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김리윤 - 전망들―감정과 사물
전망들 ― 감정과 사물 김리윤 꿈은 사건을 의미 불명 상태에서 건져내기 쉬운 현실이다. 그런 말을 했던 이웃은 언제나 아래를 향해 45도 정도 기운,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사람은 위를 볼 수도 위에서 보일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날 때부터 모자를 벗을 수 없었고, 그러니까 위를 볼 수도 없었고, 그래서 자신은 정수리 위의 세계를 오직 상상으로만 구성하고 있다고 했다. 거짓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는 담배나 불이나 마늘 몇 쪽 같은 것을 빌릴 때마다 위를 봤을 때 보이던 것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그 사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어 안녕하세요 불 좀 빌릴게요 담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양파 하나는요 혹시 쌀 한 컵만······ 고사리를 키우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씨앗 좀 갖고 계세요 오늘은 커피 원두가 똑 떨어졌지 뭐예요 오늘은 잠을 좀 빌리려고요 그 사람 빌려달라고 하는 건 뭐든 갖고 있었어 늘 여분이 있었지 그 사람 그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뭐 드릴 것도 없고 그래서 들려드리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어 개는 위를 올려다보지 못한다는 거 아세요 저는 아파트 16층에 있었는데 불이 났고 산책 나간 우리 개가 아래를 서성이는 게 보였어요 있는 힘껏 개를 불렀는데 아무리 불러도 그 녀석 위를 보지 못하더라고요 불이 타오르거나 건물이 무너지거나 연기가 맵거나 그런 것보다 그게 꼬리를 흔들고 제자리를 맴도는 내 개의 어리둥절함이 너무 슬프고 무섭고 애틋해서 그냥 뛰어내려 버렸어요 개랑 누워서 위를 보는데 아침에 널어 둔 이불이 여전히 젖지도 타지도 않고 새하얗게 깨끗하게 펄럭거리고 그 깨끗함이 불을 죽여 버린 것 같았어요 네? 아, 저 귀신 아니에요 이거 그냥 꿈 이야기예요 지금은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꿈에서도 꿈속 허공에서도 이걸 꼭 기록해야겠다 싶어서 받아 적고 있었어요 하지 전날 밤에 고사리 씨앗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유령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 아세요? 꿈은 결국 내가 겪은 일일 뿐이고 꿈에서도 나는 꿈을 기록하느라 바빴어 모든 것을 겪는 동시에 겪는 일을 모두 적고 있었어 꿈에서는 늘 그런 걸 알 수 있었어 이거 아주 중요한 일이니 잘 적어 놔야겠구나 이거 아주 개꿈이니 대충 살아도 되겠구나 그래도 매일 무언가를 빌리고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를 이어 붙이고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이야기에 생긴 야릇한 구멍을 보여주고 그랬어 많은 걸 빌려왔어 돌려준 적 없었어 창문에 걸린 일광이, 창 너머 정원이 저렇게 환한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실내는 조용하고 어둡다. 켜켜이 빛이 쌓이며 바닥을 감추는 우리 집 거실에서는 온갖 것들이 썩고 있었어 햇빛에 파묻혀 겨우 고개만 내민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57상세보기 -
시 김리윤 - 전망들―장면의 자락
전망들 ― 장면의 자락 김리윤 그래도 일단 개라고 한번 불러 보자고 했다. 아니, 개를 불러 보자고. 개는 머리 위를 보지 못하는 거 알아? 우리는 복도식 아파트 난간에 기댄 채였고 무리 지은 플라타너스 꼭대기 사이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개가 보였다. 개라고 불러 보자고? 아니 개를, 개를. 현실은 이미지의 효과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초록의 틈새로 원을 그리며 흔들리는, 기분 좋음의 기호인 꼬리가 보였다. 개, 개야! 강아지! 개, 여기야! 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사방을 킁킁거리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 화단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개는 나뭇잎과 씨앗과 거미줄이 뒤엉킨 얼굴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걸, 개를, 아무리 불러도 올려다보지 않는 것을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계속한 일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의 목에서는 쇠 맛이 났다. 자꾸 무슨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의 소리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장면. 우린 습관대로 소리를 빚어 이미지로 번역하려 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현실은 소리의 진동이 만들어낸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소리가 우리를 벗어나게 했다. 우리는 축에서 이탈한다. 장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꿈은 원을 그리는 꼬리의 형상으로 루프를 이루며 반복되고 있었다. 같은 꿈이 반복되는 것인지, 같은 일을 끝없이 계속하는 꿈속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 역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일 뿐이다. 우리가 겪은 장면일 뿐이다. 일단 개라고 부른 것들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얼굴을 보내지 못하며 장면의 중심에 보존되고 있었다. 우린 소리가 나는 쪽을 보려고 사방으로 찢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시작되는 소리가 났다. 개를 제외한 장면의 산 것들이 일제히 위를 본다. 정말 모든 것의 동시라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장면 바깥에서 끝없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걸 믿어야 하는데, 누군가 말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믿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만다. 우리는 자꾸 깨어나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끌려 다니고 있었다. 우리의 얼굴은 이상한 간격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무리 불러도 올려다보지 못하는 것을 계속 개라고 부르고 있었다. 개라는 말은 알 수 없는 소리가 되고 있었다. 개는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닥이라는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개의 얼굴은 어디를 헤매고 다녀도 아무리 헝클어져도 꽉 뭉친 형상인 채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이상한 간격이 되지 않는다. 소리와 위치를 연결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장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필요하다면 찢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창을 열면 창밖은 새하얗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것으로 우글거리는 것처럼 하얗다. 깨끗하고 어수선하게 하얗다. 아무리 불러도, 얼마나 큰 소리를 내도 올려다보는 얼굴이 없으므로 나는 그걸 수많은 너무 많아서 포개진 채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60상세보기 -
시 이시유 - 방금 태어났어요
방금 태어났어요 이시유 30분 전에 태어났어요 보채지 말아요 아직 사람의 말은 몰라요 망아지처럼 히잉 히잉 우는 게 전부예요 당근이 좋아? 황금이 좋아? 묻는다면 둘 다 싫어요 맑은 망아지의 눈망울로 히잉거리는 것 나의 특기 와그작 당근을 삼키며 머리에 왕관을 쓰는 것 나의 특기 그치만 아아 30분 전에 태어났는걸요? 선도 악도 마땅히 삼켜 봐야 하는걸요? 지구의 역사를 100년으로 축소한다면 98년쯤 지나서야 인류의 등장 그러니까, 인류 따윈 지구의 막내뻘 갓 걸음마를 띤 애새끼 오오 마땅히 죄도 빛도 누려 봐야 하는걸요? 부엉이에겐 착한 부엉이 나쁜 부엉이 없고 개새끼에겐 죄악의 개새끼 구원의 개새끼 따로 없다지만 오오, 30분 전 태어난 그것에겐 테레사의 그것과 흡혈귀의 핏줄 교묘히 섞인 DNA 흐르고 있는걸요? 누구의 탓도 아닌걸요? 본시 그러한 성정 안고 태어난 종속들 지나친 죄책감 필요치 않은걸요? 갓 태어난 너 걸맞게 절망하고 번뇌하고 기뻐하고 사람의 말 따윈 알 게 뭐요 히잉 히잉 몸부림치면 되는걸요? 그게 우리의 봄인걸요? 뭐가 되고 싶어? 자라서 뭐 될 거야? 따위의 지루한 질문들 (-적어도 너,는 안 될 거예요) 천진하게 노래하면 되는걸요?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16상세보기 -
시 이시유 - 주인공
주인공 이시유 아 괜찮아 칠십 년 후엔 어차피 다 없을 거거든 니가 자랑하는 그 싱싱한 육체 똥 되어 저 벌레보다 하급으로 분류될 거거든 그때서야 너는 벌레의 육신이라도 좋소 볼 수 있는 눈을!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다이아의 빛을! 갈망할 거거든 지금, 어디로 가든지 손해는 아니거든 바다로 가든 사막으로 가든 인생은 ‘빛’ ‘여정’ 싱싱한 그 몸 있어서 넌 주인공이거든 살아 있다는 것 지랄 같은 기적이거든 싫어도 좋아도 너는 불길의 중심 신들의 표적, 광란의 봄이거든 주인공이거든 아 괜찮아 오십 년 후엔 어차피 우리 다 여기 없거든 일사불란, 다 죽을 거거든 무(無) 되거든 기회는 지금, 여기 차라리 지금이거든 빛, 이거든.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90상세보기 -
시 이소연 - 돌려세우기
돌려세우기 이소연 저녁을 담아 놓은 자루 같다 저 하늘 껍질이 있다는 듯 벌어져 있다 아침을 위해 저녁을 쏟아 붓는다는 듯 바람을 붙잡지는 못해도 마음을 붙잡는 법은 알아 가지 마 자루 같은 몸에서 오늘은 바람 끝에 풀이 가늘게 자랐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3상세보기 -
시 이소연 - 양서류적인 코번트리 부인
양서류적인 코번트리 부인 이소연 애초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하던 대로 하게 되는 물결이다 양서류의 아랫배처럼 끊임없이 흘려보내고 함께 흐른다 조금 다른 물질들의 함량을 이해하면서 물과 밖을 잇는다 숨을 쉬는 거지? 사랑을 하다 보면 그게 궁금하다 내 웅덩이를 드나드는 발가락들 사이에 물갈퀴가 있었다 마른 땅이 발자국에 젖어버리면 몰랐던 말을 듣게 되고 새로운 이끼를 알게 되었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 앞에 엎드린다 혹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렇게 저렇게 되고 사실은 그쪽도 나름 손 써 볼 수도 있었던 거 아닐까? 나의 무능이며 나의 재능이 난삽해지고 싶어 한다 여전히 네가 보고 싶다 여전히 처음을 지우지 못하며 여전히 호수가 생각난다 여전히 밤을 낭비하고 몸이 있어 새벽이 차다 물 밖의 슬픔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 숨을 쉬는 거니? 그거 말고는 정해진 게 없어서 그것에 대해서만 묻는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4상세보기 -
시 신동옥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신동옥 장미는 덩굴 하나로 담을 넘어 지붕을 덮어버린다 제비꽃 엉겅퀴 향긋한 쑥 내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비가 내렸던 것을 기억해 그런 날은 온종일 길에서 보냈지 담벼락에 내려앉은 구름에서 이상한 맛이 났다 벽은 아직 등 뒤에 있고 어젯밤 나는 여기서 길을 잃었다 벽장 속에 모르는 얼굴들이 숨어 있었거든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겠다 내가 써온 길을 살아내는 게 두려워 더 이상 꿈꾸지 않듯 길모퉁이 돌계단 틈에 피어난 민들레 1977년에 날아온 홀씨 하나 때로 이유 없이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까지 걸었고 산책이 끝날 즈음이면 다른 삶이 조금씩 스며드는 길 지금껏 나는 내가 써온 시행에 기대어 진화해 왔다 여기 이렇게 오래 머무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를 쓴 것이 우연이 아니듯 막다른 곳은 언덕 끄트머리거나 샛강이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무엇에 쫓기는지 깨닫게 된다 영영 떠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 골목에서 길을 잃은 것은 이생이 처음은 아니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떠나올 때는 아직 젊었거든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되듯 어느 날 마침내 나는 나였던 바로 그 사람이 되었다 거울과 연기 사이로 난 푸른 길을 따라 아이와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떠나온 뒷골목에는 여전히 우리가 남긴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1977년의 민들레가 꽃망울을 틔우는데 대문을 나서면 늘 바람이 거셌다 신발 끈을 동여매며 이번 산책은 계속될 거라고 믿었다 이번 사랑은 끝내 의심을 떨치지 못한 기억 속에 지도 하나 펼치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거짓말처럼 같은 길이 반복되는데 아이야 너는 길을 잃은 것 같구나 애초에 여기 오지를 말았어야지 난 너랑 놀아 줄 기분이 아니란다 새 친구를 사귀려거든 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무나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07상세보기 -
시 신동옥 - 몬트리올 스크류잡
몬트리올 스크류잡 신동옥 파괴의 형제들 언더테이커는 링에 남았다 가면을 벗은 케인은 공화당 계열의 온건 자유주의자로 밝혀졌다 둘 가운데 하나는 유서 깊은 미국 소도시 녹스빌 시장이 되었다 레이거노믹스를 맹종하며 연간 50만 시간 책 읽기 캠페인을 공약으로 관을 끌고 난입해 탑 로프 너머로 불을 뿜으며 더블 초크슬램을 작열시키던 둘 중에 누가 시장일까? 파괴의 형제들 썩 잇, 헬 예, 왓 더 F 빈정거리며 각본진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리던 아름다운 시절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스타TV 속에 빛나던 철창은 자료화면이 되어 나무위키에 박제 글쎄, 그날 공손하게 사직서를 바치며 못 이기는 척 사장 구두코에 머리를 박은 다음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었어야 했는데 기는 척 짖는 척 이마가 깨질 것을 각오하고 구두코에다 대고 박치기를 날린 다음 철제 의자에 슬레지해머를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시시하지 스포일러는 늘 필연이었다 그날, 사프슈터를 맞고 버티던 브렛 하트는 벨트를 강탈당하고 링을 떠났다 떠나며 사장 얼굴에다 대고 시원하게 가래침을 날렸지만 옛날 옛적 레슬링 군내 나는 순정에 뼈를 갈아 바치며 사라져 갔고 레슬링 명문 하트 家는 몰락했다 각본을 배반한 레퍼리와 친구와 사장은 머지않아 월드 와이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패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시하기만 하지 스포일러는 늘 필연이었다 진짜라니까 못 믿겠으면 나무위키 찾아봐라 이제는 그마저 대세가 되었지만 언제 적 악덕 사장 기믹인가 퇴직연금을 몰빵 덕성여대 정문 건너 솔밭 귀퉁이에 탕후루 카페를 차린 친구 부부는 오늘도 태그팀으로 스크류잡 그러게 내 뭐랬냐 그게 다 쇼고 스포일러라니까 자, 기술 들어간다 긴장 풀고 늘 하던 대로 나동그라질 준비 하시라 각본만 완벽하다면 한없이 황홀한 자버의 삶 결국 레슬링은 쇼였다 룰은 완고했다 하지만 필살기 하나쯤이면 룰쯤은 우스워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 믿었던 그 필살기 하나 때문에 뼈저리게 깨닫는 날이 온다 롤은 룰보다 완고하다는 것을 레슬링은 쇼다 그러나 쇼는 운명이고 필연이라는 것을 당신이 브렛 하트를 망가뜨렸어 당신이 브렛 하트를 망가뜨렸어 당신이 브렛 하트를 망가뜨렸어 * 몬트리올 스크류잡 : 북미 프로레슬링 최악의 승부조작 사건. * 케인, 언더테이커, 브렛 하트 : WWF, WWE에서 전성기를 선보인 프로레슬러. * 초크슬램 : 레슬링 기술. 멱살 잡고 들어올려 패대기치기. * 샤프슈터 : 레슬링 기술. 새우 꺾기. * 기믹 :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공한 서사 전략과 인물 특징. * 자버 : 각본에 따라 져주는 선수.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3상세보기 -
시 김성철 - 한 때, 메가헤르츠
한 때, 메가헤르츠 김성철 까맣게 그을린 운동장은 더웠다 배구공 넘길 때마다 공은 경계선을 아슬하게 넘어갔다 까만 말소리가 까맣게 들려왔다가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흩어졌다 새벽 2시를 알리는 디제이는 잠을 권했다 독설처럼 잠 못 이루고 속상한 사춘기가 외워지지 않는 역사처럼 더뎠다 정규방송이 끝나면 영화 속 간첩처럼 이념의 반대를 찾아 나섰다 나지막한 암구호 같은 귓말이라도 담고 싶었다 대북의 낯선 억양 말들이 자꾸 나를 재웠다 맘껏 주먹과 발을 뻗었어 멍든 친구는 바짓단 늘어뜨린 불량배를 멍 들였다 까만 말들이 덩치를 부풀린 채 오토바이 굉음처럼 뛰다녔다 아침이면 운동화를 꺾어 신은 까까머리들이 또 까맣게 학교와 학교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36상세보기 -
시 김성철 - 우산 없는 일요일
우산 없는 일요일 김성철 풀잎이 빗물에 걸어 들어간 것처럼 빗방울이 나란히 전선에 매달린 것처럼 전선이 암울을 드리운 채 장마가 된 것처럼 당신 마지막 눈빛이 슬금슬금 내게서 떠난 것처럼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14상세보기 -
시 차성환 - 구덩이
구덩이 차성환 한 농부가 감자를 심으려고 작은 구덩이를 팠다. 그날따라 유난히 흙은 보드랍고 햇볕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어디선가 청록빛 꼬리의 까마귀가 나타나 구슬프게 울음을 울었다. 갑자기 농부는 구덩이 파는 일이 기분 좋아졌다. 구덩이를 왜 파는지도 잊어버리고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구덩이를 팠다. 손톱이 빠지고 두 손에 피가 흐르는데 좀처럼 구덩이 파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덩이가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구덩이 속에 구덩이를 만들어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구덩이를 벗어나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지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햇빛도 닿기 힘든 구덩이만 있는 구덩이 속에서 구덩이를 파는 농부를 기다리던 아내가 죽고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외지를 떠돌다 더 이상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 농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문득 땅 위에 두고 온 감자 생각이 났다. 이것은 구덩이의 묘비에 적힌 시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67상세보기 -
시 차성환 - 가죽 재킷
가죽 재킷 차성환 하루 종일 가죽 재킷을 입고 뽐내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옷걸이에 걸어 두고 잠이 들었는데 가죽 재킷이 식탁으로 나를 부른다. 이리 와서 대화 좀 해. 졸려 죽겠는데 억지로 식탁에 앉으니 가죽 재킷이 따듯한 커피를 내준다. 커피 마시면 잠 안 오는데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듣는다. 사실 나는 가죽 구두가 되고 싶었어. 내가 소였을 때 나는 늘 딱딱한 발굽으로 대지를 딛고 서 있었지. 여물을 먹다가도 발굽을 땅에 두드리고 주인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도, 축사가 기분 좋은 따스한 붉은 빛으로 번지는 황혼 무렵에도 나는 이 발굽으로 대지에 노크를 했지. 그때 내 영혼이 살아 있는 것 같았어. 내 유일한 기쁨이었지. 그런데 죽어서 재킷이 되고 나니까 나는 알량하고 경박하게 허공을 떠다니면서 돌아다니고 있어. 나는 바닥이 없어. 질 좋은 가죽 구두가 되고 싶었는데, 걸을 때마다 묵직한 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소리와 대지의 감각에 마음껏 취해 이 굽이 닳아서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싶었는데.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저놈이 구두가 안 되길 다행이다.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12상세보기