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폭력의 모든 진실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의 윤리 속에서 폭력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집요한 욕구에 휩싸인다. 그녀는 끝까지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백은선의 시쓰기는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과 ‘우리는 그것을 안다’는 인식 긍정 사이의 무한 왕복과 충돌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섬광,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을 포착한다.
  시적 입장의 아이러니는 시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은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재현할 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모두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시적 인식을 표출한다. 그것은 폭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고통의 기억 속에서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획 짓는다. 그녀의 시쓰기는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에 한정된다. 폭력을 기억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파편적으로 재현하고 조각의 진실을 지닌 언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의 시처럼 온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과 고통의 상흔은 시인이 비워둔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폭력의 사태, 그 현장으로’ 진입하여 조각들의 진실을 유추하고 언어의 공백을 채워가는 시쓰기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인식의 긍정, 목격자의 장소에 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백은선의 시적 언어는 폭력에 대한 전면적인 폭로와 고통의 사실적 증언을 목표로 삼는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언어의 장소에서 발원한다. 그 언어는 폭력의 실재를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암시하는 언어이다. 재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행간의 침묵과 언어의 공백으로 암시하는 언어이다. 암시 언어는 피학적 타자가 된 여성들의 몸을 폭력의 포르노그래피로 전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몸을 사물처럼 전시하거나 끔찍함의 충격을 전파하려는 재현 언어의 유용성을 폐기한다. 재현 언어가 폭력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품은 조각 형상들의 ‘가능 세계’를 전시한다면 암시 언어는 ‘가능 세계’의 공백과 배면에서 잔존하고 있는 총체적 폭력의 재현 ‘불가능 세계’를 상상력으로 현시한다.
  백은선의 시에서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임계점을 넘어선 빛들이 차례로 얼굴을 부”(1:67)수고 “등 뒤에서 칼날처럼 꽂히는 빛들”(3:100), “빛들은 찢어발긴 얼굴”(1:200) 같다.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4:47)한다. “빛 속에서/관절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1:18)이다. “유리를 관통해 들어오는 빛이/심장을 찌”(4:150)르고 “빛의 칼로 귀를 자”(4:145)른다. “가장 아픈 건 빛”(2:31)이다. 네 권의 시집에서 시적 주체가 ‘비혼 여성―아들의 엄마―이혼 여성―육아 여성’으로 변모하는 동안 지속되는 폭력의 상흔은 일관된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되기에 폭력의 총체적 진실은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면서 유예되며 유예되는 만큼 그 폭력의 강도는 강력한 것으로서 시적 주체의 외상과 증상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
  빛과 함께 시적 주체에게 폭력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소리’이다. “만 명의 울음소리를 겹치고 웃음소리를 겹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얻게”(1:150)되는데, 그것은 울부짖음8), “의도하지 않은 언어와 같은 형태”(1:150)이다. 신체 폭력이 유발하는 타격 소리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언어폭력, 그것을 체험하거나 목도한 자의 울부짖음, 그 “모든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 가장 아픈 형식으로 소리는 있”(2:100)다. 소리는 “귀가 쫑긋한 나를 키워준 공포”(1:148)이기에 “나의 청각에 대해,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1:138)해야 할 만큼 폭력적이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청각에 잔존하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순간을 연상시키고 재생하며 현재로 현전한다. 소리가 재생하는 폭력의 기억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울부짖음, 언어 이전의 폭력 사태 자체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체험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과 소리 이미지로 구축한 백은선의 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산문 언어 안에서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단어의 재배치와 언어의 몽타주를 적극 실천한다. “디귿의 마음”(1:10)처럼 ‘ㄷ’의 문자(文字) 형상을 통해 시적 주체의 어떤 재귀적 마음을 암시하거나 “짖는다. 쏟아지는 비, 구겨진 얼굴, 입속의 말”(2:94)처럼 서로 다른 문맥의 언어들을 재배치하고 몽타주함으로써 맥락 없는 조각 언어들 사이에 시적 긴장의 섬광과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이중나선//파란 깃털//모자를 쓴 구름//불면의 밤//쓸수록 멀어지는 것”(3:129) 역시 연관 없이 멀리 있는 언어들의 병치와 몽타주를 통해 백은선의 고유한 언어 방법을 창안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초록은 누가 잊은 기억”(4:79)처럼 ‘초록’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색채 상징을 부여한다. 언어의 몽타주는 백은선의 시를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시의 행위와 장소에 정초한다.
  시적 인식의 아이러니,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의 암시, 언어의 몽타주.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1:85),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폭력을 산문의 재현 언어가 아니라 시의 암시9) 언어로 저항한 백은선 시의 언어 방법으로서 시의 심미적 정치성을 고도의 언어로 실천한 것이다.


5. 조각 형상들의 섬광: 상자의 어둠과 나무의 뿌리, 성냥의 불꽃

  백은선의 시적 주체에게 빛의 세계는 세계의 어둠이다. 세계는 폭력의 빛이 점령한 어둠의 삶을 강제한다. 폭력의 빛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어둠 속에 ‘나’를 존재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이 중단되지 않는 한 살아있는 그녀의 거처는 어디서든 세계의 어둠 속이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1:171)다. 폭력의 빛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숨어든 ‘상자들’ 내부 또한 어둡다. 그 상자들은 작은 방과 여성의 몸, 관(棺)을 암시한다.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심해처럼 어두운 파란 빛이 사방을 흐”(1:180)르는 작은 방은, 열쇠 구멍이 있는 상자로 비유되는데, 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밀고 들어온 열쇠에 의해 상자는 강제로 열린다. 그것은 동의 없이 여성의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성의 폭력을 암시한다. “눈물에 눈물을 더하고/절벽에 절벽을 더해/상자는 가득 차”(2:15)오른다. 빛의 폭력을 피해 숨어든 상자 속조차 눈물과 상처로 인해 어둡다. 폭력의 흔적과 눈물의 기억은 작은 방, 강제로 열린 상자의 어둠처럼 여성의 몸, 어둠 속에 남아있다.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4:70)한 존재로서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 덩어리”(3:31)이다. “누군가는 결코 끝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게 나”(4:53)다. 몸의 상흔, 상자의 어둠과 마주서는 것은 폭력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폭력의 순간은 ‘나’에게 영원한 것으로 기억되고 몸속에서 지속된다. 여성의 몸, 상자의 어둠은 남성의 폭력적인 “열쇠들 혹은 너무 많은 열쇠들”(1:181)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상자의 어둠은, “이 도시는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밝”(4:26)은 ‘지옥’이다.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지옥이 필요한가요”(4:65)라고 되물어야 하는 도시. 상자의 어둠 속에서도 죽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지옥의 뜻”(4:138)을 지닌 도시. “지옥에는 돈이 있다//지옥의 집값은 비싸”(4:139)다. “모든 일이 상자로부터 시작”(1:186)된 것이다. 폭력의 “빛들이 관여할 수 없는 지하 세계는 얽힌 관들, 한없이 길어지는 관들, 텅텅 울려 퍼지는 거기가 내 몸속”(1:177)이라는 현실 인식에 다다른다. 작은 방과 상자의 어둠, 여성의 몸속은, 살아있는 한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를 암시한다. 세계에서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는 지하 세계의 관(棺)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다르지 않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나’는 어떤 안식도 취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살아있다. 지하 세계의 관 속에서 나는, 죽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호흡하고 있다. 두려워서 “뜯지 않은 선물 상자 속에는/호흡이 있”(1:191)다.
  관 속에서의 호흡. 그것이 백은선 시의 존재론이다. 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존재. ‘죽음’, ‘없음’이 아니라 ‘죽어감’,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존재하는 영(零). “나는 0, 0과 0 사이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0”(3:194)이다. “나는 0입니다 나는 이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다만 무대 안에서 있을 수 없”(3:196)는 존재. 오직 세계의 무대 바깥, 지하 세계의 ‘목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나, 0이다. 거기에서 나는, 세계의 빛이 아니라 지하의 어둠 속으로 뻗어있는 나무의 뿌리를 발견한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지의 숨결을 호흡하면서 뻗어가고 이어져 있다.

광장에 있는 나무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우기 때 죽은 사람들은 거기에 묻혔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 나무를 불렀어. 이름이 점점 길어졌어. 이제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물속에 잠긴 커다란 나무.
거짓과 거짓, 진실과 진실을 이어 붙인 커다란 목관.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
―「여름시」(1:127) 부분


  나무의 뿌리는, ‘나’부터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이어져 있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속 목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붙인 나무들의 뿌리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긴 이름, 얼굴 없는 목소리의 숨결이 나의 호흡까지 이어져 있다. “여자아이는 모두의 어머니”(1:132)라는 시적 인식의 발견. 그것은 여자아이,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앞서 죽은 모든 어머니들 몸속, 고통의 뿌리까지 이어져 있다는 시적 인식으로의 전회이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어머니들의 목관을 움켜쥐고 있다. 뿌리가 움켜쥔 목관에서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호흡하고 있다. 뿌리의 호흡에서 기원한 나무들은 세계의 숲, 광장의 숲을 이루지만 숲은 폭력의 빛 속에서 잘 자라나지 못한다. 굴광성을 지닌 나무들의 숲조차 폭력의 빛 속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숲은 찬란한 생명의 초록빛이 아니라 지하 세계 목관의 검은빛이다. “이 숲은 휘청이고 자꾸만 실족”(2:10)한다. “이 숲은 끝났어 나무들을 봐 저 흩어진 각도와 호흡에 대해 생각”(1:136)한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3:80)는다. 나는 뿌리의 목관 속에 갇혀 호흡한다.

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

숲

그리고 영원이지
―「1g의 영혼」(3:88) 부분


  뿌리의 목관에서 호흡으로 존재하는 나. ‘1g의 영혼’, 나와 우리 엄마, 엄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지하의 목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뿌리에서 지상의 나무로 자라나지만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없다. 지하의 뿌리에서 벗어난 지상의 나무가 직면하는 것은 폭력의 빛으로 휩싸인 숲이다. 지하의 목관을 움켜쥔 뿌리에게 지상의 초록빛 숲, 다른 세계는 절대적으로 부재하다. 그것은 다다를 수 없는 ‘영원(永遠)’이다.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숲”이다.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나는 ‘1g의 영혼’으로, 뿌리의 목관에서 숲으로, 숲에서 뿌리의 목관으로 이동할 뿐이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다른 삶의 장소는 있지 않다. “길 끝을 돌면 다른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1:199)다는 「비신비」 연작처럼 폭력의 빛이 세계의 숲에 내리꽂히고 있는 한, “나의 노래는 0과 숲으로 가득해서/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4:111)된다.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4:167)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1g의 영혼은 상자의 어둠, 뿌리와 숲, 폐쇄된 세계에서 ‘침묵’으로 살아있다.
  침묵은 남성 폭력의 빛이 강제한 것이다. 폭력의 빛은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금지하고 나는 폭력의 총체적 진실에 대하여 적확하게 말할 수 없어서 침묵에 잠긴다. 폭력의 빛이 쏟아지는 “침묵의 밖에서는 침묵을 읽을 수 없고/침묵의 안에서는 눈이 먼”(3:171)다. 침묵은 “검은 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허방뿐인 영원을”(3:202)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폭력으로 죽은 어머니들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죽은 어머니들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이어붙인 목관에서 호흡하는 침묵의 영원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죽음에 대하여, 얼굴 없는 목소리에 대하여,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할 수 없지만, 그 울부짖음을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을 무릅쓰고 어떤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침묵과 싸우면서 언어의 한계 속에서 거듭 말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남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3:112)10)이 된다. “나한테 시를 쓰라고”(3:42) 한 언니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3:32) 시를 쓴다. 나는 언니의 죽음과 어머니들의 목관에 대하여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1:117)이지만 “나는 최소한의 언어로 모든 것을 누설하고 최대한의 언어로 무의미에 도달”(3:54)하고자 한다. 거짓에 대한 두려움과 “가장 큰 중력이 만드는 침묵”(4:61) 앞에서 “그런데도 할 말이 있”(4:156)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거짓 속에 진실을 담은 “소설을 마저 쓰”(4:147)고자 한다. “세계가 하나의 작은 성냥갑이라는 걸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딱딱한 어둠에 불과하다는 걸”(3:124) 인식하고 성냥 긋기를 멈추지 않는 것. 곧 꺼지고 말 불꽃의 섬광이라 하더라도 상자의 어둠을 사르고 목관의 뿌리에 불 밝히는 일. 호흡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일. 살아있음을 저항이라 말하고 얼굴 없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아가멤논, 남성 폭력의 지속을 암시하는 백은선의 시쓰기이다.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도움의 돌」 부분(1:209)



0. 사라진 마을의 나무 아래 돌이 있다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이나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p.26.
  • 2) 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 전영애․박세인 옮김, 봄날의책, 2019, p.55.
  • 3)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Oresteia)의 이야기를 뜻하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아가멤논Agamemnon』,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Choephoroi』,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다. 아버지의 딸 살해, 딸을 위한 복수로서 아내의 남편 살해, 아버지를 위한 복수로서 아들의 어머니 살해 서사로 이어지는 비극이다. 이하 서사 요약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참고. 인용은 면수만 표기한다.
  • 4) 1987년생 백은선은 4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2.『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현대문학, 2019), 3.『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4.『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 이하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의 141면은 (1:141)로 인용 표기하기로 한다.
  • 5)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았던 장 아메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의 공포에 내맡겨진다.” 장 아메리, 「고문」, 『죄와 속죄의 저편: 정복당한 사람의 속죄를 위한 시도』(1966), 안미현 옮김, 길, 2012, p.91.
  • 6) 노인 요양병원 의사이자 사진가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 1954- )은 “가로세로 27cm의 정사각형 표면 위에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죽음의 문턱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우리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순간들을 작업한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어떤 예술적 의도도 없이 작업한 40여명의 노인들의 얼굴들은 곧 사라지고 말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피부와 주름살이 새겨진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현재의 시간이며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의 얼굴들이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바쟁의 몽타주 사진들에 의해 기억되며 그 얼굴들의 파토스가 발생시키는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앞의 책, pp.48-60 참고.
  • 7)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참고.
  • 8) 이집트에서 추방된 유대계 시인 에드몽 자베스는 『질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음’을 진술한다. “울부짖음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희생된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울부짖음의 인내에는 공(功)이 없다./어떠한 기관도, 어떠한 정부도 울부짖음을 독점할 수는 없다.” 에드몽 자베스, 『질문의 책』, 이주환 옮김, 한길사, 2022, p.109. 『질문의 책』,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사라(Sarah)는 울부짖고 유켈(Yukel)은 침묵한다.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었고 생존자는 기억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유켈은 고통 속에서 침묵한다.” 송승환, 「그 이름에 대하여」, 『포지션』, 포지션, 2023.6., p.244 참고.
  • 9) 백은선의 시가 ‘암시’를 적극적으로 시의 행위와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의 암시에 관한 시적 사유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나의 대상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시를 즐기는 기쁨의 사분의 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시를 즐기는 기쁨은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추측하는 행복에 있습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암시는 상징을 구성하는 그 신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입니다.” Stéphane Mallarmé, l'enquête Sur L'évolution littéraire 1891,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és(préface de Bertrand Marchal), Gallimard, Poésie, 2003, p.405. 번역은 필자.
  • 10) 에드몽 자베스는 작가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한다. 작가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한 사람이지만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쓸 때마다 작가는 사태의 진리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고 사태의 원천을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언어를 통해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매번 다시 쓰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진리에의 접근을 희망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글쓰기의 진실은 진리를 향한 거짓말 속에 스며 있다. “내가 나의 글에 애착을 가질수록, 나는 내 글의 원천과 단절된다. 내가 진심이고자 할수록, 더 빠르게 나는 말의 주도권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말들이 나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기에.” 에드몽 자베스, 앞의 책, pp.342-343 참고.

추천 콘텐츠

황유지 말이 달리는 방향

사회가 충분한 대화를 연습할 겨를 없이 월드 와이드 웹 체제로 진입한 것은 어쩌면 재앙이 아닐까. 표현의 자유와 의사 개진의 평등이 얼굴을 가린 채로 재빠르게 닮은 꼴을 찾아 커뮤니티란 이름으로 뭉칠 수 있는 곳은 기어이 ‘다크’한 것을 필연적 찌꺼기처럼 만들어낸다. 특정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통신망을 의미하는 다크 웹은 마약 거래, 성 착취 콘텐츠의 온상으로, 그 자체 범죄이면서 파생적으로 하위문화를 양산하곤 한다. 근자에 이런 다크 웹 문화는 음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는 지상으로 올라와 사이버불링(cyberbullying), 악플, 온라인 성 착취 등을 하나의 놀이 문화로 만들고 있다. 범죄-놀이 문화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더해서 기저에 깔린 것이 혐오의 정동이라는 점은 더 많은 악재를 내포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사용자들을 한데 묶는 공통 감각인 동시에 사용자들끼리는 도덕성을 내세워 특정인을 처벌한다는 일종의 사회정의 실천이라는 명분의 기제가 다름 아닌 혐오인 것이다. 2021년 한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게임 업체의 광고에 쓰인 집게 손 모양이 남성의 신체를 조롱하는 것이라며 문제 삼은 사건은 성별 기준에 따른 혐오의 생성과 편 가르기, 유명인에 대한 마녀사냥, 악플 공격이 순차적으로 실행된 대표적인 예인데, 이를 기점으로 혐오 심벌 캐기는 걸핏하면 사건화된다. 사용자들은 ‘사냥꾼’을 자처하며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타깃으로 ‘찍히면’ 사이버불링, 즉 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시작된다(때로 위협은 사이버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 사냥과 고발의 진정성은 전혀 담보되지 않은 채로 사냥꾼들은 사람을(동물을) 잡는다. 그러니까 WWW 체제는 ‘댓글 부대’와 같은 명칭에서 보듯 매체 사용자가 언어 주체에 포개지면서 쉽사리 권력화되는 시스템이다. 조진주의 「초모랑마는 바다였다」(『현대문학』, 2025, 6월호)에서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인터뷰 도중 ‘중심이 서지 않는다’는 표현을 해 남성성 비하 혐의를 쓴다. 타깃이 되자 사냥꾼들은 지수의 과거 발언들까지 탈탈 턴다. 반추하다는 고추가 반 토막 났다는 뜻으로, 평등과 계급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공산주의로 호도되는 식. 말도 안 되는 유추래도 상관없다.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데 맥락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말에는 발화자의 욕망이 묻어있고 그건 발화자를 떠남과 동시에 수용자(수신자)의 욕망이 붙을 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 발화자와 수신자, 각자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말은 자주 불일치와 오역 가능성이 짙은 텅 빈 기표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부쩍 늘어나는 여성 혐오 담론과 그와 함께 등장하는 남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불안정한 남성성의 위기를 보여주는 예라는 바넷 와이저(Banet-Weiser)의 말을 가져오면 이런 사회적 현상은 상실했다고 믿는 무엇, 자신의 몫인데 가지지 못했다는 패배 의식을 증오나 배척으로 돌려세움으로써 허약함을 방어하려는 거부의 방식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우리는 혐오의 기원이 위험에 대한 인식과 결부됨을 아는바, 어렵고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서라면 혐오의 차원으로 밀어버림으로써 그 단단한 덩어리에 의존해버릴 수 있게 되므로 바넷 와이저의 저 문장에 동의는 어렵지 않다. 신지수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스스로 곡을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으로 온라인 공격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왜곡해 던지는 질문이 제 속에 정말로 있진 않은지 자문하고 검열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금하는 어휘가 늘어나고 허용되는 어휘는 그만큼 줄어든다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그럴 때마다 지수는 티베트인 어머니와 한국과 미국 혼혈 아버지를 둔 루시 윌리엄스의 인터뷰 영상에 접속한다. 티베트어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지수는 그 영상에서 어떤 질문을 들은 것만 같다. 어쩌면 수신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를 그 문장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67쪽) 루시가 지수에게 보낸 이메일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루시에게 티베트 말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장에 쓸모도 없는 그 말을 얼마나 배우기 싫었던지. 그런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어머니에게 남은 단 한 줄기의 언어는 티베트어이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이는 루시뿐이다. 아버지에게는 건너가지 못하고 루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뇌 손상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을 한 사람의 정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며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거나 삼켜지는 맥락이 있을 것인데,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경유할 때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 중일까? 아버지에게 건너가며 삭제되는 듯 보이는 말은 실은 번역을 위해 듣고 있는 루시의 온몸으로 흡수되는 중이고, 그건 말이 더 나중을 향해 건너간다는 뜻이 아닐까. 당장에는 번역되지 않을지 모를 그 말은 루시의 몸과 시간을 느리게 통과한 뒤 어느 날 불현듯 기억되는 식으로 번역될 것 같다. 지수가 자신의 내부로 질문을 던진 것은 퍽 윤리적이고 성숙한 태도랄 수 있다. 타인에게 말의 고삐를 간단히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기를 노래하기 시작한 터이지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혐오 심벌을 조장하고 마녀사장을 일삼는 온라인 집단은 여전하다. 온라인이라는 매체 자체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운용되는 말은 발전의 방향과 전혀 상관없이 비이성적 활용은 물론 그것을 정식화하여 도덕률로 삼고 심판의 권위를 거머쥐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맥락에서 말을 오려내어 읽는 중일 때, 말은 상징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다. 그럴 때 말은 차라리 상징계에서 누락 되는 식으로 실재계로 이동하여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잘려 나간 말은 이제 주인 없이 떠돌며 마구잡이로 오염된다. 그렇다면 보다 엄정한 말 앞에 선 연구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일까? 최은미의 「김춘영」(『창비』 2025, 여름호)에서 ‘운탄고도’로 불리는 폐광촌을 꼬박 1년째 찾고 있는 아카이브 연구팀 박정윤은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여성을 주체로 놓는 생애사 기술 작업에서 김춘영의 구술 채집을 맡았다. 기존의 탄광과 광부를 중심에 놓는 구술자료를 위한 면담이 김춘영이란 여성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라 장담하는 정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윤은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243쪽). 면담 내내 신중함을 견지하며 김춘영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포함한 그러한 태도는 정윤의 연구 윤리와 닿은 것일 테다. 소설이 소환하는 것은 일명 ‘사북 사건’으로,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민영 광산에 일어난 어용노조와 광부들 간의 충돌에 공권력이 개입하면서 사상자를 내고 광부들은 고문을, 그 아내들은 성고문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0년 4월의 일이니 시절의 흉악함을 조심스레 짐작해봄직하다. 면담의 마지막 날, 4월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폭설로 정윤은 발이 묶이게 되고, 거기에 트래킹을 하던 부부와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 둘이 합세하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김춘영이 응당 광부의 아내 아니면 여성 광부(선탄부)일 거라 여기며 존중하려는 듯 말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김춘영은 시종일관 주춤거린다. 그는 동네에서 술을 팔던 사람이었던 것. ‘막장 인생’, ‘한센인 다음 광부’라는 자조로 운을 떼는 한 광부의 회고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속으로 제 목숨을 매일같이 밀어 넣어야 했던 광부들에게 김춘영의 술집은 숨구멍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광부의 아내 입장에서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으리라.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데 일종의 사원증인 인감부를 맡기고 내일도 없이 외상술부터 마셔버리니 월급날이면 자동으로 먼저 김춘영에게 술값이 공제되고 그 나머지를 받는 형국이라 광부의 아내들에게 김춘영은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면 김춘영을 좀 덜 싫어하더라는 이야기 속에서 김춘영은 탄광촌의 가장 바깥, 탄광촌의 타자다. 사실 아카이브 팀은 조심스러운 한편 김춘영에게 사북 사건에 대한 증언을 얻고 싶어 늘 질문을 준비해 다니는데, 이 질문의 목록을 들여다보자니 김춘영을 관찰자 내지는 목격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김춘영이 목격자가 아니라면? 김춘영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누락 된 설정값을 다시금 세팅한다면 저 물음들은 가해의 언어로 뒤바뀔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더해서 김춘영을 증언자로만 대할 때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은 김춘영이라는 사람이 아닌 김춘영의 ‘말’이 될 수밖에 없기에 정윤의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증언자의 구도에서 모종의 위계를 배제하기란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물을 때 어떤 말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자리를 벌려놓는다. 그런데 그 자리란 게 미약하여 판단이 미리 점치는 쪽으로 마련되기 십상. 김춘영의 포지션이 광부의 아내나 여성 광부 중 하나일 거라 의심치 않는 저 악의 없는 부부의 태도에서 김춘영은 자신의 자리 없음만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식이다. 분명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공동체로부터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있었을 김춘영에게 그들의 목격자로서 진술을 얻고 싶어 기회를 살피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정당할까, 얼마나 윤리적일까? 그건 소설 밖 우리의 현실, 증언이 유일한 통로인 역사들이 산재하기 때문이기에 간절한 한편, 누군가의 기억을 돌이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한다. 김춘영이 광부들에게 숱하게 팔았을 돼지두루치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손님상’에 어울려 앉지 않는 것은 과도한 엄정성일 수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려는 모종의 태도, 실낱같은 자존을 막장의 바깥에서 붙들 유일한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사건의 목격자이길, 그리하여 쓸모 있고 충실한 증언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바람은 지워질 뻔한 역사의 복원이라는 선(善)의 차원에서 발원한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 예비 된 질문에서마저 바깥에 놓인 미처 짚지 못한 김춘영의 고통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어쩌나. 쉽게 꺼낼 수 없이 몸에 각인돼 버린 그 기억 앞에서 면담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 눈치 밝은 사람이 모를 리도 없겠건만. 기다리는 답과 말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 나타난 군인의 얼굴이 겹쳐 만든 이 4월이 김춘영을 바닥에 주저앉히고 오줌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을 때 그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모양새가 김춘영이 그날 겪거나 보았을지도 모를 일을 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타게 기다리는 증언의 한 줄보다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할 사람들은 소설 밖에 있다. 김춘영의 회고에는 언변이 좋았던 그가 마을 여자들이 탄광에 바람을 공급하는 압축기실 온수로 목욕할 수 있도록 탄광 관계자와 다리를 놓아주는 장면이 있다, 냉각수가 데워지면 그 물로 여자들이 탄가루가 묻은 몸을 씻곤 했던 것인데, 춘영은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257쪽)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빼라 마라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말미에는 김춘영의 이 이야기만 유독 구술 채집록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어쩌면 김춘영이 자신의 생애사에 남기고 싶은 순간은 단 한 순간, 진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 한 토막의 이야기, 마을 여자들이 옷을 훌훌 벗고 빈 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환대했던 순간, 그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수 있는 자신의 효용을 증명한 그 순간, 그때가 아닐까, 더도 덜도 아닌 그 순간 광부의 아내도 여성광부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김춘영이라는 사람도이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소설은 증언과 채집의 순간, 그 분위기를 소설로 엮어내며 누군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을 밀어 올림과 동시에 침묵의 이유를 사려 깊게 짚는다. 어떤 말은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는 듯이. 증언자-연구자라는 일대일 구도는 폭설의 밤, 증언자-연구자-(소설 안)청자로 확장되며 거기에 (소설 밖) 청자를 자연스레 불러들이고 말의 이동 범위를 한껏 넓혀 놓는다. 그런 장면에서 어떤 말들은 끝내 말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말할 수 없는 말ㄹ을 그렇게 우리 앞에 내민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말은 날조된 채로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물질로 환원될 가능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도덕은 역사적 감정의 산물이라 했던가. 성해나의 「신포도밭」(『문학동네』, 2025, 여름호)은 (거짓)말이 인간을 어떻게 직조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삼대에 이어지는 가계도로 전승되며 계보학적 형성과 변이를 추적한다. 동란의 틈에서 세 살 매석의 뇌리에 남은 희미한 기억 한 줌은 기와집 솟을대문과 그것이 사대문 안이었다는 것이다. 매석은 그것을 악착같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씨앗으로 붙들고 일가를 일군다. 전국을 돌며 약을 팔던 매석은 직업에 걸맞게 ‘약 파는’ 재주, 즉 말재간이 뛰어났고 엄정성 없이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는 식으로 자기를 재정립할 줄 알았다. 장녀 매돈규와 그녀의 아들 호림이 이혼 후 성씨를 바꾸며 매씨의 대를 잇는 과정을 통해 이들의 ‘종자’는 반복 재생산된다. 호림에 이르러 그것은 다소 헐거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나면 철석 들러붙어 증식할 것이기에 헐겁거나 줄어든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매씨 일가의 중심에는 저 ‘포도밭’이 있다. 돈을 쥐고도 크게 투자할 줄 몰랐던 매석이 망설임 끝에 강남에서 밀리고 밀려나 겨우 마련한 땅으로, 개발의 희망만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신기루처럼 딱 눈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희망을 주는 그런 땅. 그건 언제까지고 강남인 듯 아닌 강남 같은 땅이다. 개발은 언제까지고 요원한 것이라 그 땅에 매석은 농약을 들이부어가며 포도를 키우고 매돈규는 짝퉁 명품 거래소 강남살롱을 연다. 매씨 일가가 날조나 다름없이 명명, 정의하는 포도밭이라는 장치는 여우의 우화를 연상케 한다. 포도를 먹고 싶지만 애써도 되질 않자 그것이 신포도일 것이라고 왜곡해버리는 여우의 이야기. 이것이 장기적, 반복적으로 누적 강화될 때 그리하여 그것이 분개가 될 때 이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한다. 매씨 일가가 일구어낸 신포도밭의 계보학, 만성적이고 무능력한 르상티망에 정확하게 호응하는 이 소설에서 개발이 되지 않는 포도밭에다 줄을 죽 그어놓고 우리가 강남이라면 강남이라거나, 오렌지처럼 보이는 여성의 명품 가방이 가짜인 것을 보고는 어차피 다 똑같다며 가짜 상품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믿는 행태는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위법적이기까지 하다. 르상티망이 자신의 무능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감정’, re-feeling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볼 때 대를 거쳐도 나아지기는커녕 반복되며 악화하는 이들의 계보는 근대의 합리성을 맘껏 조롱하는 성해나의 인식에 더해 소설의 축을 단단히 쌓아올린다. 호림에 이르러 이들의 지독한 자기 세뇌로 빚는 긍지는 다소 주춤하는 듯싶다가, 매돈규가 상표법 및 개발제한구역법 위반 등으로 입건되자 호림에게서 ‘매씨’의 강점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내 일가의 성정을 부정하는 듯 보였던 호림은 뜻밖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은행 청원경찰인 그가 은행 용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별 소득 없이 번호표만 반복해 뽑고 있는 이유미를 돕고 그 대가로 5천 원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사코 거절해도 쥐여주는 돈이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이 말할 땐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던 행원이란 호칭이 생판 남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진실처럼 와닿았”(253쪽)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호림은 조금씩 ‘재개발’된다. 그러다 이유미의 욕망을 보자 그것은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철석 들러붙는다. 미처 정돈하지도 못한 방치된 포도밭을 성급히 정리한답시고 휘두른 낫에 허벅지를 베이고 저 멀리 아른거리는 강남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그가 포효하는 장면은 매호림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은 호림의 그런 변화를 이지러진 근대 괴물의 탄생처럼 그려내며 시종일관 우스꽝스럽던 소설에 서늘한 리얼리티를 툭하고 던지는 것이다. 근대성이 결코 합리성과 등가가 아님을 내내 설파하는 소설적 장치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불어 호림의 변화를 우리는 결코 성장이라 말하지 않을지라도 증식이라고는 표현할 수 있겠다. 외부와 결탁한 음험한 자기최면의 말은 이제 겁도 없이 자라날 것 같다. 이정자로 살던 노년의 여성이 이유미로 개명한 것 역시 그녀가 여전히 욕망의 주체로서 살아감을 증명하듯 말이다. 나이 들어 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개명 후 통장 명의 변경과 같은 사소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비견해 홀로 불쑥 커 보인다. 그런 균형의 어긋남이 이유미를 기괴하게 보이게끔 한다. 묵혀 둔 고액 예금과 개발될지도 모르는 아파트가 바꿔다 줄 전원생활을 꿈꾸며 5천 원씩 5만 원씩 비밀을 나누는 그녀는 어쩌면 매씨 일가와 퍽 닮은 구석이 있다. 덮개 기억(Deckerinnerung). 사소하고 무의미한 듯한 기억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일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정작 큰 것을 가린 작은 덮개일 수 있음을 뜻한다. 매석에게 기왓집의 대문이란 덮개 기억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합리를 도모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은 덮개로 일생을 가리고 “되뇌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은 진실이 되”(227쪽)는 삶을 착실히 쌓아놓은 일가가 낳은 것은 작정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술술 풀어낼 줄 아는, 거짓말을 돈으로 교환하려는 매호림이다.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본 도귀분-매돈규와 매호림-이유미 사이에서 누가 누구의 먹이가 되는가? (거짓)말의 점유, 그것만이 이들을 구분할 따름이다. 선수 치지 않으면 나와 닮은 그가 나를 속여먹는 게임, 그것이 이들이 이해한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편집된 말이 신포도밭을 가진 한 가계를 통째로 정립할 때,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편집된 말의 세계에서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는다. 라싸를 걸으며 그는 혐오 심벌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 적당히 삭제된 말을 하는 대신 자기 내면을 여실히 타진한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를 가리키는 티베트어로 대지의 여신, 세상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영국인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로 대체 되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조지 에베레스트로 대체될 때 저들이 잃은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를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러면서 어떤 말은 영영 그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결코 뱉어질 수 없는 침묵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어떤 기억의 자락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김춘영에게 그것은 발화되는 대신 차라리 신체에 깊숙이 찔리듯 새겨진 채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돌아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제 와 대의를 위해 정치적이고 공적이 존재가 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발 없는 말’이란 표현은 말이 얼마든지 뛰쳐나갈 본성을 갖고 있음을, 그 대단한 움직임의 위력을 함의하는 듯하다. 인간은 의미의 자장 안에서 내내 진동하는 존재일진대, 지금 우리의 말은 어디로 가는가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중일까. 말은 이성의 산물이라는 문장을 전복하는 현실들은 이제 말을 조련할 힘을 빼앗긴 듯 보인다. 발 없는 말은 고삐 풀린 말이되고,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말의 먹잇감이 되고 자주 말의 발길에 차인다. 다시금 말의 고삐를 점검해 본다.

월간 현대문학 황유지 조진주최은미성해나말언어증언거짓말혐오 2025
황유지 비좁게 버티며 잇기 - 읽기

아무래도 삶은 고통에 가까운 걸까? ‘잘 먹고 잘살자’는 슬로건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쪽으로 옮겨가다가 아주 보통의 하루를 소명으로 살라 한다. 결코 그것을 초과하지 말라는 듯 점차 쪼그라드는 소망의 크기는 퍽 현실적이라 그건 또 트랜드라 명명된다. 노동의 자리는 차츰 더 쪼개진다. 비정규, 비전임, 하청, 임시, 기간제와 같은 용어를 앞세운 계약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갱신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계약이 불발하면 사는 공간이 위협받는다. 전세금은 누군가의 먹잇감이기 십상이고 슬금슬금 오르는 월세의 부담은 가장 먼저 취향을 뒷전으로 민다. 일터에서 삶터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협은 존재의 위상을 쪼그리고 접고 나누게 한다. 다주택을 보유하고 일주일에 며칠은 도시에서 일하고 한적한 곳에서 나머지 날을 보내는 삶은 확실히 ‘아주 보통의’ 사례는 아니다. 겨우내 누군가는 한 줄도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현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임에도 어떤 낌새도 개연성도 없는 소요를 두고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겨우 한고비나마 추스른 다음 어렵사리 꺼내놓았을 소설들이 어느 지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 계절을 통과하며 먼저 읽는 단편소설이 미학적, 정치적, 시장 경제의 문제와 같은 지점에서 장편 소설과 다른 무엇을 선취한다면 미덕 중 하나는 그 기민함에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불안정의 와중에 발견되는 단편소설의 공통 감각이란 소설의 미학적 보편성이나 작가의 감각이라는 개별성, 특수성을 초과하는 시대 감각, 그 징후의 포착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연극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기성의 공간분할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르라는 플라톤의 진단에서 랑시에르는 미학이 수행하는 감성의 분할이라는 역할이 다분히 정치적임을 포착한다. 우리의 글쓰기에서 어떤 지형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징후이기도 하면서 사회구조의 재편 가능성을 향해 기존의 레짐이 해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2025년 봄의 단편소설들이 먼저 읽고 감각하는 정치적 삶의 지형도는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이어진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소설이 소묘하는 생은 좁아지고 접힐 것을 종용하는 공간과 그것을 체현하는 몸을 통해 다시금 감각과 경험의 재배치를 전경화하는 중인 듯 보인다. 어려서 이해가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누군가는 왜 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는 불행 쪽에 서 있다. 이제 보니 그런 일은 드물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흔하다. 조경란의 「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문학과 사회』, 2025, 봄)에서 양지의 삶이 결코 성공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양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 강사로도 일했지만 쉰 살이 넘도록 교수임용은 기약이 없다. 일찌감치 교수가 된 현 선배의 빈집을 돌보며 그 집에서 자신의 전공 서적을 바라봄은 타인의 성공과 나의 패배를 여실히 대비하는 잔혹한 한 폭의 그림이다. ‘타인의 공간’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유사한 점유의 경험이 있다.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된 모 교수를 대신해 강의한 것 역시 현 선배의 소개 덕이었다. 당시 교수의 배려로 그의 연구실을 사용하면서 양지는 공간의 안락함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한 인간의 증명을 대리하기도 하는 공간의 위력 앞에 양지는 교수가 영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봐야 양지는 엄연히 그 공간의 주인이 아니고 교수가 완전히 부재하게 되자 잠깐의 꿈을 허락했던 공간에서마저 완전히 내쫓기게 된 터였다. 다시 타인의 공간에서 지내게 된 여름은 온통 물난리로 하천이 범람하고 실종자가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재난의 와중인데, 양지는 이곳으로 종소를 들인다. 말랑한 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둘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도 임용이 되지 못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양지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모성에 대한 결핍이라는 곤궁이 있는 반면 종소는 모성의 과잉 쪽이라는 것만이 둘을 가르는 차이다. 현 선배가 없는 현 선배의 집 식탁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구도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가운데 괴괴하다. 이 집의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제법 어린아이만 한, 저주 인형이라고 불리는 밀짚 인형과 함께.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타인의 공간이 양지에게 준 것이 있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오브제 보듯 낯설게 조망하는 타자화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 시선의 전유 안에서 종소가 임용과 관련한 추악한 소문의 주인공이며 어쩌면 유서일지도 모를 글을 썼다는 것, 그것을 본 어머니가 끝내 아들의 여정-그것도 제자의 기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다소 가능해진다. 그들을 당겨놓고 바라보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양지가 결코 접지할 수 없는 모자의 관계가 양지쪽으로 일정한 폭만큼 거리를 벌린 채 존재하는데, 뜻밖에 양지는 종소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경유함으로써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맥없이 풀어져 버림을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양지의 미움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놓아버리는 능숙함을 택한다.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종소의 어머니가 발견된 곳이 뚜껑 열린 맨홀이나 넘실대는 개천이 아닌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맨손체조의 대열인 것은, 어머니가 잃은 것도 실은 일상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균열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독자 앞에 힘겹게 밀어 올린다. 가장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일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 일상이란 또 얼마나 각자의 허상에 기반한 것인지 궁구하게도 한다. 누군가는 깨어진 일상 위를 더 오래 걷지 않나? 어쩌면 바라는 일상은 기실 꿈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학위나 성실함이 미래의 일상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런 이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란 그저 남의 것을 기웃대거나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임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제자의 죽음과 임용에 실패한 양지와 종소 그리고 저주 인형을 품고 사는 현 선배의 삶은 어쩌면 하나의 선 위에 놓인 가능성에 대한 확률 게임처럼도 읽히며, 그것들은 정말 한 끗 차로 보인다. 현 선배가 양지나 종소와 달리 교수임용에 ‘성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시(詩)를 역전시키는 소설의 묘미는 현 선배의 저주 인형과 혈압 보조제가 그 답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 나뭇잎이 빗방울을 끊임없이 받아내고 끈질기게 ‘버티는’ 중이듯이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견디는 중이라는 게 생의 비밀은 아닐는지. 양지는 더 버텨야 할 테지만, 그 버팀을 위한 그의 지금 현실은 너무 비좁기만 하다. 공간의 영향력이란 퍽 실재적이면서 감각적이기도 해서 때때로 공간이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매일 온몸으로 공간을 체현하며 그 경험의 체현물인 몸조차 공간이다.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지만 이것은 점점 더 요원하기만 하다. 이토록 비좁은 현실에서 금비가 가진 공간이란 ‘캐비닛 두 개’다. 이상하의 「캐비닛 비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의 금비는 근근이 독립해 살던 원룸 보증금을 빼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엄마와 이모가 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캐비닛‘마저’ 비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여성 청년의 버티기를 쓴다. 스물여덟 살의 금비는 분양사무소 바이럴 마케터다. “선캡족”(76쪽)으로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하청직원인 것과 달리 금비는 “회사 소속 현장 직원”(75쪽)이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길거리에서 분양사무소로 호객을 하는 것, 그게 이들의 일이다. 이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했지만 태블릿 피시와 줌 체제로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한 엄마, 금비가 중학생일 때 실직한 뒤로 줄곧 아르바이트만 하며 함께 살고 있는 이모는 각각 재편한 시장의 그림자처럼 금비의 생에 다소 누추하게 걸쳐 있다. 얼핏 계산을 해보면 엄마의 직장 생활과 이모의 실직,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변화는 국가부도 이후 체제의 개편과 함께 시작되었을 테다. 이제 와 이 집에 금비가 차지할 공간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고 70개가 넘는 이력서를 뿌리고 겨우 잡은 직장에서 금비가 필사적인 건 지당하다. 버티어야 재계약이 가능하고 그래야만 독립을 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회사 소속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남들은 하나 쓰는 캐비닛을 금비만 두 개 쓸 수 있게 허락했다. 금비는 거기에다 원룸에 있던 원목 수납장을 옮겨놓고 개인 소품을 넣어두는데, 그 목록이 자잘하고 소박하기만 하다. 금비는 자신의 무기를 분명히 알고 선캡족을 이기기 위해 나름 유니폼을 갖추고 구두를 신는다. ‘아줌마’들은 입지 못할 작은 사이즈의 옷에 몸을 구겨 넣는 그런 노력은 육체적 차이를 토대로 사회적 가치를 구분하는 몸의 수치화에 다름 아니지만 그건 반드시 실적의 수치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제발, 한 번만, 도와줘”(78쪽)로 호객을 하는 선캡족의 실적에 밀린 지 오래다. 길바닥을 일터로 삼으며 머리에는 선캡을 쓰고 발에는 수면양말을 껴 신고 막무가내 호객을 하는 “5,60대 여성 아르바이트 생”(74쪽)들을 혐오하면서도 무력한 엄마나 이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면서도 가족과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심정. 그런 심경을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건 저들의 버티기에도 나름의 선, 궁색할지언정 최소한 자존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1) 현실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은 엄마, IMF 이후로 내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이모 그리고 계약직 바이럴 마케터 금비로 이어지는 한 가계의 구조는 실은 이 사회의 정체, 그 지연을 여실히 되비춘다. 머무르다시피 내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퇴행하는 이 사회의 잔여물처럼 자꾸만 자리를 좁혀가며 독립할 수 없는 저들의 사정에 기댈 때, 기대수명 120세 시대의 지당한 지침일 ‘저속노화’란 말조차 삐딱하게 들리는 건 노동의 측면에서라면 몸은 언제나 수단일 따름이기에 생산력을 보유한 일하는 몸을 오래 유지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종국에 두 개의 캐비닛 중 하나마저 새로 온 선캡족에게 내어주는 금비에게 저 수납장을 옮겨놓을 오롯한 자기만의 방은 어째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엄마와 이모, 금비 중 그 누구에게도 독립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것은 이들의 자유라는 범위를 좀 더 한정할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감한다. 독립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 집만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고 얘기한다. 차은영, 「고립어 배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에서 화자는 지금 여행 중이다. 먼 미래를 위해 1종 대형 면허를 땄지만 근미래는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는 화자의 여정 내내 따라 붙는 것은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가입하지 않은 ‘자갈 보험’ 옵션이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이혼하고 전화나 걸어오는 아버지는 생명보험을 들먹이면서 내가 죽으면 그건 네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살아있다. 아버지의 ‘자살 보험’과 여행길의 ‘자갈 보험’은 그렇게 나란히 먼 미래와 아주 가까운 미래(혹은 지금)의 화자를 둘러싼 안전장치로 나란히 대비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갈 보험은 옵션에서 빠져 있고 자살 보험은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어느 쪽도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지점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다. 그는 동료에게 주말 근무 교대를 부탁했는데 동료는 주말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자살했다. 어쩌면 지난 소설 속 인물들이 과잉 윤리의식으로 인해 내면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이 대단한 사건이 2025년의 인물에게는 “왜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지”“해명을 요구하”며 “죽음으로써 모든 형태의 해명을 궁극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97쪽). 소설은 죄책감을 종용하거나 그의 책임 여부를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내내 아이슬란드의 자갈길 위에서 자갈 보험에 들지 않은 차를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 이국의 어떤 풍경에도 넋을 빠뜨리지 않게, 가족사를 회고하는 일에 깊이 골몰하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길을 더듬어가는 여정을 담백하게 그릴 뿐이다. 균형잡기란, 내 탓이라기보다 그게 나일 수도 있었고 그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 마음 그러니 조금은 더 약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다짐 비슷한 것으로, 이 소설의 저류에 묵음처리 되어 있는 음성을 가시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하여 화자가 끝내 완성한 문장이 “아버지, 죽지 마세요”(109쪽)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성장과 화해의 감각조차 달라진 ‘요즘’의 생존 감각은 아닐까. 자갈 보험과 자살 보험은 보험의 용어를 빌렸달 뿐, 결국 이 세계에서 존재란 죽음이나 삶 어느 쪽에서든 위험 앞에 균형을 잡고 버티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기미도 해명도 없이 죽음 쪽으로 발길을 돌린 저 동료처럼 「흰옷 빨래의 날」(안담, 『문장웹진』, 2025, 04)속의 마지도 그러하다. 증명할 수 있는 가난을 소유한 청년인 화자는 전세임대주택제도 덕에 역에서 멀지만 산에서는 가까운 집에서 큰 개를 키우며 지낼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다양하고, 펫시터, 원룸청소, 주말 보습학원의 데스크, 호프집 마감 직원, 자기 소개서 대필 등이 그 목록이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중증 우울을 앓는 친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그전에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옆방 남자와 사귀는 동안 그 남자의 옷에 밴 치킨집 기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곳을 떠났던 터였다. ‘냄새’는 화자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외모를 전혀 가꾸지도 심지어 잘 씻지도 않는 마지의 체취는 만만치 않다. 참다못한 그는 마지에게 세탁법을 알려주는데, 마지는 아주 간단한 생활의 기술 이를테면 세탁기 사용법조차 모르고 있다. 차츰 청소며 정리를 시작하는 마지가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다름 아닌 ‘유튜브’다. 그러니 얻는 정보는 산만하고 산발적이다. 유튜브가 마지를 데려가는 방식은 알고리즘이니, 그건 현실의 개연성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마지는 알고리즘에 따라 이것저것 살림 ‘꿀팁’을 얻어오고 청소 세제와 수납함을 구입한다. 잡다하고 목록화되지 않은 알고리즘의 경로는 그를 음모론의 세계로 데려가고, 집회로 이끌기도 한다. 태극기 집회, 장애인권, 기후 정의,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 집회까지 목록은 다양하다. “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어쩌면 이 문장은 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사는 게 서툴렀”고 “사는 정도가 아주 미약”한 사람, “사람이 덜 되었다는 피드백을 듣곤” 했던 마지에게 일상, 보통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당위성으로 갈음되곤 한다. 그건 정상성의 규정에 대한 모종의 합의를 전제하기에 일상이 누군가에게 버거운 것이라면 그에게 일상의 영위는 보편성이라는 텅 빈 것의 추구이자 폭력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가 남자친구의 옷에 밴 기름 냄새가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이 실재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될까 봐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마지의 냄새에 자신의 삶이 한데 뭉뚱그려질까 봐서 비싸고 향이 나는 세제를 고집해온 것이라면, 마지에게 그런 향기로 감싸인 공간은 끝내 곁을 물리는 행위,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켜주는 묵언의 죔쇠였던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삶은 한 번 더 층위를 구분해나가는 방향으로 마지를 몰아댔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기일에 마지의 흰옷 빨래를 하는 일은 그를 기리는 것이면서도 그 공간에 더는 없는 마지의 육체성을 마치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옷으로 대체하는 이 행위는 진정한 애도의 행위인가 부재의 확인라는 남은 자의 자기 보존인가. 그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의 빨래를 자꾸 빨아 그의 냄새를 휘발하는 행위에 마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행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던 데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곁을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희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는 광장의 숱한 깃발 중 어느 항목에도 퓨섭될 수 없었던 마지만의 깃발을 세우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이 행위의 저변은 차은영의 인물과 나란히 두고 읽게 한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죽음의 원인을 자신에 두지 않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안간힘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 실은 세계라는 외부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라는 저울의 추를 버티어내는 개인의 승리 쪽으로 점점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사후적인 윤리의 냉담을 엿보게 한다. 마지가 일상을 향해 웅얼거리던 말은 끝내 ‘버겁다’가 아니었나. 한 인간의 삶이 사회적 관계와 더불어 공간 내에서의 관계성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레짐을 형성해간다고 한다면, 마지의 죽음이 실족사였든 자의적 선택이었든 자명한 것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허용받지 못했던 마지의 죽음은 저 바틀비의 죽음이 가치와 그 가치를 수용할 공간의 말소이듯 일종의 사회적 죽음으로 수렴되는 면이 있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 가진 것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속되나. 남의 집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을 꺼내 먹어 치우는 몸, 그 몸은 빈집을 임시로 채운다(「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 임시라는 말은 각종 유사어로 위장해 부지불식간에 잠입했고 우리 세계를 점유했다. 재계약에 실패하면 남의 집 달걀이라도 먹으며 버텨야 하는 것은 대학원을 나온 시간 강사나 학습지 교사나 주방 아르바이트생이나 바이럴 마케터나 마찬가지다. 계약이 끝나면 제 몸을 둘 공간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교수의 방을 대신 쓸 수 없고, 캐비닛을 비워야 하며,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누군가의 집에 월세를 내고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가거나 고시원으로 가야 한다. 또 누군가의 몸은 냄새나고 어디에서도 구실하지 못하는 것, 곁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삶은 고단하다. 잔뜩 고통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곁에 있던 너마저 죽는다. 정당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니체의 말마따나 오로지 미적으로만 세계가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현실보다 좀 더 정당성을 가질 소설에 기대 이어 나가 보니 그건 이 사회의 레짐이 점점 협소한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악화 쪽으로 기우는 소묘들이다. 어지러운 정치의 모형들이 우리를 더 좁은 곳으로 내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어가거나 살아가는가. 쩨쩨하게도, 삶은 그럼에도 지속된다. 삶은 아무래도 고통 쪽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삶일지라도 덤벙덤벙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어쩌면 그것만이 내가 나를 존중하는 가장 비좁지만 오롯한 존엄의 태도가 아닐까. 이 계절의 소설을 읽으며 달라진 세계의 지형도를 쓸쓸하게 음미해본다. 조금 더 잘 버티기 위하여. 1) 나는 여성의 일과 자리 그리고 이름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일터에서 여성 청년이 자리를 지키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들의 ‘버티기’는 금비의 표현에서도 보이듯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받는다. 그들은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도 소외받지만 젊은 여성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거기에 하청, 하청의 하청과 같은 구조가 덧붙어 이들은 쉽게 ‘민폐 아줌마’로 전락한다. 졸고는 「비주류 생존기-여성의 호명과 자리」, 『문장웹진-콤마』, 2022.

월간 현대문학 황유지 버티기공간여성청년비정규직조경란이상하차은영안담 2025
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