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
공지 [공지][감상&비평] 2024년 3월 월 장원 발표작성일 2024-04-1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8상세보기
-
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28상세보기
-
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99상세보기
-
감상&비평 외로운 모두와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영화:디어 에반 핸슨}
평범한 일상이 변주 되었다. 3월은 개학의 첫 달이다.그래서 나는 긴장을 많이했다. 왜냐 나는 남들과 달리 기침이라는 특이 케이스가 있어 학교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교를 가기 며칠 전부터 몸은 떨리는 등 이상한 증상이 막 보였다. 기침 때문에 민원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이것으로 혼자만 남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론 1달이 지난 4월인 지금도 난 누군가의 시선이 두렵다. 그러나 이는 내가 이겨나가야 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돌격을 하며 적응을 하려 노력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남들에게 기쁘지 않으면서 웃는 척을 하며 말을 이어나가는 그런 친구 NPC 1과 같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은 외롭다. 이처럼 나와 타인을 속이면서 외로움을 이겨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정착 마음 한 편은 계속 외로운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에 본 영화인 디어 에반 핸슨의 주인공 에반 역시 나와 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한 사람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나와 같은 일상의 변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개학이라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그 날이 온 것이다. 극 I형이면서 사회 불안장애를 가진 에반은 학교로 등교했다. 에반에 한 쪽 팔에는 깁스가 감겨져 있었다. 때는 개학전 여름날 에반은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통에 몸을 실었다. 이는 초반에 들려온 음악인 Waving through a window에서의 가사 "만약 텅 빈 숲 속에서 혼자 남게 된다면 나는 누굴 찾을까? 또 누가 와줄까?" 에서 나왔듯 에반은 스스로 떨어져 누군가 떨어진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10분 넘게 떨어진 자리에 누워 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에반의 행동이 짠하게 보였다. 왜냐 오프닝으로 나왔던 위 넘버가 너무 밝은 분위기였고 등교를 하는 에반의 얼굴은 물에 젖은 고양이만양 계속 긴장 되있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숲 속에 혼자 걸으면서 길을 잃게 된다면 과연 날 진정하게 절실한 마음으로 찾아 줄 이가 있을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을 제외하고 찾아줄 이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계속 흘러가고 큰 소리가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코너라는 아이와 에반이 싸우고 있었다. 이유는 에반이 긴장이 되었는지 옅은 망가진 미소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본 코너는 화를 내며 다른 곳으로 갔다. 에반은 이 때문에 불안했는지 화장실에서 신경 안정재로 보이는 약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불안한 에반의 얼굴을 카메라가 비추고 작은 여러 문장들과 함께 카메라는 에반이 지내온 새학기부터 지금까지의 일과 교실의 학생들을 보여주며 에반이 쓰는 자기 자신의 편지를 읽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편지의 내용은 에반이 새학기에 얼마나 많이 힘들었는지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코너의 여동생 조이의 이야기도 담아져 있었다. 에반은 이를 프린트하여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중 코너가 에반에게 다가와서 자신의 이름을 깁스에 써주고 편지를 보게 되었다. 편지를 본 코
작성일 2024-04-14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10상세보기 -
감상&비평 로르바케트의 <키메라> 단상, 또는 안내서
이따금 그럴 때가 있다. 작품을 보며, 그 작품이 자신에게 숙명처럼 다가온 것 같다고 느낄 때. 만약 본인이 비평가라면, 그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일테지만, 매우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비평가라면 무릇 그것을 글로서 풀어 설명하고, 감흥과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기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평을 한다는 것은 작품을 죽이는 것과 같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을 자신 스스로 해체하고 부수며, 조립해야만한다. 그렇게 되면 종국에 남는 것은 죽어비린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비평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작품을 사랑해서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사랑하는 것을 왜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서 비평을 한다. 그렇기에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숙명적인 작품은 더욱 빨리 죽어야만한다. 내가 죽여야 하는 오늘의 작품은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 다. 그러나 윤리가 나를 끌어당길 수록, 나는 필사를 다하여 작품을 죽이지 않을거다. 나는 이 영화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까닭에, 단상과 해석에 안주하는 비평(같지도 않은 비평)을 하려고 한다. 굳이 비평(같지도 않은 비평)을 하는건 이 영화를 본 누군가가 약간의 해석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태양은 항상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말하는 여자친구를 시작으로, 태양을 마주하고 그녀와 껴안으며 끝나는 마지막까지. 영화는 그야말로 수미쌍관이다. 주인공이자 도굴꾼 아르투는 새로운 기회이자 '삶'으로 보여지는 여인 '이탈리아'의 사랑을 거부하고,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는, '죽음'으로 통용되는 전 여자친구 '프리다'를 선택한다. (‘이탈리아’는 아이를 가지고 있고, 보육원을 운영한다. 그녀의 인생은 생기 가득하다. 반면 ‘프리다’는 이미 죽어있는 고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아르투와 프리다가 만나는 장면은 아르투의 죽음에 대한 은유이며, 가장 이상적이고 황홀한 엔딩이다. 동시에 아르투가 이른 새벽 ‘이탈리아’를 떠나는 장면 역시 영화 속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아르투를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이다. 영화 속에는 두번의 기차 씬이 등장한다. 첫번째는 아르투가 감옥에서 출소하여 자신의 집으로 가는 초반부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은유인 키메라 석상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는 전철에서이다. 전자의 장면에서 아르투는 한 승객을 보고, 오래된 그림에 나오는 사람을 닮았다고한다. 바로 다음 숏에서 영화는 오래된 이집트 벽화를 보여주며, 승객과 벽화 속 인물을 비교하도록 한다. 클레쇼프효과에 의해 자연스럽게 벽화 속 인물은 승객과 동일시된다. 이 후 벽화가 나오는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누군가의 무덤 속에서다. 아르투는 이 후 그 승객을 다시 한 번 만난다. 그 장면이 바로 후자(키메라 석상을 던져버리고 오는 전철)의 장면이다. 이 장면이 매우 이상한 것은 초반 열차의 동일한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승객과 초반 열차 속 인물들은, 아르투에게 무작정 자신들의 물건이 어디있냐고 따져 묻는다. 아르투는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당황하며 모
작성일 2024-04-09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53상세보기 -
감상&비평 <인간 실격>에 대하여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첫 두 문장입니다. 정확히는 오바 요조의 첫 번째 수기 중 첫 두 문장.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입니다. 이 두 문장은 막힘없이 활자들을 읽어내려가던 저를 잠시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무슨 이유로 이 부분에서 멈추었는지는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제가 평소에 했던 생각과 닮은 구석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추어 섰던 저는 다시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요조는 저 자신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유복한데도, 그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저 자신과의 괴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 그래서 제가 이 책에 더 빠져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책은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부터 세 번째 수기의 마지막 문장까지 '정상인'이라 느껴지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고, 요조의 삶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요조를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의 방탕한 생활이나 마약 중독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의 행동에 날 선 비판을 가하기엔 인정 앞에 너무 무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족에게서 느껴지는 사랑과 혐오가 뒤섞인 그 감정 속에서 저는 요조의 글에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제 생각에 요조는 아마도 겉으로 보기엔 가장 방탕한 부류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순수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곤)누가 무슨 말을 해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을 숨기기 위해 '광대 짓'을 하고, 요양원인 줄만 알았던 곳이 정신 병원임을 알고도 아무에게도 화내지 못한 사람.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함께하거나 그에 맞서 싸우기엔 너무나도 섬세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는 요조를 무식하고 병적이며 "냉수 마찰을 하면 깔끔히 해결될" 문제에 집착한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조가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는 동의하나, 그와 비슷한 사람으로서 그를 옹호하고 싶습니다. 이쯤에서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죠. 요조는 스스로 인간실격자라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책에서 인간실격자는 요조가 맞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과연 진정한 인간실격자는 누구일까요? 요조를 인간실격자로 만든, 순수한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 각박한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 아닐까요?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무엇이든간에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 나름의 철학이지만, 이번만큼은 잠시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을 끄고 읽었습니다. 아니, 제가 끄기도 전에 이미 그것은 제 스스로 꺼져 있었습니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요. 받고 싶은 선물이 딱히 없는데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자 탈을 고르는 어린 요조의 모습과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받고 싶은 선물이 없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이학을 접는 색종이를 받고 싶다고 했던 어린 저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물건을 계산할 때
작성일 2024-04-08 작성자 Alicja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44상세보기 -
감상&비평 대중예술은 왜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슬프게도)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돌려보다가, 어느 교양 프로그램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대중문화 평론가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대중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적 현상이나 문화 산물을 뜻하는 것인데, 그 것을 평론한다는것은 대중 중심이라는 측면에서 시대를 가늠하고, 어림잡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척도로 보였다. 나는 약 한 시간에 걸쳐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꽤 도움되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 속에는 나에게 이 글을 쓰도록만든 어떠한 사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예술’이라는 것이었다. 교양 프로그램의 그 평론가는 ‘대중문화’라고 해도 될 말을 가지고, 굳이 ‘대중예술’이라는 말을, 그 것도 여러번에 걸쳐 쓰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문득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의 차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대중예술이란 대중적인 예술을 말한다. 그것은 대중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것인데, 그 차이를 확실히 하자면 대중문화는 민족의 전통이나 의식이 담긴 시대적 산물에 대한 것이고, 대중예술은 인간의 혼이 담겨있는 예술을 중점으로 하는, ‘산업적’이거나 ‘민족주의적’ 산물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예술’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예술이 ‘대중적’이라는 점에 그랬다. 대중예술에서 ‘대중’은, 일종의 산업성을 나타내는 것일텐데, 사실 예술은 결코 산업적인 것이 될 수 없다.산업적인 것의 산물이란 무릇 공산품같이 유용하고, 일상에 천착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편안히 해주는, 대중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산업이 할 수 있는 것과는 그 역할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혹은 상이하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기술을 얻기 훨씬 더 이전인 기원전으로 돌아가야한다. 문학이 존재하기 이전, 인류에게는 텍스트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실은 서로 간의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것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과 달성했던 성과들을 공유하는, 기록의 산물과 다름없었다. 즉,문학은 기록의 산물이었던 텍스트에 허구와 상상력, 과장을 더해서 만들어진 인류의 전유물인 것이다. 미술 역시 동굴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성과를 정리한 기록의 산물이었으나, 미술은 카메라가 등장하고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후 그것은 사실주의를 버리고 화가의 시선을 담은 회화또는 추상화로 재탄생했다. 즉, 예술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사실성이 아니라, 허구와 자신의 시각을 통해 말 하고자 하는 작가, 혹은 그 시대에 살았던 어느 개인의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담긴 것은 사람이다. 사르트르는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고, 연필깍이는 연필을 깎아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의 존재이유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으므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예술에는 사람(혹은 그것의 진실된 영혼)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예술 역시 사람에게 목적이 담겨있지 않 듯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는 안
작성일 2024-04-08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84상세보기 -
감상&비평 환상적 요소를 가진 현대문학 분석 -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윤고은 <로드킬>
환상적 요소를 가진 현대문학 분석- 한강 , 윤고은 1. 현실의 곳곳에 등을 맞댄 환상들 프란츠 카프카의 환상소설 이 등장한 이후, 많은 소설 속 환상적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 벌레로 변한 주인공이 경제력을 잃으면서 가족에게 소외되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 자본주의 사회와 그 속에서 한 인간을 경제적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었다. 소설 속 등장하는 환상들은 현실의 문제와 등을 맞대고 있다. 나는 환상 서사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을 읽으면서 시간이 흐른 현대, 환상 서사는 어떤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 궁금해졌다. 와 은 모두 환상 서사로 쓰인 작품이지만 각자 맞닿아 있는 현실문제(비판하고자 하는 현실문제)와 환상 요소를 부여한 대상이 다르다. 에서는 인물인 ‘아내’에게 환상성을 부여해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한다면, 에서는 배경인 ‘모텔’에 환상성을 부여해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에 따른 계급과 인간성 상실 문제를 해학적으로 비추고 있다. 이 분석에서는 다른 성격의 두 환상소설을 각각 다룬다.2. ‘내 여자의 열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열매한강- 1) 아파트와 단절 에서 먼저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남편이다. 남편은 아내의 몸에 멍이 든 것을 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그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곧 아내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안일하게 생각한다. 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아내의 말에도, 토란잎처럼 파랗게 부푼 멍에도 “내일 당장 내과에 가봐”, “그리고, 제발 나다닐 때 조심 좀 해라. 다 큰 사람 몸에 이 멍이 다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183P) 등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또, 결혼 전 아내가 정착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는, 상추와 텃밭, 정착이라는 남편 자신의 꿈을 내세운다. 그렇게 남편의 꿈을 따라 정착한 아내가 병들어가는 3년이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게는 모든 면에 있어서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시간이다. 남편의 시점에서 아내를 아파트, 텃밭의 동등선에 두고 소유물로 생각하며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런 남편의 태도와 도시에 대한 환멸로 아내는 점점 병들어간다. 아내가 식물로 변신하기 전에는 빗물을 더러운 비라고 칭하며 아파트에서 살 수 없다고 애원하지만, 남편은 그 순간 두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아 아내의 얼굴에 끼얹는다. 빗물 사건을 기점으로 남편과 아내의 소통은 완전히 단절된다.2)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성 앞부분에서는 남편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그의 폭력이 순수하고 무지한, 어떤 악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남편은 아내의 멍을 보며 (금방 잊어버리긴 하지만) 나름의 관심을 가지고, 병원에 갈 것을 권유한다. 그렇게 남편은 자신이 아내를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가 보이는 행동은 폭력과 강요라고 생각된다. 사랑에서 어떻게 폭력과 강요로 이어질 수 있나. 그 이유는 가부장적 시선과 남성중심주의가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편의 시점에서 보면) 남편은 남성으로써 아파트와 여성인 아내를 소유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의 꿈을 이루
작성일 2024-03-31 작성자 레니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54상세보기 -
감상&비평 광장, 샛길, 독방. 광장, 최인훈
광장은 열려있는 공간이다. 이에 대비되는 공간으로는 샛길로 연결된 독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때 이들의 성질은 뒤집힌다. 광장이 폐쇄되고 독방의 문이 젖혀진다. 광장이 폐쇄되는 이유로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이탈과 강압에 의한 추방이 있겠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일은 광장에 대한 실망의 여론이 떠오를 때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독방에 있던 사람들이 기나긴 샛길을 걸어야 도달하는 광장에 모였던 이유는 그곳의 기능이 자신들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 기능이 필요하지 않거나 변질되어 제기능을 하지 못함이 기본적이다. 사회라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의 불화 또는 불안정해진 사회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광장을 떠날 때 효용을 따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듯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소위 정의를 잃은 사회 같은 변명들이다. 이런 이탈을 두고 누군가는 애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도 할 것이지만 이미 광장의 편익이 없으면 기존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조차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사회에서 빠져나와 독방에 숨은 이들이 자연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하기에는 잃어버린 편익이 많은 것이다. 자발적인 이탈이 아니라 강제에 의해서 추방되는 경우 사람들은 사라진 편익에 대한 기억을 가져 강제의 주체를 몰아내거나 주체와 타협해 작아진 편익만이라도 얻으려 든다. 이때 강제의 주체로는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집단, 제도 뿐 아니라 광장의 다른 이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내 옆의 사람들 또한 포함될 수 있으며 작은 부속 사회에서의 추방, 소외가 예시가 된다. 큰 광장의 작은 구획 안에서 전체를 이루는 바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외압은 내부 억압의 정당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그럼 독방의 문은 언제 젖혀질까? 이것 또한 주인이 여는 것과 외부에서 여는 것이 있겠다. 스스로 독방의 문을 연 후 남은 선택지는 샛길을 걸어 광장으로 가는 것, 다시 독방으로 돌아가는 것, 샛길의 도중에 멈추는 것이 있다. 광장으로 가려 한다면 편익이 필요함을 느낀 것이고 돌아온 것은 재고해 봤을 때 편익이 독방 생활의 이점을 포기하는 것보다 작다고 느낀 것이며 도중에 멈추는 것은 편익을 얻고는 싶지만 독방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애매한, 어떤 면에서 이기적인 것이다. 샛길에서도 광장의 광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지만 광장과는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독방의 문을 열 때는, 만약 알 수만 있다면, 의도가 판단의 기준이 되며 광장의 편익을 공유하려는 의도로 문을 젖히는 것과 독방을 열어 광장의 일부로 만들 의도로 젖히는 것이 있다. 첫번째 것은 젖히는 입장에서야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 것은 광장의 편익을 늘려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독방 안의 개인에 대한 고려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독방을 나오지 않는 이유는 광장의 편익이 필요없기 때문이고 독방의 이점을 광장에 제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강제로 젖혀진 문은 다시 닫히지 않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 어찌됐든 광장
작성일 2024-03-27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65상세보기 -
감상&비평 듄에 나타난 가치관들
듄. 프랭크 허버트의 장편소설 시리즈다. 긴 시간을 건너뛰어 전작의 결말에서 생긴 결과만을 보여주고 시작하는 특징이 있으며 따라서 전작의 주연들이 꽤나 큰 변화를 겪는다. 또 작중 이전 시점의 사건으로 정보과학과 기계공학이 제한받은 세계관 특성상 인간을 특정 목적을 위해 개량하는 용도로 생명공학이 발달해있다. 중간과정의 생략, 생명공학의 극한. 이 둘은 작가의 손에서 반응해 독특한 생명관을 생성해낸다. 우선 우주에서의 이동을 위해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훈련된 사람을 고용해 컴퓨터를 대신할 정보처리 장치로 사용한다. 이 인간 컴퓨터들은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태어나기도 하며 정보처리를 위해서 중독성이 강한 성분을 섭취해야 한다. 작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노화로 인해서 정보처리 능력이 둔화된 경우 교체되는데 이때 이들이 평생동안 받아온 교육은 감정적인 판단을 거세하는데 있으므로 고용의 여부에 관계없이 일상생활을 누릴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또 이들이 섭취하는 성분은 하나의 생물종의 순환과정에서만 발생하며 이들은 시리즈 전체에 걸쳐서 한 행성에서만 서식한다. 책에 나오는 표현을 따라 해당 성분을 스파이스라 하겠다. 두번째로 살펴볼 점은 인간의 품종개량이다. 작중 나오는 품종개량으로 한 종교단체의 선지자를 만들기 위한 번식 계획과 전 인류 공통 형질을 만들기 위해서 복제인간을 수천년에 걸쳐 개량한 것, 그리고 인간의 자궁을 시험관 삼아서 유전자 조작 생물을 만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첫번째를 보면 교단에서 훈련을 통해 선별한 사람들이 특정 가문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가지게 하는데 이들은 태아의 상태에 조금씩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세대가 지날수록 선지자에 더욱 가까워 진다. 교단의 능력은 과거 그들의 계통상의 여자들의 기억을 갖는 것으로 여자(대모라고 불린다)만이 사용할 수 있지만 선지자는 남자로서 그 능력을 쓸 수 있으며 자신 계통 모두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확한 예지가 가능하며 여러 갈래의 경우 중 자신이 택한 미래로 갈 수 있다. 이 처리능력은 앞의 인간 컴퓨터와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으로 스파이스를 통해 각성한다. 그러나 같은 예지를 가진 이가 관여하는 시점은 볼 수 없는데 이를 이용해서 3권의 주인공은 미약해서 없다시피 한 예지를 가지도록 계속해서 복제인간을 배양해왔고 그가 번식하도록 해서 결과적으로 전 인류를 확정적인 미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목표를 갖는다. 세번째는 생명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행성의 방식으로 기계장치가 없는 탓에 생명체를 배양할 곳도 없으니 이미 훌륭한 기능을 가진 인간의 자궁을 쓰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앞의 복제인간이 여기서 배양됐다. 이처럼 듄의 세계는 몇가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을 도구로서 이용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목적에 맞게 개조하는데 이에 대해 작중에서 아무런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자궁 시험관에 대해 역겹다는 반응만을 보이고 선지자는 숭고하게까지 포장되며 복제인간 개량은 의도가 밝혀지기 전까지 폭군의 일탈 정도로 인식되고 밝혀진 후에는
작성일 2024-03-26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201상세보기 -
감상&비평 그냥, 사람은 그냥, 사랑으로부터 -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월장원 선정
나는 ‘사랑’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사람’이란 단어 역시 좋아한다. 꽤나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사랑과 사람이란 단어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랑의 받침을 바꾸면 사람이 되고. 사람에서 또 받침을 슬며시 바꾸면 다시 사랑이 되고.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사랑이란 감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나는 사랑 없이는 성숙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아직은 성숙한 사람이 아닌 한낱 고등학생인데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열심히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밟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글은 섣부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만 있다면 그냥, 사람이 되기에.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내게 있어 사랑과 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욱 잘 알려주었다.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꽤나 단순한 이유였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지금은 떠났지만 유독 책에 열정적인 선생님이 있었고 그 선생님과 나는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것 덕분이었다. 자연스레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조교와 같은 역할을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 책과의 연은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과의 연이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도 보고, 생기부도 채울 수 있겠다는,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아시기라도 하셨는지, 아마 너 이 책을 보면 평생 기억할 걸?, 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앞으로의 내 미래를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사람」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 책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홍은전 작가의 삶, 그니까 작가님이 노들야학 (장애인 야간학교)에서 활동하며 쓴 글을 이어붙인 글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장애인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은 적이 없었던 탓에 이 책이 더욱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 것이 아닌, 홍은전 작가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월호, 젠더, 아이 등 사람에 관한 이야기뿐만이 아닌 동물의 문제들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지만. 나는 장애인이라는 그냥,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 싶다. 1. 장애인이라는 이름의 사람. 일단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나의 할아버지가 장애인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선천적 장애인이 아닌 후천적 장애인. 장애를 얻게 된 사정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할아버지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그 시절, 일본 군인에게 총을 맞아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는 것도, 거동이 불편한 탓에 걸으시다 그만 크게 넘어져 장애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꽤나도 아닌 많이 어두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그러한 사정과는 달리 밝은 사람이었다. 늘 산책하시는 걸 좋아하여 매일같이 할머니가 끌어주는 휠체어를 탔고, 카페에 가 언니와 내게 줄 과자를 구경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동 휠체어를 탄 이후에는 할머니 없이 혼
작성일 2024-03-24 작성자 난바다 좋아요 2 댓글수 1 조회수 307상세보기 -
감상&비평 관심으로 변하는 사람 (짱구는 못말려:더 무비 초능력 대결전 날아라 수제 김밥,박강현-You Will Be Found)
3월은 모든 것이 시작이 되는 달이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솔직히 기침이라는 질환 때문에 많이 두려웠다. 이는 등굣길 버스 안에서부터 교실 내부까지 지속 되었고 지속 되고 있다. 매일 학교에서 집에 오면 소화가 안된 아침과 점심이 소화가 되고 급 배고파진다. 매일이 기침으로의 긴장과 시선으로 힘들고 지쳤다. 그러면서 말수가 적어지고 우울해져만 갔다. 그러나 난 지금 이 상황에서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미웠다. 자책하기도 하고 운명을 탓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이 우울을 이겨내기 위해 친구들에게 웃음을 힘들게 만들며 다가갔고 2 과목의 부장이 되며 학교 생활을 나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잠시 이야기 나눌 친구가 생기고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우울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벽을 부스는 일을 하고 있던 중 뮤지컬 의 넘버인 한국어 버전을 듣게 되었다. 위 뮤지컬을 보지 못했지만 가사 "어둠이 쏟아져 올 때 의지할 친구 필요할 때 버티지 못해 무너질 때 널 찾을게요."라는 가사를 통해 청자의 상황은 많이 힘들고 위로를 해줄 이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위 곡을 들으며 청자와 내가 겹쳐졌다. 우울과 슬픔 그리고 무너짐이 공존하고 있으며 누군가 날 위로해 주길 바랐던 것 같은 내가 보였다. 그래서 난 위 노래로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서 약간의 질문이 생겼다. "누군가 날 알아보고 위로를 해도 내가 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같은 질문이 생겼다. 이 질문을 가지며 짱구 최신 영화를 시청했다. 그리고 난 이에대한 해답을 받을 수 있었다.영화의 시작은 어느 두 신비로운 물질이 지구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하나는 어두운 빛 하나는 밝은 빛을 뿜었다. 이 화면을 볼 때 영화의 주요 소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화면은 다시 전환 되어 짱구의 일상인 엄마의 추격신이 시작 되었다. 난 이 장면이 짱구가 또 사고를 쳐서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짱구 엄마 미선이 먹을 간식을 훔쳐 먹어서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장면을 제외하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어른들의 어리석은 행동들이 많았다 나는 영화 중.후반부까지 왜 이런 장면을 넣었는지 질문이 들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이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그 답은 영화가 어른들의 어리석음으로 상처 받는 후대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곳곳에 나온다. 노스또라다무스 2세의 대사인 사회문제 나열과 후반부 중.고생 지남이 짱구에게 말하는 본인의 상황(부모 이혼 파티를 버리는 부모)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연출 때문인지 짱구와 짱아가 어른 같이 보였다. 생리현상을 참아가며 친구를 구하고 어린 지남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짱구의 모습과 자신보다 소중한 오빠를 지키기 위해 초능력을 쓴 짱아 역시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어른처럼 보였다. 어둠의 초능력을 얻은 지남은 여러 문란을 만들고 노스또라다무스 2세와 힘을 합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약은 노스또라의 일방
작성일 2024-03-23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94상세보기 -
감상&비평 마음 속의 묻은 트라우마 그 안의 자신 {영화: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폭풍수면! 꿈 꾸는 세계 대돌격}
트라우마란 사전적인 의미로 재해 뒤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을 의미한다. 나는 비빔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초등 1학년 시절 비빔밥을 먹고 토를 하며 쓰러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비빔밥 특히 산채 비빔밥을 먹지를 못한다. 나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가끔 꿈에서 그 상황이 등장을 하기도 한다. 이를 알아주듯 애니메이션 에서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악몽을 꾸는 보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에서 보여준다. 이를 보고 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중 제일 먼저 생각이든 것은 트라우마에 대하여 당서자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였다. 영화의 시작은 짱구 아빠와 엄마의 꿈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짱구 아빠는 영웅이 되어 명애를 얻고 짱구 엄마는 잘생긴 남자를 만나는 꿈을 꿨다. 이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개그 포인트로만 보면 의미는 없겠지만 이들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 의미는 영화의 주제의식에 대한 복선이 된다. 이 장면 현실에서 그들이 얻을 수 없는 희망, 탐욕이라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트라우마를 만들 매계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중반부 꿈의 물고기에서 어른들이 버려지고 악몽의 세계로 그들이 들어갔을 때의 표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그들이 꿈 속에서 가진 것을 빼앗았지만 꿈에서 더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있어 현실에서 소중하고 전부인 것들을 꿈 속에서 전부 빼앗아간 표현들이 있다. 예를들어 짱구 아빠가 현실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가족을 직장 후배인 고뭉치에게 빼았긴 것이 있다. 이처럼 꿈의 세계가 나타난 것은 떡잎 유치원에 보라라는 여자아이가 전학을 온 이후부터였다. 보라는 우울하고 차가운 그런 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보라의 주요 색은 보라다. 이 색의 상징적 의미는 몽황적 신비로움과 마력과 요술 그리고 초자아가 있다. 여기서도 주제의식에 대한 복선이 있었다. 바로 초자아라는 상징어에 있다. 초자아는 정신의 한 측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자아를 도덕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보라가 자신 때문에 죽은 엄마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비하하며 용서하지 않아 시작 된 악몽에 대하여 양심으로 죄책감에 들고 있어 더 깊은 트라우마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어긋난 양심으로 생긴 죄책감이 짱구와 친구들 그리고 짱구 가족을 만나며 죄책감을 안아주는 법과 자신을 성장시키며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 양심이 생기며 자아적으로 또 성장했다는 주제의식과 결말에 대한 복선을 이름과 성격에서부터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라는 악몽을 지우고 트라우마를 피하려고 꿈 속 세계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 또한 완벽한 해결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라는 직법 악몽을 먹는다는 환상의 맥을 찾으려고 짱구와 함께 꿈 속 물고기에게서 나와 악몽 세계로 나왔다. 이를 볼 때 트라우마는 부모가 지워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짱구의 도움으로 악몽이랑 보란 직접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 때 짱구라는 맥을 찾았다. 이로서 악몽을
작성일 2024-03-16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309상세보기 -
감상&비평 [감상&비평] 2024년 2월 월 장원 발표
글틴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감상&비평 게시판 멘토인 문학평론을 쓰는 김태선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새 학년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바뀐 환경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금방 적응하여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2024년 2월 월장원 선정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월 월장원은 영화 에 관해 쓴, 담님의 「천진은 영원하지 않다」입니다. 글의 길이가 다소 짧은 게 아쉽게 느껴질 만큼, 영화에 관한 솔직한 심정을 자신만의 생각과 함께 잘 표현한 글이었습니다. 금안백님과 송희찬님 두 분 꾸준하게 글쓰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아직은 생각한 만큼의 결과물이 나오진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리고 2월에 처음 만나게 된 gksgPdnjs님, 이윤서님, neverland님의 글도 반가웠습니다. 모두 꾸준히 활동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이번 달 부터는 마무리 하는 자리에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하고자 합니다. 추천하는 책은 다음과 같아요. 차례대로 시집, 소설집, 그리고 철학자가 쓴 산문집입니다. 모두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 빌렘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3. 모두들 건강하게 글 쓰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다가 궁금한 점이 있다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함께 남겨주세요. 답을해드릴 수 있는 것이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성일 2024-03-1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73상세보기 -
감상&비평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 수레바퀴 아래서 >저자: 헤르만 헤세출판사: 더 스토리 내가 처음 헤르만 헤세를 접하게 된 책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만 읽어봐도 한눈에 헤르만 헤세의 필체를 알수 있었다. 어딘가 씁쓸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하는 바가 있다. 내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나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깊은 시골에서 천재 취급을 받던 주인공 한스가 남들 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간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친구 헤일리를 만나 진정한 공부의 목적을 찾아가게 된다. 왜 공부를 하는지, 공부 뒤의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 까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심한 두통과 정신쇠약으로 항상 1등을 유지하던 한스의 성적은 떨어지고 결국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 돌아온 뒤 하고싶은 일을 찾던 중 기계공의 수습생이 되어 생활한다. 그렇게 기계공들과 술자리를 가지던 어느 밤에 한스는 조용히 강을 따라 흘러간다. 그렇게 다음날, 한스는 강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당시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하면서 수많은 똑똑한 청년들이 자살하는 현실을 담고자 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공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남들과 다름을 알았고, 그렇기에 한스는 언젠가 시골 마을사람들과는 다른 더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어릴때부터 생각해왔었다. 마을 친구들과는 다르게 더 멋있었고 더 똑똑했었다. 그렇기에 한스는 죽을 만큼 공부해 입학하기 어렵다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항상 신학교에서도 지독함 모범생으로 불리던 한스는 헤일리를 통해 회의감이 들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이 부분은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은 더 나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더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밤새도록 공부한다. 나도 그러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나도 항상 공부만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의 뒤에는 내가 목표로 하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책을 보면, 결국 답을 찾지 못한 한스는 한껏 쇠약해진 몸을 지니고 다시 마을에 내려가 결국 기계공을 하게 된다. 한스는 이때 마을을 둘러보며 불안감과 씁쓸함이 몰려온다. 너무나도 밝고 순수했던 어린시절은 이미 사라지고 어릴때부터 공부해온 결과가 결국 마을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는 다르게 기계공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생각해온 ‘남들과 다른 한스’가 아닌 ‘남들인 한스’였다. 한스는 여기에서 인생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금의 학생들이 어린시절을 잃으면서 얻게 될 결과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린 시절과 맞바꾼 내 노력의 결과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인생을 논하기에는 너무 어린 16살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어린 우리들에게 인생을 결정하라고 강요한다. 직업은 무엇인지? 어느 고등학교를 갈건지? 어느 대학을 갈건지? 인생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나이라며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쩌면 그 어느때보다 인생에서
작성일 2024-02-29 작성자 neverland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29상세보기
선택하신 작품으로 월장원 선정을 하시겠어요?
목록 아래에 있는 '월장원 선정 저장하기'
버튼을 클릭하시면 월장원 선정이 완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