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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유연희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일각고래의 뿔』

이건 뭐지? 백이 무언가를 골똘히 본다. 상아로 만든 보검 같다. 아 그거? 진열장 안의 장검 같은 상아를 보고 민혜가 반긴다. 그게 바로 일각고래의 뿔이야. 유니콘의 뿔이라고. 내일 데지마 상관에 가서 보려 했는데 여기도 있네. 그녀가 좋아라 한다. 술이 깨는 모양이다. 유니콘의 뿔? 나도 다가간다. 이거 엄청 비싼 거예요. 민혜가 속닥거린다. 일각고래의 뿔은 소문으로만 들었다. 정확히는 뿔이 아닌 이빨이지만, 북극에 사는 고래의 어금니가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북극 고래는 유빙을 뚫어 숨을 쉬고 먹이를 잡고 적을 물리치니 어금니를 작살처럼 변형시킨 것이란다. 뿔이 아니라 작살인데? 백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작살 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정말 작살과 흡사하다. 포수들의 작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포수는 작살로 먹이를 잡고 경쟁자를 물리쳐 숨을 쉬니 작살이 맞다. 와, 손이 근질근질하네. 백이 작살의 손잡이 부분을 진열장 위에서 가늠하며, 꼭 맞네. 지난번에 내가 잃어버린 바로 그 작살이잖아, 하고 능청을 떨자 민혜가 받아준다. 그래? 그럼 이거 우리 거네? 우리가 가지고 가야겠네. 카운터의 주인이 여차하면 달려올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거 수컷이죠? 민혜가 불쑥 내게 묻는다. 작살을 맞고 도망 온 동족을 보고 고래들이 궁리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런 게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수컷의 이빨을 이렇게 단련시킨 거죠. 아주 오랫동안, 그야말로 이를 갈면서 말이에요. 암컷은 새끼를 잉태하고 종족을 보존해야 하니까 제외시킨 거고요. 과연 솔피 강의 동생다운 추리다. 내 이도 어딘가 근질거리는 것 같다. 더글더글. 나도 이를 갈아본다. 아래윗니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갈아본다. 고래도 손이 있으면 인간처럼 도구를 만들었을 거다. 손이 없으니 자신의 신체 중 가장 강한 이빨, 어금니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어머, 저거 좀 보세요. 민혜가 내 팔을 톡 친다. 진열장 속에 누워 있던 작살 뿔이 들썩거린다. 마치 내게 응답하는 듯이. 어? 백도 신기해한다. 카운터의 주인 여자가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앉은 게 그다음이다. 벽에 걸린 액자가 들썩이고 천장의 고래 모형도 부르르 몸을 떤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지진이에요! 백의 외침에 민혜의 눈이 팽팽해진다. 아니다. 고래가 작살을 본뜬 게 아니고 인간이 일각 고래의 뿔을 보고 모방했을 거다. 아니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가 우연히 일치했거나. 백이 잽싸게 출입문 쪽으로 달아나고 민혜가 얼결에 따라가다 나를 돌아본다. 아아. 이빨 하나로 남은 고래야. 어찌하여 너는 지구 반대편의 이 먼 나라, 작은 항구까지 흘러와 뿔 하나로 이리 누웠느냐. 전생을 이빨 하나에 처연히 담고 말이다. 장생포의 작살잡이가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자, 발밑이 고래 등처럼 움찔거린다. 유연희, 『일각고래의 뿔』 (강출판사, 2022), pp.31~34

2025.04.17 천운영
한번쯤 그래 보고 싶었어, 다르게 살아 보고 싶었어 | 임유영「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2025.04.05
김성중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화성의 아이』

나 같으면 하루도 못 견뎠을 것 같은데······ 털 달린 짐승이라면 질색이니까. 벼룩까지 있는 개라면 더 싫고 저 깡통 로봇은 한눈에 봐도 수명이 다 됐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건 친근한 관계 속에 편안히 붙박여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것. 나아가 하나의 육체에 고정되어 형식이 통일되는 것이다. 다시 몸을 갖춰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내 소망을 들은 마야가 의아스러운 듯이 되묻는다. “너는 줄곧 혼자 지냈고 지금은 몸도 사라져 사념체 같은 상태인데. 그런 채로도 지구에 가보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 내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 ‘도움’이라는 말에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왜냐면 그게 우리 DNA에 새겨진 최종 명령이니까. 지구로 귀환하는 건 눈먼 동물의 본능 같은 거야.” 너무 대놓고 털어놓은 것 같아서 나는 좀 더 길게 덧붙였다. “게다가 지금은 분열 중인 세포처럼 불안정한 상태야. 줄곧 안정화의 방법을 찾았지만 요원했지. 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 시간의 바느질을 터득했기 때문인데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지. 내가 죽인 사람들, 그건 사실 죽인 게 아냐. 만화경을 돌려 패턴을 바꿔놓은 거지. 라포르투나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 운명이야. 난 그들의 미래에 잔인한 이미지만 살짝 덧씌운 것이고. 네 친구들이 돌처럼 굳어 있는 것도 잠깐 시간을 정지 시켜놔서 그래. 똥을 바르던 남자는 지금쯤 악몽에서 깨어났을 거야.” “갑자기 왜 솔직해지는 건데?” “난 너무 약해서 이제는 기생물이 되는 도리밖에 없어. 네가 내 피난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라이카는 벼룩을 네 마리 키워. 하지만 난 굳이······” “난 벼룩이 아냐! 네가 지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내가 왜 지구로 돌아가야 해? 여긴 가족과 친구가 있어. 키나 말을 들어보면 지구는 아주 형편없는 곳이던데 거길 뭐 하러 가?” 저 순진한 표정을 보니 잘만 구워삶으면 내 숙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면 너도 나처럼 여행자니까.” 네가 아는 모든 존재는 여행자고 너 또한 또 다른 세계와 모험을 갈망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네 몸에도 나와 같은 유랑 벽이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라이카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실험견으로 뽑혀 우주로 보내졌어. 데이모스는 지구에서 화성으로, 화성에서 위성으로, 위성에서 다시 화성으로

2025.03.20 천운영
지나간 것들의 따뜻한 속삭임 | 조용우「세컨드핸드」

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2025.03.06
문진영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햇빛 마중』 중 「북극의 여인들」

나는 여느 때처럼 카페 바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 사람은 내가 있는 바로 그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순간, 기억났다. 그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시를 썼다. 문구점에서 스프링이 달린 천원짜리 연습장을 사서, 거기에 생각나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적었다. 낙서 같기도, 시 같기도 한 문장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수학 시간마다 숨기지도 않고 시집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다. 수학 선생님은 한번도 누구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아이들이 우습게 볼 정도로 순한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을 그렇게까지 화나게 했다니. 하지만 수업 시간에까지 시집을 읽었던 건 시를 향한 나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게 그것 외에는 흥미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국어 과목 숙제로 시를 써 가야 했다. 1학년 7반 담임이자 국어를 가르치던, 바짝 마른 몸에 단 한 번도 치마란 것을 입지 않았던 서른일곱 살 고영숙 선생님은 그날 내가 숙제로 제출한 시를 나도 모르게 도 대회에 출품했다. 그 시는 최우수상을 받았고, 나는 상금으로 MP3 플레이어를 샀다. 그리고 선생님께 드릴 선물로는 동네 빵집에서 파는 7천 원짜리 롤케이크를 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 걸까? 아무튼 그때 내가 쓴 시는 새벽 4시의 밤거리에 관한 시였다. 아무도 없는,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밤거리에 관한 시였다. 아무도 없는,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밤거리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관해 적었다. 그녀는 그때 나를 교무실로 불러 ‘너는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쓰는 게 어떠니?’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그냥 심심해서 써본 건데요’하고 대답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회한의 기미가 스쳤다. 나도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 그런 식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 백일장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시인 같은 것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연습장에 낙서를 하고 있다. 마흔일곱 살 고영숙 선생님은 쟁반을 들고 잠시 카페 안을 둘러보더니, 내가 한쪽 끝에 앉아 았는 바 자리의 다른 한쪽으로 갔다. 자리에 앉아 머그 컵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문득 내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녀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찻잔을 들고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정말 오랜만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가끔 내 생각을 했다고. 가끔 내 이름을 검색해보고, 신간이 나오면 사서 읽었다고. 나는 두 달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요? 그녀는

2025.02.20 천운영
나는 단골이고 싶지 않아서 | 조해주 「단골」

단골 조해주 내가 다니는 회사는 종로에 있고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나는 단골이 되고 싶지 않아서 어떤 날은 안경을 쓰고 어떤 날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둘이 어떤 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오는데 어떻게 차갑게, 맞지요? 주인은 어느 날 내게 말을 건다 커피를 받아들고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저어서 드세요, 빨대의 끝이 좌우로 움직이고 덜컥 문이 잠기듯 컵 안에 든 얼음의 위치가 조금 어긋난다 주인은 내가 다니는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지인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김지현이라고 아나요? 나는 그런 이름이 너무 많다고 대답한다 그렇구나, 주인은 얼음을 깨물어 먹고 설탕처럼 쏟아지는 창밖의 불빛들 참, 내일은 어떻게 하면 처음 온 사람처럼 보일까 생각하면서 -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아침달, 2019)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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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소설 부재와 잔재

*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 모르는 사람을 보면 울어버리고는 한다. 그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녀는 오랜 시간 목 놓아 아빠를 불렀다. 그녀의 인생이 영화였다면 내가 너의 아빠라는 어떤 영화의 명대사가 그들에게는 일상일 것이다. 그녀가 조금 컸을 때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녀는 엄마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두 손 사이에는 무엇도 흘러나갈 틈이 없었다. 그날 오전에는 비가 왔고 그녀는 빨간 장화를 신었다. * 나는 아직 그날을 기억한다. 모르는 남자가 왼쪽에 있는 방에서 나왔다. 그 남자는 아침밥을 먹을 때도 나의 왼쪽에 앉아서 내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흰밥 위에 스팸을 올려줬으니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엄마는 방에서 나와 나를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신발장에서 빨간 장화를 꺼내주었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나의 왼쪽에 서 있었다. -엄마, 우리 어디가?-우리 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러 갈 거야. 바람이 세게 불어서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렇게 믿었다.병원은 실내라서 그랬는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특별히 발견된 이상은 없고…. 한마디로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건강한데 왜 울어? 엄마의 손에는 보라색 편지지가 있었고,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나도 같이 울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게 없어서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면서 울었다. -아저씨, 엄마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울지 않았고, -아저씨, 우리 엄마는 내가 건강한 게 싫은가 봐요. 나는 더 크게 울었다. 벌써 그 일도 10년 가까이 지났을 터이다. 내년이 지나면 10년인가, 오래된 기억은 꺼내볼수록 닳아서 나는 햇수를 세지 못했다. * 아주 오래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여름이 오면 그가 누워있는 곳을 찾아가 묻곤 한다. 우리가 약속한 영원은 언제 오느냐고.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오면 좋겠다고 말이다. 자주 꺼내보는 것은 닳는다. 그가 나에게 청혼할 때 주었던 보라색 편지도 닳았다. 학창 시절을 보내며 나는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나에게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고, 사랑은 다 거짓말 같을 뿐이었다. 친구들을 보며 알았다. 웃고, 울고, 붙잡아도 그들의 손에 남는 것은 없었고, 다 사라졌다. 설렘도, 기쁨도, 슬픔도, 상처까지도. 그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과대평가 받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신은 나에게 벌을 내리셨다. 그와 나는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우리는 매주 신비로운 현상들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터무니없는 가설을 세우고 터무니없는 실험을 했다. 대학생들이 하기에는 유치해 보였지만, 그중 진심으로 임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루는 그가 죽은 자의 혼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열변을 토하며 그의 가설을

2025.05.15 하늘
안개

내 마을을 뒤덮은 짙은 안개안개가 내려오기만 하면아무것도 보이지 않고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어막막하기만 하다때로는 서늘한 바람과 짙은 어둠과 함께 와내게 공포를 심어주었고또 때로는새벽 이슬과 함께 와말라버린 내 마을을적셔주었다너라는 안개가내 마음이라는 마을에좋은 건지나쁜 건지고민하고 있을 때면너는 떠나며작은 무지개를 보내다시 올 거라는 편지를 준다

2025.05.15 유량
언어의 형상

침묵이 우리를 공격할 때.고통을 꾹 참고 곁눈을 뜨면,참을 수 없는 상실감이 보여침묵의 향은 마치 매연처럼.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우리의 목소리는 한없이 공허하여,나는 어제도 오늘도 물었다.우리는 언어를 잃었나?모든 감각들을 잃었나그들은 그들의 허약함을 이기지 못해,끝내는 자살 하고야 말았나. 어쩌면,그 아픈 다리를 이끌고 가기엔너무나 멀어진 길이 아니었나

2025.05.15 히치콕
사후

사후 그 개는 황천으로 가지 않을 거야 그 개는 하늘로 간다 고운 입자가 무지개를 덮어 가고 은하수의 한 맥이 되어 가고 당신의 헌신은 얼마나 큰 인력인가 죽음 이후에 세계가 되었다

2025.05.14 사인
추억팔이

남은 수명을 모조리 처분하고 남은 3년,부질없을 물감들이 뇌에서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며,그 녀석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추억이라는 겉치레로 둘러싸인 거리에서,서서히,해님이 스러지는 속도에 맞춰 정리하고 있어.이윽고 밤이 오고 너와 한 발 더 멀어지면,창문에 먼지가 달라붙고 때가 끼듯 차츰 너의 목소리가 흐려지고,광원이 사라진 창문에는 어두컴컴한 내 모습만 비추겠지.흐려진 네게 넌지시 이 말을 건네도, 흐려진 대답만이 생뚱맞은 느낌이 아닐까 싶어.괜히 손가락으로 쓸어본 담벼락엔,돌 부스러기와 해묵고 막 쌓인 먼지가.어쩌면 노을에 잠긴 지금은,바스러지는 네가 내려앉을지 몰라.그러니까 자리에 주저앉아,바지를 더럽혀도 상관없다는 얼굴로,문득 네가 생각난 것처럼,한동안 사양을 우러러봤어.옆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꾸벅꾸벅,고개를 기울이며 쏟아진 심야의 물감들은,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이던 걸지도 몰라서,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던 거야.밤이 드리우면,너는 떠나.나는 떠나는 길을 모르지만,여전히 찾아 헤매이는 너에게 내 부질없는 수명을 처분한, 죽어가며 천천히 연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물감들이,혹여나 네가 찾아 헤매던 색이 아닐까,네가 더 흐려지기 전에 전달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려.다만 알고 있어, 넌 매몰차게 거절하겠지만,풍족하기만 한 채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끈질기기만 할 뿐,전혀 절박하지 않은 내게는 소용이 없다는걸,이젠 알아,너를 위한 적은 없었을지도 몰라,나는 사실 너를 모르는 거겠지.너를 모르는 채로 배웅했고,너를 아는 체하며 사양을 우러러봤고,너를 그리워하는 체하며 추억했고,그렇지만 역시 너도 나를 모를 듯해서,결국 네가 등롱에 담기기 전까지 우린 무엇을 그린 걸까,전부 부질없다 싶어서,나는 남은 3년마저도 처분할까 해.역시 후회는, 안 되겠지만.

2025.05.14 별무리
여름 연명

큰 벽이 있었어어느샌가부터큰 벽이 있기 전을 회상하는 것은 어렵다 큰 벽의 표면에는 몇 겹의 먼지가 쌓여 있었다 자화상이 서툰 솜씨로 음각되어 있었다 오래된 명언이 쓰여 있었다 과거는 실로 중요하지 않다지만과거를 지우는 사람이 없었기에깨진 계란들과 돌, 약간의 피는 어느새 질어져 있었다 지나친 시간만큼 단단하도록.그럼에도 큰 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코 부식되지 않았다헛건반질에 조금은 닳았을 모서리는 예외로 두자큰 벽의 부동심에 대해아는 사람은 적었지 모두는 이웃과 싸우느라 바빴고.큰 벽이 있기 전에 나무들이 있었다고 한다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나무들이 있었지 나무들은 서로에게무슨 말을 나누어 주었을까작게 보면 폭도이고 멀리 보면 폭포일 물방울들처럼운율로 대화를 나누었을까운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 역시 적었지 우리는 모두 여러 방향으로 뛰느라 바빴다그럼에도 결국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성질귀소본능?어쩌면 나무들의 소리는 애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회고는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무들은 서로를 완전히 옥죄어 둥지를 이루었고 한날한시에 사라져 버렸다지 어느샌가 멈춰버린 빗방울처럼.세상 모든 나무는 죽어버린지 오래이지만세상은 계속 돈다 돈다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묘비명을 새겼다 뿌리를 내렸다함께라는 말을 할 때면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여름깨진 계란들은 어느새 적란운으로 만개해 있었다

2025.05.14 강완
백지

흔적조차 없이 무안할 정도로빽빽한 공백, 아무것도 없는새하얀 백지에주어진 질문을 보고정답을 써내려 가며공백을 매워 나간다적어낸 것들을돌아보며이건 아닌것 같아지우개로 닦아내며 흔적을 없앤다자그마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계속 문질러 보지만지우려 할 수록 더 번져오며짙은 얼룩이 공백을 매운다이 공백을 매우려 하는게문제의 정답이였나보다

2025.05.14 유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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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협성마리나G7)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호텔프린스)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2025년 문학레지던시(남이섬) 공고문

2025.03.12
공지사항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2025년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참가지원

※ 2025년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추가공모 사업에 대한 공통 안내문입니다. 사전에 확인 후 세부 공고문 확인바랍니다. [해외레지던시참가지원] (문학)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참가지원 1. 사업개요 ○ 사업명 :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Kyoto Writers Residency) ○ 사업기간 : 2025. 10월 중순 ~ 11월 중순 (1개월) ○ 사업장소 : 일본(Japan) - 교토(Kyoto) ○ 주요내용 : 오프닝 포럼, 클로징 이벤트 등 교토작가레지던시 개최 프로그램 참여 및 작가 개인 창작활동 수행 ※ 사업 세부소개 • 해외협력기관 :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Kyoto Writers Residency) • 홈페이지 : https://kyotowriters.org/ • 기관/사업소개 - 교토에 있는 대학의 문학 학자들과의 연계를 통해 2022년에 설립된 국제 문학 레지던시 - 전 세계의 작가 및 번역가들이 교토에 머물며 창작활동과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 • 세부 프로그램 - 레지던시 공식행사인 오프닝 포럼 및 클로징 이벤트 2회 ※ 모든 프로그램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며, 공개 행사에 한하여 영어-일본어 통역 진행 예정 2. 지원신청자격 ○ 문인(시, 소설, 아동·청소년 문학) - 시, 소설, 아동·청소년 문학 : 최소 1권 이상의 발간 실적이 있는 문인 ※ 그림책, 희곡, 비문학(에세이 등) 제외 - 영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자 ○ 선정자는 레지던시 공식 행사 필석 3. 지원규모 및 항목 ○ 참가 예술가 직접 지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선정자 보조금 지급/지원신청서 내 예산 편성) 구분 선정 인원 지원규모 자부담 일본 교토작가레지던시 1인 (후보군 3~5인 내외) 100만원 내외 총 사업비(보조금+자부담)의 10% 이상 - 프로그램 참가를 위한 왕복 항공료(이코노미석 기준 실비 지원) ※ 비자 발급비, 현지 체재비 등은 참가자 개인 부담 - 회계법인 회계검증수수료 ※ 회계검증수수료는 문예진흥기금 지원신청 공통안내사항 내 가이드라인 참조 ○ 기타 지원항목(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번역가/제작업체 지급) - 문학 분야 작가키트 제작비 및 작품 번역비(시 15편, 소설 30페이지 내외) : 400만 원 ※ 작가키트 제작비 및 작품 번역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해당업체, 번역가에게 직접 지급 ○ 프로그램 참가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해외협력기관 지급) - 프로그램 참가비 : ¥430,000 ※ 숙박비, 일부 식사, 공식 행사 관련 통역료(영어-일본어), 프로그램 운영 등 각종 비용 포함 ※ 현지 체류 중 지급되는 현지 체재비 외 추가분은 참가자 개인 부담 ※ 해당 지원 내역은 해외협력기관과의 협의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4. 제출서류 및 자료 (필수자료 총 3개) ※ 우편 및 방문 접수 불가 제

202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